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2020.06.03] 몰락의 예술들, 더 많은 미술들의 미술사 / 이수영(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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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작성일
2020-06-0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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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2020.06.03] 몰락의 예술들, 더 많은 미술들의 미술사 / 이수영(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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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시대, 예술은 조악하고 추해졌다. 이주자들, 침략자들, 야만인들이 우리 문화를 망쳤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찬란한 예술은 퇴락했다.

멸시받아 온 것, 추한 것 앞에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은 몰락의 예술을 연구했다. 몰락의 예술 앞에서 그는 오히려 ‘미술사’라는 학문을 세우고자 했다. 환쟁이의 손재주라며 낮게 취급받던 회화가 고고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 음악과 함께 ‘미(beauty)’, ‘쾌(pleasure)’와 같은 미학적 개념 아래 ‘예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정착된 것은 18세기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융복합의 미학적 개념들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민족의 그림과 조각에 선험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고 리글은 생각했다. 시대마다 민족마다 그리고 장소마다 미술은 다르다. 그는 미학의 자장에서 벗어나 ‘미술사’라는 학문을 독립시키고 싶었다. 이 독립운동을 위해 미술 고유의 법칙과 요소를 만들어야 했다. 몰락의 예술에서 발견한 ‘예술의지(kunstwollen)’라는 리글의 개념은 그가 미술사라는 학문을 세우기 위해 연구해 낸 개념 중에 가장 불확실했고 그래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었다.

시간·공간·사람,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미술 창작의 욕망, 예술 충동, 예술의지는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의지와 후기 로마의 예술의지는 다르다.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과 그의 적통 르네상스 미술을 두 정점으로 놓고 나머지 미술들을 그곳을 향한 형성기와 그곳으로부터의 쇠퇴기로 설명하는 미술사에서는 후기 로마 미술은 퇴락으로 보일 것이다.

균형 잡힌 황금비율의 몸, 절제되고 기품 있는 동작. 고대 희랍의 신들은 이 우아한 신체로 하강했다. 이 이상화 된 몸은 왕자 고타마 시타르타를 고민에 빠뜨리고 결국 출가시킨, 병들고 늙어가며 죽는 우리의 몸은 아니다. 피 흘리고, 고통에 일그러진 몸을 가진 새로운 신의 등장, 이 고난에 대한 찬미였던 그리스도교 미술 역시 암흑기였을까. 생로병사를 겪는 유기적의 것의 표상을 금지하고 기하학적 추상으로 유일신의 완전성을 표현한 이슬람의 미술 역시 적통이 아닌 방계였을까.

몰락의 미술을 연구한 이 매력 있는 미술사가의 눈에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은 오히려 언제나 회귀하여 무상한 신체적인 것, 우연적이고 불완전한 것에 대한 표현 열망을 방해하고 지연시킨 패권적 미술이었다.

예술의지는 단지 관념적인 것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술의지에 따라 인간 지각방식과 표현방법도 달라진다. 리글이 미술의 기본요소로 사용하는 ‘평면’, ‘입체’ 그리고 ‘근거리 시야’, ‘원거리 시야’라는 인간 지각방식은 각 시대의 예술의지와 맞물려 변화한다. 고대 이집트의 조각을 원거리 시야로 보게 되면 경직되어 보이지만 가까이서 촉지적으로 바라보면 무한한 생명을 관찰하게 되며 원거리 시야에서 나타나는 경직성은 사라진다. 신체적인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선언한 후기 로마 미술은 숭배의 가시적 대상을 피하고 저 멀리서 정신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원거리 시야 지각 방식이 필요했다. 이는 부조와 평면 회화로 나타났다.

예술의지가 그에 따른 기법은 물론 인간의 지각방식 자체의 변화와 연결되어 하나의 미술이 아닌 수많은 미술들의 탄생이라는 사건들을 일으킨다는 아이디어는 많은 현대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라는 기술복제시대 예술의 변화와 함께 지각작용의 변화를 설명하며 고대 희랍 이외의 다른 예술, 다른 종류의 지각을 분석한 리글의 성취를 언급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유목민 예술(야만적, 고딕적, 현대적 예술)을 ‘근거리 파악-촉지적 공간’이라는 리글의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도 흥미롭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체』에서 리글의 예술의지를 언급하며 오늘날 혁명과정에서 다중의 특이성들을 공통적 과정으로 연결해내는 ‘법의지’, 제도적이고 구성적인 의지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에 의하면 몰락과 폐허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출현을 보는 자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리글의 ‘예술의지’, 아비 바르부르크의 ‘정념정형(pathosformel)’,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잔존’.

나는 문학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을 이 계보 위에 올려 보았다. 소비에트 해체라는 몰락의 시간 폐허의 땅에게 말을 걸고 그 목소리들에게 피가 도는 맨살의 육체를 입힌 사람. 새로운 문학, 더 많은 문학이 된 거대한 익명의 웅성거림.

리글이 시작한 계보 위에 더 많은 몰락, 더 많은 예술들이 어떻게 웅성거리며 나타날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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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 | 알로이스 리글 지음 | 정유경 옮김 | 갈무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