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_발제] p.242-251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19-11-09 18:45
조회
673
<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귀결들 : 무의식은 계열적이고 미분적이며 물음을 던진다>

무의식의 현상들은 대립이나 갈등과 같이 지나치게 단순한 형식을 통해서는 포착될 수 없다.
-갈등들은 훨씬 더 미묘한 차이의 메커니즘들(전치와 위장들)의 결과물이다.
-대립관계들은, 보다 심층적인 심급을 표현하는 미분적 요소들로부터 시작된다.
-부정성 일반은 문제와 물음들로 구성된 심급에 비해 이차적임을 보았다.

잠재적 대상을 통해 욕망과 욕구 사이의 원리적 차이가 확연해지는 순간, 욕망은 부정의 역량으로도, 대립의 요소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욕망은 오히려 물음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어떤 탐색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욕구와 만족의 장과는 다른 장에서 전개되는 힘이다.


있다/없다(부정적인 것의 비-존재)
- - - - - -
물음의 비-존재


물음-문제들, 이는 모든 가면들 배후의 어떤 가면, 모든 장소들 배후의 어떤 자리바꿈 덕분이다. (...) 문제들은 영원한 위장과 관련되고, 물음들은 영원한 전치와 관련된다.

즉 사이비pseudos는 여기서 참됨의 파토스가 되었다. 물음들의 역량은 언제나 대답들과는 다른 곳에서 오고, 결코 해결되지 않는 어떤 자유로운 바탕을 향유한다.

무의식은 제한과는 무관하고 대립과도 무관하다. -무의식은 전락의 무의식도 모순의 무의식도 아니다. 무의식은 물음이나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고, 이 물음이나 문제들은 해답-대답들과는 본성상의 차이를 지닌다. 즉 무의식은 문제틀의 (비)-존재와 관계한다. (?-존재)

“무의식은 ‘아니요’를 모른다.”
부분 대상들은 미세 지각들의 요소들이다. 무의식은 미분적이고 어떤 미세 지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 무의식과 의식의 본성 상의 차이 → 무의식이 관계하는 문제나 물음들은 커다란 대립이나 그로부터 의식이 도출하는 총체적 효과들로 환원될 수 없다. (라이프니츠와 그 방향이 같음.)


쾌락원칙의 넘어서 - 두번째 요소 발견

첫번째 수동적 종합, 하비투스의 종합은 살아 있는 현재의 재개된 양식에 의존하여 반복을 끈으로 제시했다. 이 첫 번째 종합은 상호 보충적인 두 방향에서 쾌락원칙의 정초를 보장했다. 왜냐하면 그 종합으로부터 쾌락이 일반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어 이제 이드 안에서 심리적 삶이 종속되는 최종 심급의 자리에 오른다는 결과가 뒤따르고, 또 동시에 각각의 수동적 자아가 특수한 환각적 만족감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결과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무의식 자체 안에서 성립하는 두 번째 시간의 종합 : 에로스-므네모시네의 종합> 반면 두 번째 종합은 에로스-므네모시네의 종합이다. 이 종합은 반복을 위장과 전치로 설정하고, 쾌락원칙의 근거로서 기능한다.

*쾌락원칙이 <어떤 사용을 조건으로>, <어떤 제한과 심화 과정들을 대가로> 어떻게 자신의 관할 영역에 적용되는가?
-하나는 현실 일반을 지배하는 법칙이 서 있는 방향이다. 이 방향에서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은 자신을 넘어서서 능동적 종합과 능동적 자아를 향해 나아간다.
-반면 다른 한 반향에서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은 스스로 심화되는 가운데 두 번째 종합에 이른다. 이 두 번째 종합을 통해 특수한 나르키소스적 만족감은 강화되는가 하면 또한 잠재적 대상들의 응시와 관계를 맺게 된다.

묶인 흥분으로만 정의되었던 충동은,
현실의 능동적 노선을 따를 때는 자기보존 충동으로 나타나고 새롭게 획득된 수동적 깊이 안에서는 성적충동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이 현재의 종합이라면, 두 번째 수동적 종합은 과거의 종합이다.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이 반복을 이용하여 그로부터 어떤 차이를 훔쳐낸다면, 두 번째 수동적 종합은 반복의 품 안에서 차이를 포괄한다. 사실 차이의 두 가지 형태, 곧 이동과 가장복, 전치와 위장은 반복 자체의 요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전치를 통해 서는 잠재적 대상이 상징적 변용을 겪고, 위장을 통해서는 -잠재적 대상이 합체되어 있는- 현실적 대상들이 상상적 변용을 겪는다. (...) 실은 에로스가 지닌 반복의 힘은 차이가 지닌 어떤 역량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다.

하비투스에 의한 첫 번째 수동적 종합에 비추어 보면, 현실적인 것(혹은 현실 안에서 지나가는 현재들)의 계열과 잠재적인 것(혹은 모든 현재와 본성상 다른 어떤 과거)의 계열은 서로 발산하는 두 원환을 그리고 있다. (...) 그러나 잠재적 계열의 내재적 한계이기도 하고 두 번째 종합의 원리이기도 한 ‘대상=x’에 비추어 보면, 이제 어떤 공존하는 계열들을 형성하고 원환들이나 심지어 하나의 같은 원환에 속하는 원호들을 형성하는 것은, 매 순간 계속 이어지는 현실적 현재들이다. 이 두 준거점이 혼동을 겪고, 그래서 순수 과거가 어떤 사라진 현재의 상태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여기서 사라진 현재의 상태는 신화적일 수 있지만, 순수 과거는 자신이 폭로한다고 간주되던 가상-근원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이 있다는 착각, 기원 안에는 동일성이 있고 파생적인 것 안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착각으로서의 가상-을 재구성하고 되살리는 가운데 그처럼 사라진 현재의 상태로 전락한다.

게다가 에로스의 삶은 순환 주기로서, 혹은 순환주기의 요소로서 펼쳐진다. 이 요소에 대립하는 또 다른 요소는 기억의 바탕에 있는 타나토스일 수 밖에 없고, 이 두 요소는 사랑과 증오, 구축과 파괴, 인력과 척력처럼 조합된다. 근거 또한 여전히 똑같은 모호함 속에 잠겨 있다.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과하는 원환 안에서 표상되기 때문이고, 자신이 원리적으로 규정하는 표상의 회로 안에 다시 요소의 자격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종합 혹은 세 번째의 ‘넘어서’ : 나르키소스적 자아, 죽음본능, 시간의 텅 빈 형식> (p. 249-)
잠재적 대상의 본질적 특성은 잃어버린 대상이라는 데 있다.
현실적 대상의 본질적 특성은 변장한 대상이라는 데 있다.

나르시시즘의 강력한 동기들인 이 두 가지 대상은, 리비도가 자아로 회귀하거나 역류할 때, 그래서 수동적 자아가 전적으로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빠질 때, 자아는 두 노선 사이의 차이를 내면화하고 있으며 또 자기 자신을 한 노선 안에서는 영원히 전치된 것으로, 다른 한 노선 안에서는 영원히 위장된 것으로 경험한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상처와 분리될 수 없을 분더러 위장과 전치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 → 자아는 다른 가면들을 가리는 가면이고 다른 가장복들 밑의 가장복이다.

두 번째 종합의 선행 단계와 대비되는 이 수준에서 어떤 재조직화가 산출되는데, 이 재조직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수동적 자아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순간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능동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능동성은 오로지 변용으로서만, 심지어 양태변화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양태변화이고, 이런 체험 과정에서 자아의 배후에는 다시 자신에게 ‘타자’로 다가오는 어떤 나je가 있다. 능동적이지만 또한 균열된 이 나는 초자아의 기저일 뿐 아니라 나르키소스적 자아의 상관항이기도 하다.

수동적이고 상처받은 이 자아
“유산된 코디토”, 폴 리쾨르
애벌레-주체

나의 균열은 단지 시간에서 비롯될 뿐이다. 그 균열은 자신의 내용들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텅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에 의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시간 속에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전혀 시간적인 내용을 구성하지 못한다. 나르키소스적 리비도를 통해, 자아로 향하는 리비도의 역류를 통해 모든 내용이 사상되는 것이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차라리 텅 빈 시간의 형식에 상응하되 이 형식을 채우지 못하는 현상이며, 이 형식 일반의 공간적 현상이다.

나 안에서 시간의 형식은 시간의 순서, 집합, 계열을 규정했다.
*시간의 순서 : 이전-사이-이후, 정태적이고 형식적인 순서는 시간 안에서 나르키소스적 자아의 분할, 혹은-자아에 의한-응시의 조건들을 나타낸다.
*시간의 집합은 가공할 행위의 이미지 안에서 모이게 된다. 이때 이 행위는 초자아에 의해 현시되는 동시에 금지되고 또한 예고되는 행위, 즉 행위=x이다.
*시간의 계열을 통해 지칭되는 것은 분할된 나르키소스적 자아와 시간의 총체적 집합 사이 혹은 그 자아와 행위의 이미지 사이에서 성립하는 대결 구도이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먼저 ‘이전’의 양태나 결핍의 양태를 통해, 곧 이드의 양태를 통해 한 번 반복한다. (이 행위는 자아에게 너무 벅차다.) 하지만 두 번째에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이상적 자아에 고유한 양태, 어떤 무한한 동등하게-되기의 양태를 통해 반복한다. 그리고 세번째에는 초자아의 예고를 실현하는 ‘이후’의 양태를 통해 반복한다. (이드와 자아, 조건과 행위자는 무화될 것이다!) 사실 실천적 법칙 자체는 이 텅빈 시간의 형식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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