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 251-262 긴 손가락의 시를 중심으로

작성자
commons
작성일
2019-11-09 15:43
조회
53
긴 손가락의 詩 ㅡ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
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잠재적 대상들의 전치를 감당하고 현실적 대상들의 위장을 책임진다.(251)”
중심은 먼 쪽의 가까운 곳일 뿐이다. 나무의 중심은 사실, 군락을 이룬 나무들의 먼 쪽이며, 나무 가지에겐 옆 나무 보다 가까운 곳이다. 기실 숲은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 먼 쪽, 가장자리들의 가장자리들이 이어진고 포개진다. 따라서 중심에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가상이고 환상이다. 실재하는 것은 가장자리가 ‘느끼는 것’뿐이다. 만일 가상과 환상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이차적인 차이짓는 차이, 분화소의 역량이리라. 여기서 중심은 신체가 사라진 어떤 정신만을, 가장자리는 정동(감성적인 것, 감각할 수 밖에 없는 것)만을 간직한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가지 끝 자아이다. 그 자아는 시인의 손가락에서 춤추는 자율적인 율동들이다. 손가락이 건드리는 것들, 이를테면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들,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 그것들은 정신에게는 망각된 가장자리의 정동들이다. 시인은 저 오랜 망각의 흔적들을 은유와 환유로 펼친다. 스스로 전치하며 위장하는 시의 이미지는 노동 보다 유희에 가깝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기억들을 지니지 않는, 지독한 건망증 환자이다. 반면 죽음 본능은 사랑을 지니지 않는, 탙성화된 상태에 있다.(252)”
우리는 전치된 혹은 위장된 기억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이 중 어떤 기억이 선명해지고 도드라지고, 그 기억이 자체의 영양분을 찾아 스스로 충족시킬 때, 건망증이 질환이 될 때, 우리는 삶이 마치 한 자아 안에서 예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고 믿는다. 나르키소스적 나뭇가지는 곁가지가 된다. 죽음은 이젠 나무 밑둥이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은 나, 자아와 관련되는 인격적인 죽음이다.(254)” 죽음이 기억되는 전혀 새로운 사태가 펼쳐지고 삶은 ‘기억되는 죽음’에 빗대어 다시 재편된다, 시인은 이 죽음을 비웃는다. 시인은 손가락이 건드리는 것에서 시간이 피어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자아와는 무관한, 기이하게도 비인격적인 죽임이다.(254)” 나무는 여리 디 여린 멀리 있는 가지에서 시작해서. 그 기원도 모를 수많은 부러짐 속에서 자신을 뻗어 나간다. “‘나의 죽음’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아무개의 죽음’이 상존하며. 끊임없이 죽고,... 여기서는 마치 개체가 나와 자아의 인격적 형식 안에 갇히지 않는 어떤 세계, 나아가 독특한 것이 개인의 한계 안에 갇히지 않는 그런 세계들이 출현한 듯하다. .. 비종속적 다양성이 출현한 것이다.(256)” 숲의 원리가 숲을 만들지 못한다. 나뭇가지의 수많은 죽음들이 숲을 만든다.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차적일 뿐! ‘기억되는 죽음’ 혹은 죽음본능이라는 원리는 얼마나 지독한 농담인가?

“사유는 다만 생식적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는 탈성화되고, 우리에게 텅 빈 시간을 열어주는 이 역류로부터 절취된다.... 필요한 것은 사유 자체 안에서 사유하는 활동을 분만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 어떤 폭력의 효과 아래 일어나는 분만일 것이다. 그것은 리비도를 나르키소스적 자아로 역류시키는 폭력이다. 이와 병행하는 현상이지만, 이 폭력을 통해 에로스에서 타나토스가 추출되고, 모든 내용으로부터 시간이 추상되며, 그 결과 시간의 순수한 형식이 도출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세 번째 종합에 상응하는 어떤 죽음의 체험이 있는 것이다.(257~258)”
빗방울 떨어진다. 나무의 자기 보존 욕구는 오랜 갈증을 충족한다. 수화된 나무 세포 마다 살아있다는 만족감이 행복하게 반짝인다. 물기는 잎맥을 흐르고 가지들은 더 단단히 줄기에 매달린다. 모든 게 다시 안으로 안으로 줄지어 간다. 그런데 리비도의 갈증은 ‘물’이 아니었다. 안으로 충만해 질수록 물을 매개로 모든 나무가 하나처럼 굳어갈수록 갈증은 그동안의 만족을 배반하듯이 고통이 되고 중심으로 향하던 가지 끝은 더 간절히 건드리고 건드려지기를 갈망한다. 이제 시간의 형식은 새로운 타나투스를 추출한다. 더 길어지고 더 민간해지고 더 강인해진 가지가 태양아래 다시 흔들린다.
시를 쓴다. 하지만 타나투스에서 추출된 시는 차라리 시가 시인을 쓰는 것이다. 내 안의 시가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가지 끝의 무수한 정동들이 시가 되어 시인에게 들어온다. 시가 넘쳐 시인에게 닿는 곳은 어디일까? 시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은 어디인가? 나무 가지 끝의 맨 끝점은 어디인가?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을 넘어서는 자들만이 알 수 있으리라.

“영원회귀는 긍정하는 역량이다.(260)” “미래의 체계는 신적인 놀이라 불러야 한다.(261)” “무지한 자들은 무한하게 추첨을 하려면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시간이 무한치 쪼개지는 것으로 충분하다.(262)”
잎이 핀다는 것! 만일 가지의 욕망에 부정적인 것이 있다면, 가지가 피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 안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가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긍정의 근거만이 잎을 피게 한다. 또 잎이 피기 위해 시간이 전제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간은 이전 사이 이후라는, 생성하는 영원회귀만을 내용으로 담는 텅 빈 형식으로 이어져야 한다. 무한한 생성을 만들 기 위해서 무한한 공간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 무한한 생성이 삶의 유한성을 받쳐주면 충분하다.
시가 탄생한다는 것! 논평이나 평가로 시가 생성되는 게 아니다. 무수한 정동들이 폭풍우치고 모든 안정적인 것들이 가차 없이 무너질 때, 때로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줘야 할 때, 시인의 손가락은 마치 나무 가지처럼 미세한 충동으로 떤다. 가장 긍정적인 순간, 시는 자신을 주장한다. 삶이 의미가 있다면 이 때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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