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공지] 5/23 『어셈블리』 77~155p

작성자
bomi
작성일
2020-05-17 00:36
조회
33
『어셈블리』 세미나 첫 시간 공지합니다.

*일시: 5월 셋째 주 토요일(30일) 저녁 7시 30분
*장소: 다중지성의 정원 세미나실 X 각자의 공부방(인터넷 화상 연결)
*공부범위:
『어셈블리』 77~155p
1. 3 루소에 반대하여 혹은 주권의 종말을 위하여
1. 4 우익운동이라는 어두운 거울
1. 5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발제:
각자 토론거리, 질문거리 등을 정리하셔서 본 세미나 게시판에 올려주시면 됩니다.
게시판 공지글 중 <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에 안내된 내용을 참고해 주세요.
http://daziwon.com/?page_id=4273&uid=3899&mod=document&pageid=1



지난 세미나 후기 >>>>>>>

어셈블리 세미나 첫 시간 후기


<근황토크>>>>>>>>>

비인간 – 객체 – 무지 – 철학 – 예술 - 벌새

비인간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생각하는 게 중요하게 된 시대인 것 같다. 기후 온난화도 마찬가지다. 이제 정말 여름이 빨리 온다. 이를 다루는 이론 중에서 그래이엄 하먼이나 라투르 등이 물개념을 통해서 이런 문제를 사고할 수 있는 틀을 남겨 놓았다. 하먼이 라투르의 책을 논평한 글도 읽고 예술과 객체라는 책도 읽고 그 주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그래이엄 하먼은 지식으로서의 철학을 거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은 지식이다. 이때 철학-지식은 인식론 중심으로 편성된 지식이론인데 하먼은 이것을 존재론으로 전환한다. 따라서 지식보다는 오히려 무지를 중시한다. 인간이 알려고 노력은 하지만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모르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사물의 말을 번역한다. 그런데 실은 번역이라고 하지만 끊임없이 오역하고 있고 또 오역할 수밖에 없다. 하먼은 이러한 현실을 철학 개념이 담으려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를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는 앎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앎에 대한 사랑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앎에 대한 노력은 무지의 표현방식이다. 즉 앎에 대한 사람은 무지함이 취하는 태도이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취하는 태도가 아니다. 무지가 앎에 대한 사랑이므로 “철학은 무지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것이 또 그러한 무지함과 상관이 있다. 객체에 사람이 접근할 방법은 지식 형태로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그 객체를 번역해내는 것이라 보고 그런 의미에서 예술 행위를 철학 중에서도 철학. 제1 철학이라고 부른다.
[객체와 예술]은 객체라는 것을 예술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를 쓴 책이다.

벌새라는 영화를 보았다. 94년도에 14세 여성이 겪은 삶에 대한 의문과 고통, 외로움이 잘 그려져 있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이 14세 여성의 딱 1년의 과정으로 표현했는데, 이게 인생전체로 펼쳐봐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새의 주인공, 그 친구가 계속 어른거린다.

벌새라는 영화 정말 재밌게 보았다. “응답하라“의 여중생 버전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남성 중심의 관점을 가진 감독들은 절대로 잡아낼 수 없는 것들을 너무 신비하게 잘 담아냈다. 영상과 표정과 대사 모두 훌륭하게 느껴졌다.


<토론>>>>>>>>>>

1) ‘어셈블리’의 번역에 대해

어셈블리 – 회집 – 아상블라주 – 네트워크 – 공통 common – 연대

책의 제목이 음역 그대로 ‘어셈블리’로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가 사전적으로는 집회로 번역된다. ‘어셈블리’를 ‘회집’으로 번역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회’라고 하면 ‘회’ 즉 ‘모임’에 악센트가 간다. 이를 ‘회집’이라고 하면 ‘집’ 즉 ‘모이다’라는 것에 악센트가 간다. 더불어 회집력, 회집체, 회집성 등의 말을 만들 수도 있다. ‘회집’은 가변적인 개념 놀이를 할 수 있는 번역어다.
최근 어셈블리라는 말이 철학에서 화두처럼 되었다. 들뢰즈의 아상블라주도 접미사가 붙어있긴 하지만 회집(어셈블리)의 불어다. 들뢰즈의 철학에서도 이 아상블라주가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도 이전에는 네트워크라는 말을 많이 썼었는데 이 네트워크도 어셈블리와 유사한 말이다. 회집(어셈블리) 중에서도 망사성을 띤 것을 네트워크로 칭할 수 있다. 라투르도 네트워크 이론을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마굴리스의 공생론도 어셈블리와 가족유사성을 같는 말이다. 커몬도 어셈블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어셈블리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 책(어셈블리)에서 공통 common이나 네트워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어셈블리를 쓴 이유는 2011년 말부터 북아프리카 유럽 북미지역을 휩쓸었던 2011년 봉기들에 대한 사유과정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그때 대부분 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또 미국 제너럴 어셈블리라는 조직화 형태가 등장했었다. 광장 집회는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스페인 쏠 광장이라거나 프랑스, 미국 같은 경우는 주코티 공원 같은 데서 집회를 했었다. 그 때문에 집회라는 것을 표상에 놓고 아상블라주, 즉 회집의 문제를 사유해 보려는 집필 시도가 바로 이 책 <어셈블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회집이라는 말이 왜 사용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모이는 현상을 표현할 때, 보통 집회라는 말을 많이 쓰고, 요즘은 그냥 ‘모임’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가 많다. 하지만 ‘모임’이라는 말은 ‘집회’나 ‘회집’에 비하면 좀 가벼운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모이는 현상은 ‘모임’이라는 말로 다 감당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연대라는 표현은 어떨까?
연대(連帶)는 이을 連 혁대 帶. 여기서 ‘帶’는 네이버 한자 사전에 따르면 ‘허리띠를 두른다.’ 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줄 하나로 여러 개를 묶을 때 ‘대’자라는 말을 쓴다. 어셈블리는 서로 다른 것들이 이어지는 건데, ‘연대’라고 하면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의 끈이 묶어버린다는 의미가 더 강해서 조금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연대’는 ‘연’이 그런 의미를 좀 완화해 주기는 한다. 연결한다는 의미가 없이 그냥 ‘대’라고 하면 사실상 파시즘 적인 표현이다. 파쇼라고 하는 것이 묶은 짚단을 한 단, 두 단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이때 ‘단’을 이태리 말로 파쇼라고 한다. 어셈블리는 하나의 목적성을 가진 회집이 아니다. 연대라고 하는 것과는 어원 자체가 좀 다른 것이다.

어셈블리는 어떤 특정 집회보다는 연결 행동 혹은 연결과정을 지칭하고 있다.

어셈블리가 우리말로 번역될 때 ‘조립’이라는 말로도 많이 번역된다. ‘어셈블리’는 공학적으로 접할 때는 ‘조립’으로 많이 번역되고 정치적으로 사용될 때는 ‘집회’로 많이 번역되는 것 같다.


2) 서문에 등장하는 실체와 주체 개념

진리 – 객관진리 – 공통진리 - 스피노자 – 헤겔 - 실체 – 주체

29쪽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사회적 존재는 전체주의적 명령의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저항과 해방의 힘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일자’는 ‘둘’로 나뉘며, 존재론은 각자 역동적이고 구축적인 상이한 관점들로 쪼개진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인식론적 분할 또한 나온다. 한편으로는 자연에 의해 지시받은, (비록 그것이 구축된 것일지라도) 영구적이고 유기적인 고정된 질서로 간주 되어야 하는 진리의 추상적 긍정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에서 구축되는 아래로부터의 진리의 탐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는 예속의 힘으로 나타나고, 후자는 주체화, 즉 자율적인 주체성 생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주체성 생산은 그러한 진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라는 사실,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는 만들고 구축하는 힘이 진리의 표지이다. 실천에서 발전되고 실행되는 주체화의 과정에서, 진리와 윤리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발생한다.“

진리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고정된 질서로서의 진리는 철학적 언어로는 객관진리다. 실천을 통해서 아래로부터 구축되는 진리의 탐구는 공통진리에 가까운 진실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근황 토크 때 이야기한 ‘무지’라는 개념과도 통하는 거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거나 탐구라거나 이런 건 다 진리라는 것이 손에 잡힐 수 있는 객관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실험과 모색 공동의 노력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므로 탐구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와 헤겔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첫 시작을 ”실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실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상정하고 그 실체에 대한 인식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이냐로 에티카를 출발시킨다. 스피노자의 출발범주는 substance이다. substance가 실체 개념이다. 그런데 일단 실체라고 하면 위에 유기적인 질서로 간주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도 이는 정태적인 것, 즉 멈춰 서 있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 자리를 잡은 어떤 근원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substance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substance를 여기서 말하는 고정된 질서로만 볼 수는 없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굉장히 역동적인 개념이다. 사실상 그 역동성을 실체(substance)가 가지고 있어서 그 실체가 conatus(자기 보존 노력)라거나 cupiditas(욕구), 비르투스 등의 역량들로 계속 substance가 움직이는 다이나믹을 스피노자는 그려나간다. 헤겔이 스피노자를 독해하는 방식도 여기서 출발한다.

헤겔의 존재론, 개념론, 본질론이 있다. 이 셋으로 구성된 논리학의 시작 부분에서 헤겔은 자인(is) 개념과 무개념 (있음/없음)을 교차시켜서 논리학을 전개해 나가는데 바로 이때 ”존재론적 ‘실체’는 ‘주체’다.“ 라고 번역한다. 이처럼 헤겔은 실체와 주체를 하나의 두 측면으로 보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책의 서문에서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고 말하는 것은, 두 필자(하트와 네그리)가 우선은 실체와 주체를 갈라내고, 실체를 고정성과 비슷한 것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실체와 주체 개념을 둘러싼 논란에서 헤겔이 실체는 주체라고 이야기할 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고정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관점이 중요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다. 책의 저자들도 이와 같은 관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이를 위해 오히려 실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 강조한 대목이라 볼 수 있다.


3) 현재 우리의 ‘진실’ 개념은 어떤가?

대안 진실 – 객관(공적)진실 – 전문가(엘리트) - 지식권력 – 푸코 - 가짜뉴스

‘가짜뉴스’, ‘대안 진실’, ‘탈진실’ 이런 것들이 우리 시대에 엄청나게 횡횡하는 상태이다. 진OO은 가짜뉴스에 객관진실을 맞세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객관진실이라고 하는 것, 즉 오브젝티브 하다는 것이 일정한 보편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기능해왔는데 이 오브젝티브가 공격을 받아서 다중이라든가 하는 제3 지식 세력, 새로운 집합 세력이 나타나면서 객관진실이 있다는 것을 깨버렸기 때문이다.

엘리트가 공적 지식 객관(objective) 지식을 담보한다. 권력을 재창출하기 위한, 권력 지식 태제다. 푸코 같은 철학자가 지식은 곧 권력이다라고 하면서 객관진실 개념을 비판했고 이런 것에 주도적인 공감 세력이 다중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세력이다.
진OO은 객관진실이 비판을 받고 취약해져 버린 것이 문제라고 바라보면서 전문가의 지적 권력 회복을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우선 가짜뉴스라는 것이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야 한다.
푸코와 데리다 등의 철학자로 대표되는 해체론이 있었다. 그들은 진실 개념을 비판하면서 기존의 객관진실 체제는 권력 체제라고 공격하고 비판했다. 그러고 나니 (새로운) 진리를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터전이 생겨버렸다. 모두가 진리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상 진리 정치라는 것도 무력해져 버린다. 어떤 면에서는 ‘진실’도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가짜뉴스인데 대안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나온다. ”우리는 다른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라고 하면서 대안 진실들이 쏟아져 나온다. 몇 가지 요소들을 결합해서 ‘진실’이라고 말하는 공간이 해체론, 포스트 모던 담론을 통해 만들어졌다. 거기다 가짜뉴스가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면서 이제 우리 세대 담론의 지배적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 버렸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이 이러므로 이제 다시 객관진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상 시간을 역행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다. 전문가의 붕괴가 가역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철학적으로도 객관성 개념이 엄청나게 공격을 받고 주체성, 구성, 사건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과정, 주체 없는 주체성 다 유사한 이야기다. 이런 유사한 개념들이 이제는 거꾸로 돌아가려 해도, 이미 나와 있는 철학적 컨셉들을 무너뜨릴 힘은 더는 나오지 않는다.


4) 남겨진 문제: 그럼 진실 개념을 포기해 버려야 하는가?

탈진실 시대 – 진실찾기 - 공통진실 – 구축 – 집합성 - 사회주의

‘탈진실 시대의 진실찾기’란 객관진실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고, 그럼에도 남아있는 진실의 가치를 찾아 나가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 앞에 common을 붙여서 ‘공통진실’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객관성보다는 집합성이 있는 어떤 것을 진실로써 인정하고 구축해 나갈때에 (커머닝)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진실이 있을 수 있고, 이런 게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다 공통진실의 기능을 해 왔다.

‘진실’이 한계가 있고 권력과 동의어로 된 측면도 있지만, 우리의 커먼센스의 차원, 우리의 윤리감이라든지 그런 식의 커먼센스라고 불리는 앎의 지평이 있다. 이것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지식화하면서 사회를 떠받쳐 온 측면이 분명히 있다. 증여 개념과 같은 것도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감되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말을 보태건, 돈을 보태건, 무언가를 보태어 감싸면서 함께 지키려는 과정이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공통진실의 구축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진실은 역사적인 한시성을 가진다. 80년대의 사회주의 같은 것도 그런 것이다. 당시에는 ‘사회주의’라고 하는 공통진실에 정말 몰입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가 공통언어로 구축되었었다. 그때는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나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모두 잘못한 것이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렇게 힘을 합친 것은 당시 공통진실의 구축과 실행과정이었다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판이 달라져 버리니까 사회주의가 왜소해지고 그 의미도 달라지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그 자체로 (공통진실의 구축과는) 완전히 별개의 과정이다.

지금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지난 이야기가 모두 허위,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공통진실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만약 지금 우주인이 찾아와서 우리가 ”아 정말 이전에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했구나“ 하고 깨달으며 생각이 크게 바뀐다고 해서 그 전에 말하는 것들이 모두 허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안 맞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공통진실’ 개념은 진/위 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사유 장치다.


5) 성폭력 사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법적 접근 – 문화적 접근 – 페미니즘 – 학술화(강단화) - 진실과 분리된 문화화 – 파시즘 – 실천적 페미니즘 – 회집체 – 학술계 – 계급제도 – 전투성 – 부정적 회집체

성폭행 사건을 바라볼 때 그것을 범죄로 바라보는 시각과 문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가장 문제는 이 둘을 가르고 어느 한쪽의 시각에만 편향되어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성폭행 사건을 범죄로만 바라보는 시각 (사법적 접근) 이 매우 강하고 문화로 바라보는 시각 (문화적 접근) 은 약하므로 성폭행 사건을 사회의 문화와 연결해 바라보고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때도 사법적 접근을 완전히 배제하고 문화적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

문화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사법적 접근이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데에는 너무 둔감하고 처벌에만 그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훨씬 이론적인 원인 진단 위에서 사회문화적 조건이나 장치를 어떻게 바꿀지를 생각해 내야 한다. 처벌강화라는 것은 그런 요소 중 하나다.

문화적 접근이 실천적 힘을 잃고 강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문화연구가 인기를 끌었고 이것이 탈진실 정치학을 선도해 나간 부분이 있었다. 문화구성주의의 한 부분이다. 문화구성주의 시각에서는 진실정치는 중요하지 않다. 강단에서 어떤 운동이나 힘을 이러한 방향으로 꾸부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로부터 분리된 어떤 페미니즘 문화를 말한다면 이는 한편에서 일시적으로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잘못 발전하면 파시즘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진실로부터 유리된 문화구성주의.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니다. 생태주의 문화 운동도 파시즘으로 충분히 변질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혐오 위에서 인구 대다수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생겨난다. 비인간을 강조하는 것이 인간혐오로 나아가고 오히려 비인간을 추앙하는 것이 될 때, 실행의 측면에서는 파시즘과 비슷한 결과를 낳게 된다. 여성들이 남성은 다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이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진실과 분리된 문화화는 위험하다. 문화로서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학술화(강단화)된 페미니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를 다루면서 페미니즘 운동을 해나가는 문제, 즉 집단행동 시위 이런 것이 아니라 언어적 능력으로 페미니즘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지금 페미니즘의 학술화 강단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기에는 이른 것 같고 오히려 실천적 페미니즘과의 연결가능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론, 연구, 문화가 어떻게 그 자체로서 실천성을 담지 하느냐가 문제이다. 지식의, 앎의 전투성 회복이 중요하다. 이는 하트가 제안한 개념이다. 이론으로써의 페미니즘이 실천적 부분과의 연결을 놓치지 않고 계속 추구해갈 수 있도록 유도해 간다면 학술적 발전은 페미니즘 운동 전체에서 기여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다 어셈블리와 연결이 된다. 어셈블리가 회집이라고 했는데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라고 하는 관점에서 회집 문제를 생각해 보면 한 페미니즘이 어떤 회집체로 되느냐를 질문해 볼 수 있다. 한 회집체는 어떤 구성 요소들의 네트워크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학술적 페미니즘은 학술계라고 불리는 한 계의 네트워크이다. 학술계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대학 제도, 학술지리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교수, 학생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엇보다 학위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학술계로 구성되는 요소들이고 또 이는 곧 한 사회의 차별제도이다. 학술계, 문단 이런 것들은 모두 계급제도이다. 여기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 돈, 시간, 훈련의 길이 등으로 가로막혀 입장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입장할 수 있는 그런 계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차별들, 억압들을 사유의 중심에 두고 행동적으로 움직이려는 것이므로 학술계와는 본질적으로 연결 지점이 없다. 학술계밖에서도 페미니즘 연구 등은 진행될 수 있다.

학술계페미니즘이 된다는 것은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사유체계와 사유성과를 가지고 대학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학술계의 연합이 그런 의미이다.

어셈블리 결합체의 의미에서 보면 학술계라는 결합체는 권력을 써포트하는 공간이지 대중을 설득하는 공간은 아니다. 부정적 방식의 회집체의 위험성을 다분히 띠는 어셈블리 네트워크로 볼 수가 있다. 따라서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체계가 전투성을 갖느냐 학술성을 갖느냐 이 경향적 차이는 무척 중요한 문제이다. 전투성 측면이 대학 내에는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척 힘든게 사실이다. 내적 경향을 가져야만 전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이번 책 <어셈블리>에서 아주 강조되었다.


6) 그 외

흑인 페미니즘 – 인종 – 계급 – 리더쉽,이니셔티브 – 기업가 정신 – entrepreneurship – 개입 정신

아우토노미아가 여성운동 소수자 운동의 연합체로써 페미니즘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넘어서 흑인 아프리카 페미니즘을 가져와서 강조했다. 흑인 페미니즘. 흑인은 인종성이다. 레이스 문제를 가져와서 페미니즘과 결합한 이유는 페미니스트의 특정한 조류들은 인종 문제나 계급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기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가 있고 그것들을 극복하려면 흑인 여성 노동자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배워와야 한다는 입장을 설정한 때문이기도 하다.

리더쉽이라고 하는 말이 이 책을 읽을 때 방해가 되는 지점이 있다. 리더쉽이라는 말을 계속 씀으로써 정당 운동의 지도력. 전위 지도부, 지도부 교체, 리더쉽 요청 등 리더쉽이란 말을 계 속 쓰는데 그때 이 책이 잘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었다. 따라서 리더쉽을 ‘이니셔티브’나 이런 말로 대체해야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술적 단위가 리더쉽을 갖는 게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밀리티아의 번역을 민병대로 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민병대는 정규군이 없는 체제에서 시민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을 민병대라 부르는 것인데 오늘날 ‘민병대’가 사용되는 맥락으로 보면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병대보다는 사병대, 사병조직으로 쓰여야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등장하는 ‘기업가 정신’이 entrepreneurship이라는 외국어를 쓰면 이해가 되지만 우리말로 ‘기업가 정신’이라고 쓰면 어원적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entrepreneurship은 create new combination 어원적으로 사이에 끼어들다의 뜻이다. 즉 기업가 정신이란 새로운 "개입력" "개입정신"을 지칭한다. ‘entre’라는 것이 중간에 끼어 들어가서 두 개를 새롭게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은 업을 기획하다 일으키다 라는 뜻인데, entrepreneurship은 이처럼 단순한 업 개념이 아닌 사이에 끼어 들어가서 매개하는 정신, 우리말로는 ‘개입’과 가장 가까운 것 같다. 번역은 기업가로 되어있다고 하더라고 개입해 들어가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기업가’라는 말을 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entrepreneurship이 영어로 처음 쓰일 때는 연극 제작을 관리하는 사람 홍보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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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셈블리 1-2장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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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5/9 『어셈블리』 처음~p.77 [+지난 세미나 후기]
bomi | 2020.04.27 | 추천 1 | 조회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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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역사비판 세미나 토론거리
ludante | 2020.04.25 | 추천 1 | 조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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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토론거리
ludante | 2020.04.11 | 추천 0 | 조회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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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4/11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9,10장을 읽습니다./세미나 후기(3/28)
bomi | 2020.03.29 | 추천 0 | 조회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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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0.3.28.(토) 7시30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7, 8장을 읽습니다. (후기도 있음)
ludante | 2020.03.14 | 추천 0 | 조회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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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5, 6장 토론거리
ludante | 2020.03.14 | 추천 0 | 조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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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연공지] 오늘(2/22)은 세미나가 열리지 않습니다.
bomi | 2020.02.22 | 추천 1 | 조회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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