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제] 11/17 석기시대 경 제 학 제3장. 가족제 생산양식: 생산의 강화

작성자
greywolf
작성일
2020-11-17 04:41
조회
482
인류학 세미나 / 2020년 11월 17일 화요일 /
텍스트: 석기시대 경제학 / 마셜 살린스 지음/ 박 충환 옮김 / 한울 아카데미

제 3장
가족제 생산양식
생산의 강화

‘생산관계’와 ‘생산력’ 간의 원시적인 모순이 가내 생산체계의 토대이자 내재적인 조건이다. 다시 말해, 가내적 통제라는 생산관계가 생산수단의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또 다른 차원의 모순과 겹쳐짐으로써 상쇄되는데, 후자는 가내경제와 전체 사회, 즉 가내체계와 그것이 속해 있는 더 큰 제도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다. 원시사회에는 친족과 추장제, 그리고 심지어 의례적 질서조차도 그것들이 달리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특정한 경제적 힘의 형태로 나타난다. 경제적 강화라는 거시적 전략은 가족의 범위를 초월하여 사회구조를 작동시키고 생산을 초월하여 문화적 상부구조가 기능하도록 한다. 결국 이러한 모순들의 위서체계의 최종적인 물질적 산물은 여전히 기술적인 역량 이하이긴 하지만 가내생산의 내재적인 성향을 초월한다. (156쪽)

친족의 하부구조적 수준에서 주요 생산조직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원시 사회에서 직면하는 딜레마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이 달레마는 바로 이론적으로 경제적 토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질적으로 상부구조인 친족관계가 지배적인 경제관계라는 사실 사이에 존재한다. 상부구조/하부구조 구분을 상이한 유형의 제도적 질서(경제,친족)로부터 친족의 상이한 질서들(가구 대 종족,씨족)로 치환한 것이 앞 단락의 요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56쪽- 각주1)

가내생산의 사회적 굴절 분석방법에 관하여

사용을 위한 가내생산체계에서 이론적으로 노동자 1인당 노동강도는 가구의 노동자 대 소비자 비율에 정비례해서 증가한다.(차야노프의 법칙) 즉, 소비자의 상대적 수가 많을수록 각각의 평균적인 생산자는 전체 가구에 적절한 1인당 산출을 조달하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 수가 상대적으로 작은 가내집단이 오히려 더 태만한 성향을 보여준다는 경험적 사실만으로도 실재가 법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 수가 상대적으로 작은 가구의 노동강도가 이론적 기대치보다 오히려 낮게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차야노프의 노동강도 기울기가 공동체의 실질적이고 전체적인 사회구조 수준에서는 구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한 가구는 친족적. 정치적 관계로 인해 타 가구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위치에 있어서 통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이 가내적 태만의 일부 혹은 적어도 그 태만의 수용 가능성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 한 사회체계의 가구 노동강도는 특수한 구조와 굴절을 보여주는데, 이는 차야노프의 표준 노동강도 기울기에서 독특한 범위와 방식으로 벗어난다. (157쪽)

촌락의 저생산은 산술적으로 분명하게 논증된다. 일부 가내 집단이 표준 노동강도 이상으로 기능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가내집단은 표준 이하로 기능하고 있어서 촌락 전체의 산출이 약간 마이너스 균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포는 전혀 우연적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의 전체적인 프로파일은 가구의 경험적 노동강도 기울기뿐만 아니라 표준 노동강도 기울기에도 투사되어 있고, 가내 잉여의 차원뿐만 아니라 가내 저생산의 차원에도 구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통합적인 사회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부 가구의 표준 노동강도 이하의 산출은 나머지 가구의 잉여노동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자료의 범위 내에서 보면 가구의 경제적 실패는 질병, 사망,유럽의 영향 같이 생산조직에 외적인 조건들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일부 가족이 전적으로 자체의 원인 때문에 성공할 능력이 없다고 판명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한 실패를 성공과 완전히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일부 가구는 다른 가구에게 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준 산출을 달성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서 비롯된 저생산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이들 취약한 가구가 나머지 가구의 잉여 노동강도에 의존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역동적인 상황에서 초래될 수 있는 가구의 비극이라는 사회적 사건을 미리 예견하고 그에 대비하는 것이 된다. (169쪽)

친족과 경제적 강화

여기서 가족제 생산양식, 즉 권력과 생산수단이 분절적이면서 소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생활양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원시적 형태의 사회계약을 엿볼수 있다. 하지만 또한 상이한 친족체계가 다양한 수준의 견인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상이한 수준의 공간적 응집력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상이한 친족체계는 상이한 정도로 가내생산의 분절화를 극복하고 또 그 범위 내에서 점유한 영토의 부양능력과 이용 정도를 결정한다.
더욱이 가족제 생산양식에 분절적인 성향이 내재해 있는 한 원시사회의 친족결속이 무차별적일 수는 없다. 심지어 하와이 친족체계도 단지 형식적으로만 일반적 친화성을 보여줄 뿐이고, 실제로는 차별적으로 사회적 거리를 구분하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와이의 가구는 더 큰 공동체속에 결코 전적으로 함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가내적 결속이 더 광범위한 친족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이는 곧 원시사회와 경제에 내재하는 항구적인 모순이지만 그렇게 현저하지는 않다. 통상 이 모순은 친족관계의 광범위한 영역까지 확장되는 친교관계를 통해 억제되고 호혜성이라는 맹목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신비화되어 희미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모순은 가족과 가족보다 큰 공동체를 관통하는 사회적 원리의 연속성, 즉 종족 구성원들이 종족을 더 큰 규모의 가구로, 그리고 추장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만드는 조직상의 조화에 의해 은닉되어버린다. (179쪽)

마줄루의 속담에 담겨 있는 이들 모순은 사회의 실제적인 갈등, 즉 ‘나란히 작동하지만 정반대로 대립하는 행위의 두가지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퍼스는 그러한 모순들을 단순한 사회적 사실로 분석하는 데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대신 경제학에서는 이미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종류의 ‘미숙한 인류학’ 을 채택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과 문화 사이, 즉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과 ‘사회집단의 표면적 도덕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었다. 아마 레비스트로스라면 그 모델이 결국 마오리 사회에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속담들이 날것과 요리된 것의 관계가 소유와 분배의 관계와 같다는 점, 즉 자연과 문화의 관계가 분배거부와 호혜성의 관계와 동일하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후에 퍼스가 마오리 경제에 관해 수행한 상세한 분석은 원리의 대립이 왜 하필이면 이들 대 먼 친척이라는 계열을 따라 묘사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확장된 친족관계와
‘마오리 경제의 기본단위’인 가구, 즉 와나우(whanau)의 내적인 자기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었다. (181쪽)

이들 원시 사회내에서 가구가 차지하는 위상은 가족 구성원의 복지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더욱 광범위한 친족구성원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항상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타협해야 하는 항구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고 지속적인 방향조정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182쪽)

가족범주가 광범위하게 확장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회적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친족의 사회적 구속력도 약화된다는 주장은 충분한 설명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다지 논리적인 설명도 아니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분절적인 분리가 더 적절한 설명일 수 있다. 친족유대의 이와 같은 소실에 기능과 한계를 부여하고 ‘아들’과 ‘먼 친적’의 구분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박애의 원리가 시작하는 지점인 가내집단, 즉 가정의 경제적 결정이다. ‘친족거리’의 첫번째 전제는 바로 가족제 생산양식이다. (183쪽)

가족제 생산양식은 중화되고 초월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협력이라는 기술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가내경제가 사적으로는 궁지에 빠지기 쉽고 공적으로는 압력을 받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기능적인만큼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광범위한 친족체계는 가족제 생산양식을 중화시키는 중요한 기제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가내경제의 지속적인 중요성은 사회 전체에 표식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친족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으로서 이는 결코 이면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미묘한 방식으로 일상적인 재화의 처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발생했을 때는 경제 전체를 분절적 해체의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표면화된다. (186쪽)

정치적 질서의 경제적 강화

원시 정치경제의 이러한 측면에 관해 개괄적으로 논의해보도록 하자. 모든 것은 가족제 생산양식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원심적 경향을 정치적으로 부정하는데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그리고 다른 모든 요소가 동일하다면), 한 사회가 달성하는 생산역량의 근사치는 두 종류의 경쟁적인 정치적 원리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다. 그중 하나는 일종의 반사적 평화기제)로서 가족제 생산 양식에 내재하는 원심적인 분산이고, 다른 하나는 우세한 위계와 동맹제도를 통해 구축되는 조화이다. (188쪽)

여기서 우리가 문제시하는 정치적 권위는 기껏해야 이름뿐인 ‘추장’이다. 통상적으로 왕권이 국가라는 정치적 질서의 파생물인 것처럼 추장권은 친족적 질서의 정치적 파생물이다. 더욱이 가장 발달한 형태인 추장권에 적용되는 사실은 다른 모든 종류의 부족적 지도자에게도 당연히 적용된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 친족연망 내에서 일정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리고 구조적.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우두머리의 경제적 역할은 단지 친족적 도덕성의 분화에 지나지 않는다. (189쪽)

이러한 분배과정에서 우두머리가 보여주는 호의적 관심과 그것을 통해 축적되는 정치적 에너지는 그가 활동하는 친족관계의 장에서 생성된다. 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바로 위세의 문제이다. 한 사회가 사회적으로 친족관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만큼 도덕적으로는 관대성에 무게를 둔다. (191쪽)

친족은 호혜성과 상호부조를 통해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이다. 따라서 관대성은 명백한 채무의 부과로서 선물에 대한 보답이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 줄곧 수증자가 증여자에 대해 신중하고 책임 있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증여자와 수증자라는 경제적 관계는 지도자와 추종자라는 정치적 관계와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작동원리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바로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관대성을 ‘이데올로기’라고 표현한 것은 애초에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더욱 커다란 이상, 즉 호혜성과의 모순을 통해 처음부터 그런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등급관계는 항상 한 사회의 질적 특성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충실하기 때문에 보상적인 성격을 가진다.
(191쪽~192쪽)

게다가 등급관계는 물질적 불균형을 은폐하는데, 이는 다른 종류의 보상을 통해 합리화되겠지만, 여하튼 호혜성의 부정을 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추장의 관대성은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물질적 불균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것이다. 체계에 따라 그러한 물질적 불균형은 우두머리 측 아니면 주민 측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실제적 착취와 규범적 호혜성의 결합이리는 측면에서 볼 때 원시 사회의 정치경제는 다른 어떤 종류의 정치경제와도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곳에서 착취의 토착적 범주는 다름 아닌 ‘호혜성’이다.
(192쪽~193쪽)

좀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 고려해보면, 관대함과 동시에 호혜적인 추장직의 이데올로기적 모호성은 원시 귀족제의 모순, 즉 권력과 친족간의 모순, 그리고 우호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193쪽)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모호성에는 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추장의 관대성이라는 윤리는 불평등을 신성화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호혜성이라는 이상은 어떠한 차이도 만들어내기를 거부한다. (193쪽)

더욱 발달된 추장권이 마오리족에서만 특별히 관찰되는 현상은 아니다. 이러한 더욱 발달된 추장권하에서 이루어지는 재분배가 추장에게 물질적 이익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인 은유를 사용하면, 우두머리가 될 목적으로 자신의 생산을 타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자신의 생산을 일정 정도 추장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타자와 함께 끝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호혜성과 추장의 관대성이라는 이상은 사람들의 종속을 신비화하는데 기여한다.
(201쪽)

하지만 이러한 가족적 교환은 사회적으로 여전히 유용하고 추장의 재분배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재분배되는 재화의 다양성과 시기를 고려해서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구체적인 이익에 대해 고마워한다. 여하튼 때때로 추장에게 귀속되는 물질적 이익이 그 제도의 주된 의미는 아니다. 의미는 바로 추장이 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한 부를 통해 그에게 부여되는 권력이다. 그리고 더 큰 관점에서 보면 추장은 공동체적 복지의 후원과 공동체적 활동의 조직을 통해, 분리되어 있는 가내집단들의 상상력과 역량을 초월해서 사회의 집단적 이익을 창출해낸다. 추장은 가구라는 구성부분의 총합보다 더 큰 공공경제를 제도화한다.
이러한 집단적 이익은 또한 가구 부문의 희생 위에서 성립한다. 인류학자들은 기계적으로 추장권의 출현을 잉여생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추장권의 출현과 잉여생산의 관계는 적어도 역사적 과정에서는 상호적이지만 원시사회의 작동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나타난다. 리더십은 가내잉여를 지속적으로 창출해낸다. 등급과 추장권의 발달은 동시에 생산력의 발달과 연결된다. (201쪽~202쪽)

다시 말하면 추장이 가내경제에 부과하는 부담은 그 사회의 친족배열과 맞물려 있는 도덕적 한계가 설정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추장의 정당한 보수가 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억압이 된다. 이러한 조직은 추장을 위한 노동배분과 가내부문을 위한 노동배분 사이에 적절한 비율을 설정한다. 그것은 또한 추장이 주민의 재화를 보유하는 것과 주민에게 재분배하는 것 사이에도 적절한 비율을 설정한다. 체계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오직 약간의 불균형만을 용납한다. (211쪽~212쪽)

비교론적 관점에서 보면 하와이의 정치조직에 내재하는 커다란 한계는 그 원시성, 즉 그것이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와이 체계의 진보는 오직 국가로의 진화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였다. 하와이 사회가 생산과 정치체계를 확대할 수 있는 능력 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도달할 수는 있지만 결코 초월할 수는 없는 원시사회의 고유한 경계 그 자체였을 것이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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