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호] ‘존재지도학’이란 무엇인가? / 레비 R.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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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09-01 11:48
조회
207
 

‘존재지도학’이란 무엇인가?
The Idea of Onto-Cartography


『존재의 지도』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레비 R. 브라이언트

김효진 옮김 (『존재의 지도』 옮긴이)

 

저는 먼저 『존재의 지도』라는 책을 번역하여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도 마련해 준 점에 대해 갈무리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새로운 독자가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 점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리면서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 한국인들과 논의할 기회를 얻게 됨으로써 저 자신의 사유가 새롭고 흥미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존재의 지도』의 영어판이 출판된 지는 이제 6년이 지났으며, 그 책이 저술된 지는 더 오래되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제가 전해드리고 싶은 바에 관해 생각하면서 저는, 1878년에 미합중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se가 저술한 「우리의 관념을 명료하게 하는 방법」How to Make Our Ideas Clear 이라는 시론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파악에 있어서 세 번째 등급의 명료성을 달성하기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을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구상 대상이, 어쩌면 실제적 영향을 미칠 어떠한 결과를 낳으리라 생각하는지 검토하라. 그리고 이들 결과에 관한 자신의 구상이 그 대상에 관한 구상의 전부다.


제가 여전히 시카고의 로욜라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2000년 무렵에 저는 이 시론을 처음 읽었으며, 그리고 그 이후로 이 원칙, 때때로 ‘실용주의적 원칙’으로 일컬어지는 이 원칙이 정말로 제 사유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필경 퍼스가 의도한 바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에서 그럴 것이지만 말입니다. 퍼스의 원칙과 관련하여 제 마음에 매우 깊이 새겨진 것은 그가 단언한 관념 혹은 개념과 행위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철학이 왜 중요한지 혹은 철학이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는지에 관한 물음과 씨름했었는데, 지금도 종종 그런 물음과 씨름합니다. 흔히 철학적 저작은 매우 추상적이고 삶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은 무미건조하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가 두렵게도, 때때로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퍼스가 제게 가르쳐준 바는 관념 혹은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퍼스는, 우리가 자신의 관념 혹은 개념을 명료하게 하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세계 및 자신의 행위를 지각하거나 파악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그런 관념에서 어떤 실제적 결과가 비롯되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개념에 힘입어 나는 세계 혹은 우주와 관련하여 무엇을 탐색하거나 인식하게 될 것인가? 이 관념에서 어떤 실천 혹은 행위가 비롯될 것인가? 예를 들면, 망치에 관한 제 개념은 어쩌면 제가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용도일 것입니다.


퍼스는 우리가 자신의 관념을 명료하게 할 방법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도 관념을 명료하게 하는 데 관심이 있음이 확실하지만, 저는 퍼스의 원칙에서 약간 다른 교훈을 끌어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퍼스의 원칙은 주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우리의 행위가 자신이 품고 있는 관념 혹은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함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 혹은 개념이 볼 수 있게 하는 것밖에 절대 볼 수 없으며, 우리의 행위는 자신의 개념 혹은 관념만큼만 훌륭할 수 있을 따름일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자신의 관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주변 세계에서 우리가 파악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현상학적 의미에서 우리가 파악하거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관련하여 이런 사례를 살펴봅시다. 주어진 것, 즉 소여는 의식에 현시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강연문을 작성하고 있는 컴퓨터는 제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컴퓨터는 제 경험의 장 안에서 제게 현시됩니다. 이제 폴이라는 사람이 이라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합시다. “제프, 책방에 가야 해.” 대다수 사람은, 심지어 존도, 폴이 단순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하고서 더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폴은 존에게 말할 작정이었지만, 대신 제프에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폴은 마음이 산란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폴은 피곤했을 겁니다. 어쩌면 폴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을 겁니다. 이 모든 경우에, 소여, 즉 폴이 말한 것은 실수나 오류로 귀속되고 우리는 다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익힌 사람이었다면, 이런 소여, 이런 진술을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지각할 것입니다. 이 부적당한 발언을 무의미한 오류로 파악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의 징후로 해석할 것입니다. 어쩌면 폴은 자신의 친구 제프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어쩌면 폴은 자신의 친구 제프에게 존이 자신에게 은밀히 말한 것을 발설했기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우정을 배신한 행위에 대해 용서받기를 바랄 것입니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갖춘 사람은 일상생활의 얼개를 구성하는, 매우 흔한 이런 오류를 완전히 다르게 파악합니다. 이런 오류에는 의미가 스며들어 있고 당사자가 품고 있는 무의식적이고 억압된 욕망이 드러난다고 이해합니다. 저는 다른 주로 이주하면서 제 친구 제프의 집에 제가 가장 아끼는 재킷을 깜박 잊고 남겨둡니다. 어쩌면 이것은 제가 이주하기를 원치 않거나 혹은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이처럼 사소한 사건들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 철저히 변환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저는 손을 씻습니다. 물론 손 씻기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저는 왜 손을 씻을까요? 제가 손을 씻는 이유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같은 세균에 관한 개념 혹은 관념과 더불어 이런 세균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믿음을 제가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저의 행위는 세균, 세균이 유발하는 질병, 그리고 이런 질병이 예방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저의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제가 실천하는 행위는 제가 품고 있는 관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끌어내는 교훈은 관념이 그저 관념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관념, 개념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관념 혹은 개념 덕분에 소여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게 됩니다. 더욱이, 관념 혹은 개념은 완전히 새로운 행위의 장을 우리에게 개방합니다. 이전에는 부적당한 발언이나 실언을 그냥 무시했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의미의 경로를 좇아서 어쩌면 자신이 직면하거나 인정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을 내면의 욕망을 찾아냅니다. 이전에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무의식이라는 개념,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개념, 그리고 억압이라는 개념, 억압은 반드시 억압된 것의 귀환을 수반한다는 개념 덕분에 의미가 충만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삶의 핵심에 자리 잡고서 생각하는 무언가가, 자각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함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념을 제가 끼고 있는 안경과 유사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제가 끼고 있는 안경을 벗으면, 제 주변의 세계는 불분명하고 흐릿해집니다. 저는 사물을 알아볼 수 없고, 약간 떨어져 있는 표지판도 읽을 수 없으며, 사물들을 서로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은 안개이고 윙윙거리는 혼란입니다. 이제 제가 안경을 끼면 세계가 부각됩니다. 흐릿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이 이제는 뚜렷해집니다. 세계와 세계의 사물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개념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개념은 세계의 무언가를, 실재계의 무언가를 부각함으로써 이들 사물이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 있게 합니다. 요리사는 결코 요리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주방과 주방에 놓여 있는 것들을 파악합니다. 요리하지 않는 사람은, 시력이 나쁘면서 안경을 끼지 않은 사람처럼, 주방에 놓여 있는 객체들을 무의미한 것들의 불명료하고 윙윙거리는 혼란으로 이해하는데, 이를테면 숲에서 밀집한 덤불의 얼개를 파악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리사에게는 주방의 모든 용품이 의미와 기능을 지닌 채로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안경과 개념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은 개념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한 영역은 부각되어 그 영역이 소여로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한편으로, 세계의 다른 한 영역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억압을 통해서 만들어진 무의식적 의미가 꿈과 증상, 실책, 실언, 농담에 골고루 스며든 정신분석학자의 세계가 신경학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자에게는 전기화학적 신호가 가득한 신경학자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념은 일단의 사물을 부각하면서 또 다른 일단의 사물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세계가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과 자신의 행위를 조직하는 관념 혹은 개념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이들 개념은 세계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파악과 매우 매끈하게 통합되어 있어서 우리는 구상, 세계, 그리고 행위를 서로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상 자신의 관념을 자각하려면 무언가가 어긋나는 외상적 상황을 종종 대면해야 합니다. 무언가가 뒤틀리거나 작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식의 외상적 만남이 세계에서 촉발할 때, 어쩌면 우리는 구상과 세계 사이의 차이를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각은 절대 보장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개념이 어딘가 문제가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 주장의 맥락에서 저는 철학의 작업을 이해할뿐더러 철학이 중요한 이유도 이해합니다. 제 가설은 철학이 우리의 개념을 부각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우리가 행동하고 세계를 파악하는 수단인 개념에 관해 작업합니다. 위대한 소설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바를 의도하는 것 혹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말하는 것 둘 중의 하나는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바를 의도하는 것과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말하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시사한 대로,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개념은 무의식적입니다. 우리는 개념을 통해서 행동하느라고 너무 바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개념이 세계와 행위에 대한 자신의 파악을 조직함을 인지하는 데 개념을 사용하느라고 너무 바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개념을 ‘살아가’고, 게다가 개념을 살아갈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지각과 행위는 자신의 관념과 매끈하게 이어지게 됨으로써 그것들이 마치 동일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저는 제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제가 행동하는 세계가 ‘사유 세계’임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이거나, 혹은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철학이 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개념을 무의식적 상태에서 구출하여 부각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우리는 이들 개념이 세계에서 무엇을 파악하도록 우리에게 제시하는지,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특징짓는지, 그리고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경의 비유로 되돌아가면,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지만, 오히려 철학은 바로 그 안경을 바라보려고 시도합니다. 이렇게 노력함으로써 철학은 어쩌면 완전히 달성하기는 불가능할 기묘하고 역설적인 이중 시각을 계발합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맞닥뜨릴 때 통과하는 바로 그 개념을 바라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들 개념 없이 세계를 바라보려고 시도합니다. 이런 이중 시각을 시도함으로써 우리의 개념이 온갖 종류의 굴절과 변형, 급변, 생성을 겪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의 개념이 이런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철학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은 차이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우리의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우리의 개념을 사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의 개념이 변형됩니다. 비판적 검토를 거친 후에는 이들 개념이 우리가 시작했을 때의 관념들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자신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개념에 관한 이런 철학적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의 행위 역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지도학’이라는 프로젝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철학에 관한 이런 개념의 맥락에서입니다. 저는 『존재의 지도』라는 책을 철학적 논쟁에 개입하여 어느 한쪽을 편들 의도를 품고서 저술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저작이 사람들의 실천에 얼마간 이바지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을 저술할 때 제가 품었던 열렬한 희망은 사람들이 그 책의 내용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세속적 실천적용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존재의 지도』라는 책의 성공을 그것이 저명한 철학 저널에서 거론되었는지 여부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만약 그런 사태가 그 책이 세상에 기입되는 유일한 방식이라면 저는 그 사태를 실패로 여길 것입니다―오히려 그것이 실천하는 데 사용되었는지 여부로 가늠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이 저작과 『객체들의 민주주의』라는 저작에서 제시된 개념들을 받아들인 고고학자들이 기후변화 및 인류세와 관련된 현장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그런 연구에 관여하게 되어서 기뻤습니다(그들은 또한 어떤 것들을 보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 개념이 건축가들과 설계자들의 설계 업무에 적용되는 것을 보고서 기뻤습니다. 예술가들과 다양한 정치적 실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책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사람들이 일처리를 다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고해 보면 그런 일은 매우 단순하고 자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묘하게도 ‘존재지도학’의 주요 목표가 그 책의 논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런 구상을 하게 된 것은 그 책이 저술된 지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존재지도학’으로 제가 겨냥한 것, 제가 추구한 것은, 사람들이 제가 ‘탈출 속도’라고 일컫는 것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일단의 개념적 도구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탈출 속도는 한 객체가 행성 지구 같은 다른 한 물체의 중력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속도입니다. 탈출 속도에 도달하는 데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됩니다. 『존재의 지도』라는 책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바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회집체를 벗어날 수 있게 할 실천을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될 일단의 개념적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주요 개념 중 하나는 중력입니다. 중력은 권력을 가리키는 저의 낱말입니다. 푸코 같은 사상가들로부터 우리는, 권력이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과 담론을 조직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방대한 문헌에 친숙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을 획득하기 위해 이런 권력을 벗어날 방법에 관한 물음에도 친숙합니다. 그렇다면 왜 ‘권력’이라는 낱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을까요? 완전히 좋은 낱말이 이미 있는데도 왜 ‘중력’이라는 용어의 기묘한 용법을 도입할까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라는 시론에서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개념이, 표면이 닳아버려 예전에 그 위에 새겨졌던 형상이 더는 식별될 수 없는 그런 동전처럼 될 수 있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개념이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더는 요구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가 그 낱말의 의미를 더는 표명하지 않은 채 그 의미가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식으로 그 낱말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 개념은 닳아버린 동전이 됩니다.


저는 ‘권력’이라는 기표가 오늘날 그런 개념이 되어 버렸다고 믿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우리는 권력이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바에 관해 사실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그 낱말을 사용합니다. 비판 이론, 단순히 세계를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변화를 겨냥하는 무기로서의 개념을 구축하고자 하는 그런 형태들의 이론을 다루는 방대한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는 권력이라는 개념이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전개됨을 알게 됩니다.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런 문헌에서 권력은 담론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권력을 표상의 견지에서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권력은 사람들의 믿음, 우리 행위를 조직하는 규범, 사람들을 분류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호들의 체계 등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권력을 이렇게 구상함으로써 이들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예증하거나 혹은 이들 기표 체계를 변화시키면 세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담론적인 것의 영역, 즉 제가 일반적으로 상징계 혹은 기호계로 일컫는 영역이 우리의 삶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제가 부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곳 미합중국에서, 저와 불법 노동자 사이에는 유의미한 물질적 차이 혹은 생물학적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다소간 같은 인지 역량과 육체적 역량을 갖추고서 세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매우 다른 삶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것은 어떤 기표입니다. 제 실존은 ‘시민’이라는 기표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불법 노동자의 실존은 ‘비시민’ 혹은 ‘불법’이라는 기표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이들 기표는 물질적이거나 물리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을 특성이나 특질이 아닙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몸무게나 건강 혹은 우리의 인지 역량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비물질적 기표로 인해 우리의 삶은 극적인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운전처럼 단순한 사례를 생각합시다. 어쩌면 저는 속도 제한을 시속 십 킬로미터 혹은 십오 킬로미터 넘겨서 운전하는 것과 관련하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경찰관의 단속에 걸려 속도위반 딱지를 받고서 벌금을 내야하고, 따라서 제 자동차 보험료가 올라갑니다. 이 사태는 미합중국 시민으로서의 제 지위와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법 이민자의 경우에는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어떤 불법이민자가 단속에 걸리면 그는 추방되거나 투옥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집에 배우자와 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속도위반으로 단속당하는 사태처럼 단순한 경우에도 불법 이민자는 자신의 가족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체포되어 추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 이민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유념해야 합니다. 예컨대, 어쩌면 그는 학대하는 고용주에 맞서 소송을 하거나 부정의에 맞서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럴 때 자신이 추방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결코 사물이 아닌 것, 즉 아무것도 아닌 기표 때문입니다. 결코 사물이 아닌 기표가 불법 이민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양상을 조직합니다. 이것이 담론적인 것 혹은 상징적인 것의 권력입니다.


조금 전에 저는, 우리의 개념이 세계 속의 어떤 것들을 부각하는 만큼이나 다른 것들을 보이지 않게도 한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권력에 관한 제 개념이 담론적인 것에 한정된다면, 저는 우리가 세계를 바꾸고 싶다면 이들 담론적 장 혹은 상징적 장을 바꾸면 충분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많이 바꿉니다. 그런데 『존재의 지도』를 저술할 당시에 제게 떠오른 생각 중 하나는, 푸코, 데리다, 주디스 버틀러, 지젝 등과 같은 인물들이 제기한 강력한 담론적 비판 혹은 상징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그다지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담론적 층위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성규범성,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등을 부지런히 해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황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속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들 담론적 체계를 해체하여 그런 해체와 비판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데도 상황은 예전 그대로인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언가가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표와 잘못된 믿음, 이데올로기의 그물에만 포획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계, 즉 우리가 구축한 세계와 자연 세계 둘 다의 물질성에도 포획되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의 맥락에서 중력에 관해 생각했을 때, 그는 중력을 물체를 끌어당기고 밀치는 힘으로 구상하지 않고 오히려 객체의 질량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곡률로 구상했습니다.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이유는 지구의 질량이 달이 따르게 되는 시공간의 곡률을 창출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징계와 물질계 둘 다에서 비롯되는 중력에 포획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런 중력을 통해서 우리가 따라 움직이는 경로들이 창출됩니다. 우리는 ‘불법’이라는 기표와 관련하여 이런 중력이 상징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일례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건물들의 건축, 도시 설계, 재화가 생산되는 방식, 물자 보급로와 분배 방식 등에서 온갖 종류의 사례가 나타납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바꾸었지만, 우리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활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물질성의 장에 우리 자신이 여전히 얽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존재지도학’이 해결하려는 문제는 우리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기호적 경로와 물질적 경로에서 벗어날 탈출 속도를 달성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지도학, 즉 세계 속 회집체들의 지도를 제작하는 기술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들 회집체가 결합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변화시켜서 탈출 속도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해체가 있습니다. 해체는 상징계의 층위뿐만 아니라 물질계의 층위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상징계의 층위에서 해체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기표 체계들을 분쇄하여 존재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방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물질계의 층위에서 해체는 우리의 움직임이 어떤 경로들을 따라 이루어지도록 강제하는 물질적 회집체들을 분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지형성, 즉 상징계의 층위와 물질계의 층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존재지도학’을 실천할 방법을 여러분 모두가 찾아내리라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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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공유지는 없다ㅣ권범철
자율평론 | 2020.07.01 | 추천 0 | 조회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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