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151쪽(5줄)~161쪽 발제

작성자
youn
작성일
2019-10-13 07:45
조회
406
다지원 들뢰즈와의 마주침 발제/ 2019년 10월 13일/ 발제자: YOUN
텍스트: 질 들뢰즈,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민음사 차이와 반복 151쪽(5줄)~161쪽 발제
참고 문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질 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
스피노자의 철학/질 들뢰즈 지음/박기순 옮김/민음사

환영(simulacre)의 탄생

물론 의심의 여지없이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차별적인 분유 속에 함축되어 있는 모든 종류의 정도와 모든 종류의 계급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환영과 환상만을 지닌 소유자, 즉 그 자체가 환영이고 환상인 자에게 이를 때까지 정도의 격하를 무한히 따라가는 그런 삼차적인 것속에서의 소유자, 사차적인 것 속에서의 소유자....등은 없는 걸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정치가”는 다음과 같이 세분화된 격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정치가”는 참된 정치가 또는 근거 있는 주장자를 제시한다. 다음으로 “정치가”는 부모, 보조자, 노예 더 나아가 환영과 위조물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격하를 세분화해간다. 그리고 이때 마지막에 해당하는 환영과 위조물에게는 다음과 같은 저주가 내려진다. 환영과 위조물은 거짓된 주장자의 그릇된 힘을 구현하나니.......(중략).........즉 환영에 대한 연구 덕분에, 환영의 구렁에 관심을 집중한 덕분에 플라톤은 순간적인 번쩍임 속에서 환영이란 단순하게 거짓된 사본이 아니라 오히려 사본...과 모델의 개념 자체를 의문시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소피스트에 대한 최종 정의는 소피스트 자신을 짧은 논쟁을 통해 은밀하게 활동하는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소크라테스 자신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시각에로 우리를 이끌고 만다. 그렇다면 과연 플라톤은 여기에 이르기까지 아이러니를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리고 이점과 관련하여 혹시 플라톤 자신이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데 있어서 최초로 그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 30쪽~31쪽에서 인용

“앎” 이란?

한편 아마도 가장 신비스러운 성격이 될 환영의 마지막 성격은 환영에 대한 파악이 갖는 양태와 관련된다. 우리는 먼저 모델 또는 이데아에 대한 파악이란 과연 무엇인지 요구 할 수 있다.이에 대한 답변은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오로지 일차적인 것 속에서 소유를 하는 자만이 바로 그 일차적인 것을 통해서 참다운 앎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차적인 것 속에서 소유를 하는)사본과 도상은 (참다운 앎이 아닌) 단지 “올바른 견해”만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본은 그 자신이 이데아와의 유사성을 내화하는 한에 있어서, 그리하여 그의 주장이 근거 있는 주장인 한에 있어서 그 자체로 (참다운) 앎을 분유한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서 이처럼 보다 심오한 유사함에 의해 보증을 받는 그런 단순 유사성에 대한 파악을 올바른 견해라고 불러보자. 그렇다면 이제 환영에게는, 환영이 지니는 내적인 다름과 거짓된 유사성에게는 무엇이 남게 되는가? 그 답변은 한마디로 환영에게는 결코 앎이나 올바른 견해......등이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 35쪽에서 인용

플라톤주의를 뒤집다.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이제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다는 것은 도상 또는 사본에 맞서서 환영의 권리. 환상의 권리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니체의) “우상들의 황혼”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다는 것은 본질과 외양, 모델과 이미지라는 플라톤적 구분의 형세에 대하여 단순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종류의 이미지에 맞서서 다른 종류의 이미지가 갖는 권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적인 것과 그의 사본을 모델과 그의 재생산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역능이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래적인 것이란 동일자, 즉 플라톤이 오로지 정의만이 정의롭고, 용기만이 용감하며, 경건만이 경건하다고 말할때의 바로 그 동일자를 말한다.-따라서 그것은 일차적인 것 속에서 소유하는 자, 즉 근거에 대한 추상적인 규정을 말한다. 그리고 플라톤적 사본이란 유사자, 즉 동일자를 분유하거나 또는 이차적인 것 속에서 받아들이는 주장자를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에서 있어서는 본래적인 것의 순수한 동일성에 전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유사함이 대응하며, 사본의 순수한 유사성에 모방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유사함이 대응한다. 그러나 이제 환영이 본래적인 것과 사본 모두를 허물어뜨린다. 왜냐하면 환영에 내화된 발산하는 두 계열중에서 그 어떤 계열도 본래적인 것으로서 지정될수 없으며,그 어떤 계열도 사본인 것으로서 지정될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 47쪽~48쪽에서 인용

따라서 철학이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숲 속이나 오솔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속에서, 도시의 길에서, 그리고 도시와 그 길에 있는 보다 인위적으로 틀에 박힌것속에서이다. 이렇게 해서 반시대적인 것은 가장 먼 과거와 관련해서는 플라톤주의를 뒤집음 속에서 성립되고, 현재와 관련해서는(인위적으로 틀에 박힌 것에 맞서는) 이러한 비판적인 현대성의 지잠으로 고려된 환영속에서 성립되며, 미래와 관련해서는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영원회귀속에서 성립된다. 인위적으로 틀에 박힌것과 환영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서로 대립한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틀에 박힌 것은 언제나 사본의 사본이며, 따라서 그것은 환영 속에서 자기의 본성을 바꾸고 스스로 뒤집어지기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져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틀에 박힌 것과 환영은 현대성의 한복판에서, 현대성이 자기의 모든일을 처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 대립한다. 그리고 이때 이 둘의 대립은 마치 파괴의 두 양태의 대립과도 같다. 왜냐하면 환영은 현대적인 삶속에서의 파괴자이지만, 우리가 행한 현대적인 파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통해 작용하는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 52쪽~53쪽에서 인용

삶이란?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검소,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 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suffisamment puissante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 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besoin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더 이상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해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검소,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 Grand Vivant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질 들뢰즈 지음/박기순 옮김/민음사 9~10쪽에서 인용

스피노자의 전기를 쓴 콜레루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거미들의 싸움을 좋아했다고 한다.<그는 거미들을 찾아 그것들을 함께 싸우게 하거나, 파리를 잡아 거미줄에 던져 놓은 다음 즐거운 듯 그 싸움을 바라보곤 하였다.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우리에게 적어도 죽음이라는 환원 불가능한 외재성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를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 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죽음은 자연 존재들의 질서에서 일어나는 나쁜 만남과 같은 것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내적인 죽음, 노예-폭군의 이러한 보편적인 사디즘-마조키즘을 아직 창조하지 않았다.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하게 될 비난, 즉 부정적인 것과 그것의 능력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스피노자의 영예이고 무구함이며, 그의 고유한 발견이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좀먹은 세계속에서, 스피노자는 죽음, 인간들의 살인 욕구, 선악의 규범들, 정의와 부정의의 규범들을 의문에 부칠 만큼 삶과 삶의 능력을 확신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모든 유령들을 거부할 만큼의 삶에 대한 확신이다. 파문, 전쟁, 전제, 반동, 마치 노예 상태가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들, 파문, 전쟁, 전제, 반동, 이 모든 것들은 부정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았다.
스피노자의 철학/질 들뢰즈 지음/박기순 옮김/민음사 24~25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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