[공지와 후기] 7/27 『아시아의 민중봉기』1,2 장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07-23 05:17
조회
573
7월 27일에는 『아시아의 민중봉기』 첫 번째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함께 공부할 범위는 1,2장(22~135)입니다.
- 세미나 시작 전에 토론거리를 게시판에 올려 주세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적극 권장합니다!)
- 토론거리는 게시판 위 고정란의 <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라는 글을 참고해 정리하시면 좋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7/13 세미나 기록,
『한국의 민중봉기』10~13장

<근황토크>

사과: 동네 조그만 도서관이 생겨서 그곳에서 피서를 보내고 있다.

복숭아: 저도 도서관에서 많이 지내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보내고 있다.

포도: 어제 페미 시국광장 다녀왔다. 조선일보 빌딩에 빔을 쏘는 퍼포먼스도 했는데 정말 멋있었다. 유튜브로 방송도 했는데 실시간 댓글에서 “고소할 수 있나?” “고소하면 안 되는데” 같은 종종 걱정하는 글들이 있었다.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다 같이 금요일에 가면 어떨까?

수박: 어제 나도 같이 갔었다. 남성들은 배제되지 않나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남성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같이 가보면 좋을 듯.

사과: 윤지o 삼촌? 윤지o의 이모부...등이 유튜브에 들어가면 메인에 뜬다. (뭔가 엄청난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수박: 유튜브에서 (윤지o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강하게 하는 데가 이모부 쪽이다. 가o세o 연구소는 요즘 하는지 모르겠는데, 구독자는 꾀 많고, 유튜브에서 공격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딸기: ‘김수o’이 ‘13번째 증언’의 대필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왜 ‘김수o’이 대필작가라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을까? 지난 관련 기사나 영상들을 찾아보니 특별히 김수o씨가 대필작가라고 언급하는 건 없었지만, 분명 언론들이 윤지o씨가 책을 직접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필작가가 있다. 김수o작가가 고소했다. 등의 정보를 마구잡이로 흘리면서 사람들이 윤지o가 스스로 책을 쓰지도 않았고, ‘13번째 증언’이라는 책에서 김수o작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드는 흐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 대필과 글도우미는 다른 것이다. ‘13번째 증언’이 책으로 나오는 데 도우미는 있었다. 대필이라고 하면 애초에 원고가 없고, 자료만 주고 작가가 구성해 주는 것이고, 도우미는 윤문, 그러니까 원고가 있고, 그 원고의 문장들을 다듬어 주는 것이다. 애초에 원고가 있냐 없냐가 결정적 차이다. ‘13번째 증언’은 대필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출판사에서 고용한 글 도우미가 기본 원고를 윤문을 해서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런데 그 도우미가 ‘김수o’도 아니다. (그는) 원고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한다. 중앙일보에서 대필작가라는 말을 썼다. 출판사에서는 도우미라고 했는데 신문사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대필이라고 해버렸다.

사과: 시국광장에서 ‘윤지o’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나?

수박: 페미니스트들은 ‘윤지o’에 대해 그닥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측면이 있다. 한국에 왔을 때 (‘윤지o’가) 페미니스트들의 도움을 구했는데,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는 표현을 하면서 그게 ‘윤지o’가 페미니스트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돌면서...) 페미니스트가 워낙 다양한데, 일부사람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표현이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윤지o씨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니까 특정한 유형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것도 아니고(해서) 애매한 측면이 있다. 장자o 관련 사건들은 페미니즘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윤지o’의) 과거의 태도를 가지고 잣대를 드리대는 건, 페미니즘이 사적 잣대를 대는 것이니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 생각한다. ‘윤지o’에 대한 언론이나 에스엔에스의 공격이 극심해지면서 페미니스트들이 이것을 방어하고 끌어안으면서 장자o 사건을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우회 전략을 쓴다. 윤지o는 내버려 두고 장자o을 건드리지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한편 그러는 ‘윤지o’ 비판 세력 중 일부가 ‘윤지o’를 비판하는 논리로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자o 사건을 여론화시키고 공론화하는 건 좋은데 (현 ‘윤지o’ 공격 세력들 중 일부가) ‘윤지o는 아니다’라고 하기 위해 윤지o를 밟기 위한 수단으로 장자o에 대한 립서비스를 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윤지o 우회전술과 윤지o 공격전술)이 결합하는 접점이 있다. 위험해 보인다. 장자o을 윤지o없이 충분히 다룰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장자o 관련 사건은 문건도 그렇고 증거물이 많이 소각되고, 공식적으로는 없는 걸로 되어 있기도 하다. (리스트도 현재는 없고) 리스트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리스트 전 문건을 보면 문건의 대부분이 ’김종o’에 대한 비판. 조o일보 방o 예기 할 때도 ‘김종o’ 언급. 전적으로 ‘김종o’ 중심이다. 한계가 있다. 그외에는 연예게 피디들 등만 나온다. 그러니까 (정치적 관련 인물들?은) 리스트에서 나오는 건데, 리스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이 유o오, 이o숙 정도다. 그 외에는 ’윤지o’다. ’이o숙’은 전혀 진술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고 ‘유o오’는 처음엔 진술했다가 지금은 진술번복을 하고 있다. ‘윤지o’ 말고는 리스트에 대한 진술을 할 사람이 없다. 따라서 윤지o를 빼면 리스트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싸움이 될 수 있는 건. 문건에 등장하던 ‘김종o’. ‘김종o’의 악행을 통해 방oo아들 그것 하나만 가지고 싸움을 벌여야 하는 형국. 국정원 등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다. ‘윤지o 우회전술’은 그냥 논재로써 문제제기를 하는 그정도는 갈 수 있지만, 즉 조o일보의 외압 등을 비판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이걸 처벌로 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은 없다. 마약이나 성폭행 문제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를 윤지o는 증언한다. ‘유o오’는 하다가 빼버리고, ‘이o숙’은 입을 닫고 있고, 이슈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러니 재수사라고 하는 것이 ‘윤지o’가 빠지면 의미가 없게 된다. 투쟁의 맥락차원에서도 ‘윤지o’를 빼면 공허한 측면을 갖게 되는 거다. 재수사는 끊임없이 이뤄진다. 과거사, 광주항쟁도 재수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장자o 관련 사건’도 계속 이루어질 수 있는 거다. 재심은 역사속에서 언제든지 국민이 요구하고 집합적인 목소리로 요구하면 가능한데, 재수사할 때, 구체적인 게 나올 수 있는 건 ’윤지o’의 증언이다.
두번째로, 이게 더 핵심적인데, 지금 윤지o가 겪고 있는 게, 장자o이 겪고 있는 것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3개월동안 조o일보가 길길이 날뛰면서 ‘윤지o 탄압’이 이어져 왔다. 그 지면을 돈으로 계산하면 어마어마하다. 계산이 안 될 정도로 지면을 쓰고 있다. 조중동 등 기타. 그런 집합적 공격은 지금 바로 살아있는 공격이다. ‘장자o’에 대한 공격은 과거의 공격이다. 윤지o의 공격은 지금 살아있는 공격이다. 지금 살아있는 공격을 우회해서 과거의 공격을 본다는 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다행히 어제 보니, ‘윤지o’를 심하게 외면하는 건 없었다. 단상에서 대 놓고 공격한다거나 그런건 없었고, 대신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태도도 없었다. 민변 사람이 지나가면서 윤씨라고 부르면서 슬쩍 언급하는 정도였다. 단상 발언에서는 거이 언급이 안 됐다. 적극적 방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난하는 입장도 아니고, 그냥 침묵하면서 나가는 정도의 집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본격 토론>

복숭아: 한국 민중봉기 마지막 시간이다. 87년 이후부터 IMF까지 한고비, 전후로 그 IMF후까지 한 호흡. 87년 전후로 운동의 흐름이 많이 바뀌고 87년 이후에 정치적 자유화와 함께 경제적 자유화(가 이뤄지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운동의 성격 자체가 많이 달라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IMF 이후에는 다양한 운동이 생겨나게 되고 2008년 효순이 미순이 사건부터 광우병까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토론거리 1>-------------------------

딸기: 594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워싱턴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방식과 관행에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노력"으로 미국 관리들이 이룬 바로 그 성공이 남한에서 반미주의의 불씨를 부추기고 한국과 미국 간의 전략적 동맹을 침해했던 것이다. ... 한국은 미국화의 경로를 계속 밟을 것인가? 아니면 등을 돌려서 EU, 어쩌면 스칸디나비아, 또는 더 가능성이 높은 쪽인 중국을 향할 것인가? 2003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은 미국보다 중국에 더 많이 수출했고, 1년 전에는 중국이 한국 자본이 투자되는 주요 국가가 됐다. 한국의 제조업은 이제 쇠퇴 중이고 일자리와 산업은 국외로 이동했다. 신자유주의적 축적 체제 아래서 쓸데없는 금융의 역량 증대는 한국에서 반미주의를 증가시킨다. 한미 관계를 추동하는 더 가시적인 이슈도 있겠지만, 표면 아래서 한국인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미국 관리들이 미국 투자가들의 이익을 외골수로 추구하는 행태는 당연히 장기적으로 한미 동맹의 붕괴를 의미한다. (594)」
질문)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피카츠의 위 서술은 오늘날에도 유효할까? 혹은 위 서술을 바탕으로 지금의 모습을 평가해 보자면?
- 한국은 현재 미국화의 경로를 계속 밟고 있는가? 아니면 등을 돌려서 향하고 있는 다른 쪽이 있는가?
- 이전에 비해 지금 한미 동맹이 약화 혹은 붕괴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미 동맹이 오히려 남-북-미 동맹으로 강화되고 있는 듯한 모습은 그냥 겉으로만 드러난 착시효과인가?)

복숭아: 피카스는 한국의 행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겠는가? 미국의 영향력으로 부터 어떻게 달리 될 수 있을 것인가. 당시 동아시아 론을 이야기하면서 (좀 허구적인게 섞여있긴 하지만) 중국을 미국의 대항마로 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당시와는 또 달라진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수박: 미국화라고 하는 표현하고, 한-미 동맹 한-중 국제동맹 측면은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국화는 동맹 관계와는 달리 미국의 경제사회시스템과 닮아간다는 표현이다. 중국도 미국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를 축으로 하는 국가자본주의적 특징이 있고, 미국화의 본질은 신자유주의화 일텐데, 신자유주의의 특질이 눈에 안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거 중국과 현재 중국을 비교해 보면 사회 양극화의 심화가 진전되어 오고 있고, 국가 자본의 사유화도 많이 진척되어 있다. 미국화 과정은 한국이나 중국이 (함께) 겪고 있는 과정이다.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진다고 해서 중국의 사회시스템을 가져온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미국화 영미화의 과정은 한국사회에서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교관계 측면에서는 사정이 다를 것 같다. 정권 담당청이 민주당 쪽인가 혹은 (지금의)자유한국당 쪽인가에 따라 주요한 외교적 연합축이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김대o 노무o 이쪽에서는 그때 당시에는 동북아시아 금융허브론에 따라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동북아의 금융매개고리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비전하에서 공동체 축을 아시아축으로 많이 끌고 왔었다. 중국과의 교류가 굉장히 활성화되고, 빠르게 성장해갔던 시기라고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든다. 이명o 박근o 9년은 이명o시기에는 일본쪽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중국으로 많이 갔던 흐름을 다시 일본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있었다. 박근o는 그냥 중국 루트를 그대로 내버려뒀다. 어쩌면 박근o 답지 않은 측면으로 볼 수 있겠는데, 중국과 북한이 우방이라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는 매정하게 끊으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는 강화하는, 정치적 색깔과는 상관없이 중국이 워낙 (...)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동맹관계는 군사동맹일 경우에는 전쟁을 할 경우에는 동맹국은 반드시 참전하도록 되어 있는 굉장치 강력한 관계다. 그냥 좋게 지내자의 수준이 아니다. 한미동맹은 노무o 정부 때 종속적 동맹을 수평적 한미 동맹으로 해 보겠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군사적으로는 종속된 한국이 하위동맹국인 (미국과의) 동맹이 문재o 정부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굉장히 복잡하고 큰 문제인데, 북한이 중국 소련과의 우호동맹관계가 있었다. 그것이 중국과는 79년도에 약화되고 81년도에는 아예 교우관계가 사라지면서 (북한이) 그 전에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받았던 군사적 지원 백이 없어졌다. (후에 북한이) 자주국방으로 핵개발을 시도해서 지금 핵무기 비공인 보유국으로 됐다. 이런 상태에서 지금 미국과 한국과 북한의 만남이라고 하는 건, 북한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를 둘러싼 외교 정치적인 밀당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대화자체가 동맹관계의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경우는 한국전쟁 후에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체험이 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으므로, 과거 (북한이) 중국과 소련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과도 상황이 좋아저서 핵무기를 둘러싼 대화가 일정정도 안정기에 들아가더라도 소련 중국 미국과 등거리 외교를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당연히 중국과 가깝고 소련이랑은 멀지만, 대화가 안착관계가 된다면, 등거리외교를 하지 않을까 생각되고, 북한이 남한과의 통일 논의가 진척되어가게 된다면, 연방제 형식이든 뭐든 간에, 공존하는 두 개의 국가로 정립이 되고, 장기적 통일을 위한 대화창구가 공식적으로 갖춰지는 구도가 된다면 지금의 한미 관계나 한일관계나 미일 관계가 급격하게 재편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워낙 복잡해서 예상하기 힘든데, 이러한 예상하기 어려움은 통일 한국, 통일로 향해가는 한반도, 한반도의 통일된 정치체제가 이제 미국을 자신의 후견국으로 삼으려 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을 후견국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양자간 등거리 외교를 할 것인지 (...) 이는 정치체의 자기 결단에 달려있기 때문에 예상하긴 어렵다. 드루o 같은 경우, 노무o 지지자이며 문제o 정부를 등장시키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한 그 사람 생각은 미국을 버리고 중국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통한 아시아 공동체, 그 쪽으로 생각이 많이 가 있다 (...) 자유한국당은 미국이나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중심에 놓는 체제개편을 염두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향방. 시민사회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토론거리 2>-------------------------

딸기: 611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노무현은 잘못된 노동정책과 더불어 마찬가지로 엄청난 정치적 실수를 범했다. 노무현은 당선 전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진보적 지지층을 실망시켰지만 보수적 반대파를 더욱더 겁먹게 만들었고, 그들은 반격을 조직했다. (,,,)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열린우리당이 절대 다수였음에도 노무현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의사도 없었고 그에 필요한 다수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지만, 이 문제를 구회 본회의 표결에 상정조차 하지 못했고, 이 근본적 실패로 민주적 권리에 대한 반격에 문을 열어줬다. (611)」
질문) 피카스는 노무현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럴 의사도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의 근거가 책에 등장하는지? 혹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 중에 피카스의 이러한 서술을 뒷받침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사과: 나의 두번째 질문과연결되는 거 같다.
[질문] '아시아의 만델라'라 불렸던 김대o은 집권 이후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카치아피카스는 그의 행동을 두고 '진보의 위장'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시민의 변호사였던 노무o 역시 이라크 파병, 대추리 탄압, 한미 FTA, 국보법 폐지철회 등으로 지지자들에게 그 못지 않은 실망감 안겨줬다. 노무현의 경우 한신의 과하지욕이나 갈릴레오 일화로 불가피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이들의 지지자들은 '진보'적인 정치인이 폐쇄적인 구조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계로 환원하기도 한다. 이들의 신자유주의 체제와 미국에 대한 굴종은 시대적 한계로 봐야할까, 아니면 그들 자신의 계급, 정치성에 충실한 결과일까?
김대o 노무o도 정체성 계급에 충실했던 게 아닌가. (...) 자신의 계급과 정치관에 충실했던 게 아닌지, 신자유주의 옹호 면에서.

복숭아: (...) 민자당 삼당 합당으로 인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김대o-노무o으로 이어지는 문민정부의 쭉 흐름들이었는데, 봉기를 등에 업고 만들어진 정부였는데, (...) 책에서는 신자유주의, 국가보안법 폐지 (라는 논제들과 함께 이야기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과연) 폐지할 의도가 있었던가 (하는 문제다.)

수박: 국가라고 하는 기관 자체는 자기 자신을 위한 통제수단이나 (그런 것들을) 재생산해 나가는 장치가 있으면 그걸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2001년 911사태 이후에 (미국이)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국가 보안법 패트리어트 법을 재정 한다. 노무o 때는 테러 방지법을 미국의 부시 정부를 따라서 (하려고 했다.) 노무o 정부가 태러방지법을 제안 해서 그게 통과 되었다면 (정부 입장에서) 국가 보안법을 패지 하더라도 무난할 텐데, 그 법을 국민이 반대하니까, 국가 보안법을 그냥 가져간다. 통치 수단으로 국가 보안법을 적용해 처벌한 사람의 수가 계속 줄어들지 않는다. 통계로도 바로 알 수 있다. (...) 정치세력들이 힘을 꽤 쎄게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해서 (반대 세력을) 처단할 수 있다는 야심도 있었다. 북한과 더 대화가 진전되어 간다면 반드시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사과: 김대o에 대한 이야기 중세 디제이의 노동자 탄압이 있다. 그들의 정체성에 충실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까.

수박 : 계급자의 기반과 상관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대o이 집권하기 전에도 그 당시의 사회운동권은 주요 공격 방향은 독점자본 제벌. 주요 타격방향은 보수야당을 향해 (있었다.) 민주당 야당쪽에 대한 비판을 해 왔다. 야당에 가해지고, 집권 여당에 가해지는 이 중 전술을 택했었는데, 주요 타반으로 설정된다는 것은 그들이 중소자본을 대표한다는 중소자본은 수탈되는 대상이든, 착취하는 대자본에 대해서는 저항적 노동에 대해서는 착취적, 김대o 문제o 노무o 이후 계속 나온다. 일면 진보적 성격이 드러난 것은 아래로부터 힘을 이용해서 중소자본의 목소리를 키워내고 대자본의 입장에서 유리한 입지를 더해 가는 것, 집중적으로 노동문제와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억압적으로 대하고 (그러한) 양면성을 수십 년 동안 가져왔고 (...) 어쩔 수 없는 전술적인 측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딸기: 한 국가 내에서 자본이 개인들을 자본가(착취계급), 중간계급, 노동자(피착취계급)으로 나누듯이 세계화 이후에는 개개의 국가들이 그렇게 나뉘는 것 같다. 세계를 자본의 영향력 아래서 본다면 한국은 중간계급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따라서 위쪽 계급에 의해서는 수탈당하지만 동시에 아래 계급을 수탈하는. 어찌보면 세계에서 그러한 위치에 있는 한국의 대통령이 이중전술 즉 상위계급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아래를 억압하는 그러한 이중전술을 펴는 게 자연스러운 일로도 보인다.

수박: 아제국주의론이다. 제국주의에서 서브 제국주의. 전체 제국체제 속에서 한편에서는 제국의 중심국가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는 나라. 아제국주의로써의 한국이라는 개념은 90년대 중반에 나온 것이다. 국내 관계에서 보면 (국가 안에서 보면) 쁘띠브루주아 층은 많이 약화됐다 하더라도 노동자층이 많이 두터워졌는데, 노동자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고) 한 부분이 과거의 쁘티 브루주아가 차지했던 부분을 일정하게 차지하고 그 역할을 맡아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중간성이 같는 양면적 역할은 계속 지속된다는 생각이 든다. 울산 등에 배치되어 있었던 노조(들을 보면) 대기업 노조들이 연대노조 초창기에는 강력하고 저항적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외교 노조들의 성격이 본질적으로는 대기업 재벌체제를 서포트하는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도맡고 하고 있다.) 임금을 받아서 주식투자도 하고 부동산 투자도 하고 다양한 형태로 노동임금 이외의 다양한 지대를 수취한다. 3포세대 저소득층 노동자와는 분명 다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사과: 민주노총 간부와 삼성 노조가 비공개로 밀착한 게 오늘 자 기사에 나와 있다.

수박: 민주노총이라는 (...) 그전에는 전노협이라는 게 있었고 전노협을 만든 주도 세력은 전국 노동자 운동 협의체다. 전노협이 80년대 말에 급진적 노조운동을 이끌어냈던 단체다. 그런데 그게 91년 1월 22일인가에 해산한다. 해산하게 되는 이유가 새로운 노조 연합체를 만들어내자는 것이었다. 4년 동안의 담론 논의 과정에서 민노총은 대기업 노조가 헤게모니 쥐고 전노협에는 중소기업 노조등 쪼그만 노조들이 (남아)있었다. 그때 당시 전노협의 해체에 저항을 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김o균 김o균 형제가 전노협의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한 학내라고 하는, 전노협의 정신을 역사 속에서 살려 나간다는 취지에서의 학내를 만들었다. 전노협 정신과 같은 그런 부분이 있고, (그것이) 대기업 연내회의 합법 쪽으로 가서 권o실(?) 씨를 후보로 (...) 대중조직과 연동 작전(을 펼치고 ...) 그런 것들이 커다란 흐름에서 여러 경로를 거쳐 지금의 정의당으로 왔다고 볼 수 있다.

토론거리 3>-------------------------

사과: [질문] NL은 운동권 총학의 다수였고, 2000년대 초반 민주노총 선거, 민노당에서도 PD활동가들보다 우위에서 조직을 통제했다. 80~90년대 학생들이 NL(민족)/PD(민주)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 미쳤던 요소들을 유형화 할 수 있을까?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 이후 2000년대 초반에도 NL이 민노총과 민노당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NL이 주도권을 잡는데 어떤 (특별한) 요인이 있었는지?

무화과: 계급적 문제라기보단 심리적 문제였다. (대학 시절) 처음엔 엔엘 조직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와 심리적인 게 안 맞았다. 아티(?)총학을 시작했는데, 총공격을 받았다.

복숭아: 주체사상을 하면 성품론 같은 게 항상 있었다. (조직 내에서) 한 사람은 주사 교육을 시키고 다른 한 명은 시키지 않는다. 귀인대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귀인 대장에 있는 분들이 ...) 인간적으로 넉넉한 품성(이 있고,) 뭔가를 잘 사주는 등의.

무화과: 그런 품성(론)에 잘 따르는 학생들은 주류가 되어 잘 따르고, 위로도 올라가고.

자두: 원래 주체사상 안에 품성론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남한사회의 학생운동에 정착될 때 왜곡 됐다고 할까. 자의적 해석을 많이 추가해서 그런 식의 실행이 많이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조직 활동 내에서 밥을 잘 사주거나 말을 잘 들어주거나, 어떤 품성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르고, 비인부전非人不傳. (품성이 있는) 인간이고 아니고를 가른다.

무화과: 실제 안의 형태는 썩은 조직이었다. 이면계약서 작성으로 사고가 나고 성폭행 문제도 있었다. 보호하기 위해 서로 은폐하고. 그거를 깨려고 시도를 하면 조직력이 강해서 어느새 다 (사라져?) 있고, 그런 모습을 조직의 막판에 많이 봤다.

자두: CA쪽 ND 였는데, 주사쪽 친구들이 와서 하소연을 한다. 품성론을 가지고 와서 인간이 돼 야 한다고 하면서. 그 당시 주체사상이라고 해서 옛날 글자로 된 카피물이 있었다. 품성론. 내가 알기에는 품성론이 이렇게 인간 비인간을 구분하고 좋고 나쁘고를 구분해서 이렇게 극단화된 방식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서 어떻게 현실화하느냐(의 문제에서 많이 왜곡되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형태의 품성을 가지고 조직을 진행했다면 당연히 은폐와 왜곡 타락 그런게 진행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주사의 주요 무기는 사람을 많이 확보하자는 거였다. 사람을 많이 확보하는 데는 품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실제로 많이 확보하기도 했다.

복숭아: 그래서 인품 쪽으로 훌륭한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고,

수박: 이론적으로 보면 민족개념과 계급 개념의 차이다. 민족이라고 하면 주체라는 것도, 민족을 주체화하는 철학적 방식(이다.) 민족 주체를 주체라고 하는(것이다.) 소련이면 소련 미국이면 미국 이민족과 그 자신을 구별하고, 그 자신을 동화하고 구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주성, 그런 게 주체 개념일 텐데, 그 민족을 주체사상에서는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가족적 공동체. 이걸로 사고를 하니까, 수령이 어버이니까 어버이 수령을 중심으로 해서 민족의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 공동성을 유지해야 하는 거고, 그러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 즉 정을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구성되고, 그런 게 운동으로 자리 잡을 때는 서로 정을 나누고 통하는 관계로 만들어서 자기 사람으로 위치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의식 보다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민족을 구성하는 것도 그런걸로 가능(해 진다.) 계급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관계, 계급적 이해관계를 토대로 작동하는 거고 계급적 이해관계가 자본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분할되고 침식되니까, 그러므로 정치적 차원에서의 계급관계 이거를 꼭 달성하려면 의식의 개입이 필요하고 계급 의식에 의해서 정치적 차원에서 실현해 내야 한다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지게 된다.

무화과: 나중에 피디로 옮겨갔을 때는 토론도 많아지더라. 예전엔(NL에서는) 까라면 까야하고, 동원되면 절대 질문하면 안 되고.

자두: 86년에 나이키를 신어도 되냐 신으면 안 되냐 이런 논의를 했다. 97년에도?

무화과: 민족주의가 하나의 축으로 굉장치 중요했다. 하나의 축으로 존재하니까, 어떤 걸 우선순위로 둬야 하는지(의 문제가) 대학 내내 있었던 것 같다.

수박: 민족주의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라는 게 역할이 있다. 식민지의 조건이라든지 억압의 조건, 억압에 맞선 시간적 과정들이 있다. 시간, 정. 함께 했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 섞여서 계급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일정한 카테고리를 특수하게 구성할 수 없는 시기가 있다. 싸빠티스타들이 멕시코 네이션 이렇게 말할 때 (이를) 제국주의 서광에 맞서서 살피면 (바로) 자기의 할아버지(다.) 그런 차원에서의 민족적 이익 해방 그런건 의미를 갖는다. 카치아 피카스도 민족개념을 중요시한다. NL이나 PD나 학생운동에서 첨예한 문제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의 민족주의가) 농민운동이나 그 정도로는 안 보인다. 농민운동은 NL에 조금 더 가깝고 노동은 PD에 가깝지만, 대중으로 내려갈수록 양자가 희미해지는 측면이 있다. (실상) 그 둘은 정파화된 정치흐름이다. 정파화된 정치흐름은 학생과 지식인 사회에서 중요한 것이다. 학생과 지식인 사회는 사회 혁명이 일어나면 (앞으로) 그 사회의 리더, 실질적으로 꾸려나갈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쪽으로) NL과 PD가 공유하는 면이 큰데, 위계성이라는 면에서 공유하는 면이 크다. (NL이든 PD든) 스스로를 내면적으로 보면 운동 당시에는 (자기)희생이라 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를 지배자로 표상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운동 후 일정한 업적이 쌓이면 사회의 엘리트 쪽으로 나가는 정식 코스(를 밟는다.)

사과: 선생님은?

수박: NL은 만난 적 없다. ND, 광의의 PD에 가깝다.

자두: 사노맹 이전에 해방 쪽은 해방과 선언으로 갈라지고 나서 (...) 선언 다음에 RS(?), 제헌회가 모태다. 그게 선언과 해방으로 쪼개진다. RS(?)에서 사노맹 그 안에서 문건이 내려온다. 그중에 선택을 하게 한다. 선택을 하고 그 라인의 선배들을 만나고. 점(조직)의 형태로 선배를 만나고, RS로 노동해방 쪽으로 (...)

수박: 86년도 감옥에서 CA사람을 만났다. 그러다가 선언 계열 사람들이 문해연(?)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연결이 되다가 (...) 시인 최o미가 선언 쪽이었다. 문해연에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선언 문건을 뿌리는 사람이었다. 문해연의 상당부 사람들은 그 문건을 읽고 공부를 했다. (...)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김o태의 비서로 있던 김o이라는 사람과 함께 공부했다. (...) 안o범, 세 사람이 프롤레타리아 과학자 동맹을 만들자 해서
같이 스터디를 하다가 박시인을 만나서 (...) 김o과 안o범은 CA가 중앙에 검거된 다음에 감방에 같이 있었고 나온 다음에 나와 함께 공부했다. 그런 다음에 바로 RS로 넘어가게 된 건 아니고, 이o복, 노동자 신문 발행자 이 사람이 노동문학을 창간한다고 해서 그때 당시에 이o경하고 나하고 문o현하고 노래패의 그 세 사람을 편집위원으로 하는 팀을 구성했다. 이o복(을 만나려고) 동네 출판사에 나가기로 했던 바로 그 날, 그 무렵에 박시인을 만나서 나는 불참선언을 하고 안갔다. 87년도에 감옥에서 나온 뒤 1년 반동안 우여곡절을 겪고 88중반부터 노동자의 문학 중반 모임으로 (...)
ND가 NL과 PD의 중간노선이다. N은 민족, ND는 민족개념을 없애지 않는다. PD는 민족 개념을 없애 버린다. 그 이유는 운동이 지식인 사회에서 정립되기 때문이다. 다 이론가이다. PD의 노동계급이라는 잡지가 3,4회 발간됐다. (...) 노동자 깃발은 꼭 PD로 보기는 어렵고 계속 논쟁중이다. 시인 황o우와 그의 형제 황o수. 그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잡지를 따로 만들어서 PD경향이 뚜렸했던 경향이다. 이사람들은 모두 학술계의 일정한 인맥과 연결, 현실과 화합이라는 잡지를 쭉 출간했다. 윤o영 과천 연구소. 윤o영씨가 이론적 리더로, 차골로프나 소련의 정치개혁 교과서를 출간했다. 전형적인 소련 PD다. NL은 북한(에서 생겼고), ND는 자생이다. ND는 NL과 PD 둘을 섞으면서도 소련과 북한을 비판했다. 김o태씨가 주체, 문o식 주축 NL은 남한의 독자적(인 것이고) PD는 현실과학을 중심으로 하고, 이를 운동화 시킨 사람은 이o경, 박o수. PD세력은 조직사건 나면 다 학교로 (...) ND와 PD가 공유하는 부분이 큰데 ND는 두뇌가 없고 행동력이 강하다. 정리는 이론가들이 다 한다. 그러니 (운동을) PD가 다 정리(한다)

자두: 이 얘기가 중요한 이유는 남한사회가 그 때처럼 백가쟁명이 때가 없었다. 그때 정말 많은 생각이 나오고, 많은일이 벌어졌다. 그 이후에도 많은 것들이 나오는데, 그 때 당시에 어떤 일들이 진행됐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ND는 남한 사회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것이라 본다. 박o해씨는 김o수와 서노련에서 활동을 하다가 백o웅과 결합. 또 조o환 선생님과 ND가 서노맹으로 발전. ND가 서노맹에서 노해문으로 발전. 그런 식으로 발전해서 진행이 되어 왔는데, 83년부터 시작해서 89년까지 이뤄져 왔던 그 일들 그 내용들을 알 필요가 있다.

무화과: 너무 복잡하더라. 역사적으로 그런 시점에서 폭발 적으로 그런 운동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자두: 80년 광주 이후겠지?

수박: 광주를 어떻게 볼 것이냐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토론거리 4>-------------------------

사과: [비판]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적 토대를 분석할 때 '유교적 전통', '유교적 가치'를 끌어온다. 가령 "서양 정치학자들은 오랫동안 유교적 가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서구의 탐욕은 유교적 전통의 시각에서 불미스러운 것으로 보인다."(592) "유교적 문화의 매력적인 온순함은 한류 성공의 핵심이었다."(631) 같은 식으로. 어쩌면 탐욕스러운 서양과 대비되는 유교적 문화라는 틀로 한국적 요소를 나누는 것 또한 전형적인 이분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딸기: 요즘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중심으로 성 상납 비리 사건이 큰 문제인데, 중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의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미투운동이 생겨났었다. 그런데 그때는 성폭행에 관한 것이었지 성상납 이슈는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의 성폭력 문제와 한국, 중국의 성상납 비리는 좀 다른 차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동아시아의 유교문화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수박: 유o주 씨가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책이 있다. 저자가 게일 루빈. 주요 메시지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 성 상납의 모태다(라는 것이다). 몽고같은곳은 지금도 손님이 오면 주인이 자기 아내를 손님한테 '접대'를 하는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다. 성접대. 이는 가족제도라고 하는 게 가부장하에서 가족구성원을 자신의 소유물로 파악을 하고, 대외관계에서 소유물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가족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성차별보다 더 완강한 제도적 문화적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게 유교가족의 역사적 기원보다도 더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인류학적인 전통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유교도 가부장적 체제를 한 국가의 골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나, 나름의 성차별 문화를 갖추고 있는 것이고 그걸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두: 아마존의 모계사회 전통. 모계 사회적 풍습. 그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성을 손님 접대하는 풍습과 (어떻게 다를까?)

수박: 인류학적으로 볼 때 모든 게 그랬다고 볼 수 없고, 제주도는 아직도 모계가 중요한 부분이 있다. 한국 내에서도 타지역하고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모계사회의 문화는 우리의 경험이 너무 적어서 사례를 들 정도로는 (알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 가부장제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자두: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많이 (활용한다.) 아마존은 가부장과 멀면서 아직 모계가 남아있다.

딸기: 모계사회가 만일 가부장제의 성역할만 바뀐 거라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여성이 남성을 접대한다는가 하는.

수박: 모계사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심청전 같은 경우도 아버지를 위해서 딸이 자기 몸을 인당수에 바치는 거다. 용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 (용궁의 상징은 사실상) 남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성은 노동력도 안 되니까 빨리 (팔아버리는)

자두: 고려는 어떠했기에, 왜 조선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수박: 국가체제가 강화된 거랑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고려 때만 해도 성주 중심으로 해서 사회가 분할되어 있을 때였고, 왕도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나가는 존재였다. 반면에 조선시대는 역성혁명을 통해 이성계가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시스템을 바꾸고 사대부라고 하는 계급을 육성해내는 것이었다. 이게 장점이 되게 큰 부분도 있는 건데, 고려시대는 혈족이 움직이는 것이고 조선은 지식이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대부가 하나의 클래스를 구성하긴 하지만, 그 원천은 아래로부터 계속 올라온다. 과거제도라는 것. 고시제도처럼 오직 과거로만 사대부로 올라올 수 있는, 민중과 사대부의 순환 루트가 있었고, 사대부를 집단지성적 원천으로 삼고, 그걸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이루어졌다.) 사대부는 지아비 부자를 쓴다. 여성 관료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중앙집권적인 체제의 구체화 과정에서 (여성의) 일정한 배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여성이 지금만큼 격하되고 멸시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사대부는 지성적 계급이고 수양을 많이 거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품격을 유지해야 하고, 따라서 여성에 대해서도 품격있는 대우를 해 준다. 그래야 자기의 품격도 유지된다.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는 지금보다는 높았다.

자두: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여성에 대한 대우는) 매우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형태였을 거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문화. 돈있고 권력있는 겉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쇼윈도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거다.) 실제 조선시대 여성들의 지위는 사대부의 지위들과는 다를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서브의서브였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딸기: 유학의 역사가 있다. 도가와 유가의 차이점이 유가는 꾸준히 과거제와 서당을 (운영한다.) 유가는 공자 자손의 지배체제의 학문이다. 지금도 공자의 적자가 살아있고, 기원전 제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수박: 고시도 그렇다. 그런데 로스쿨은 그걸 버려 버린다. 집단지성의 순환도 버려버리고, 과거제도가 가지고 있었던 민주주의(에서 마저도 이탈한다.)

무화과: 그런 것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자사고 시스템. (밑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시스템들이 있다.) 이제는 계급이동이 거의 없고 점점 더 어려워진다.

자두: 있는 집 애들은 없는 집 애들이 있다는 인식을 아예 못한다.

무화과: 출신도 달라진다. 자사고 출신, 과고, 국제고 출신, 수능출신.

수박: 양극화되고 나면 양극화 그 내부에서 부패해 들어간다. 방씨의 집을 보면, 아내를 두드려 패고 (...) 조선시대로 치면 왕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최고급 가문이다. 그런 가문의 집에서 자식들까지 동원해 패륜을 저지른다. 이런 사태가 조선시대때 벌어지면 가문이 무너졌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잘만 살아간다. 엘리트층 여성들의 지위도 과거에 비하면 현저히 추락했다. 과거 엘리트는 여성 부장품도 매우 잘 갖추어져 있다. 과연 지금도 그럴까? 유교는 유교 그 나름대로는 나름의 인간적 품격을 우주론에 따라 삼고 있었다. 지금은 표준도 사라지고 (사라진 채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사과: 전쟁을 거치면서 유교가 많이 해체됬다.

무화과: 조선시대의 기생제도. 오늘날의 연예기획사 (같은 게 아니었을까?)

복숭아: 기생 안에도 계급이 있었다. 오늘날의 연예기획사처럼.

무화과: 그런 관료화된 모습들이 학교든 어디든 다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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