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타임스 - '시간, 나레이션, 정치', '모더니티의 재고' 발제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9-07-28 14:21
조회
730
모던 타임스 - ‘시간, 나레이션, 정치’ 발제문

랑시에르는 겉보기에 동떨어진 영역을 탐사하고 배치한다. 노동자의 해방 형태, 예술의 식별 체제, 민주주의 원리, 문학적 허구의 변형, 지적 능력의 평등론 등이 그 대상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다양한 지식과 실천이 공통 세계에 대한 어떤 지도그리기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공통 세계를 규정하는 동시에 이런저런 주체가 그 공통 세계에 참여하는[몫을 가진] 방식을 규정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 체계를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으로 부른다.

시간과 시간성 범주가 이 나눔에서 핵심적인데, 시간의 서사는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모두와 공유하는 경험 세계의 틀이 있다. 현재가 과거에 매이거나 단절하는 방식, 그럼으로써 이 현재가 이런저런 미래를 허하거나 금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저 자신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을 들 수 있겠다. 이때 시간의 서사는 현재에 얽매인 시간과 달리 ‘가능성’과 ‘능력’ 가지고 있으며, 내재하는 진실의 힘에 참여하는[몫을 가진] 방식을 뜻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 하는 것이 ‘허구’다. 랑시에르에게 허구는 ‘상상적 세계의 발명’이라는 편견과 달리, 주체. 사물. 상황이 공통 세계에 공존하는 것으로서 지각될 수 있는 틀, 사건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사고되고 연결될 수 있는 틀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시간의 서사는 상황을 이해 가능하게 하는 허구의 중심에 있다.

랑시에르가 문제 삼는 것은 전자의 시간, 소련 붕괴 이후 우리 현재를 기술하는 지배적 방식에서 작동해온 ‘실증주의적 시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소련 패망으로 사라져버린 것은 단지 경제. 정치 체계뿐 아닌, 내적 진리에 의해 움직이는 시간성의 모델 또한 들어간다. 이제 어떤 약속도 진리도 갖지 못한 일상적 시간만이 남겨진 것이다. 이것을 정부와 주류 언론은 ‘전문 경영’, ‘번영의 기회’로 계산하고, 불만 찬 지식인들은 과도한 소비지상주의, 커뮤니케이션, 불신이 지배하는 유일한 현재의 지배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이 절대적 현재가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예견이 낳은 열정을 쉽사리 제거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산주의 포기한 국가에서는 민족적 서사, 종족적. 종교적 갈등이 부활하고, 서구 의회주의 국가들이 펼치는 합의 정책은 다른 인종, 국민, 종교가 공포를 야기한다는 구시대적 서사에 사로잡혔다. 자유 시장의 현실적 전문 경영 또한, 현재를 희생시키며 임박한 파국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랑시에르는 역사에 대한 과거의 환영과 현재의 견고한 현실을 단순 대립 시키는 것으로 은폐 기제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현재’자체 안에 있는 분할과 무엇이 현재인지를 둘러싼 갈등이 가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에 영향 끼치는 ‘시간의 정의’를 다시 살펴볼 걸 요청하며, 계보를 추적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적 허구의 인과 연쇄와 단순한 잇달음을 대립시킨다. 전자의 경우 인과적 합리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잇달음의 시간은 사태가 개별적이며 우연한 사실로 나열되어 있다. 여기서 시학적 위계가 생기며, 인간 존재의 두 계급을 대립시키는 사회적 위계 형태로도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시간 있는 자들, 능동적 인간으로 불리는 자들의 시간이 있다면, 그 반대편은 현재 속에서 재생산하며 반복적인 시간에 갇힌 수동적 인간이 있는 것이다. 한편 근대의 대서사는 시간의 이중 나눔에 기반 두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립시켰던 역사적 잇달음에 허구의 인과적 합리성을 적용했다. 그런 점에서 시간성의 위계를 기각하고, 차례차례 사태가 일어나는 세계를 인과 연쇄 법칙을 따라 구조화된 세계로 전환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서사에서, 역사적 과정의 합리성을 긍정함으로써 기각됐던 시간성의 차이가 그 서사 한가운데서 재등장했다. 그 역사적 과정은 몇몇 계급을 과거로 집어던져 미래로 가는 길에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처럼 행동하게 했다. 역사과학은 미래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과학이자, 그 가능성의 불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과학이 되어야 했다. 이로써 이전엔 두 분리된 세계 사이 거리였던 시간성의 위계가 이제 같은 세계에 거주하는 두 방식 사이 거리가 됐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필연성, 가능성, 불가능성이 벌이는 게임의 재배치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대서사의 종언이 곳곳에서 떠들썩하게 선고되는 동안, 자본주의와 국가의 지배는 역사적 필연성의 원리를 간단히 인수했다. 역사적 목적론은 단순 선택지로 대체됐다. 기성 질서를 능숙하게 경영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유일한 가능태이냐, 아니면 대대적인 붕괴이냐에 놓인 것이다. ‘비판적’ 사유는 결국 체계가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하며, 여러 형태의 전복을 흡수하도록 안감을 덧대고 말았다. 공식 담론은 희생자들을 전 지구화된 자유 시장의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무지렁이라 나무라고, 비판적 담론은 ‘민주적 개인들’이 자유 시장에 너무 잘 적응해서 문제라고 비판한다. 이런 플롯 속에서 오늘날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떠받치는 요소로 전환된다. 지금까지 대서사의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허구 논리를 살펴봤다. 사건들의 필연적 연쇄 논리, 시간성의 위계적 나눔에 바탕 두는 논리 말이다.

그렇다면 예속자들은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랑시에르는 한 소목장이가 수동적 시간을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으로 변형시킨 것을 예시 삼아, 시간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뻗은 선이기 이전에 ‘환경’일수도 있음을 언급한다. 시간성을 나누는 정상 논리에서 이탈한 실정적 단절의 환경 말이다. 시간적 연쇄의 다른 형태, 즉 순간은 인과 연쇄에 대립되는 일시적인 시간이 아니라, 운명의 저울 위에 올려진 추를 재분배함으로써 다른 시간을 발생시키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그 힘을 지적 해방론의 핵심에서도 발견한다. 그가 『무지한 스승』에서 자코토를 빌려 전개했던 것, 즉 단계적으로 밟는 진보의 정상 시간 아닌, 어디서나 출발할 수 있고 어느 때나 시작할 수 있는 해방의 시간 말이다. 이 논지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다.

랑시에르는 필연성의 대서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사고하길 제안한다. 순간들의 점유를 제 현장으로 삼고, 시간성의 위계적 나눔을 문제 삼는 자들이 빚어내는 틀, 불안정한 시간을 재전유하려는 이 전쟁은 어쩌면 개인적 단절과 집단적 단절을 새로이 연결하는 원리가 될 수도 있다. 플라톤적 국가의 정의는 각자를 필연적 시공간에 머물게 하는 업무[점유]의 분배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대응하는 것이 오큐파이 운동이다. 오늘날 노동자에게 공장이 차지하던 자리를 광장이나 거리가 대체하고 있다. 자기 일터의 시공간에 따라 흩어져 있는 노동자들은, 공통 시간을 위한 장소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 장소에서 다양하게 조각나 있는 시간 경험들이 결집될 수 있다.(ex. 프랑스의 ‘비정규직 공연 예술인’ 파업, 탁심 광장의 스탠딩 맨 등)


모던 타임스 - ‘모더니티의 재고’ 발제문

이 장에서 랑시에르는 모더니즘에 대한 전형적인 통념을 문제 삼는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주석가들은 예술이 회화적 평면의 순수성처럼 자신의 고유 매체를 가진다고 보았다. 단절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예술은 제 고유 매체에 갇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 제도, 지각과 감정, 개념, 서사, 판단 방식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의 쟁점을 다시 사고하며 근대의 시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논하기 위함이다. 랑시에르에게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개념은 시간성의 복잡한 엮임을 띄고 있으며, 과거에서 미래로 뻗은 선이기 이전에, 인간 존재를 나누는 형태이자 삶의 두 형태(시간 있는 자들이 삶의 형태와 시간 없는 자들의 삶의 형태)를 사고하는 것이다. 이를 그린버그의 모더니즘과 대비되는 ‘역사적 모더니즘’이라 표현한다.

삶과 분리돼 기교로 전락한 세태를 두고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것은 헤겔이었다. 그린버그는 헤겔의 역사의 진보라는 단선적 시간관, 예술에 대한 관점을 이어받았다. 그에게 키치는 자본주의적 문화가 구현된 후위이며, 삶과 분리된 아방가르드야말로 이를 넘어서 우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에 논박하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모더니티가 완수됐다고 생각하는 헤겔과 그린버그의 동시대성에 맞서, 그들이 진단하는 배경 자체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비동시대성) 그가 인용한 시인 애머슨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 모던하지 않으며, 정지된 알렉산드리아적 시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현재는 공존의 시간이며, 시는 아메리카의 현재를 이루는 다수의 이질발생적 현상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 ‘모던’ 문제는 공동체의 새로운 의미, 감각의 새로운 직조를 구축하는 데 있다. 랑시에르는 아방가르드 용어가 없던 시절 애머슨이 취한 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첨병도 상품 문화에 저항하는 최후의 부대도 아닌, “근대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차이에 위치한다”고 정의했다.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전개한 논지 역시 예술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지만, “현재의 바로 그 지체에서 추출한 예견의 힘을 사용하여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는 관점은 애머슨과 공통된 시간 플롯 구성이다. 그것을 소비에트 혁명 시기 자신의 실천에 할당한 예술가가 있다.

베르포트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혁명적 필름이다. 이 필름은 다큐멘터리 아닌, 근대 소설의 원리(울프, 조이스)를 따르는 허구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사건을 재현하는데 바쳐지는 예술 작품도 아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정치 체제가 아니라 공통의 감각 경험의 새로운 직조)를 구성하는 모든 활동의 일환으로서의 활동이다. 베르토프의 몽타주는 공통점이 전무한 다수의 상이한 과제를 한데 묶는다. 소비에트 산업이나 노동을 찬양하기 위한 게 아닌, 평등주의 교향곡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운동의 등가를 담아내는 것이다. 이는 모든 회전 운동을 접속하는 영화적 몽타주 작업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발레리나들의 몸짓에서 그 흐름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령 풀러가 드레스의 크레이프[주름]을 펼치는 회전 운동은 말라르메가 보듯, 모든 상정 공동체를 등지고서 자기 자신에 갇힌 잠재성만 탐사하려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공통적인 것을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려는 시도이다. 베르토프에게 있어서도 무용은 집단적 신체 활력에 한정되지 않는 자유로운 운동이었다. 이런 예들은 청년 마르크스의 텍스트에 표현됐던 공산주의 이념을 완수한다. 노동이 생계를 꾸려야 하는 단순 필요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 간단히 말해 여기서 공산주의는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하나의 동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기계적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삶의 형태이다.

안타깝게도 ‘현실’ 공산주의 건설자는 예술가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감각적 형식들을 짜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시간성만 있을 것이다. 목적과 수단의 시간성. 또한 노동과 휴식의 시간성. 이는 예술가들이 재현 체제의 오래된 논리로 되돌아가야 했다는 뜻이다. 역사적 모더니즘에 대한 이 같은 억압은 그린버그에게 새로운 ‘모더니즘’이 회고적으로 발명될 수 있는 길을 깔아줬다. 그린버그의 분석에서 남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유일한 일방향적 시간성이다. 그 시간성은 아방가르드를 공통의 신념과 상징에서 분리해내는 동시에 키치 문화를 촉발한다. 그에게 스탈린 문화는 단지 키치 문화의 러시아식 버전일 뿐이고, 역사적 모더니티가 당한 억압과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인식 속에서 두 모더니티 사이의 갈등, 두 공산주의 사이 갈등은 단순히 키치 문화의 침입으로 축소되고, 키치 문화는 산업화의 끔찍한 결과에서 생겨난 문화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린버그는 문화의 재앙이 장인의 자녀들이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여가를 가질 때 발생한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에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것의 기본 관념이 그런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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