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세상 2020.10.13] 자본의 ‘가치’는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 채효정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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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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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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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2020.10.13] 자본의 ‘가치’는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 채효정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5422


들어가며

농사는 올해도 망했다. 강원도 산촌에서 과수 농가 5년 차.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려고 시작한 농사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상한 경제’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5월까지 눈이 오던 작년과 재작년엔 냉해가 나무를 얼려 죽이더니, 겨울에 눈도 오지 않고 강도 얼지 않던 이상하게 따뜻했던 올해는 해충이 나무를 말려 죽인다. 앞으로 벌어도 뒤로 나가는 게 더 많은 농사는 지으면 지을수록 적자다. 나간 돈, 들어온 돈이 맞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러고 나면 내 노동의 값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내 밭에서 무상 노동을 할 시간에 남의 밭에 품삯 일꾼으로 일 다니는 것이 나을 판이다. 열심히 일하고 빚과 병만 남는 농사는, 동네 공부모임에서도 항상 묻지만 풀지 못하는 비밀로 남는다.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알고 싶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인지, 답해 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이슨 W.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이론이나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녹색 담론은 그게 지구 온난화 때문에 일어난 ‘기후 위기’라고 설명한다. 환경주의자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원인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이 지구가 왜 뜨거워 졌나 알아보니 원인이 탄소가 너무 많아서라고 한다. 지금 같은 속도대로 탄소 배출량이 늘어나면 머지않아 지상의 많은 곳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답은? 탄소를 줄이는 것이다. 탄소를 줄이는 방법은 에너지를 바꾸는 것이다. 탄소를 내뿜는 화석 연료에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로.

이 에너지 전환을 중심으로 사회 경제를 다시 설계하는 것을 ‘그린 뉴딜’이라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적색 담론은 이런 식의 관점이 원인을 ‘탄소’로 환원시켜 배출 원인이자 주범인 기업과 금융 자본 등 주요 행위자 및 사회경제적 체제의 문제를 뒤로 감춘다고 비판한다. ‘기후 변화가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말해야 한다는 구호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농민과 농업의 파탄도 마찬가지다. 이산화탄소가 농사를 망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배출의 구조와 역사다. 농업은 그 어떤 산업 분야보다 세계 경제 체제에 깊숙이 예속되어 국제 유가와 국제 투기 자본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산업이 되었다. 영어를 몰라도 WTO(세계무역기구)와 FTA(자유무역협정)를 아는 농민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직관적으로는 모두 알고 있다. 30년 전에 배운 사람들이 대세라고 했던 ‘세계화’가 어떻게 우리들의 논과 밭을 집어삼켰는지를.

녹색과 적색의 통합

그동안 녹색과 적색 담론은 접합 지점을 잘 찾지 못했다. 녹색 담론은 자연 생태계 안에서 설명하고, 적색 담론은 사회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한쪽은 문제를 ‘자연의 회로’ 속으로 소급시켜 자연의 회복과 인류의 반성을 요구하고 한쪽은 ‘사회의 구조’로 환원시켜 구조의 철폐와 인간의 의지를 요청한다. 이것은 자연과 사회라는 이분법을 계속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녹색사상도 환경보호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로 귀착된다. 무어는 말한다. 데카르트 식으로 양적 물체(res extensa)로 환원될 수 있는 그런 자연은 없다고. ‘인간 사회’에 대해 ‘자연 전체’로 나타나는 그런 단일 실체로서의 자연은 없다. 그것은 관념상의 표상일 뿐이다. 인간 존재가 ‘정신 더하기 육체’가 아니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도 ‘사회 더하기 자연’ 같은 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자연’과 ‘사회’를 각각의 단일한 실체로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서는 수량화, 획일화, 균질화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표상화 작업에는 권력과 과학과 문화가 동원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세계 지도는 북구의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다. 남구의 관점에서라면 그 지도는 거꾸로 뒤집혀서 남극이 위에 가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다. 대양의 남쪽에선 북극성이 아니라 남극성을 좌표로 삼아 ‘위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그 지도는 북구의 항구에서 출발한 상선이 남구의 신대륙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구글 어스는 훨씬 더 균질화된 공간을 생산한다. 구글 어스는 우리의 위치를 대양이 아니라 대기권으로 옮겨 놓는다. 그것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을 창조한다. 이런 시점은 인간의 감각에 ‘지구의 관리인’으로서 조절자의 관점을 부지불식간에 각인시킨다. 이런 문제는 ‘탄소 환원주의’에서도 나타난다. 각 나라를 탄소 배출량으로 계량화하고, 세계를 탄소량으로 균질화하면, 탄소로 양화된 숫자와 도표는 정치적인 것을 비정치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탄소량’에 매몰된 사고는 탄소 문명의 역사 속에서 발생한 계급, 젠더, 인종, 식민주의 같은 정치적 문제들을 탈정치화하거나 은폐한다. ‘탄소거래제’나 ‘탄소국경세’와 같은 발상은 탈정치화된 탄소의 기술주의적 지구 공학이 어떤 식으로 ‘대기권 인클로저’를 통해 북구와 남구 및 계급과 인종의 정치적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자연과 자본의 변증법적 관계

책에 따르면, 자연은 계속 새로운 자연으로 ‘만들어진다.’ 거기에는 계급투쟁과 권력관계와 정치 지리학 및 여타의 사회 경제적 조건들이 반영된다. 그렇게 ‘생산된 자연’을 무어는 ‘역사적 자연’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한 자연은 ‘역사 없는 자연’이다.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산은 거기 있었고, 강은 거기 있었다. 인간 사회의 ‘외재성’으로서 자연의 존재론은 ‘실체론’에 토대한다. 무어는 외생적이고 실체론적인 자연관을 ‘관계적 개념’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이 단순 위계의 전복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적인 것으로서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호관계성을 나타내는 핵심 개념이 ‘오이케이오스’다. 오이케이오스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길들이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무어는 이 말을 자연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 개념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를 자연 중심주의로, 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전도시켜 인간을 자연 속 생물의 한 종으로 겸손하게 도치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과 자본의 상호 변증법적 관계를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오이케이오스는 생명의 그물을 직조하는 원리이며 그 속에서 자본주의도 부단히 재형성되고 재창조된다. 자본은 자연을 산출하고, 자연은 자본을 산출하는 이 변증법적 과정을 무어는 ‘자본주의 속 자연’과 ‘자연 속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무어는 이러한 자연과 자본의 오이케이오스를 통해 만들어진 자연과 자본주의를 무어는 ‘역사적 자연’과 ‘역사적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자연이 단일 실체가 아니듯이 자본주의도 단일한 경제 논리가 아니다. 자연의 경제는 자본의 경제에 가만히 불려 와서, 시키는 대로 순순히 착취당하고 전유당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들)은 자본에 길들여질 뿐 아니라 길들이기도 한다. 무어가 핵심 개념으로 삼고자 하는 ‘오이케이오스(oikeios)’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길들임’의 의미다. 아주 오래 전의 생명의 흔적인 석탄과 석유는 얼마나 자본주의 경제를 길들여 왔는가. 지금 ‘기후 위기’만 봐도 기후가 다른 자본주의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 생명의 일(노동)/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인간 노동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화에 저항했다가, 프롤레타리아로서 저항하고, 다시 탈프롤레타리아화(재자연화, 호모 사케르)에 저항한다. 인간/비인간 자연이 다른 자연으로 계속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자본도 여기에 대응하며 다른 자본주의로 계속 탈주해 나가야 한다. 이 ‘전환’은 상호적이다. 신자유주의로, 신경제로, 뉴 노멀로, 포스트 자본주의로의 끝없는 전환은 자본의 축적을 지속하기 위한 ‘자본의 탈자본주의’ 전략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로 변신하고 있을 뿐이다. ‘탈탄소 자본주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얼마든지 자본의 전환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린 뉴딜’도, 정치적 주체의 경합을 빼고 단지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탈탄소 경제 사회 대전환’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통치 언어인 ‘주체 없는 문법’이며, 탄소와 자본주의의 정치적 상호과정(oikeios)을 누락하는 탈정치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자연과 역사적 자본주의

무어에게 자연과 자본의 상호관계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역사’다.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은 ‘역사’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 책은 ‘역사적 자본주의’와 ‘역사적 자연’ 사이의 역사적 변증법을 계속 현실의 문제에 대입해 보게 만든다. 이를테면 책에서 무어는 목탄-석탄-석유로의 에너지 연료 이동 과정과 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의 자본주의 중심지 이동 및 금융 흐름이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 역사적 고찰 속에서 재생 에너지 분야는 또 다른 ‘에너지 프런티어’가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석유는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산 비용이 증가했기 때문에 ‘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것이다.

반면에 재생 에너지는 새로운 ‘무상의 일/에너지’로서의 ‘저렴한 자연’을 다시 창출한다. ‘태양과 바람은 공짜’라는 말은 신대륙의 발견자들이 ‘여기엔 땅과 자원이 무궁무진하다’고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프런티어’다. 하지만 태양과 바람에는 석탄과 석유 같은 ‘시간의 압축’이 없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무상이란 것도 속임수다. 지하에 수직화되어 있던 연료 생산 프런티어가 지표면에 수평화 된다는 사실과, 그런 전기 프런티어는 이전보다 더 많은 토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EU의 모태가 유럽석탄철강공동체였다는 사실과 그것이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지금 정부, 기업, 투자자들이 중심이 된 유럽 그린 딜의 동력은 새로운 에너지 공동체 및 그와 결합한 금융 자본-지식 복합체를 통한 에너지 제국주의로서 새로운 자본 축적의 프로젝트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나타났던 착취와 전유의 패턴을 고려하지 않고 에너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시 돌아가서, 기후 위기와 금융 자본이, 지구 온난화와 자본 축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토지와 농민의 생명(일/에너지)을 연료로 삼아 이뤄진다는 것인가? 비밀은 ‘저렴한 자연’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무어는 가치의 셈법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통상 가치는 노동 생산성으로 설명된다. 주류 경제학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기술 혁신이라고 말한다. 서구의 과학 기술 혁명이 경제 발전과 사회 진보를 이룬 토대라는 것이다. 무어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자고 말한다. 자본의 ‘논리’에서는 가치의 ‘법칙’이 나타나지만 자본의 ‘역사’에서는 ‘패턴’이 드러난다. 그 패턴을 따라가면 자본의 축적에는 반드시 저렴한 자연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시장 가격이 결정된다든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는 식의 ‘가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사회’라는 진공 상태의 관념 공간 안에서 가설과 논리에 의해 추출된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패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여기서 무어는 ‘가치 법칙’을 ‘가치 관계’로 프레임을 전환한다. 이것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이겠다. 그것은 자본의 ‘가치’가 바로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에서 기술 혁신에 따른 노동 생산성의 향상 보다 이 ‘무상의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자본주의 가치 법칙은 곧 ‘저렴한 자연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무어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생산성을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에서 강조해온 무상/일 에너지와 다음과 같이 결합한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짜나 싼값으로 식량, 노동력, 에너지, 원료를 산출해 내야 한다. 이 ‘네 가지 저렴한 것’에서 가치가 쌓이기 시작한다. 이 네 가지 저렴한 것은 악순환적으로 재생산된다. 저렴한 식량은 저렴한 노동력을, 저렴한 노동력이 저렴한 에너지와 원료를, 다시 저렴한 에너지가 저렴한 식량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 축적의 위기는 저렴한 자연의 상실에 따른 위기다. 21세기의 신자유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생산해 온 자본 회로 외부의 개척지(frontier)가 폐쇄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자본의 마지막 ‘대 약탈극’이었다. 20세기 서구의 마지막 저렴한 자연을 공급했던 중국과 인도를 비롯해서 대부분 남구의 프런티어 비용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와 함께 ‘역사적 자연’의 저항 강도도 높아진다.

기후위기 또한 저항의 형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토적으로는 더 이상 프런티어가 남아 있지 않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하늘에서 바다까지, 전 지구를 통틀어 이제 자본주의 외부는 없다. 남은 것은 인간/비인간 동물의 ‘신체’ 뿐이다. ‘새끼를 낳는 한’ 그것은 영원히 재생하고 지속가능하므로. ‘새끼 낳는 짐승’에서 ‘임금노동자’로 자본화되었던 프롤레타리아는 다시 역사적 자연으로 재창조된다. 노동유연화는 공장에서 착취하던 신체를 ‘싸게 쓰고 쉽게 버리는 몸(자연)’으로 재전유하는 기술이다. 이처럼 저렴한 것이 한계에 도달해서 더 이상 저렴한 것이 아니게 되면, 자본은 다시 전유의 공간을 찾아 역사적 자연을 재구성한다. 역사적 자연을 생산하는 지대를 무어는 ‘프런티어’라고 부른다.

프런티어

프런티어는 ‘역사적 자연’으로 생산된 지대를 일컫는다. ‘식민지’ 개념과 유사하지만, 무어의 프런티어 개념은 ‘식민지’가 갖는 국가적 영토성의 구획이나 자연-사회 이분법을 넘어 전유의 지대를 여성, 동물, 원주민의 몸(oikos)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의 생명의 일/에너지가 생산되고 전유되는 모든 곳이 ‘프런티어’라고 불릴 수 있겠다. 문제는 1492년 신대륙 침략 이후로 자본에 의해 끝없이 갱신된 프런티어의 팽창이 이제 지리적-공간적으로는 더 이상 개발할 곳이 없이 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위기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본 축적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상의 자연을 계속 생산해냄으로써만 지속 가능한 체제다. 그런 점에서 무어는 생태주의적 서사가 말하듯이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연을 적극 생산하려는 동력을 가졌다고 본다. 지금까지 반신자유주의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자본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으로 불러들여 상품화하고 있다는 ‘자본화의 법칙’이다.

그런데 무어는 반대로 자연을 자본화하지 않으려는 동력이 자본 축적의 원리에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화의 회로 안으로 들어오면, 지금까지 무상으로 누렸던 생명의 일/에너지에 대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가내 노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본은 돌봄 노동을 자본의 회로 속에 넣어 ‘저렴한 노동’으로 상품화하면서 동시에 ‘무상의 일/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연의 영역으로도 남겨놓는다. 이러한 이중착취는 여성에게는 동일한 일이 무상 노동과 유상 노동의 2교대 근무를 강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시장에선 저임금의 청소노동자나 가사도우미로 착취당하고, 가내노동에서는 무상으로 전유당하며 저임금 노동시장을 다시 떠받치는 것이다. 농민이나 소자영업자들의 노동도 동일한 방식으로 착취와 전유의 이중적 구조 속에 놓여있다. 농업과 농민도 자본의 회로 속에서 농산업체의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완전히 흡수하는 것보다는 무상 전유가 가능한 프런티어로 생산하는 것이 자본으로서는 더 ‘저렴한’ 것이다. 이런 착취와 전유 사이의 2교대, 3교대 노동은 신체로부터 시간을 탈취하는 기술이다. 무어는 이것이 지리적 공간적 포화에 도달한 프런티어를 대체하기 위해 자본이 찾아낸 ‘시간의 식민지’라고 말한다. 이제 남은 것은 생명의 일/에너지에서 ‘시간’을 추출하는 것뿐이다. 강제적 노동과 자발적 노동, 임금 노동과 무상 노동, 공적 업무와 사적 업무의 끊임없는 전환과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출된다. 자본은 시간을 압축하고, 미래를 담보로 잡는다. 금융자본주의의 ‘투자’ 패러다임은 생명으로부터 미래의 일/에너지를 채굴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오늘날 자본의 축적은 자본화보다는 자연화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자연화란 녹색 사상에서 말하는 생태주의적 회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서 모든 신체를 ‘사케르(sacer)’의 의미로서 신성하게(자연(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플랫폼 노동’에서 자유노동자(free worker)라 불리는 형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무어의 ‘자본화’ 개념은 자본의 회로로 편입시킨다는 뜻이다. 농민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것이 자본화라면, 자본과 노동의 임노동 관계를 해소하여 프롤레타리아를 기업적 신체(또는 신체적 기업, corporation-corpus)로 전환시키는 것은 대표적인 자연화 방식이다. 이제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자기의 사장인 자신에게 착취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노동을 외부의 자본에 전유 당한다. 농민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상품 생산자로서 자본의 회로 안에서 착취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약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자연 신체)로서 자연의 회로 안에서 노동을 전유 당한다. 노동생산물은 자본화(상품화)되지만 노동은 자연화 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자본의 마술에 숨겨진 비밀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은 프런티어의 저항에 직면하여 자본의 착취와 전유의 이중 전략도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다. 싼 식량도, 싼 토지도, 싼 노동력도, 싼 에너지도, 더 이상 없다. 무어는 지금까지는 ‘금융화’와 ‘재생산 영역에서 자본화의 심화’(돌봄, 식품, 의료, 교육의 자본화)가 자본주의의 파국을 지연시키는 방법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책은 물음으로 끝난다. 어쩌면 이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이 내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지연된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생명의 일/에너지가 계속 고갈되어 갈 것이라는 뜻이다. ‘혁신’이 자본의 지연 출구로 이용될 때, 그것은 새로운 지옥을 열어서 오래된 지옥을 철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기술주의적 혁신론에 노정된 위험이 바로 그런 것이다. 탄소에서 탈탄소로, 화석 연료에서 재생 에너지로, 노멀에서 뉴 노멀로, ‘바꿔 끼우는’ 것이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본의 운동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 역시 새로운 자연의 매트릭스를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전 세계 노동자들이 인터내셔널 운동으로 연재하고 저항했듯이, ‘인터-내셔널 inter-national’ 연대를 ‘인터-스피시즈inter-species’ 즉 ‘종간 연대’로 전환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내셔널 워커스를 인터스피시즈 워커스로 확장·재구성하는 상상을 해 볼 수는 없을까. 누가 노동자(workers)인가? 무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치 관계 안에서 ‘일을 하는’ 모든 생명 활동”(354쪽)이라고. 노동을 이렇게 재 정의할 때 전유당하기만 했던 일/에너지와 그 가치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나는 연재하고 있는 ‘워커스 사전’에서 ‘동물’ 개념을 다루면서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돼지와 단결하자.” 무어가 책 속에서 인용하는 “동물은 노동계급의 일원인가?”라는 질문도 그런 맥락과 연결된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영토주의의 논리를 넘어 일국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와 단결할 수 있었다면,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동물(생명)들이 자본에 맞서 함께 생명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법도 없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을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생명의 논리, 해방의 논리로 재구성하는 지식, 과학, 문화의 전략이 필요하다. 무어의 이 책도 그것을 위한 중요한 학문적 기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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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 제이슨 W. 무어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