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후기] 10/1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두 번째 시간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10-17 04:33
조회
51
10월 18일(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함께 읽을 범위는, 민음사 판본으로 98~198 입니다.
- 인상적인 부분,
- 공감 가는 부분,
- 그냥 좋아서 낭독하고 싶은 부분...
등을 미리 체크해 세미나 시간에 소개해 주시면 그를 바탕으로 함께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한 문장도 좋고, 한 단락도 좋고, 한 페이지 혹은 몇 페이지여도 좋습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2장 기호와 진실>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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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 후기>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말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프루스트가 그리는 세계는 추억의 원천들이 아니라 배움의 원료들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글을 읽으며 비포가 말한 '기호 자본주의'가 떠올랐다. 비포는 그의 책, 『노동하는 영혼』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기호 자본주의'라 말한다. 인지 노동이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노동은 곧 기호를 인식하고 조작하고 또 생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기호를 해석하고, 생산하는 능력, 즉 기호를 통해 배우는 능력을 기르는 건 우리에게 필수적인 일일 것이다. 이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무척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기호들의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기호들의 세계는 여러 개의 원들로 짜이는데 몇몇 지점들이 서로 교차하긴 하지만 각각은 특유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 세계의 기호를 해독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고 해서 동시에 모든 기호 해독에 능숙해지는 건 아니다. 하나의 기호계에 통달해서 거기에 안주하는 순간 오히려 다른 기호계에는 완전히 무지해질 수도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에 등장하는 코타르라는 인물이 좋은 예다. 코타르는 훌륭한 의사지만 의학적 징후 외에는 그 어떤 기호도 전혀 해독하지 못하는 무지한 인물이다.

「코타르 의사는 상대방에게 어떤 어조로 대답해야 할지, 또는 상대방이 농담을 하는지 진담을 하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표정에 조건부적인 임시 미소를 덧붙였는데, 모든 걸 기대하게 하는 미묘한 미소로, 상대방이 우스꽝스러운 말을 할 때는 순진한 얼간이라는 비난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 경우에 직면해서도 이 미소를 분명히 얼굴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진심으로 말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는, 그런 불확실성이 지속적으로 감돌았다. (30) 」
「그(코타르)가 모든 것에 적용한다고 믿는 비판 감각이 실은 그에게는 완전히 결여되었고, 상대편에게 은혜를 베풀고도 오히려 은혜를 받은 쪽은 자기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말을 믿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사교계의 세련됨이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그는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베르뒤랭 부인은 그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는데도, 물론 여전히 그를 섬세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마침내는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32) 」

의학계만 벗어나면 지독한 기호 난독증자가 되어버리는 의사 코타르가 작은 사교계인 베르뒤랭네 모임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동시에 너무나 익숙하기도 하다. 코타르의 모습에서 주변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하고, 또 언젠가 나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이 기호 난독증에서 발생한 것이었다니....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타나는 기호의 세계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이 네 세계가 기호들의 통일성과 다원성을 동시에 형성한다.
1) 사교계 - 공허한 기호들
2) 사랑의 그룹 - 거짓말의 기호들
3) 인상(혹은 감각적 성질)의 세계 - 물질적인 감각적 기호들
4) 예술의 세계 - 다른 모든 기호를 변형시키는 본질적인 기호들
각각의 기호를 해독함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진리에 가닿을 수 있다. "각각의 진리"라 말한 이유는 네 유형의 기호들을 해독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진리의 깊이 혹은 넓이가 모두 다르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4번째, 예술계의 기호 해독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교계의 기호가 하찮거나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들뢰즈도 지적하듯, 사교계의 기호는 공허하지만, 배움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기호들이며, 이를 거치지 않는다면 "배움은 불완전할 것이고 심지어 불가능하기조차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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