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 <생명의 그물 자본주의> 세미나 기록

작성자
케이
작성일
2020-10-13 18:16
조회
841
지난 토요일 세미나 기록 올립니다.
발언하신 순서대로 이름은 알파벳으로 바꿨습니다.(중간에 살짝 뒤바뀐 부분이 있는 것도 같은데 양해해주세요)
그럼 다음 세미나에서 뵙겠습니다!

***
A : 저자 사유의 규모가 참 크다. 맑스코뮤날레에서도 적녹보라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색에는 빠지는 게 많지만... 역사적 혁명 운동이나 대안적 사상의 한계들을 생각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설 지평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저자가 한다. 페미니즘을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페미니즘 사유를 종합한 흔적도 역력하다. 주로는 맑스주의, 생태주의 흐름을 조합하려는 기획이다. 그걸 오이케이오스라는 말이 잘 반영한다. 세계생태론이라는 지향성을 갖고 종합하려는 시도를 한다. 내 발제에서 파란 표시한 것부터 살펴보겠다.
저자는 맑스주의와 생태주의를 종합하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녹색사상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발제문에 “녹색 전체론의 위험한 귀결을 특징짓는 붕괴보다 종과 환경의 창조적이고 생성적이며 중층적인 관계인 오케이오스에 주목하는 복수의 의문들을 고려하자. 여기서 녹색전체론이란?”이란 질문을 써봤다. 간단히 말해 녹색전체론의 붕괴론을 넘어설 수 있는 오이케오이스적 사유를 발전시켜 가보자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데, 그걸 왜 녹색전체론이라 표현했을지, 왜 붕괴론이라 표현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자.

B : 지금 얘기는 책 23쪽 두 번째 줄 문장들이다.

A : 즉, 한편으로 녹색사상, 녹색정치는 늘 피부에 와닿는 철학이자 운동이었는데, 저자는 녹색주의 운동에 대해 ‘전체론’ ‘붕괴론’ ‘양자택일(지속가능함을 둘러싼 양자택일적 태도)’ 적으로 보고 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C : 서론 초반부터 저자는 자연/인간, 자연/사회 식 데카르트 이분법을 문제점으로 삼고 있다. 아직 서론에서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데, 이런 이분법을 유지한 상태에서 자연, 환경, 생태 문제를 강조할 때 좀전의 양자택일론 역시 그 이분법의 프레임으로 연결되는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선 더 이야기하고 싶다.

D : 양자택일론은 어디에 나오는지. 그 말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A : ‘지속가능성인가 붕괴인가’가 녹색논리의 기본틀이다.

D : 지금 제기해주신 양자택일론 문제는 상당히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어서 아직 이야기하기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중요한 문제로 일단 남겨두고 가면 좋겠다.

A : 서론에서 사실상 이 책 전체 내용을 다 이야기한다. 책 구성이 서술적이라기보다 음악적이라는 느낌이다. 이후에는 앞의 얘기가 변주되는 분위기이다. 구체화시키면서 발전시키고 발전시키고 되돌아오고... 우리의 논의는 결국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 책 구성상 우리 토론이 취하게될 어떤 특징일 것 같다.
녹색사상조차도 자연vs.사회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책은, 자연이라는 덩어리진 실체, 사회라는 덩어리진 실체 식으로 양자를 분리하고, 별개의 실체로 놓고 살피는 것을 문제로 보고 있다. 근대성 논리에서 생태주의는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입장인데 그 논리적 배경이 무엇인지는 차차 논의해보자.

E : 잠시 질문하고 싶다. 이 책은 녹색전체론을 개념화하거나 집중화해서 다루지는 않은듯도 하다. 책 전체에선 자연/사회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유독 그 부분이 더 눈에 들어왔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도 궁금하다.

A : 전체론이라는 게 우리 시대에는 보통 파시즘을, 그리고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주의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저자에겐 인간사회 뿐 아니라 세계 수많은 객체들이 중요하다. 참고로 역자가 한국에선 사변적 실재론 소개자인데 이 책에 역자의 아이디어가 반영된다. 생명 그물망 속의 무수한 비인간 객체들까지 포함해서 그것들의 특이성들을 압살할 수 있는 위험한 사고방식을 전체론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녹색주의가 과연 그런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일견 난 동의가 된다. 심층생태학의 일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세계에 우연히 탄생한 암으로 보고, 그렇기에 암을 외과적으로 도려내야만 생태의 재활성화가 가능하다라는 경향도 있다. 녹색파시즘이라는 용어로 비판하는 사람도 등장했고, 20세기 후반 녹색운동은 자본의 축적욕구를 제3세계를 배경으로 도모하려고 한 문제적 흐름이었다고 비판되기도 한다. mb 4대강 역시 녹색이념으로 추진했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생태계에 더 위험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지금 정부의 그린뉴딜 경우 현재 생태위기에 어떤 정도의 긍정적 영향을 미칠지... 녹색이란 게 갖고 있는 한계,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은 녹색의 중요성을 발견, 깨닫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다. 녹색운동 추진하는 많은 주체성이 실질적 대안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 상태. 그래서 저자가 녹색전체론이라는 표현을 통해 뭘 얘기할지 귀 기울여보고 싶었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우리의 지구’ 시리즈, ‘우리를 지구를 위하여’(2020)가 있는데 그걸 만든 사람 93세다. 20대부터 자연 모습을 촬영했다. 70년 이상을 세계 곳곳 변화를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자기 20대 때는 야생이라 불리는 곳이 세계 전체의 77프로인데, 지금은 35프로 정도라고 한다. (이때의 야생은 이 책에서 근대주의자가 말하는 자연과 같은 의미) 영상의 메시지는 야생의 회복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례는 체르노빌이다라고 말한다. 실제 지금 체르노빌은 밀림화되었다. 일종의 자연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사라지면 야생이 회복된다는 메시지다. 인간의 성장을 스톱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생태론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인간을 위험존재로 바라보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저자는 인간/비인간을 포함하는 세계생태의 창조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C : 좀전 얘기를 체계적, 간단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25페이지에 있다. 2번째 단락. 데카르트적 서사라고 지칭하는 대목이다. 저자에게 어떻게 자본주의를 바라볼까라는 게 이 책의 중요한 과제다. 인간/자연을 나눈 상태에서 자연을 바라볼 때 극단적 두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전형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훼손하면 인간에게 자연이 보복할 것이라는 서사다. 그럼 이 이분법으로 나눠진 것을 없애지 않고 생각을 한다면, 아예 자연을 압도해버리든지, 아니면 달래면서 개발을 하든지(이를테면 복지동물), 아니면 인간은 멸종할거야라는 식의 서사다. 저자는 이런 서사를 넘어서고자 한다. 궁금한 건, 저자가 이중내부성을 계속 얘기하기 위해 쓰는 다양한 표현 중, 자본주의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협력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 일했다’라는 표현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F : 아까 녹색전체론 얘기와 관련해 생각할 때, 생태주의란 게 자연과 사회를 분리된 실체로 다룬 것이 생태주의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자를 분리된 실체로 다룬 것을 오히려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어떤 이유에서 녹색전체론이란 단어를 썼는지 살짝 궁금했다.

E : 난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숲해설가 수업을 들었을 때 에피소드가 떠올렸다. 앞의 ‘붕괴’라는 말이 감정적으로 다가왔다. 인간이란 나는 과연 이 세계에서 암적인 존재인건가. 여기에서 엔지니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할만큼 식물과 벌 관계도 그렇다. 이런 과정들을 생각하니 ~위해서라는 말이 확 와닿았다.

A : 이 책의 입장은 감사의 글 첫 단락에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초대장이다.”라는 대목이다. 부드럽게 초대장이라고 했지만 도전장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 책은 사회주의 비판도 하는데, 비판이란 행위를 통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도전에 직면하고 어떤 형태로건 응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이 진지하게 취급된다면 간단히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라는 말에서 ‘위해서’라는 말이 설득력 있겠냐는 것에 대해서 말해본다. 이건, 결과적으로는 자연이 자본, 인간을 위해 일해왔고, 계속 일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 있다는 냉정한 현실진단 차원의 말이다. 그래서 ‘위해서’는 결과론적으로는 사실인 말이라고 본다. 그런데 동기 차원에선 전혀 아닌가.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때 자연을 대문자로 생각하지 않는 훈련이 중요하다. 총칭으로서의 자연, 인간 등을 벗어나서 개개의 객체들로 돌아가 사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나타나 있는 적대를 분석할 때의 이론적 틀(ex. 노동자가 자본을 위할 수 없다/여성이 남편을 위할 수 없다)이 있다. 그리고 삶의 현장 자체는 실제 공존하는 타자들을 위하는 경우도 있다.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적대관계 때문에 ‘위하여’라는 상황이 구조적으로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D : 그런데 그렇게 볼 때 이 책 관점이 흐려지지 않나. 종합이지만 비판적인 책이라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이건 그간 있었던 자연/사회를 재정립하겠다는 것이다. 이분법을 비판하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위하여’라는 말에 꽂히면 그 진정성의 문제를 따지는 것에 빠지게 된다. 이건 37쪽에 나오는 말인데, 실제 맥락을 보면 좀 다르다. 진정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문장은 아니다.

E :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 일한다”라는 문장을 우리가 듣고 해석할 때.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늘 떠올릴 수 있다면, 자연이 자연을 위해 일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저자가 넘어서고 싶은 것 같다. 인간사회 이전의 자연이란 게 있는데 인간사회가 존재하고 나서 자연은 늘 자본주의 하에 있었다라는 것. 도전장이란 말도 나왔지만, 이 책 읽으면서 기존의 익숙했던 사고나 감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의 도전을 계속 받게 되지 않을까.

D : 자연과 사회를 사용했을 때는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념은 물질성을 갖고 있으니까 새로운 실체를 만들고자 하는 방식의 이야기다. 오이케이오스 같은 말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B : 이러한 다른 의견들에 대해 A님 더 얘기하실 게 있을지.

A : 이 책 전반에 ‘위한다’ ‘통한다’ ‘어우러진다’ 같은 말들이 동원되는데, 자연과 인간이란 표현은 저자가 원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쓰는 표현이다. 자연이 인간을 위한다는 표현도 저자가 적극적으로 원해서 한 자기표현 명제는 아니다. 저자 생각에는 엄밀히 말해 자연도 인간도 없다. 그 개념들은 엄청나게 폭력적인 실체적 추상관념이라고 표현한다. 그 양자 속에서 ‘위한다’라고 표현한 건 다리를 건너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럼 저자가 생각하는 걸 따져볼 수 있다. 개개의 객체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세계생태라는 것을 만들어간다라는 것이다. 결국은 관계론이다. 이 관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방식이 ‘통한다, 위한다, 어우러진다’ 식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까 ‘주관적 동기에서’라는 표현을 썼는데, 많은 이들은 ‘위해서’라는 말을 쓰자마자 주관적 동기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주관적 동기라는 범주를 구성해서 위함을 부정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주관적 동기에서는 결코 위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함이다. 주관이란 걸 구성하지 않는 존재들의 세계로 내려갈 때는, 게임, 벌레, 식물 등 비인간 차원으로 갔을 때 주관적 동기란 말이 무색해진다. 그 차원으로 내려갈 때는 지향성이나 또 다른 차원의 개념을 발명해야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 나아가 생각하기엔 좀 이르다는 생각이다. 우선은 위함의 근거지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자연이 인간을 위하는 측면이 없는지를 일단 물어보자는 것이었다.

D : 일상에서 ‘위해서’의 용법과 의미는 알지만, 그 용법을 이 책에 그대로 적용시켜야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전체 맥락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나 싶다.

-휴식-

A : B님의 발제문 2번에도 거의 동일한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B : 37쪽 아래에서 6줄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자연에 행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 대신에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물음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전자의 물음이 분열을 함축한다면 후자의 물음은 통일, 즉 자연-속-자본주의/자본주의-속-자연을 함축한다."
* 자본주의가 자연"에 행하는 것"(what capitalism does to nature) - 분열
*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일하는 것"(how nature works for capitalism) - 통일
질문은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 일한다"고 할 때 그것을 통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였다.
그런데 이야기 들으면서 ‘위해서’가 ‘통해서’와 같은 의미라면, 이 말이 어떻게 그 안에서 작동하는지 볼 의미도 있을 것 같다.

A : 분열은 자본주의가 자연을 대상으로 무엇을 하는가라고 보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자연 사이에는 일단 대상, 대립 관계가 있다고 봐야한다. 반면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어떻게 일하는가의 질문에는, 양자가 서로 통해가면서 일하고 작동하는 측면이 그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이 든다. 저자 입장에서는 자본주의가 자연을 대상으로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을 수동적인 것으로 대상화시키는 관계인 것이다. 무어가 생각하는 자연과 자본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통일’ ... 자본주의 속에 자연이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계라는 것도 자연이 자본주의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속에선 노동력, 기계, 원료, 토지 등 자연들이 어우러져 작동한다고 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함께 존재하는 ‘일관성의 평면’이다. 그런데 책에서 정-반의 이항성을 주장하고 그 관계를 논하는 변증법이란 말은 저자 스스로 논의를 풀어가는데 기능하기 어려운 말인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B : 다음 질문을 더 보자.

A : “무어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독립적인 단위체들 ― 자연과 사회 ― 의 상호작용에서, 생명의 그물 속 인간의 변증법으로 이동하는 개념, 자연-속-인류와 인류-속-자연에 관한 어휘를 번성할 수 있게 할 개념이라고 보는데,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발제문에 썼다. 생명의 그물의 웹이나 네트워크는 이항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의 세계여서 변증법이란 말은 전혀 안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상호작용에서 생명의 그물로 넘어가는 건 필요하고, 거기에 맞는 개념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자연-속-인류, 인류-속-자연 식의 이중내부성이다. 서로 속에 있는 관계에 대한 어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상징체계를 계급투쟁의 중요한 방법이라 보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다른 각도에서 전개하고 있는 장. 자연-사회 개념에 맞서 오이케이오스라는 용어를 먼저 도입하고 싶어 한다고 읽었다.

C : 방금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변증법이란 말을 무어가 중요하게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8쪽 마지막 단락이다. “이런 두 가지 반전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저자가 분명 변증법적이란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앞의 얘기 중에서, 저자가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 비판은 하지만 그 두 용어를 계속 쓸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징검다리 식으로 그 용어들을 쓰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럼 변증법이란 말도 그런 식의 징검다리처럼 이해할 수 있을지 싶다.

A : 저자는 철학자가 아니다. 역사학자고, 맑스주의 문헌은 깊이 읽었겠지만 그 이후 발전된 철학적 담론에 익숙하진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로건 변증법을 통해 축적해간다. 대안을 변증법에서 찾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보통은 형이상학vs.변증법인데, 여기에서는 데카르트를 비판하다보니 기계론vs.변증법 식의 방법론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때 기계에 대한 관념 역시, 이후 가타리 등에 의해 발전된 기계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고, 그런 정도의 복잡성도 없다. 보통 우리가 ‘메커니즘적이다’라고 할 때의 기계성, 하나의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일방적이다라는 의미를 함축한 기계성인 것 같다. 변증법은 맑스 이후 수많은 변증법들의 변종 해석들도 살펴야 하지만 지금 저자가 제기하는 세계생태론 차원에서 생명의 그물망으로 연결된 평면을 다루려면 변증법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미분법을 통해 변증법을 대체했다. 저자는 헤겔보다는 좀더 복잡한 변증법 체계지만, 그런 논의를 철학적으로 정리하면서 쓰는 건 아닌 듯하다.

D : 변증법 개념에 대해 설명은 어렵지만, 이 책에서 맥락상 파악은 가능하다. 21쪽 1단락에 “인간은 환경을 형성하고, 환경은 인간, 인간조직을 형성한다” 딱 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까 ‘통해서’ 작업하기가 변증법적이라는 얘기인 것 같다. 맥락상으로는 관계성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A : 저자의 생각은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

D : 저자의 ‘깊은’ 의미가 방금 전 내가 언급한 내용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B : A님 얘기는, 저자가 자본주의 설명할 때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변증법을 넘어서자고 한 것이라는 건가?

A : 저자의 지향은 변증법을 넘어서 있는데, 철학적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이란 말에 묶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근대성 범주를 가지고 근대성을 넘어서려는 작업이 계속되는 게 아닌가 싶다.

B : 책 읽을 때 오이케이오스가 잘 의미가 안잡혔다. 변증법 얘기 나올 때마다 막혔다. 그게 아닌 걸 얘기하면서 왜 변증법을 얘기하나 싶었다.

D : 변증법이 이항대립을 전제하나. 어떤 개념의 의미란 늘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생성된다고 할 때, 이게 늘 이항대립 구도인가. 나도 이 변증법에 대해 잘 설명 못하겠지만...

A : dialectics. 둘이 말이 한다는 어원적 의미를 갖고 있다.

D : 헤겔이 진보를 전제하고 변증법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비판받지 않나. 저자의 변증법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항대립을 전제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B : 책 읽어가면서 논의하자.

G : 1부 제목이 ‘이원론에서 변증법으로’라서 다음에 더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A : 그럼 다음 질문. “자연/사회라는 관념은 실재적이고 폭력적인 추상관념이다.” 이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C : 이 문장이 가장 좋았다.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 자연과 사회는 실체가 아니라 각각 따로 씀으로서 실제로 이 세상의 생명의 네트워크의 실제적 작동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 같다. 실체가 아닌 ‘실재적이고 폭력적인 추상 관념이다’라고 하는 말이 설득력있었다.

A : 원래 문장은 “폭력적이면서 실재적 추상 관념이다”. 이때 문장에서 ‘폭력적이면서’가 앞으로 나오니 더 리얼한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맑스 해석에서도 이런 방식 문장구조가 중요한 해석의 여지를 줄 것 같다. 이 책 뒤에 계속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일단 이 명제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면 이 책 골조는 해석된다고 생각한다.

B : 내가 올린 발제문 1, 2번 질문은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3번은 세미나 후에 한번 각자 확인하면 좋겠다. 화상강연에서 조지 카펜치스는 무어가 자기 개념을 잘못 가져다가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A : “하지만 무어의 책에는 지대 범주 옆에 더 중요한 공백이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노동계급의 자율성과 자기­활동 개념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계급구성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계급분해와 계급재구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비판이었다. 실제 노동계급 개념 결여는 맞아도, 무어에게는 있는 게 있다. 무어의 오이케이오스를 들뢰즈 식의 다양체로 해석하면 문제가 풀리는데 싶다. 생명의 그물은 자본주의 속의 자연, 자본주의 속의 생명의 그물이라 할 때 ‘생명의 그물’이란 자기활동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구제, 결여되어 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이란 걸 생명의 그물 개념을 통해서 재해석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식량, 에너지, 원료 같은 것, 저렴하게 자본주의에서 취급되는 것들의 생명성을 얘기하려는 게 무어의 관심사다. 그럼 그것만큼 자율성 개념을 풍부하게 설명하는 게 또 있겠나 생각한다. 노동계급이라 불리는 카펜치스의 계급 개념을 좀더 확대시켜 보면, 무어의 생각과 어떻게 겹치고 어떻게 달라질까를 살피는 일이 필요치 않을까 싶다.

C : 방금 들으며 떠오른 것인데, 들뢰즈 개념이 여기에 덧붙여 상상하기 좋다고 생각한다. 다양체 얘기를 들으니. ‘~되기’를 설명할 때 들뢰즈는 항 개념 대신 부분대상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 것 같은데, 무어 얘기도 ‘자연 속 사회, 사회 속 자연’ 식으로 이항은 아니더라도 다양체로 가는 과정에서의 ‘~되기’의 장 같은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A : 부분대상(오브제 쁘띠 아)은 라캉 용어이니 ‘부분객체’로 바꿔서.. 부분객체로 본 특이자들의 관계성을 무어도 상상하고 있다는 점에선 들뢰즈와 통한다고 본다. 변증법은 이항성을 고정된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다양체 다룰 때는 부적절하다. 객체들의 흐름을 다룰 때에도 변증법은 한계에 부딪힌다.

B : 다들 수고하셨다. 2주 후에는 이 책의 1부 전체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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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톄쥔, 여덟번의 위기 4장 ‘1997년과 2009년에 발생한 두 번의 외래형 위기’ 독서노트와 토론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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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여덟 번의 위기』 세미나 공지
bomi | 2024.02.17 | 추천 1 | 조회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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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톄쥔, <여덟번의 위기> 3장 토론거리
amelano joe | 2024.01.27 | 추천 0 | 조회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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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토) 7시30분 <여덟 번의 위기> 3장 세미나 공지
ludante | 2024.01.08 | 추천 0 | 조회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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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토요일 7시30분 윈톄준 <여덟 번의 위기 : 현대 중국의 경험과 도전> 역사비판 세미나 공지입니다
ludante | 2023.11.25 | 추천 0 | 조회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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