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와 후기] 8/24 『아시아의 민중봉기』 4,5장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08-19 18:10
조회
116
8월 24일에는 『아시아의 민중봉기』 세 번째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함께 공부할 범위는 4,5장(174~272)입니다.

- 세미나 시작 전에 토론거리를 게시판에 올려 주세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적극 권장합니다!)
- 토론거리는 게시판 위 고정란의 <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라는 글을 참고해 정리하시면 좋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8/10 세미나 기록,
『아시아의 민중봉기』 2장 필리핀, 3장 버마

토론 1>--------------------------------------

연필(사회): 토론거리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공책: 질문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기사를 찾아서 적어본 것이다.
「1) 필리핀 "2016년 5월 9일 대선에선 아웃사이더라고 볼 수 있는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당선 ... 두테르테는 집권 이후 마약 사범을 소탕한답시고 강경책을 펼쳤는데,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치안 문제와 부패로 골머리 앓던 필리핀의 치안을 개선하는 데 한몫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재판없이 마약 사범들을 총살 집행함으로써 제대로 된 판결이 안 이루어지고 억울한 자도 죽어 나간다며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독재자 마르코스의 시신을 국립묘지에 몰래 안장시키며 시민단체의 반발을 불러오는 등 독선적 행보와 제정신을 의심하게 하는 막말과 기행으로 비판받고 있다."(나무위키)」
두테르테에 관한 이야기들. 나무위키의 서술인 걸 감안해서 읽어주었으면 한다. 다음은 필리핀의 현재 상황을 찾아보며 발견한 최근에 보도된 기사다.
「"19일 일간 필리핀스타 등 현지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필리핀 경찰은 전날 로브레도 부통령 등이 대규모 시위를 부추겨 두테르테 대통령을 퇴진시킬 목적으로 대통령 일가와 행정부에 대한 가짜 정보를 퍼트리려고 한 혐의가 있다며 고발했다. 로브레도 부통령과 전·현직 야당 상원의원, 천주교 주교, 인권 변호사, 대학 총장, 시민단체 대표 등 35명이 고발됐다. 이는 올해 5월 치러진 중간선거를 앞두고 두테르테 대통령 일가와 측근이 마약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영상 '진짜 마약 리스트'가 유포된 것과 관련된 사건이다." (연합뉴스 2019년 7월 19일자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0719063000084 )」

연필: 필리핀의 현재 상황까지 알려주어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 보면 좋을까? 나도 오늘 공부하는 나라들(필리핀, 버마)의 상황에 무지하고 책 자체가 가치판단이나 의미부여는 뒤쪽 장들에서 서술된 것 같고, 앞쪽에는 민중봉기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그려 보여주는 스케치에 가까워서 질문을 만들기는 힘들었다.

공책: 필리핀 상황을 보며 느낀 점은, 필리핀은 대통령을 3번이나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쫓아냈는데도 또 독재자가 집권하게 되어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피플을 계속 배신하고 또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

필통: 왜 그럴까? 연표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서 핵심적 내용들을 추려놓은 것 같은데, 피플파워가 시작되는 게 86년 2월 22일이 1차 봉기이고, 이는 카치아피카스가 한국의 87년 시민항쟁에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서술했던 바로 그 혁명이다. 연표에서 그 이전을 보면 84년 11월에 미국국가 안정보장회의 비밀 메모에 "마르코스는 물러나야 한다." 이런 걸 적고 있다. 이게 좀 국제적 맥락에서 피플파워를 이해할 변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를 너무 주도적 변수로 보면, (필리핀의 민중봉기가)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좌지우지됐다는 그런 평가(로 너무 치우쳐 버릴 위험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 (미국이) 전체적인 국제적 국내적 시류 속에서 사람들 마음속에 일고 있는 일련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독해를 해서 이런 식의 정책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비밀 메모, 비밀 정책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이 상황을 만든다기보다도 미국이 상황을 따라가는 (...) 그런 게 (1984/11월~1986/2/22) 1년 3개월 정도의 간극이 있는데, 그 후에 피플파워 혁명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한국도 87년 전후 상황을 보면 전두환 정부에 대한 미국 측의 평가가 이와 비슷하게 (있었다. 미국의 정책이) 이제는 전두환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그런 정책으로 변경되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필리핀도) 그런 맥락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피플파워 혁명이 있었음에도, 마르쿠스 전이나 후나 대체로 얻게 되는 상황,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가 87년을 겪고서도 전두환에서 노태우가 되는 그러한 상황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변화를) 집권층의 차원에서만 보면 (독재자의 얼굴만 바뀌는) 그 정도의 변경을 가져왔을 뿐인 그런 상황이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도 일어나는데 이는) 국제적 차원에서의 혁명에 대한 (미국의) 수동적 관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피플혁명이 있는 게, 2001년 1월 16일에 제2차 피플 파워 혁명, 2001년 4월 25일에 3차 피플파워혁명이 이어지는데, 이 3차에 대해 카치아피카스가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미국과 관련된 설명이었던 것 같은데...

공책: 134쪽에 나온다.
「부패한 대통령을 몰아내는 두 번의 봉기가 성공했는데도, 필리핀 민중은 사회체제를 제대로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1986년 봉기는 국제적으로 사랑받았지만, 경험적 역사는 봉기가 친미 엘리트의 한 분파에서 다른 분파로의 권력 이전을 성취했음을 보여준다. 군의 무장 부대와 보수적인 가톨릭 고위층이 한 중심적 역할을 생각하면, 심지어 오늘날에도 마르코스를 타도한 것이 신의 손인지 CIA의 손인지, 민중의 힘인지 군대의 총인지에 대해 토론할 여지가 남는다. 물론 봉기는 이 모든 요소의 결합이었다. 좌파의 선거 보이콧은 친미 세력이 역사적 기회를 장악하며 봉기를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필통: 신의 손이라고 하는 것은 추기경, 필리핀에서는 천주교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추기경, 성직자 집단이, 버마와 티벳에서는 승려들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필리핀은 추기경들이 역할을 하니까 신의 손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CIA손 이건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한 표현이다. 민중의 힘은 3차는 특히 빈민들이고, 그 다음에 군대의 총. 종교, 민중, 군대. 이렇게 4개의 힘이 혁명과정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혁명의 향방을 결정짓는 요소가 됐다. 가변요소들(이 있다.) 굉장히 애매하게 느껴진다. 한국의 경우는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민중의 힘이라고 느껴지는 요소가 80년은 뚜렷하게 나타나긴 했지만 (...) 87은 민중과 시민의 힘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정치적 귀결은 노태우로 나타나서 결과가 크지 않은데, (하지만 이를 계기로) 민중의 내적 역량은 굉장히 강화되어서 정권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하더라도, 즉 노태우가 군부이긴 했지만 시민사회의 강화된 힘에 자신을 맞출수 밖에 없었던 그런 힘(이 있었다.) 민중이 강화되고 독자적인 힘으로 나타나는데, 필리핀은 민중과 종교, 민중과 군대가 뒤섞여서 한패가 되어, 약간 구분이 모호한 방식으로 힘이 출현한다는 걸 서술한 것 같다. 그다음에 135페이지에 보면 2차피플파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 134의 마지막 단락,
「제2차 피플파워 기간 동안 대중 동원은 수천 명의 자발적인 주도로 이루어졌고, 그들 대부분은 제1차 피플파워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모이고 무엇을 가져갈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제1차 피플파워의 베테랑들이 아이들과 함께 도착했다. 그 당시에 NGO 활동가들은 1986년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었다. 에슽트라다 축출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군 지휘관의 이탈은 마지막 행동이었지 초기 국면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제2차 피플파워는 어떻게 사전 계획과 치밀한 준비를 통해 활동가들의 지도력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새 행정부의 첫 100일간의 의제를 준비한 NGO 지도자들은 미래의 봉기에 참여할 민중들에게 위대한 모델을 제공한다. 그들은 대통령이 된 그들의 일원인 아로요의 배신에 실망했지만, 그 배신조차 귀중한 교훈을 준다. 개별 지도자들, 특히 즉시 교체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의존하는 일의 한계가 바로 그것이다. 」
이때의 대중 동원은 수천 명의 자발적인, 즉 1차 피플파워를 경험한 사람들이었고, 엔지오 활동가들이 (...) 더 잘 조직됐다는 점을 들고, 그다음에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 다음 3차 피플에 대한 평가는 군대와 경찰의 강압 정책 때문에 빈민의 피플파워가 패하고, 그리고 한 단락을 건너뛰어서 초국적 자본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마르코스의 초국적 자본으로의 전환은 칼라일 그룹 같은 국제 투자자들의 입맛에 맞았다." 그런데 그다음 대목이 기묘한데, "제1차 피플파워의 영웅이자 나중에 필리핀의 대통령이 된 피델 라모는 2004년까지 칼라일 그룹 아시아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러니까 혁명 주도 세력이 초국적 자본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 피플파워봉기가 국제 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하나의 생생한 예로 필리핀 봉기가 남아 있다. 이 때문에 필리핀 사회의 경제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았고, (...) 마르코스의 미망인과 아들, 딸. 한 줌밖에 안되는 엘리트 가문들이 계속 지배한다 (...) 피플파워의 1,2,3차 움직임들이 결과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 부를 수 있는 신체제의 구축 동력으로 흡수되어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을 돌아보면 광주민중항쟁 이후에 전두환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이유는 아래로부터의 반전두환 저항 세력이 굳건했기 때문에 전두환이 하려는 일련의 정책들에 대한 반대가 심했고 특히 반미정서가 강해지면서, (전두환 정부는) 미국하고 적극적인 문호개방 결탁 이런 걸 하려는 건데 미국의 입김이 한국에 작용하는 걸 느낄 때, 그때마다 사람들이 반대하고, 그런 방식으로 전두환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좌절되어가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87년 이후로는 상황이 좀 달라지면서, 노태o는 스스로를 보통 사람으로 칭하면서 시민들에게 아부하는 정책을 펼쳐갔고, 그렇다고 (시민들을) 위했다기보단 형식적으로 아부를 하며 신자유주의를 관철하고 (...) 김o삼이 집권해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려 했다. 그래서 김o삼의 구호가 세계화라는 것이었고, 김o중 같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화를 위한 자본 국제화의 선봉으로 역할을 했었다. (김o삼 정부에서) 이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지구화는 이루어나갔는데, 노동 차원의 자유화는 김o삼 정부가 할 수는 없었다. 하려고 시도했으나 파업에 막혔다. (김o삼 정부는) 1996,7년 사이 신노동법이라는 걸 통해 노동 자유화를 할려했었으나 총파업의 반대에 부딪혀서 노동법 개악은 좌절됐다. 그 바톤을 김o중이 이어받고, 아이엠에프를 수습하면서 자본의 지구화는 훨씬 심화됐다. 노사정(삼자)위원회를 통해 노동자 속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게 하는 설득작업이 있었고, 이것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노동 대중 차원까지 스며들게 한 건 김o중 정부다. 큰 흐름에서 보면 필리핀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봉기도 신자유주의의 동력으로 이용했다는 건 명확한 사실로 볼 수 있다. 봉기의 의도와 봉기의 효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자유화라고 하는 요소가 한국에 아주 강력히 깊숙이 파고 들어서 영향을 미쳤다면, 필리핀은 아직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고 (... 하지만)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은 명료하다. 군부라는 게 워낙 강력해서, 자유화와는 반대되는 통제화의 흐름 (...) 이것이 아직도 막강한데,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하지만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피플파워는 나타나고 있다. 민중화와 자유화가 비슷해져 버린다. 한국에도 민주주의적 동력을 자유화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게 자본의 정책이다. 평등이라거나 우애, 공통화는 빼버리고, 자유화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수용하고, 수동혁명적으로 끌고 나간 게, 신자유주의적인 자본, 초국적 자본, 바로 이들이었다. 그게 독점자본이다. 우리나라는 재벌체제 이런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재벌이라는 게 (일본처럼) 초기에는 정치 권력과 결탁해서 재벌을 정치 권력이 아예 주조해내는 형태였다가, 자본이 강해지면서 정치와 대등한 권력에 서게 되고, 그러면 결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두환 정부까지는 재벌 권력이 (정치 권력을 따라가고), 노태o 정부부터는 일정한 대등한 차원의 결탁 관계를 맺는다. 김o삼 말기 김o중부터는 국가권력을 재벌체제가 쥐고 흔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재벌과 김영삼 정부까지의 재벌은 성격이 다르다. 김영삼 초기까지의 재벌은 국내자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본이 지극히 낮은 데 반해, 김영삼이 세계화를 받아들이고 김o중이 아이엠에프 해결책으로 신자유주의를 대중 차원까지 받아들인 후의 재벌은 아이엠에프라는 분기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이엠에프의 취지에 따라 만들어진 재벌, 해외자본이 50프로 이상을 다 장악하고 있는 재벌로 성격이 바뀐다. 97년 말 아이엠에프라는 건 한국의 재벌의 성격을 바꾸기 위한 해외자본 주도로 바꾸기 위한 초국적 자본의 집중적인 공략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삼성이라거나 현대 국민은행 어느 기업체를 들더라도 해외자본이 거의 50프로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하나도 없다. 방o가 거의 100프로.

?: 그곳은 그냥 그 자체가 해외자본이다.

하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필통: (IMF라는 분기점) 재벌체제를 뒤흔들어 놓고 다시 재벌체제로 간다. 초국적 자본이 재벌의 구성 부분의 우위를 차지한 후에는 국내 자본이라 보기는 어렵다.

연필: 99페이지 맨 마지막 대목에서부터 보면,
「시오닐 호세가 내게 말했듯이, 필리핀은 "동아시아의 주요한 문화적 흐름(유교, 힌두교, 불교) 밖에서 아직 국가가 되지 못한 나라이며, 필리핀인들에겐 앙코르와트나 보로부두르가 없다.". 타이 활동가 술락 시와락과의 대화에서, 호세는 똑같은 감정을 다른 식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타이, 인도네시아, 대륙의 동남아시아 국가 상당수에 대해 커다란 열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고 배울 수 있는 고대 문명의 유물이 존재하고, 그들의 역사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은) 피플파워 2차가 등장할 즈음에 근대적으로 국가를 이루어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응집시킬 토착 문화가 파괴된 상황에서 (위 구절은 봉기 당시 민중들이 자신들을) 필리핀 국민으로 상상했을 가능성처럼 읽혔다. 그랬을 때. (추측인데) 이 시기가 지나면서 1,2,3,차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의?) 동력이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처음의 강한 동력은 주변국가와 같은 근대적 국가와 문화에 관한 것이 강하게 작용했다면 그다음엔 여러 정세의 변화와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동력도 굉장히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90년대 이후 가시적으로 내셔널리즘에 대한 상상력은 희석이 되는 편 (...) 이지 않는가. 그런 맥락 속에서도. 1차 2차 3차의 차이를 읽을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지우개: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필리핀은 아니었고, 캄보디아 분들에 관련되었던 것으로 얼핏 기억이 난다. 영상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외국에서 노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에 나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면, 자신의 나라에서 살지 못해 떠밀려 외국으로 일을 하러 온 안타까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는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영상 속에서의 사람들은 단지 살기 위해서 국경을 넘는다기 보다는 자기 삶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또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욕망으로 외국에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삶의 수준을 높이는 방향이라는 것이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이 있겠으나) 자본주의적 욕망과도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삼이 정권을 잡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뭔진 잘 몰라도 '세계화'라고 하는 것이 무척 세련되고 멋지고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동경의 느낌을 굉장히 강하게 곳곳에서, 온몸으로 받았던 기억이 있다. 세계화라는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흐름과도 강하게 닿아있는 것이고.... 정리하자면, 필리핀의 민중봉기가 1, 2, 3차로 이어지면서 그 과정 중에 민중의 동력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뒤로 갈수록 분명 필리핀의 민중 (혹은 필리핀에서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흐름이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필통: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거의 100퍼센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쓰고 있었다. 아시아인들이 일본 말이나 중국 말을 하고 (그 밖에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가족을 동반한 사람도 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외양이 뚜렷해서, 이런 동남아 지역의 사람들이 한국으로 많이 건너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필리핀에서의 피플 파워라거나 그다음에 보는 버마에서의 민주화 운동이라거나, 독립운동이라거나 이런 식의 운동의 영향들 속에 깃들어 있는 자유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여러 유형으로 표현되겠지만, 해외로 나가서 (세계를) 구경해 보고 싶은 욕망도 포함돼 있다. 그 자유가 포함하고 있는 굉장히 다양한 면 중에는 세계에 대한 갈증, 그리고 세계를 알고 싶은 글로벌한 지평에 대한 욕망이 들어 있는 건 사실이다. 글로벌리즘. (이에 비해) 내셔널리즘의 갑갑한 측면이 생긴다. 워낙 globalization이 빈부격차를 거대하게 양산한다거나 범죄를 (야기하고) 위기를 상시적으로 분배해서 공유한다거나 이런 악영향들이 있으니까, 지역성에 대한 애착이 또 반대급부로 생기는 게 사실이다. 다시금 복원하려고 하는 것이 생기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그런 상태로 보인다.

볼팬: 가짜 난민과 진짜 난민을 판별하는 우리 안의 편견이 있다. 그 이분법으로, 진짜 난민은 떠밀려서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으로 구분한다.) 자신의 욕망을 찾아오면, 가짜난민(으로 구분한다.) 이런 감정이 우리나라에서 그들이 우리와 함께 일자리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런 심사의 기준들이 작동하는 것 같다. 10년 전, 15년 전쯤에 처음으로 난민이나 이주 노동의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가시화되었었는데, 그때하고 지금과 상황이 굉장히 다르게 나타난다. 힘들어서 오는 것도 있고, (...) 이동을 한다는 건 다양한 사연들이 있는 건데 말이다. 15년 전에 재현물에서의 이주의 문제가 2000년 초반에 많이 나왔던 것 같다. (당시의 재현물들에서는) 다양한 상황들이 다 고려가 되었고, 진짜다 가짜다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다양한 사연들이 (이제는 현실의 문제로 되면서) 출입국 관리소에서는 (하나의 구분법이 난민) 신청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필통: 이민과 난민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김이: 10~15년 전에는 이동의 다양한 사정들을 공유하고 (이것이 지금과는) 다르게 작동할 수 있었던데는 난민이라는게 한국에서 (현실적으로) 가시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필통: 불법체류를 하더라도 이민자의 한 유형처럼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80년도 초에 (친구들이) 해외로 많이 나갔다. 그때 이 사람들이 이민을 간 사람들도 있지만 무작정 가서 살다가 불법체류자로 일정 기간 머물면서 계속 시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를 거쳐서 결국 정착하는 그런 과정을 밟아가는 걸 봤는데, 그런 경우는 난민에 속하나(?) 이민과 난민이 묘하게 섞여 있는, 본국에서 살 수 없을 지경이어서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게) 싫다, 좀 고생하더라도 미국 같은데 가서 거기서 올라가야겠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먹어서 떠났던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난민을 거쳐 이민화된다고 할까?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난민인지 아닌지 가려야 될 사항(일 것이다.) 멕시코 국경에 트럼프가 장벽을 설치했는데, 쇄도하니까 그들을 난민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예멘 난민 같은 경우도 (...)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민 현상의 출현과 난민 현상의 출현은 실선으로 그을 수 있는 경계가 있는 건 아닌데, 난민은 전쟁이라거나, 자연재해라거나 이런 것으로 인해 무조건 쇄도해 오는 무리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제주도 사람들의 상당 부분이 배를 타고 (지금 북한 사람들이 쪽배를 타는 것과 비슷하게) 일본으로 건너가서 직장을 잡고 했던 사람들이 7, 8만정도 된다. 재주도 인원이라는 게 지금 60만 정도밖에 안 되는 데 그에 비해 굉장히 많은 인구다. 그때 당시로 보면 식민지배로 인한 난민 유형이 매우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낮에 보았던) 식당 사람들은 관광객으로 보였다. 나름 소득이 있고, 관광할 수 있는 그런 여력이 있는 계층의 사람들일 것이다.

볼팬: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힘들고 못살아서 왔을 것이다.'라는 이런 식으로 동남아시아를 생각하는 것, 이러한 위계를 일본강점기 때에 벌써 주입을 받았다. 차별적인 시선이 굉장히 뿌리 깊게 있어왔다.

지우개: 내가 그곳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동남아시아는 '가난'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 사계절이있는 우리와는 왠지 다르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에는 옛날에 보릿고개도 있었고, 그래서 가난하다고 하면 그 끝이 정말 굶어 죽는 그런 것인데 그곳, 동남아시아는 환경이 너무 좋아서 농사를 지으면 최대 3모작까지도 가능하고, 과일나무도 지천에 있고 하니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그게 굶어 죽는 것까지 연결되지는 않지 않을까?

필통: 사유화 이전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예전에 시골에서는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평판이 나빠진 상태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 한, 공동체 구성원일 경우는 밭에서 감자나 수박이나 먹을 것이 널렸으니까, 누구나,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건데. 사유화되고, 땅값이 엄청나니까 토지에 대한 경계 의식이 생기고, 땅을 경계가 지어진 사적 토지로 인식되게 되면 니꺼내꺼 침범하는 것이 된다. 제주도도 (곳곳에 귤나무가 있는데) 임의로 귤밭에 가서 따먹으면 처벌받게 되어 있다. (예전에는 얼마든지 따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곳이 사유화된 지금은 안 그렇다.

토론 2>--------------------------------------

연필: 버미로 넘어가겠다. 토론거리로 올려주신 맨트들을 소개해달라

공책: 위키에서 가져왔다.
「"2008년 민주화를 기초로 한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하였으며, 2010년 총선 후 이듬해 민정 이양하여 군사정권이 종식되었다. 하지만 이 총선은 그저 이름만 "민주적인" 선거였다. 실제 총선에서 압승한 정당은 기존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으로, 실질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미얀마에서는 의석의 25%를 군부에게 할당하도록 하며,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 피선거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 두 조항에 대한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으나, 무시되고 있으며, 정부는 폐지할 논의가 실질적으로 없음을 밝혔으며, 미얀마는 사실상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진 정권교체로, 민주화와 개혁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후 2015년 11월 8일에 개최된 총선에서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지역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를 확정했다."(위키)」
다음은 최근 기사다.
「"이슬람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유혈 탄압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미얀마군 최고사령관 등 미얀마 군수뇌부가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 유럽연합(EU)의 제재 조치에 이어 미국의 제재도 본격화 하는 분위기다. 16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을 포함한 미얀마군 수뇌부 4명에 대한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미얀마 정부가 인권침해 및 학대에 책임을 묻는 조치를 하지 않은 점을 우려한다”며 “지금도 미얀마군이 전역에서 인권침해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서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7월 17일자 기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7171391794072 )」

연필: (3장을 보면) 버마 내에서 로힝야족 말고도 종교도 굉장히 복잡하고 다른데, (책의 서술이) 이러한 것을 고려한 맥락은 (아니라는 점이 의문이다.) (...) 3장에서 아웅산이 비폭력의 수호자로 기능하면서, 로힝야족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건 아니지만 눈을 감고 있다. 눈을 감으면서 버마내에서의 민주세력이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민주화 그 안에서의 시민권의 범위가 어떤 것으로 상상되었을지가 궁금하다. (이러한 문제는 버마의) 로힝야족 뿐 아니라 식민지를 갖춘 모든 곳에서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권 계정을 할 때 로힝야족의 지역이 노골적으로 배제됐다. 박탈시키고, 니희 알아서 가, 이런 식으로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의 난민이기도 하고 (...) 이렇게 버마내에서의 민주세력, 즉 민주화를 주도한 민중이 (자신들을 탄압했던 군부와) 같은 정동을 공유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과제 중에는 이런 과제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통: 로힝야족이 얼마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

연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규모가 200만 정도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종족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버마의 종교구성도 복잡하고, 또 로힝야족이 과거 식민지 때는 버마 내에서 토착민들을 관리하는 (식민체제의) 중간관리자 같은 것으로 역할을 부여받았던 역사가 있다. 그런 복잡한 역사들이 있고, 아웅산 수 치는 (이들에 대해) 눈 감고 있다고 하는데, 그전까지 (아버지가 살해되기 전) 로힝야족에게 자치를 실현해 주겠다고 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죽었고, 아웅산 수 치는 (아버지의 약속?도 나 몰라라 한 채) 평화의 수호자로 포지션을 하고 있는데, (...) 군부와 민주세력 사이에서의 어떤 암묵적인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필통: 그럼 (로힝야족은) 시민권은 같지 못한 건가?

연필: 식민지 때는 제국과 버마 토착민들 사이에서의 중간 위치를 부여받았었고, 해방 후에는 그 안에서 최소한의 시민권을 부여받았었는데, 그 후에는 완전 추출 당하고, 방글라데시에서도 탄압받고, 결국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필통: 여기에는 약간의 계급 감정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혁명 당시를 그린 '고요한 돈강'(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을 보면 적군과 백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종족이 나오는데 이 종족도 러시아에서 일종의 마름 역할을 맡은 종족이다. 주인공이 그 종족 소속인데,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중간자로서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로힝야도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고, 식민지배 당시의 매판적 역할에 대한 처단 같은 게 이루어지는 게 배제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식민 지배계급이 인종적 차이를 인종차별을 통해서 분열시키고 이용해 먹는 케이스이고, 그것 때문에 이런 식의 내몰림 상황으로까지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연필: 한 가지 더. 로힝야족과 버마의 아웅산 수치를 생각하면서 (...) 6, 80년대 일본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한 지명관 선생, 그분 인터뷰를 들은 일이 생각나는데,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자기는 거기서 북한 관련 상황은 아예 손을 끊고 섞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철저히) 한국의 민주화 상황만 전달했다. 왜냐면 통일 문제보다 군부 독제에 항거하는 게 우선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왠지 아웅산 수치도 비슷한 구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상상했던 민주화 운동이라는 게 선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니까, 군부 독제로 상정된 (것들을 우선적으로 그러니까) 전략의 차원에서의 배제와 포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펼쳐졌다.

필통: 아웅 산 수치도 이런식의 내적 분열을 방관하면서 활용할 수도 있겠다. 한국적 상황에 적용해 보면 (한국은) 인종이라고 할 만한 차이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게 전혀 없다곤 할 수 없다. 제주도는 자치지역으로 되어 있고, 그 외에도 삼국시대를 생각하면 신라 백재 고구려 이들을 동일 종족이라 볼 수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적 격차도 있고, 혈족적 격차도 있고, 인종적으로까진 나눠지지 않지만 상당한 정도의 격차가 있는 에스닉들이다. 지금은 경상도 전라도 북한 (...) 이렇게 이해를 돕기위해 나눠보면 그 문화적 격차가 잔존하는 건 분명하다. 식민지배 권력으로 치면 3분할로 된 한반도가 있다. (이 지역들이 그 중) 특별한 지역을 미뤄주고 특별한 지역을 배재하는 분할정치로 사용될 수 있다. 로힝야족 외에 다수 민족이 또 있을 텐데 그들을 소수화시켜서 배제하는 게 통치에 유리할 거냐 (아닐꺼냐.) 오늘날의 군중들 같은 경우는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므로 차별받는 걸 만들어내는 데서 쾌락을 느끼고 (그에 대한) 우울감도 가지고 (...) 이런 심리상태를 가질 수 있다. 정말로 인종간 민족간 내적 평등과 공통화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식의 권력체계라거나 또 권력에 동조하는 군중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도 박정희와 김대중의 갈등이 나타나면서, 지역적 차이를 이용한다. 아웅산 수치라고 해서 그런데서 전혀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구체적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분할의 룰이 작동하리라 생각한다.
한국과 전반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은 한국과 다른 특이성이 (있는 것으로 읽었고) 버마는 한국과 비슷(하게 읽혔다.) 버마의 네 윈은한국으로 치면 박정희다. 이 사람의 통치가 노태우 이런 식으로 얼굴을 바꿔 가면서 계속되고, 아웅산 수치가 그것과 대립하는, 한국의 김영삼이나 김대중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양자, 여야간의 여야관계가 한국의 70년대, 네 위가 집권한 것도 62년으로 박정희와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네 윈은 박정희보다 훨씬 오래. 21년 (...) 군부 통치를 봉기 세력이 극복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태,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 2015년? 에 좀 달라졌다고. 하는 것 같긴 하다.

볼팬: 미얀마라고 하지 않고 버마라고 한 건 이 분(카치아피카스)이 어떤 의도를 뛰고 한 건지?

필통: 미얀마라는 이름은 군부세 력이 붙인 거고, 민주 세력은 지금도 버마라고 하고 있다. 2007년도에 다지원을 처음 만들었을 때 조모아라는 분이 있었는데 버마사람이다. 그 분도 난민인 셈인데 그 사람은 버마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른다. 민주화 세력은 버마라는 이름의 복권을 주장하므로 그에 따라 버마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연필: 171쪽을 보면,
「넬슨 만델라는 더 이상 로빈 섬에 갇혀 있지 않고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 된 반면, 왜 아웅 산 수 치는 성인이 된 이후 삶의 대부분을 집 안에 갇혀 보냈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분석가가 언급한 대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봉기는 참여자의 일부가 폭력으로 선회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것이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로 버마가 권력을 접고 못 잡고가 아니고,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우개: 서술된 그대로, 봉기의 힘이 충분히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왜 힘이 약해졌을까? 이는 아웅산 수치가 성인이 되어 버린 것과 연결되는 것일 텐데, 이는 장의 초반부에 서술된 '아웅산 수치가 신화화되었다'는 언급과도 연결된다.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만들면서 혁명을 신화화하는 것은 봉기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에 NGO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그 경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적인 기관들이 있음으로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한 기관들을 만든 것으로 봉기가 다 완성되었다고 여기는 게 혁명의 불꽃을 약화시켜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만들면서 혁명을 신화화하는 것도 봉기의 힘을 약화시켜 버린다.

필통: 무장투쟁이 고립되어 가는 과정이 있다. 무기들을 해외 정부들로부터 지원받지 못해서 (...) 격리된 무장투쟁이 되고, 무장상태에서의 (...) 교착됐다라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도시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다양하게 설명이 된다. 170페이지를 보면 샤프란 혁명이 나온다.
「샤프란혁명에 CIA가 개입한 사실은 어느 정도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윌리엄 엥달은 미국 정보부가 1986년 필리핀 반란에서 배워 사전에 준비한 불안정화 계획을 적용했다고 지적했다. 색깔 티셔츠, 음악인, 비우호적 정부를 겨냥한 공적 공간의 대규모 비폭력 점거 전술등이 그것이다. "버마의 '사프란혁명'은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이나 조지아의 '장미 혁명', 그리고 최근에 러시아를 둘러싼 전략적 국가에서 선동한 다양한 컬러 혁명처럼, 워싱턴이 치밀하게 운영하는 정권교체 연습의 일환이었고, '벌떼' 같은 노란색 불교도 무리들의 '치고 빠지기' 시위, 인터넷 블로그, 이동전화 SNS를 이용한 시위 그룹 간 의사소통,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일사불란한 시위 조직 등 세부 사항까지 지시했다. CNN은 9월 방송 도중에 버마의 시위 배후로 NED(미국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민주 기금)의 활동을 언급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색깔 티셔츠를 입는 다거나, 대규모 비폭력 점거전술, 버마 무장투쟁과는 다른 방식의 전술이 2007년에 사용되는데, 이거는 CIA의 지침 비슷한 (...) 지침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이것들은) 정권교체 연습의 일환이었고, 불교도 무리의 치고 빠지는 시위라거나. 에스엔 시위소통이라거나. 시위조직이라거나 이런 거를 CIA쪽에서 알려준 면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튼. (...) 무장투쟁이 계속되어왔고, 그러한 역사가 있었는데, 무장투쟁과 동시다발 투쟁. 전술과 방법론상에서 차이가 나는 건데, 아마도 (...) 그런 평가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식의 무장과 폭력성이 있었다는 평가가 있는 모양인데, (...)
촛불집회가 2008년에 있을 때는 5월2일에 시작해서 8월 15일에 끝났다고 평가를 하는데, 8월 15일까지만 하더라도 내부에서 촛불이라고 하는(것에 관한) 문제 제기들이 있었다. 너무 평화롭게 (진행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들이 계속 있었다. 평화시위들에 대한 반론들이 있었다. 8월 15일을 분기점으로 해서 대부분의 촛불은 집으로 돌아갔는데, 횃불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년 가까이 시위를 했다. 그때 촛불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력으로 밀당을 하는 거에 대한 거부감을 많이 표현했다. 전투경찰을 고립시키거나 투구를 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사람을 집중 공략해서 못하게 말리고, 말리는 걸 넘어서 배제해버리는 (모습이 많이 있었다.) 명박산성이 들어섰을 때도 밧줄로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고 막고, 이런 걸 현장에서 지켜봤었는데, 2016년 같은 경우는 그런 움직임은 없고, 그런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압도적 힘을 발휘하니까, 지극히 평화적으로 발현됐다. 2016년은 (그만큼) 압도적이지 않으니까, 대치상황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평화롭게 할려면 하고, 각자의 자율성으로 하면 되는데, 너무 억압적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술상으로 통일될 수 없는 군중이 모여서 전술상의 통일을 꾀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오히려 역량을 갉아먹는 것으로 작동을 하지 않았냐는 생각이다. 무조건 폭력은 안되 비폭력이어야 되라는 생각이 오히려 굉장히 폭력적으로 행사된다.

지우개: 68혁명 당시 현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세이 형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학생들과 진압경찰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르는, 학생들 쪽이었는지, 경찰들 쪽이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돌멩이 하나로 시작되어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게 양 진영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촛불 현장에서, 팽팽한 긴장 속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우발적인 사건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 같은)을 엄청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심리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필통 : jtoc에서 광주항쟁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계엄군 쪽에서 작업복을 입혀서, 편의대 (편안한 작업복 차림으로 온다고 해서 편의대)를 (시위대에) 보냈고, 이런 사람들이 무력도발을 했다는 거다. 그런 사람들을 (...) 작업시키고, (시위대에) 총을 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이 경우에는 편의대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총을 쏨으로써 반격할 수 있도록 하는 고의적인 유도전술을 썼던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한 경계심 같은 것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원시적 무기, 그러니까 돌멩이처럼 미리 준비된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장비를 시위대의 일부가 사용하려 하는 것을 (시위대 안에서) 서로 감시하면서 서로 싸우는 것은 (...) 서로가 서로를 프락치로 몰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그런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분위기가 양분되었을 때 (...) 왜 너네들은 돌맹이를 던지냐고 공격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왜 안 던지냐고 공격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서로 (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데로) 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수백만이 현장에 나오면 (총을 들고) 뭐 그런 게 사실상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압도적 힘을 만들어내는 게 관건이다.

공책: 끝으로, 책을 읽으면서 경찰과 군대가 너무 미웠다. 3장에 경찰과 군대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무척 흥미로웠다. 다들 읽어보시면 좋겠다.
전체 1

  • 2019-08-23 18:43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들.. 저는 24일 결석합니다. 스카이프접속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어요... 이번 세미나 즐겁게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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