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의 개봉에 부쳐

작성자
absinth
작성일
2019-09-21 17:21
조회
1429
영화 <조커>의 개봉에 부쳐

정신의학자의 입장에서 영화 <조커>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뻤습니다. 오락적인 기능이 주로 부각되어오던 히어로물에 어딘가 정당한 대가가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989년 팀 버튼이 어둡고 음울하면서도 뒤틀린 느낌의 수퍼히어로의 자화상을 그려낸 이후로, (물론 중간에 조엘 슈마허 감독이 똥칠을 하긴 했습니다만) 감독들은 꾸준히 배트맨과 악당들의 심리적 측면들을 다루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팀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들만의 시선으로 조커라는 인물을 재구성해냄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두 사람이 묘사한 조커는 '역대 최고의 조커'에서 1,2순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팀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조커

팀버튼 감독은 코믹스에서 전통적으로 브루스 웨인의 살해범으로 알려져 왔던 조 칠(Joe Chill)을, 후에 조커가 되는 잭 네이피어(Jack Napier)로 바꿈으로써 스토리를 약간 뒤틀어버립니다. 잭은 힘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이류 건달로 묘사됩니다. 그는 보스의 자리를 꿰차 최고의 악당이 될 기회만을 노리죠. 배트맨은 액시스 화학 공장에서 악당 무리를 쫓던 중 실수로 잭을 화학 폐기물 오염수에 빠뜨리게 되고, 잭은 이 화학물의 영향으로 하얗게 표백된 피부와 끝없이 웃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합니다. 그는 자기 보스를 죽이고 조커가 되는데, 배트맨과 조커는 서로를 만들어낸(그보다는 차라리 서로를 뒤틀고 망가뜨려버린) 존재이자 서로를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거울상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상대적으로 조커의 탄생설화 부분을 건너뛰는 경향을 보입니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조커의 단편적인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죠. 여기서 조커는 다른 의미에서 배트맨의 거울상 기능을 합니다.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의 손을 들어주고, 법의 수호를 첫 째 목표로 가지는 배트맨과 달리, 조커는 그러한 법을 조롱함으로써 완전한 무법 즉 카오스의 대리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배트맨이 칸트적 의미의 법을 대변한다면 조커는 그 이면의 사드적인 법의 측면을 고발하게 되는 것이죠.

이후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나타난 조커도 마찬가지고, 이 세 명의 조커는 모두 공통적으로 반사회성이라는 가치의 신봉자로 묘사됩니다. 우리가 흔히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에게서 묘사되는 조커는 그들의 다양한 탄생 배경의 맥락을 경유하면서도 일관되게 사이코패스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의해서도, 불우한 어린시절에 의해서도 결국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의 결여로 정의되는 사이코패스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동일한 심리적 외상을 겪어도 왜 누구는 밤의 수호자가 되면서, 누구는 카오스의 화신이 되느냐 하는 차이점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커와 실성 및 광기의 문제

사실 배트맨의 외상과 그것의 발생학적 타협점 사이에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Brody(1995)나 Langley(2012)같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조기 상실이 오이디푸스적 부친살해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배트맨에게 과도한 죄책감과 악에 대한 처벌 의지를 야기한다고 보았고, Reichstein(1998)이나 Bass(2009)는 배트맨의 조기 부모 상실이 정동 조절(affect regulation)의 문제를 가져옴을 보였습니다. Lang(1990)은 Lacan의 공포증 개념을 경유해 남근 도입 실패를 겪은 브루스 웨인이 박쥐라는 남근을 도입해야만 하는 운명을 다루기도 합니다. 저는 최근 외상이 자기(self)의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함으로써 배트맨에게서 나타나는 자기애적 문제, 즉 과대성과 공격성 및 이상화의 문제를 다루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조커에 대한 정신역동적 분석은 잘 다루어지지 않은 편인데, 현재 개봉을 앞두고 있는 <조커>가 이에 대한 논의를 더 활발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사실 예고편만 봐도 생각할 만한 거리가 많아보입니다. 일단 어머니라는 주제가 부각되고 있고, 거기에 의례적으로 뒤따르는 상실의 문제가 시사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오리지널 코믹스의 설정을 따라 그를 가난한 코미디언으로 묘사하는데, 아마 잘은 모르지만 (로버트 드니로와 같은 거장 코미디언이 되는)이상이 좌절되면서 결국 실패하게 되는 운명이 그려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극단에서, 흔히 실성한자의 웃음이라고 부를 광기(Insanity)의 문제가 폭로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서 기술한 반사회성도 실성 또는 광기의 일종이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둘은 결이 다른 문제입니다. 반사회성의 중심적인 특징은 죄책감의 결여, 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초자아의 결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동이 걸리지 않는 폭력성이고, 조커의 다른 측면들 가령 그치지 않는 웃음의 문제 같은 것은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렇지만 <조커>에서의 웃음은 이차적이기보다 오히려 일차적인 문제로, 즉 광기 그 자체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다뤄지는 것 같습니다. 예고편은 냇 킹 콜의 명곡 'Smile'을 대놓고 주제가로 쓰는가 하면,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는 그 노래의 원작자인 채플린의 얼굴이 그려진 플래카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양가성이란 무엇인가

채플린의 Smile이라는 노래가 가진 맥락을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모던 타임즈>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음악인데요, 이후 냇 킹 콜, 마이클 잭슨 등이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든 뒤 더 유명해졌습니다.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된 가난뱅이 채플린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여자친구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합니다. 웃자고. 웃으며 다 잘 해결될 거라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던 그의 말처럼, 이 Smile이라는 노래는 웃음 자체가 가진 이 지극한 양가성(Ambivalence)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희극과 비극의 양가성을 담아낸 Smile이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곡이 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왜 조커의 Smile에서는 꺼림칙하고 광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는 것일까요? 방금 이야기한 양가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다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반대되는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때, 가령 나쁜 엄마의 모습과 좋은 엄마의 모습이 하나의 엄마에게서 동시에 느껴질 때 양가적이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렇지만 이 엄마가 어떨 때는 전적으로 나쁘게만 느껴지다가, 또 어떨 때는 전적으로 좋게만 느껴지는 건 양가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오히려 완전히-좋거나 완전히-나쁘거나의 양자 택일의 문제라고 봅니다. 전자에서는 두 가지 상태가 상호 모순되면서도 양립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한쪽이 존재하면 다른 한 쪽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분열이란 무엇인가

양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능력입니다. 이것이 확립될 수 있으려면 일단 아이는 발달적으로 나쁜 어머니와 좋은 어머니의 모습, 나아가 자신 안의 부정적 감정과 긍정적 감정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켜야만 합니다. 거기에 더해 자기 자신의 감정 조절 능력 혹은 통제 능력도 어느 정도로 발달해야 하고 초자아도 어느 정도 발달해야만 하죠.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이것이 잘 되지 않을 때 개인은 두 가지를 함께 양립시키는 것에 엄청난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들에게 자신 혹은 사랑하는 타인 안의 결점을 인정하는 것은 죽음에 비견하는 공포를 가져오고, 어떤 경우 타인을 좋은 대상으로 남기기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나쁜 대상으로 만드든가 하면 자신을 좋은 대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무조건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이런 걸 고전적으로는 분열(Splitting)이라고 합니다. 분열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에 잡티 하나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정신의 미숙한 전략입니다.

심한 경우 이 분열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데, 그런 면 때문에 인격의 분열이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과 전혀 다른 자기의 모습이 자신을 대변하는 처지에 이르기도 합니다. 열등한 자신이 숨는 대신 과시적인 자신이 우세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쁜 모습의 자신이 숨는 대신 착하고 예의 바른 자신의 모습이 우세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 실제 자기 모습이 무엇인지 완전히 망각하고 살아가게 되기도 합니다. 이 분열이라는 것은 배트맨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신의 부와 젊음을 과시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가면 뒤에, 그리고 그의 날개만큼이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배트맨의 가면 뒤에는 분명 초라하고 열등하면서도 의존적일 수 밖에 없었던 웨인의 자기(Self)가 놓여있는 게 아닐까요?


분열의 화신을 고대하면서

<조커>의 예고편에서도 이러한 분열의 테마가 간간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고편은 반복적으로 거울을 보고 억지로 웃어보이려는, 그리고 지하철에서 억지로 웃음지으려는 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상담가와 이야기하는 게 도움이 되나요?"라고 묻는 실망스러운 표정의 여성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분명 조커의 상담이 잘 진척되지 않고 저항에 부딪치고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상담 중에도 진짜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요. 최근 나온 최종 예고편에서의 조커는, 이미 어떤 웃음의 화신이 된 것 같은 모습입니다. 더 이상 우울하고 취약하면서도 어린애 같은 아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죠. 조커의 가면이 원하는 진짜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폭력성이니 반사회성이니 하는 이름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뉴런의 와이러잉이 잘못돼서 애초에 공감능력이 없었을 지도 모르죠. 누군가는 쾌락 중추에 이상이 있어 동물이나 기타 생명체를 학대하는 데서 도파민이 빵빵 터져나오는 보상 시스템을 가족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의 배트맨과 조커처럼, 상실과 좌절의 상처가 반복되는 가운데 취약한 자기 자신을 억누르고 강인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커>가 어떤 식으로 웃음과 광기의 화신의 탄생설화를 그려주게 될지, 지극히 기대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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