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상태 3장 발제문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20-04-28 12:04
조회
129
3장 유스티티움

3. 1 아감벤은 로마법에서 근대 ‘예외상태’의 원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 유스티티움[법의 정지]에 주목한다. 그것의 축소된 패러다임적 형식 속에서 근대의 예외상태가 풀지 못했던 아포리아들을 해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절차를 살펴보자면, 공화국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해 동란을 선언하고, 유스티티움 선포로 이어지는 법령의 기반이 있다. 여기서 유스티티움은 단순히 사법 행정의 정지를 의미하는 게 아닌, 법 자체의 효력 정지를 의미했다.

3. 2 로마법 전문가들은 로마 국법에서 예외상태론의 재구축이 발견된다는 점 때문에 당혹스러워했다. 공법에는 그런 이론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몸젠 역시 혼동을 겪었는데, 그는 예외상태가 법 바깥에 있음을 수긍하면서도 그것을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런 한편 몸젠은 자신이 한계에 부딪힌 지점에서 문제의 권한이 법-형식적 관점에서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예외상태론의 정식화를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

3. 3 1877년 아돌프 니센은 유스티티움이라는 용어를 ‘휴정 기간’, ‘공적 추도’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키케로의 사례를 들며 ‘법의 정지’야말로 유스티티움이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동시에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정식화임을 주장했다. 법을 무효화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니센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법이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공동선을 보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법에서 등을 돌리고 그보다 더 유용한 것을 찾는다. 긴급한 상황에서 원로원의 권고에 의해 정무관들이 법률의 제약으로부터 풀려나듯이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법을 제쳐놓을 수 있게 된다.

3. 4 아감벤은 유스티티움이 법질서 전체의 중단 또는 효력 정지를 의미하는 한, 그것을 독재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해석할 수 없다고 봤다. 유스티티움에서는 독재관과 관련된 정무 기구가 창출되지 않았고, 임기 중 정무관들이 ‘법률에 의해 공포됨 없이’ 무제한 향유하던 권한도, 독재적인 명령권에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법률이 효력 정지됨으로써 생겼던 것이다. 해서 몸젠과 플라우은 독재가 아니라 ‘준독재’를 사용했지만, ‘준’이라는 한정사는 애매함을 없애지 못했고 그릇된 패러다임에 따라 제도를 해석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근대의 예외상태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예외상태와 독재를 혼동함으로써 1921년의 슈미트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로시터나 프리드리히도 예외상태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특정한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었는데, 예외상태를 로마의 독재라는 권위 있는 계보 속에 위치 짓는 것은 쉽지만, 유스티티움이라는 패러다임 속에 다시 위치 짓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외상태는 독재 모델에 따른 권력의 절정 상태, 즉 법이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텅 빈 상태, 즉 법의 공백과 정지로 정의된다. 아감벤은 엄밀히 말해 히틀러, 무솔리니의 통치 역시 독재라 정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의 체제는 현행 헌법을 존속시킨 채 세워졌기 때문이다.

3. 5 유스티티움은 공적 공간의 존립 자체를 물음에 부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사적 공간의 존립 또한 마찬가지로 즉시 무효화되어 버린다. 이처럼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공법과 최고 명령권 그리고 법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역설적 합치는 하나의 본질적 문제를 사유하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드러내준다. 법의 공백에 완전히 내맡겨질 때의 인간의 실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인간의 행위 앞에 완전한 아노미적 공간이 나타났을 때 모두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듯한 형국으로 보인다.

법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인간의 행동을 입법, 집행 행위, 법 위반 행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유스티티움 기간에 행동하는 정무관이나 민간인은 하나의 법을 집행하고 있는 것도 그것을 위반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유스타티움이 계속되는 한, 특정 행동을 법률적으로는 절대 규정할 수 없으며 그것의 본질을 정의하는 일은 법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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