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0 18:15
Every Woman Is a Working Woman
Silvia Federici interviewed by Jill Richards.



In 1972 feminists from Italy, England, and the United States convened in Padova, Italy, for a two-day conference.
1972년 이탈리아 파도바시에서 열린 이틀 간의 컨퍼런스에 이탈리아 영국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모여들었다.
Associated with the extra-parliamentary left, anti-colonial struggles, and alternatives to the communist party, these activists composed a declaration for action, the “Statement of the International Feminist Collective.”
원외 좌파, 반식민주의 투쟁, 그리고 공산당 대안활동 영역에서 활약하던 그들은 행동을 위한 <국제 페미니스트 컬렉티브 선언>(Statement of the International Feminist Collective)을 작성하였다.
The statement rejects a separation between unwaged work in the home and waged work in the factory, pronouncing housework as a critical terrain in the class struggle against capitalism.
이 선언서는 가정 내의 무급노동(unwaged work)과 공장에서의 임금노동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에서 하나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천명하였다.
Silvia Federici, an Italian expat living in New York, attended the conference and afterward returned to New York to found the New York Wages for Housework Committee.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 뉴욕에서 활동하는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 회의에 참석한 후 뉴욕으로 돌아가 <뉴욕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위원회>(New York Wages for Housework Committee)를 창설했다.
In the following years, Wages for Housework committees were launched in a number of U.S. cities. In each case, these groups organized autonomously, apart from waged male workers.
이를 시작으로 여러 해에 걸쳐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그룹들은 남성 임금노동자들과는 거리를 두고 각 도시에서 자율적으로 조직되었다.

As “Theses on Wages for Housework” (1974) put it, “Autonomy from men is Autonomy from capital that uses men’s power to discipline us.”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고찰」(Theses on Wages for Housework, 1974)에 따르면, “남성으로부터의 자율은, 남성의 권력을 이용해 우리를 길들이는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이다.”

In New York, the Wages for Housework Committee consisted of no more than twenty women, who maintained close ties with the Italian Triveneto Committee and the Power of Women Collective in London.
단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뉴욕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위원회>는 <이탈리아 트리베네토 위원회>(the Italian Triveneto Committee)와 런던의 <여성의 힘 컬렉티브>(the Power of Women Collective)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As Federici remembers it, there was high turnover during early years, as members discussed the paradoxical nature of the demand for a wage: was this compensation for housework, and, if so, a mere reformism that further incorporated women’s labor into the capitalist system—or was the demand for a wage a subversion of housework, shifting women’s social roles and identities?
초기 몇 년간은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 요구의 역설적인 성격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며 구성원의 드나듦이 잦았다고 페데리치는 회고한다. 즉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 가사노동에 대한 보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여성의 노동을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더욱 편입시키는 한낱 개량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요구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가사노동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것인가?
These were central questions in the domestic labor debates of the 1960s to the 1980s.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러한 질문들이 가사노동 논의의 주를 이루었다.
Though Marxist and socialist feminists had long theorized about domestic labor, these new debates focused more specifically on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housework in the wider arc of capitalist development.
맑스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오랫동안 가사노동을 이론화 시켜왔지만 이 새로운 논의들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좀 더 큰 그림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의 정치경제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In this framework, social reproduction marks the unwaged labor of cleaning, cooking, raising children, but also the expectations of feminized care, comfort, and sex that make men’s waged work in the factory possible.
이러한 논의 틀에서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것은 청소, 요리, 육아가 무급‘노동’일 뿐만 아니라 남성의 공장 임금노동을 가능케 하는 여성의 돌봄, 위로, 섹스에 대한 기대 또한 함의하는 것이었다.
For more than four decades now, Federici’s scholarship and activism have been central to this work. Her writing offers a foundational account of the demand for the wage as a revolutionary act.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페데리치의 연구와 활동은 이 방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녀는 저술을 통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요구를 혁명적인 행위로 위치시키기 위한 작업에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Her influential pamphlet, Wages Against Housework (1975), opens with a provocative rebuttal: “They say it is love. We say it is unwaged work.”
그녀의 영향력 있는 소책자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Wages Against Housework, 1975)은 도발적인 반박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임금 없는 노동이라고 말한다.”#
In this document and others, Federici argues that demand for a wage is a critical political nexus for organizing women around a shared condition of alienated labor.
이 소책자뿐만 아니라 다른 저작에서도 페데리치는 임금에 대한 요구가 소외된 노동이라는 공통의 조건을 중심으로 여성을 조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정치적 연결고리라고 주장한다.
The demand for the wage is impossible for capitalism to meet, and that is the point; success would entail a wholescale reconfiguration of the distribution of social wealth.
자본주의 시스템은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 요구를 맞춰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운동이 운동의 성공은 사회적 부의 분배에 전면적인 재구성을 수반할 것이다.
Wages Against Housework has been recently reissued by AK Press as part of the collection Wages for Housework: The New York Committee 1972–1977: History, Theory, Documents, edited by Federici and Arlen Austin.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은 최근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 뉴욕 위원회 1972~1977 ― 역사, 이론, 자료』(페데리치와 앨런 오스틴 엮음, Wages for Housework : The New York Committee 1972–1977: History, Theory, Documents)라는 선집에 수록되어 AK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This collection includes a number of previously unpublished or difficult to locate pamphlets, speeches, newsletters, photographs, songs, and media coverage.
이 선집은 이전에 출판되지 않았거나 확보하기 어려웠던 팸플릿, 연설문, 뉴스레터, 사진, 노래, 그리고 언론보도들을 포함한다.
Although the collection focuses on New York, it also includes materials from Los Angeles, Iceland, Italy, Germany, and London. The texts often reject the utopian promise that new technologies will reduce the time spent on housework, freeing up time for other activities.
이 선집이 뉴욕을 기반으로 하긴 하지만 로스앤젤리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독일, 런던의 자료들도 포함한다. 이 텍스트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가사노동에 할애되는 시간을 줄여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준다는 유토피아적 기대가 종종 어긋나는 모습을 담고 있다.
As Federici and Nicole Cox argue in Counter-planning from the Kitchen (1975), the enhanced productivity enabled by new technologies does not necessarily change the isolated nature of housework or the normative family forms produced by it.
페데리치와 니콜 콕스(Nicole Cox)는 「부엌으로부터의 대항계획」(Counter-planning from the Kitchen, 1975)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한 생산성 증대가 가사노동의 고립된 성격이나 가사노동이 생산하는 규범적(normative) 가족 형태를 필연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Rather than focus on the innovations that make housework look different, the following conversation considers technologies and techniques of struggle developed through feminist organizing around reproductive labor.
다음의 대화는 기술 혁신에 초점을 맞춰 가사 노동을 포장하기보다는 재생산 노동을 둘러싸고 진행된 페미니스트 조직화 과정에서 연마된 투쟁의 테크놀로지(technologies)와 기법(techniques)을 다룬다.
----------- 문주현 님 -----------

Jill Richards: Why did your collective decide to organize separate from other activist groups that were doing related work around labor justice?
질 리처즈 : 선생님의 콜렉티브를 노동 정의 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던 다른 활동가 단체(groups)와 별도로 조직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Silvia Federici: The women’s movement as a whole was autonomous because it was clear that our concerns were not important to the male-dominated left. By 1969 women were leaving left organizations, such as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SDS), because every time women asked for a discussion of their oppression they were booed and silenced.
실비아 페데리치 : 이 여성들의 운동이 대체로 자율적이었던 것은 남성 지배적인 좌파진영에서 우리의 의제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1969년에 이르면 여성들은 <민주사회를 염원하는 학생들>(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SDS)을 비롯한 좌파 조직들을 떠나게 되는데, 여성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억압에 관해 논의하자고 할 때마다 야유를 받고 재갈이 물렸기 때문입니다/ 함구 당했기 때문입니다. (#문주현 님 옮긴이 주#)

It was crucial for all women’s groups to organize separately from men; we would have never been able to develop an understanding of the specific forms of oppression women suffer in our society if we had remained in mixed organizations.
여성 단체들이 남성들과 별도로 조직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남녀 혼성조직에 남아있었다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특정한 억압의 형태들에 대한 사유를 전개해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By the time our collective formed in 1973, the need for feminist autonomy was well established.
우리 컬렉티브가 조직된 1973년 무렵에는 페미니스트 자율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었습니다.
By organizing autonomously, we created spaces where women could speak, hear each other, valorize one another’s experience, and realize that what we had to say was important.
자율적 조직화의 일환으로 우리는 공간을 마련하였는데 거기에서 여성들이 말하고 들어주고 서로의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고 또한 우리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여성들이 서로 말하고 들으면서 서로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줄 공간을 자율적인 조직화를 통해서 마련하였습니다.
Autonomy made it possible for us to find our own voices. I must add that no feminist organization was concerned only with the question of labor justice.
자치는 우리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어떠한 페미니스트 조직도 노동 정의 문제에만 한정해서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는 것을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JR: Can you talk about how Wages for Housework found its way to a place of deep interracial engagement, long before intersectionality was something people talked about, and at a time when women’s activism was mostly divided along racial lines?
JR: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은 사람들이 교차성을 이야기하기 오래전부터, 그리고 여성 운동이 대개 인종에 따라 나뉘어져 있던 시대에, 여러 인종이 함께 참여하는 장소로 나아갈 방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나요?
SF: The politics of Wages for Housework was shaped by women who had an understanding of capitalism, imperialism, and the anti-colonial struggle. Thus we could not accept that women’s liberation could be a struggle for “equality with men” or that it could be limited to equal pay for equal work.
SF: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에 대한 정치학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 투쟁을 선이해가 있는 여성들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 해방이 단지 “남성과의 평등”을 위한 투쟁이나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제한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We saw that in the same way as the racialization of black men and women had served to justify slavery, so had gender-based discrimination served to exploit women as unpaid workers in the home.
인종차별을 이용해 흑인에 대한 노예제를 정당화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차별을 이용해 여성을 가정 내 무급 노동자로서 착취해왔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This is why we supported the struggle of welfare mothers, which was led by black women—not because black women were the majority of women on welfare, which was not the case, but because black women were the most ready to struggle for their rights.
그래서 우리는 흑인 여성들이 주도하는 ‘생활보조를 받는 어머니들’(welfare mother)의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이는 생활보조를 받는 여성 대다수가 흑인 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흑인 여성들이 가장 강력하게 자기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They were the ones who were out in the streets saying: Welfare is not charity. Every woman is a working woman.
바로 이들이 거리로 나와서 “복지는 자선이 아니다. 모든 여성은 노동을 하고 있다.”라고 외치는 여성들이었습니다.
They were saying, like us, that raising a child is socially necessary work. They were saying, Don’t tell us that we are parasites. Don’t tell us that we are dependent on the state. When the state needs soldiers, it turns to our children. When it needs people for its factories, it turns to our children.
우리와 마찬가지로 흑인 여성들은 자녀 양육이 사회적 필요노동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기생충이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가 국가에 의존한다고 말하지 말라. 국가가 군인을 필요로 할 때 국가가 공장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할 때, 바로 우리의 자녀들을 데려간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So they understood that Wages for Housework would give women more power: in the short term, by having more money, by having more control over their lives, by not being forced to depend on a man or depend on whatever job came along because they would be so desperate for some money of their own;
그들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의 성공이 여성들에게 더 많은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금전적 여유를 바탕으로 그들 자신의 삶에 전보다 많은 통제력을 갖게 되어 자기 수중에 약간의 돈이라도 가지는 것이 간절해서 남성에 의존하거나 닥치는 대로 일하지 않아도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and in the long term, by refusing to continue to give the capitalist class an immense amount of unpaid labor, as generations of women have done. And refusing to continue to ignore that the home is a sort of factory, and that domestic work is what makes every other form of work possible, as it produces the workers.
장기적으로는, 여성들은 대대로 자본가들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무급 노동을 끊임없이 제공해 왔는데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정은 일종의 공장이고 즉 가사노동은 노동자를 생산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형태의 노동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더는 무시하기를 거부하는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This was never meant to be a prescription for women not to work outside the home. It meant rather that when we did leave the home, we would be able to do that with more power and not out of desperation, not because we would have to accept any job that came along, just so we could have some economic autonomy.
이것은 여성들에게 집 밖에 나가서 일하지 말라는 처방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갈 때에, 너무나 절박해서 즉 단지 조금이라도 경제적 독립성을 가지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힘을 가지고 집을 나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김예나 님 -----------

JR: Can you comment on the wider relationship between local and international feminist movements, especially in terms of labor organizing?
JR: 노동 조직화와 관련하여 지역적 페미니스트 운동과 국제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의 거시적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SF: Capital is international, so activism against capitalism must also be international. This was something we understood when we formed the International Feminist Collective in Padova in the summer of 1972.
SF: 자본은 국제적입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 역시 반드시 국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1972년 여름 파도바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컬렉티브>를 우리가 결성했을 때 이미 공유된 생각이었습니다.
Organizing internationally allowed us to develop a stronger critique of capitalism than we could gain from a purely national perspective. On a day-to-day basis, it meant that our organization focused on what we could do in New York and the United States more broadly, but that we also tried regularly to have international meetings where we could exchange documents and analysis, so that we would have a broader view of the struggles we all shared.
국제적인 조직화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국가에 국한된 관점이 가능하게 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자본주의 비판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우리 조직은 뉴욕에서 그리고 좀 더 넓게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문서와 분석 자료를 교환할 수 있는 국제적인 회의를 정기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함께하고 있는 투쟁에 대한 좀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Today, as well, we see the need for international organizing, as is happening around the issue of violence against women. Violence is not uniform; it affects some women much more profoundly than others.
요즈음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도 국제적인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폭력은 균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폭력은 어떤 여성들에게는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Clearly violence affects women of color,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much more intensely than it does white women. Likewise does it affect women in the Global South differently than in the North.
확실히 미국 사회에서 유색인종 여성에 대한 폭력은 백인 여성에 대한 폭력보다 가혹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적 북과 지구적 남의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영향이 다릅니다.
And yet as women we all have been raised knowing that we cannot go out at night, that we have to be careful about where we go, when, how we dress because many men will feel entitled to sexually harass us. From childhood, women of my generation were prepared for the fact that violence would be an element in our lives, that men in the streets would make humiliating or threatening comments about our bodies, that fathers and husbands could beat us and it would be tolerated.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성적 희롱을 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밤에 나다니지 말고 외출 시에도 언제 나갈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입고 나갈지 조심하라고 배우면서 큽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같은 세대의 여성들은 언제라도 폭력적인 상황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즉 거리의 남성들이 우리의 신체를 조롱하거나 겁주는 말들을 하는 것, 아버지와 남편이 우리를 때렸을 때조차 참을 수밖에 없는 것에 단련되어야 했습니다.
A key turning point in feminist organizing was the International Tribunal on Crimes Against Women that was held in Brussels in March 1976. Organized by feminists, the tribunal spoke to all forms of violence, not only individual or domestic violence, but also violence related to war and institutional policies.
페미니스트 운동의 일대 전환점은 1976년 3월 브뤼셀에서 열린 <여성에 대한 범죄 국제 인민 재판소>였습니다. 이 행사를 조직한 페미니스트들은 당시 개인이나 가정 내 폭력뿐만 아니라 전쟁과 제도 정책과 관련된 폭력 등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해 선언했습니다.

One of the limits of th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however, was that it focused mainly on demanding more severe penalties for the abusers, and often collaborated with the police. This was a mistake. As black women’s organizations have made clear, more severe penalties end up criminalizing the men of already-victimized communities. Today the call—mostly promoted by black feminists—is for restorative justice and community accountability.
그러나 여성 폭력에 관한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 중 하나는 가해자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종종 경찰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패착이었습니다. 흑인 여성 단체들이 분명히 주장했듯이, 처벌 강화는 이미 핍박받는 지역사회의 남성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을 뿐이었습니다. 대부분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하듯 오늘날 절실한 요구는 회복적 사법과 지역사회의 책임성입니다.

Our analysis of violence against women hinged on seeing housework as a form of capitalist production, and analyzing the role of the wage in constructing the whole family’s organization.
우리는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에 관해서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안에서의 하나의 생산 양식으로 보는 것과 전체 가족 제도를 구축하는 데서 임금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을 주축에 놓고 분석하였습니다.

We argued that violence is always latent in the family because, through the wage, the state delegates to the husband the power to supervise and control the work of the wife, and the power to penalize her in case she does not perform. I would describe it as a sort of indirect rule: the state mediates the control over women through the man and his wage. It is not for nothing that in the 1970s, women on welfare called the state “The Man”!
우리는 폭력이 언제나 가족구조 내에 잠재해 있으며 임금을 통해 국가가 남편에게 부인의 일을 감시하고 통제할 권한을 위임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권한은 부인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학대하는 것마저([옮긴이] 우리들의 분노를 담아 번역했음.)도 포함합니다. 나는 이를 간접적 지배의 한 형태로 간주합니다. 여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남성과 그에게 지급되는 임금을 통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1970년대에 생활보조를 받는 여성들이 정부를 지칭할 때 “포주”(The Man)이라고 부른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This explains why domestic violence has been tolerated for so long and rarely treated by the state as a crime. We began to even see rape as a form of domestic discipline.
바로 이 점이 가정폭력이 그토록 오랜 세월 드러나지 않고 국가 권력에 의해 범죄로 취급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강간조차도 가정 내 훈육의 한 가지 형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It is a way of regulating women’s time and space: You should not be out at night alone without your husband, you should be in your house with your children, doing housework, preparing for the next day, etc. If you are out, then be prepared, you know The threat of rape is an unspoken discipline on women’s time and space.
이는 여성들의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밤에 남편의 동행 없이 나돌아 다니지 말고 아이들 곁에서 집에 머무르며 집안일을 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그래도 외출한다면 강간에 노출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강간의 위협은 여성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암묵적인 훈육인 것입니다.
We must not forget, also, that violence against women is related to the abuse of children, the other major population that is subjected to violence which is not recognized as such.
또한, 우리는 폭력이라고 인지되지도 않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집단인 아동에 대한 학대가여성에 대한 폭력의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Children can be beaten up because, as with women, the state accepts that this is a necessary way of disciplining them, to prepare them for future forms of exploitation.
여성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구타당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는데, 이는 국가가 이 폭력을 아이들이 훗날 견뎌야 할 착취형태에 길들이기 위해 필요한 훈육방식으로 용인하기 때문입니다.
And violence against women is continuous with violence against all black people, women and men, though from slavery to the present this has taken much more brutal, destructive forms.
여성에 대한 폭력은 흑인 전체 즉 흑인 여성과 남성에 대한 폭력과 이어지는데, 노예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동안 그들에 대한 폭력은 더 잔인하고 파괴적인 형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Violence is always necessary to force people to accept a subordinate place in society, to impose intense forms of exploitation.
폭력은 강도 높은 착취를 부과하기 위해 사람들이 예속적 지위로 밀려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언제나 필수 요소입니다.

----------- 김정연 -----------
JR: What aspects of the Wages for Housework platform were most frequently misunderstood at the time?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플랫폼의 출범 당시 가장 많이 오해를 받았던 점들은 무엇입니까?

SF: The wider feminist movement was concerned with improving the conditions of women, but not equally concerned with transforming society away from capitalism. We felt that it was impossible to do the former without doing the latter.
광의의 페미니스트 운동은 여성이 처한 조건을 개선하는 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사회를 자본주의에서 탈피시켜 변화시키는 데는 똑같은 정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후자 없이 전자를 달성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Wages for Housework was misunderstood as saying, Give us money so we can stay home, doing the same domestic work.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은 “우리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던 대로 계속할 테니 돈을 달라.”는 주장을 한다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We actually saw wages for housework as a strategy of refusal, as a strategy giving us more options, more power to decide how to organize our lives.
실제로 우리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일종의 거부의 전략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부여하고 우리 삶을 조직하는 방법을 결정할 더 많은 힘을 주는 전략으로 봤던 것입니다.

We were accused of “institutionalizing women in the home.” But many women we met would tell us that they were already institutionalized in the home because, without any money of their own, they could not go anywhere or they could not leave their husbands even if they wanted to.
우리는 “여성을 집안에 붙박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많은 여성들은 자신만의 재력이 부재하기에 아무데도 갈 수 없고 설사 남편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자신들은 가정 내에 붙박아 놓여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Wages for Housework was not the end goal for us, as some critics supposed—which is not to say that it was not a powerful goal in itself.
일단의 비평가들이 섣불리 가정한 것과 달리 우리의 최종 목표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급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 그 자체로 강력한 목표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We believed that the struggle for Wages for Housework would be the quickest way to force the state to give us free daycare and other key support services.
우리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는 투쟁이, 무료 보육 및 기타 주요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국가에 압력을 가할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Unfortunately the women’s movement has still not been able to obtain them!
안타깝게도 여성 운동은 아직도 이것들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I think this is in part because the movement put all its energy into entering male-dominated spaces, and did not struggle to change the conditions of reproductive work, particularly in relation to domestic work, child-raising, and other forms of care work.
나는 이런 상황이 부분적으로는 여성 운동이 모든 에너지를 남성 지배적 공간으로 진입하는 데 사용했고, 가사노동, 육아 및 기타 형태의 돌봄 노동과 관련된 재생산 노동의 조건을 바꾸는 싸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Meanwhile, instead of providing more services to women, the state has actually reduced access even to the services that were available. Today it is more difficult to get eldercare and childcare than it was at the end of the 1960s.
그동안 국가는 여성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는커녕 기존에 이용할 수 있었던 서비스의 접근성을 오히려 떨어뜨렸습니다. 1960년대 말보다 오늘날 노후지원이나 양육지원을 받는 것이 더 어려운 실정입니다.
Our strategy was to struggle on the terrain in which women are strongest, over issues that affect us all, such as domestic work, sexuality, and child-raising, as well as paid labor.
유급노동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가사노동, 섹슈얼리티, 육아처럼 여성이 강력한 영역,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의 영역에서 투쟁하자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었습니다.

When the issue of paid maternity leave went to the Supreme Court in 1976, few feminists supported it because they were afraid that if they were granted these “privileges,” they would never be entitled to ask for equality.
1976년에 유급 출산 휴가 문제가 대법원에 회부되었을 때 페미니스트들 중에 이를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특권”을 부여받으면 전체적인 평등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However, when by the early 1980s masses of women were entering wage work, they found that “equality” remained elusive because they still had to carry out a lot of unpaid work at home, caring for children, relatives.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많은 여성이 임금 노동에 진입하게 되었고, 그들은 “평등”이 여전히 요원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들은 임금 노동을 수행함과 동시에 집안에서 아이들과 친척들을 돌보는 막대한 양의 무급노동을 여전히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And then they had to fight their battles separately, each in her own workplace, and at a time when the whole organization of work was being turned upside down due to globalization.
전지구적 글로벌화로 인한 노동의 전체 조직화가 대 격변을 겪는 시대에 그녀들은 각자의 직장에서 각개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There was the dismantling of the industrial complex in the United States, with jobs going abroad, with the state cutting services—so women were entering the work force at the moment in which the roof of the factory was falling down.
미국에서는 그 때 일자리들이 해외로 이전되고 국가가 [사회복지]서비스들을 삭감하면서 산업복합체 체제에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은 공장의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 노동력으로 진입한 것이었습니다.

JR: In what ways was your activism aided or hindered by the technology of the day?
당대의 테크놀로지가 선생님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었습니까?
SF: It is hard to tell. But I don’t think that the lack of computers and the Internet was a problem.
그것을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어서 문제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It meant we spent more time talking to women in the street, in laundromats, and other places where women would gather.
그 말은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길거리, 세탁소 등 여성들이 모이는 곳에서 이야기하면서 보냈다는 뜻입니다.
I think that was very important, the face-to-face encounters; it helped establish better communication than is made available by encounters online.
저는 이러한 면대면의 만남이 매우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온라인 만남에서 가능했던 것 보다 더 나은 소통을 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Generally I think that the Internet consumes a lot of our time but not necessarily in more politically productive ways.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터넷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만 반드시 그것이 정치적으로 생산적인 방식인 것은 아닙니다.
We are submerged by more information than we can handle, have constant requests that we cannot respond to or that force us to become very superficial in our responses.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고, 각종 요청들이 끊이지 않아서 일일이 응답하기가 힘들거나 피상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In addition, I still have stacks of letters I exchanged with women in England, Italy, and Canada, and some are like articles in the ways they analyze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se localities—a lot of thought went into these letters. There is nothing like that today.
덧붙이자면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의 여성들과 주고받은 서신 뭉치들을 나는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몇 몇은 각 지역의 정치 상황을 논문처럼 분석하는 글들도 있습니다. 심사숙고해서 쓴 서신들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That said, I do not doubt that the Internet and computers are also opening up new possibilities.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과 컴퓨터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는 점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전체 0

전체 99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회원님들께 요청드립니다.
다중지성의정원 | 2019.11.03 | 추천 0 | 조회 294
다중지성의정원 2019.11.03 0 294
[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ludante | 2019.02.10 | 추천 0 | 조회 659
ludante 2019.02.10 0 659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ludante | 2019.01.27 | 추천 0 | 조회 711
ludante 2019.01.27 0 711
비밀글 <어셈블리> 세미나 참가자 명단 - 2019년 1월
ludante | 2018.07.05 | 추천 0 | 조회 11
ludante 2018.07.05 0 11
3장 발제
july123 | 2020.03.21 | 추천 0 | 조회 70
july123 2020.03.21 0 70
[공지] 1월 18일 7시 모임 공지
ludante | 2020.01.12 | 추천 1 | 조회 126
ludante 2020.01.12 1 126
16쪽 분량 수정본
july123 | 2020.01.11 | 추천 0 | 조회 103
july123 2020.01.11 0 103
[공지] 1월 11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 공지
ludante | 2019.12.14 | 추천 0 | 조회 206
ludante 2019.12.14 0 206
12/14 실비아 페데리치 번역모임 정리 파일입니다.
ludante | 2019.12.14 | 추천 0 | 조회 168
ludante 2019.12.14 0 168
rakuta | 2019.12.14 | 추천 0 | 조회 127
rakuta 2019.12.14 0 127
july123 | 2019.12.14 | 추천 0 | 조회 130
july123 2019.12.14 0 130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2.14 | 추천 0 | 조회 130
evadongpachloe@gmail.com 2019.12.14 0 130
12월 14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이 열립니다.
ludante | 2019.12.06 | 추천 0 | 조회 188
ludante 2019.12.06 0 188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1.30 | 추천 0 | 조회 128
evadongpachloe@gmail.com 2019.11.30 0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