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조커>를 보고 왔습니다.

작성자
absinth
작성일
2019-10-04 07:52
조회
627
오늘 <조커>를 보고 와서 리뷰를 다시 작성해봅니다. (스포가 담겨있습니다)

사이코패스로서의 조커

정신의학자의 입장에서 영화 <조커>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뻤습니다. 오락적인 기능이 주로 부각되어오던 히어로물에 어딘가 정당한 대가가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989년 팀 버튼이 어둡고 음울하면서도 뒤틀린 느낌의 수퍼히어로의 자화상을 그려낸 이후로, (물론 중간에 조엘 슈마허 감독이 똥칠을 하긴 했습니다만) 감독들은 꾸준히 배트맨과 조커의 심리적 측면들을 다루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팀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들만의 시선으로 조커라는 인물을 재구성해냄으로써 극찬을 받았는데요, 이번에 토드 필립스 감독이 그려낸 새로운 조커도 결코 만만치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하자면,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 가슴 속 깊이 무언가 꿈틀하는 것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팀버튼 감독은 코믹스에서 전통적으로 브루스 웨인의 살해범으로 알려져 왔던 조 칠(Joe Chill)을, 후에 조커가 되는 잭 네이피어(Jack Napier)로 바꿈으로써 스토리를 약간 뒤틀어버립니다. 잭은 일인자를 꿈꾸는 이류 건달로 묘사됩니다. 그는 보스의 자리를 꿰차 최고의 악당이 될 기회만을 노리죠. 배트맨은 액시스 화학 공장에서 악당 무리를 쫓던 중 실수로 잭을 화학 폐기물 오염수에 빠뜨리게 되고, 잭은 이 화학물의 영향으로 하얗게 표백된 피부와 끝없이 웃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합니다. 그는 자기 보스를 죽이고 조커가 되는데, 배트맨과 조커는 서로를 만들어낸(그보다는 차라리 서로를 뒤틀고 망가뜨려버린) 존재이자 서로를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거울상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상대적으로 조커의 탄생설화 부분을 건너뛰는 경향을 보입니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조커의 단편적인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죠. 여기서 조커는 다른 의미에서 배트맨의 거울상 기능을 합니다.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의 손을 들어주고, 법의 수호를 첫 째 목표로 가지는 배트맨과 달리, 조커는 그러한 법을 조롱함으로써 완전한 무법 즉 카오스의 대리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배트맨이 칸트적 의미의 법을 대변한다면 조커는 그 이면의 사드적인 법의 측면을 고발하게 되는 것이죠.

이후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나타난 조커도 마찬가지고, 지금까지의 조커는 모두 공통적으로 반사회성이라는 가치의 신봉자로 묘사됩니다. 우리가 흔히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공감 자체가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잭 네이피어는 젊은 시절 토마스 웨인 부부를 살해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미소짓는 모습을 보이는가하면, 히스 레저의 조커는 인륜성이 무너져 몰락하는 사회를 바라보며 그저 "차를 쫓아가는 개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최근 정신의학자 및 신경과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입증하기 시작했습니다. Kiehl, Hare 등은 이들에서 편도체 및 대상회의 활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하면, Raine 등은 보상시스템의 이상이 병리적인 형태의 쾌락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 즉 아서도 비슷한 측면을 공유하기는 합니다. 자신의 직장 동료나 심지어 어머니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살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에게 인간적 공감이라는 게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죠. 그렇지만 '역시 아서도 사이코패스였어'라고만 이야기하기에는 어딘가 허전한 데가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단지 하나의 표면적 현상을 가리키는 추상물일 뿐입니다. 단어가 보편적이 되고 추상적이 될수록 그것을 이루는 내용 자체는 흐려지고 뭉뚱그려질 뿐이죠. 사이코패스에 이르는 길은 권력에 대한 욕망(팀버튼의 조커)을 경유할 수도, 법과 권위를 조롱하고자 하는 욕망(크리스토퍼 놀란의 조커)을 경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표면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죠. 그렇다면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어떤 길을 거쳐 반사회성이라는 표면적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자기애(narcissism)의 문제에서 이것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조커>의 발생학

<조커>는 사실 깔끔한 영화입니다. 별로 논의의 여지 같은 게 없죠. 아서가 조커로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발생학적 과정을 매우 구체적이고 그럴싸하게 보여줍니다. <조커>의 발생학은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 개의 계열들을 교차시킴으로써 특정한 결론에 이르는 전략을 택하게 되죠. 여기에는 심리학적 계열이 있고 사회적 계열이, 그리고 자연적 계열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종합되면서 결국 하나의 인격으로 결정화되기에 이릅니다.

심리학적이라 함은 조커 개인의 양육환경 즉 모자관계를 말합니다. 앞서 제가 자기애라는 용어를 말씀드렸는데, 이에 대해 조금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태동시킨 이후, 사람들은 정신이 이드(id)와 자아(ego), 그리고 초자아(super-ego)라는 세 가지 부분으로 구조지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들 이것을 뒤칸에 탄 아버지(초자아)의 지적을 받아가며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드)을 이끄는 마부(자아)에 비유하곤 하죠. 인간은 성욕이나 공격성 같은 욕망을 갖고 태어나지만, 부모님의 도덕관념을 내재화하면서 자신의 욕망들을 통제하고 살아갑니다. 사회화된 인간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도덕관이나 사회성이 지나칠 경우 필요 이상으로 욕망들이 억압되면서, 그것이 결국 다른 방향에서 비집고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거나, 신체의 어딘가에 통증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강박적이 되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치료는 이런 죄책감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과는 분명 다른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과시적이면서 남들을 깎아내리고, 오만한데다가 가혹한 죄책감 같은 것은 없는 특징이 관찰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들에게는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아무리 노력해봤자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프로이트처럼 의자에 앉아 중립적인 입장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분석을 한다고 해서 나아지지가 않았던 것이죠.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이들에게서 죄책감보다는 수치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이런 부분에 더 귀를 귀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중립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 이들을 지지하고, 이들의 성장욕구를 돕는 식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치료자를 이상화하면, 그냥 이상화할 수 있게 놔두었고, 이들이 자랑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공감하면서 반영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이들은 조금씩 치료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죠.

코헛은 이들의 수치감 너머에 성장하지 못한 자기(self)가 있다고 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자아와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내가 나 자신임을 느낄 수 있는 어떤 무게 혹은 하중과 같은 것이었죠. 이 자기라는 것은 처음에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혼재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는 아기가 엄마의 눈짓과 손짓을 자신과 다른 타인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 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명확히 구별하고 타인을 타인으로서 대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애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 하는 측면을 갖게 되죠. 아기는 처음에 전지전능한 '과대 자기'를 갖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신인 줄 알죠. 아이가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손을 뻗으며 엄마는 그것에 동참해주고 미러링(mirroring)해주면서 아이를 하늘로 들어올려줍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아이는 점차 자연스럽게 자신의 현실적 한계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는 점차 현실적인 자기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부적절한 공감은 자기를 고태적인 자기의 상태에, 즉 전지전능하다고 착각하는 자기의 상태에 묶어두게 됩니다. 그들은 제대로 성숙되지 못 한 과대환상을 억압하고 분열(Splitting)시켜서 정신의 한 쪽에 몰아둔 채 부적응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죠.

아서의 양육환경과 공감의 실패

아서는 공감이 결여되었다기보다 차라리 공감이 박탈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아서가 민감한 정서적 특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감성이 무뎌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풍부해서 문제죠. 이는 태어날 때부터 동물들을 학대하거나 도덕관념이 결여된 순수한 사이코패스와는 다른 측면입니다. 이 공감이라 함은 두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집니다. 공감이라는 하나의 양육태도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도 있겠네요. 하나는 과대하고 고태적인 환상을 가진 자기의 측면에서의 공감("우리 애기가 하늘을 날고 있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고태적인 자기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이상화 대상의 측면에서의 공감입니다("엄마를 따라서 점프해보렴!"). 그런데 이것이 안정적인 부모로부터 제대로 제공되지 못 했을 경우, 아이는 계속해서 이것을 대체할 대상을 모색하게 됩니다.

아서가 공감의 실패를 경험했음은 자명해보입니다. 아버지는 학대를 일삼았던 데다가 어머니는 그것을 방관한 사람으로 묘사되죠. 아서의 자기(self)는 분명 제대로 성숙될 기회를 잃었을 겁니다. 당연히 이상화할 대상도 없었을 테죠. 이 이상화 대상이라는 것은 결코 타인으로서의 이상화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가 발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정한 타자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상화 대상이 실망을 줄 때 자기 자신의 존재가 와해되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꿈이나 공상(daydream)의 내용을 관찰함으로써 그 사람의 환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요, 아서의 경우 이는 이상화된 아버지를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머레이를 강렬하게 열망하고, 그런 열망은 심지어 머레이가 "너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아"라고 말하며 그를 껴안는 공상으로 형상화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는 토머스 웨인을 찾아가 울부짖습니다.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맞다니까요! 왜 계속 그걸 부정하려고 하세요!"

아서에게 이들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의 분노의 강도를 살펴보는 것이죠. 자기애적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상화하던 대상에게 거절당할 때 엄청난 분노를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머레이를 향해 무자비하게 총기를 난사하던 그의 모습과, 자신의 존재를 깎아내리는 TV 속 토마스 웨인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역으로 그에게 그러한 이상화 대상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서에게 이상화 대상이 상실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는 것만큼 견디기 어렵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이상화 대상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코헛은 <자기의 분석>에서 심지어 거짓으로 위대한 아버지의 존재를 만들어냈던 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공감의 실패는 개인을 앞서 말한 분열(Splitting)에 이르게 합니다. 이 분열은 우리가 과거 정신분열증(지금은 조현병이라고 합니다)을 이야기할 때의 분열(Schizo-)이나 다중인격을 이야기할 때의 해리(Dissociation)와는 다른 것입니다. 분열은 기본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나란히 존재시킬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적절한 공감이라 함은 과대한 환상을 가진 아이로 하여금 점차 부분적으로 박탈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패하는 경우 아이는 자신의 과대 환상을 한 쪽으로 밀어두고 거짓된 자기(False self)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아서의 어머니 페니는 그 자신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을 너머 아서로 하여금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는 항상 말해왔죠. 웃으며 살라고."

<조커>는 그것의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도 이 분열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 초반 구부정한 모습으로 어두운 계단을 오르던 아서의 우울한 모습과 화려하게 분칠한 채 춤을 추며 내려오는 밝은 대낮의 계단을 분명히 구별지어볼 수 있습니다. 전자의 계단이 힘겹게 올라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라면, 후자의 계단은 과시적인 가면의 조커가 자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무대죠. 음악적 장치에 대해서도 다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제곡 중 하나인 'Smile'은 원래 <모던 타임즈>의 주제곡으로 쓰려고 찰리 채플린 본인이 작곡한 음악인데요, 이후 냇 킹 콜, 지미 듀란트(<조커>의 버전은 그의 노래입니다), 마이클 잭슨 등이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든 뒤 더 유명해졌습니다.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된 가난뱅이 채플린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합니다. 웃자고. 웃으면 다 잘 해결될 거라고. 이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도 웃어보여야만 했던 아서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Smile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적절하게 공감받지 못한 고태적이고도 과대적인 자기와를 은폐하고 억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거짓 자기로서의 웃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비극이지만, 진짜 자기를 숨기고 어릿광대짓을 살아갈 수 없는 아서의 삶, 즉 코미디로서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죠.

아서와 자연적 계열, 그의 뇌질환에 대하여

제가 이전에 봤던 한 환자분은 멈출 수 없는 웃음 때문에 병원을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터져 나와서 몇 분간 지속됐는데, 이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워 상당한 우울감을 경험하셨었죠. 사실 의학에서는 아직도 이에 대해 명료한 원인을 밝히지 못 하고 있습니다. 치료도 어려운 편이죠. 의학에서는 과거 이를 “거짓숨뇌감정(pseudobulbar affect)”, “감정동요(emotional lability)”, “감정실금(emotional incontinence)”, “불수의적 감정표현장애(involuntary emotional expressiondisorder)” 등으로 불렀지만 최근에는 병적웃음과 울음(pathologic laughing and crying, PLC)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유튜브에 Pseudobulbar affect라고 쳐보시면 이런 것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부위의 뇌 손상이 이런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고 알려져있습니다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사실 없습니다. 아서는 어린시절의 학대에 의해 뇌손상을 당하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멈출 수 없는 웃음에 시달리게 합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리지널 코믹스에서는 사실 배트맨의 실수로 조커가 화학약품에 빠지면서 그칠 수 없는 웃음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1799년에 험프리 데이비라는 화학자가 웃음 가스(나중에 일산화질소로 밝혀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이후로 사람들은 화학약품이라는 것이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어쩌면 조커의 탄생설화의 배경에도 이런 옛날 사람들의 관심과 두려움이 반영된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이런 공포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요즘은 모든 걸 뇌로 설명하고 싶어하고, 뇌의 질환만큼 사람의 정신과 감정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 뇌질환이라는 자연적 계열은 아서의 발달심리학적 계열과 중첩되면서 그의 분열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서는 그의 신체 조건 상,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분열시키고, 진짜 자기 감정을 뒤로 억압시킬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죠.

아서와 사회적 계열,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대하여

아서, 그리고 고담시의 시민들에게 부와 가난이란 삶과 죽음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아서는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당장 오늘 돈을 벌지 않으면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서의 노트에 적혀있던 "I hope my death makes more cents(sens와 동음) than my life(내 죽음이 내 삶보다 더 의미있기를(더 벌이가 되기를))"라는 조크는 '삶의 의미'와 '동전 몇닙'이 교환가능한 등식 관계에 있다는 것을 폭로함과 동시에 삶 속에서 노동이 벌어들이는 쥐꼬리 만한 급여를 기대하느니 사망보험이나 장기매매같은 죽음을 기대하겠다는 조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조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본가와 자본자체에 대한 노동자의 강력한 분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2011년 9월 17일, 30여명의 사람들이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뉴욕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부를 챙기는 월가의 경영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죠. 신자유주의는 미국 사회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99%의 이익은 소수의 자본가에게로만 쏠리게 되면서, 이는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후 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고 사람들은 극 중 광대 가면을 쓴 시위대처럼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채 월 가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서는 어떠한 정치적 이익이나 노선과 상관 없이, 단순히 자신의 박탈감에서 야기된 분노로 3명의 화이트칼라를 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서 개인의 계열이죠. 그런데 이 계열이 사회의 계열과 마주치게 되면서 아서의 도발은 일종의 기폭제로 작용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상영되던 <모던 타임즈>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떠돌이 채플린은 우연히 어떤 트럭에서 빨간 깃발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차를 향해 소리치며 붉은 깃발을 휘두릅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뒤에 공산주의 시위대들이 몰려붙기 시작하죠. 굉장한 코미디이자 아이러니인데, 아서의 삶도 비슷한 궤적을 밟게 됩니다.

이처럼 아서의 행위는 사회의 계열 자체에 영향을 주지만, 반대로 사회의 계열이 아서의 개인적 계열에 역으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던 중 처음으로 아서가 진실된 미소를 짓는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의 살인 이후 집으로 돌아온 아서는 (망상 속에서) 소피(재지 비츠)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요, 길거리에 나가자 여기 저기 그의 '활극'을 칭송하는 신문기사가 나돌고 광대가면을 쓴 시민들이 활보합니다. 자신을 똑같이 모방하고 따라해주는 존재만큼 자신의 존재를 공감해주는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아서의 조커가 광기를 표출하는 이면에서 살인에 대한 짜릿함만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 동기를 추정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서의 진짜 짜릿함은 바로 이런 공감에 있었을 겁니다.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 그를 상담해주던 상담가도 제공해주지 못 했던 공감을, 이제는 사회가, 시민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는 필요에 의해 그를 이용하고, 아서는 그런 사회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과대 자기에 대한 공감과 미러링을 받아냅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왔어.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어"는 정확히 과거에 박탈되었던 어머니의 공감적 시선이 이제서야 사회라는 계열을 거쳐 그에게 제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커와 나르시시즘

저는 현재 자기애성 성격이라는 관점에서 배트맨을 분석한 논문을 준비 중인데요, 두 인물의 특성을 관찰하다보면 상당히 겹치는 데가 많습니다. 배트맨 또한 어린시절 부모를 상실한 뒤 다양한 이상화 대상(알프레드, 고든청장, 그리고 <배트맨 비긴즈>의 라즈알굴)들을 추구하면서 부자 도련님이라는 가짜가면 속에서 강력하고 전능하며 과시적인 배트맨으로서의 환상을 실현하고자 하니까요. 흔히들 배트맨과 조커를 거울상으로 다루곤 합니다만, 이는 단순히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만들어냈기 때문(팀버튼)이라거나, 서로가 법에 대해 상반된 두 개의 짝개념을 대변하기 때문(크리스토퍼 놀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애적 구조의 두 가지 다른 표현으로서 거울을 구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마스 웨인이 티비에 나와 "비겁하게 가면 뒤에 숨어 진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겁쟁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이 문장은 그의 가짜 아들(아서)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진짜 아들(브루스)를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극 중에서 아서의 엄마인 페니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코헛이 지적했듯이 자기애적인 양육자는 아이에게 공감의 대상이 되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를 자신의 공감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부모의 태도에 맞추어 거짓 자기를 발달시키게 되고, 이것은 그들을 자기애적으로 손상된 상태에 묶어두죠. 이러한 유전적이고도 양육적인 측면과, 생물학적이고도 사회적인 계열은 하나로 만나면서 아서를 정확히 '자기애성 성격'이라는 구조로 향하게 합니다. 아서는 분열된 자기 안에서 참된 자기가 억압된 채 우울하고 공허한 삶을 사는 가운데, 미성숙한 과대 환상을 품고 살아갑니다. 열등한 자기 자신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수치감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이 최고의 능력자이고 다만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 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최고의 코미디언, 1등 학생, 유명한 연예인, 국가 영웅같은 것들은 자기애적인 환자들에게서 단골로 나오는 테마들입니다.

<조커>의 개봉을 두고 미국 사회에서 모방범죄에 대한 우려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로라 총기 난사 사건' 피해자 가족모임을 이끄는 샌디 필립스 등은 '조커'의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에 편지를 보내 "폭력 장면이 불필요하게 많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악당을 미화하는 측면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조커> 말고도 이런 영화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이 영화는 이토록 논란이 되고 있는 걸까요. 제가 글의 서두에서 밝힌 것 같은 '꿈틀함'에 그 이유가 어느 정도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좌절당하고 억압당한 개인이 그 족쇄를 풀어헤치는 장면들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영웅의 초라하고 어설픈 탄생설화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움직이는 것도 없죠. 어쩌면 <조커>의 공명지점도 그런 곳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서진 경찰차 위에서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두 팔을 벌려 웃음지어보이는 아서의 모습 안에서 우리 안의 위축되고 공감받지 못 한 자기가, 과대적인 환상을 억압해왔던 자기가 꿈틀거리며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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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세미나 공지
voov11 | 2024.03.16 | 추천 0 | 조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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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3월 10일 공지, 3월 2일 후기
rilkes@naver.com | 2024.03.08 | 추천 0 | 조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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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2/25 자본1 세미나 공지.
voov11 | 2024.02.24 | 추천 0 | 조회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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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자본론』 2/18 공지, 2/4 후기
bomi | 2024.02.15 | 추천 0 | 조회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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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2월 4일 공지와 1월 28일 후기
rilkes@naver.com | 2024.02.03 | 추천 0 | 조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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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1월28일 공지와 1월21일 후기
lema | 2024.01.27 | 추천 0 | 조회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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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1/21 공지, 1/14 후기
bomi | 2024.01.19 | 추천 0 | 조회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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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1월 14일 공지 및 1월 7일 세미나 후기
rilkes@naver.com | 2024.01.08 | 추천 0 | 조회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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