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10.08] 인류세 지도작성학 개론 / 박준영(수유너머 10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강사)

서평
작성자
갈무리
작성일
2020-10-13 21:10
조회
28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10.08] 인류세 지도작성학 개론 / 박준영(수유너머 10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강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40


COVID-19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천명되는 시점에 철학자들에게 분명해진 것이 있다. 더 이상 휴머니즘 따위를 진지하게 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다. 사르트르가 1930년대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테제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지 한 세기가 채 안 되어, 어느덧 ‘휴머니즘’이란 단어는 발화되면 좌중을 썰렁하게 하는 농담이 되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제 철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 인류가 지구에 궤적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의 시기)라는 지질학적으로 상대화된 관점 안에 ‘인간’을 기입하고, 생태론을 전개할 필요성 앞에 서 있다. 적실하게도, 브라이언트는 이 인류세의 생태론을 아주 쾌활하고 생생하게 (말 그대로!) ‘상연’한다. 생성의 무용술(choreography of becoming)을 펼치듯이 인간의 죽음이 선언된 폐허 위에서 가볍게 또는 진중하게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따라 춤을 추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막 토슈즈를 신고 입장한 인류세 발레리나의 동선과 신체선을 위한 지도작성학인 셈이다.

우선 브라이언트(Levi Bryant) 자신만의 특이점을 살펴보자. 그는 휴머니즘이 ‘인식적 폐쇄성’에 갇힌 구제불능의 인간중심주의이므로, 철학의 주제는 이제 ‘에일리언’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105-106).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사람들은 퍼뜩 영화 《에얼리언》에서 시고니 위버와 혈투를 벌인 외계생명체를 떠올릴 듯 싶다), 브라이언트는 정색을 한 채로 우리에게 묻는다. “대안적 삶과 움직임의 가능성 (...) 새로운 시공간의 고랑을 개방하기 위해 걸림돌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10) 여기서 걸림돌은 물론 인간중심주의, 주/객 이분법 더 나아가 자연/문화, 성별 이분법이다. 그리고 대안적 삶, 새로운 시공간이란 바로 해방의 시공간이다!

브라이언트는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를 따라 이 질문에 답하는 철학을 ‘에일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에일리언’이란 “모기, 나무, 바위, 컴퓨터 게임, 기관 등과 같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들을 가리킨다(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들에 대해 느낀 ‘공포’를 상기해 보면 재미있는 대조가 느껴진다). 여기에 ‘현상학’이 붙는 것은 이 에일리언들이 “주변 세계를 맞닥뜨리는 방식을 탐구”한다는 의미다.

예컨대 에일리언 현상학은 “줄기 두꺼비가 우리에게 어떠한지 묻기보다는 오히려 세계가 줄기 두꺼비에 어떠한지 묻는다”(103). 이 현상학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내 눈 앞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두꺼비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저 두꺼비가 차가운 바닥을 쓸고 갈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묻기 때문이다. 후자의 물음에는 ‘나’는 그저 ‘묻는 자’로 부차화된다. 거기에는 바닥과 두꺼비의 뱃가죽, 더 나아가 대지와 두꺼비-유기체의 상호작용과 그 결과 엉금거리는 경로가 중요하다. 놀라운 것은 이 심드렁해 보이는 사태에서 ‘인간’을 국지화하는 순간, 세계의 배치가 달리 보이고, 정치적 실천의 프로그램이 특이한 방식으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잘 것 없이 국지화된 세계는 언뜻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자아편향 증상에 빠졌던 주체가 백신 처방의 예후를 겪는 것과 같다. 순간적인 약시현상은 “세계에 현존하는 온갖 흐름”(105)에 느닷없이 노출되었음을 확인하는 ‘좋은’ 증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눈이 밝아졌을 때 보이는 이 확연한 세계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브라이언트는 ‘기계 회집체’(machine-assemblage)라고 답한다. 세계는 기계다! 그러면 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론이 필요한가? 그 기계-회집체에 대한 ‘열역학 정치학’(thermodynamic politics)이다. 이에 따르면 기계 회집체로서의 세계는 열역학적 흐름이 좌우한다.

브라이언트는 이 흐름이 작동하는 방식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한다. 기계들, 다시 말해 존재자들은 시시각각 다른 기호적, 물질적, 상징적 흐름과 마주친다. 이 마주침 속에서 각각의 기계들은 “구조적 개방성과 조작적 폐쇄성”(101)이라는 역능을 발휘하는데, 흐름은 이에 따라 절단되거나 변형되거나 가속되고, 감속된다. 예컨대 앞서 바닥에서 빈둥거리던 두꺼비를 보자. 이 유기체가 포식자-기계로서의 뱀을 만나면 이제 평화롭고 께느른한 유기체에서 하나의 표독스럽고 악착스러운 방어자이자 기민한 공격자로 변형된다. 두꺼비-기계는 뱀과 전쟁상태에 들어서는데, 이때 뱀-두꺼비는 막 적대적인 회집체가 되며, 두꺼비는 독을 뿜어냄으로써 회집체를 다시 변형할 수 있다. 팽팽한 긴장감 안에서 뱀-두꺼비 회집체는 각각 생존본능, 신체의 이동과 속도, 독(毒)과 같은 유무형의 흐름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서로가 공생하는 회집체(예컨대 악어와 악어새 같은)도 상상할 수 있으며, 이 뱀과 두꺼비 각각이 자신만의 기관들(oragans)을 가진 기계-회집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열역학 정치에서 역량(puissance)이란 이런 흐름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렇게 해서 전체 사회기계를 변형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현상유지할 수도 있다. 열역학 정치학에서 전자는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것이고 후자는 낮아지는 것이다. 전자는 혁명 기계의 작동방식이며, 후자는 강도 0의 파시즘에 근접한다. 여기서 기계의 기능부전이나 소요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것이 더 온당하다. 그것은 “기계를 형성하는 통일체에 매끄럽게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로서 “어느 때나 분출”될 수 있다(129-30). 대개의 사회기계들은 그 부분기계들을 길들이려고 하겠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절대 실현되지 않는 하나의 이상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부분들 사이에는 은밀한 음모와 기계적 간계, 작은 반역 행위, 엉큼한 불복종 행위가 언제나 존재한다. 이와 같은 완벽한 배치의 실패는 결코 근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의 본질적인 창조성의 일부다”(130).

은밀하고, 엉큼한 창조 행위들, 그리고 순진한 목적을 가진 간계들과 반역행위들은 지배계급의 욕구가 흘러가는 회집체에 흠집을 낸다. 더 나아가 이 행위들은 지배적 기계들 자체의 물리적 흐름을 파탄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재벌이 “어처구니없는 노동관행과 정치적 관행, 환경적 관행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게”(118)하기 위해 재벌 총수를 기소하고, 재판에 넘기고, 대법원까지 이르는 지루한 여정을 통해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지금 당장 총수가 아니라 재벌-기계 자체의 흐름을 끊기 위해 불매운동을 하고 파업을 일삼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러한 수행들은 거대 기계의 생산과 유통 두 관건적인 흐름 모두를 “정지시킴으로써 기업-기계가 이윤을 창출하는 조작에 종사하지 못하게 막는다.” 한없이 유예되는 사법절차의 기만을 조기에 패퇴시키고, 입법을 독려하는 헛된 제스처를 반복하기보다 기계의 흐름에 집중하고, 그것을 창조적인 역량으로 절단(cut-out)해 내는 것이 더 이득이다. 이와 같이 “열역학 정치란 어떤 기계의 에너지원과 작업 역량을 겨냥하는 정치적 개입 형식이다”(119).

사실상 브라이언트에게 존재론이란 이 정치적 설계도에 기여하기 위한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가 즐겨 인용하는 이안 보고스트의 말처럼 “모든 사물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지만, 모든 사물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79; Levi Bryant, The Democracy of Objects, Open Humanities Press, 2011, 289). 문제는 ‘동등하다’가 아니라 ‘동등하지 않은 이 사태’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된 존재론은 소위 ‘평면 존재론’(flat ontology)이라 불린다. 하지만 “평면 존재론은 모든 객체들이 동등하게 기여한다는 것이 아니다”(Bryant, 2011, 290). 따라서 “더 만족스럽고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새로운 회집체를 구성”(422)하는 것이 존재지리학의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다.

이 새로운 회집체는 무엇보다 “포스트휴먼주의적 틀”(432)을 요구한다. 이 틀은 인간중심주의 뿐 아니라 ‘인간예외주의’(중심은 아니지만 예외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신화)라는 보다 간교한 이데올로기도 비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건데 전지구적 생태질서를 그토록 교란할 특권을 누려왔단 말인가? 설마 그의 빙퉁그러진 욕망을 후원하는 ‘신’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인가? 작금의 생태 위기를 감안한다면 아마 그 신은 복수의 신(Nemesis)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브라이언트 존재지도학의 대계(大系)는 이제 시작이다. 이 책을 필두로 그는 분명 가장 명쾌하고 지속가능한 존재지도학을 더 무궁무진하게 펼쳐낼 것이다.

글.박준영
수유너머 104 회원. 현대철학 연구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강사. 학부에서는 불교철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는 프랑스철학을 연구했다. 대학원 연구 과정에서는 주로 들뢰즈(Deleuze)와 리쾨르(Ricoeur)의 철학을 종합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최근에는 ‘신유물론에 관심을 가지고 번역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가속주의(Accelerationism) 정치철학과 육후이(Yuk Hui)의 기술철학도 연구 대상이다. 동서양 철학 개념들이 갈마들고 창발하는 철학적 사유에 대해 생각중이기도 하다. 『해석에 대하여-프로이트에 관한 시론』(공역, 인간사랑, 2013)을 번역하였고, 「들뢰즈에게서 ‘철학’과 ‘철학자’」(진보평론, 2019, 82호) 등의 논문을 썼으며, 『욕망, 고전으로 생각하다』(공저, 너머학교, 2016), 『사랑, 고전으로 생각하다』(공저, 너머학교, 2016) 등의 글을 썼다.



8961952196_1.jpg

『존재의 지도』 | 레비 R. 브라이언트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