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0_발제] 철학이란 무엇인가(145-166)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21-01-10 09:37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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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과 그리스 도시와의 결합 / 현대철학과 자본주의의 결합
현대철학의 구원을 위해서는, 고대철학이 도시의 친구가 아니었듯이 철학이 더 이상 자본주의의 친구일 수 없다.

독재적인 혹은 초월성에 의한 유토피아 vs 자발적, 혁명적, 내재적 유토피아 의 분리
그러나 혁명은 그 자체가 내재성의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은 꿈이거나 실현될 수 없는 혹은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고서는 / 실현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내재성의 구도로서, 무한한 운동으로서, 절대 조감으로서 정립시키는 것이되, 단 이는 그러한 특질들이 /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서 / 지금-여기에 실재하는 그 무엇과 연루되어야 하며, 앞서의 혁명이 배반당할 때마다 / 새로운 투쟁들을 다시 시작한다는 조건에 한해서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란 단어는 철학 또는 개념과 현재 환경과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정치적 철학이다. (사무엘 버틀러의 단어 ‘Erewhon’ : ‘아무 곳에도 없는(No-where)’ 그리고 ‘지금 여기(Now-here’))

혁명이란, 그 탈영토화가 새로운 땅, 새로운 민족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절대적인 탈영토화이다.
재영토화 없는 탈영토화란 있을 수 없다. 철학은 개념을 재영토화한다. 개념이란 대상이 아니라 영토이다. 그것은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토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도취되어 구축했던 내재성의 구도를 제대로 붙잡고 있었지만, 동방의 형상들로 다시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 구도를 어떠한 개념들로 채워야 할지를 찾아 헤매야 만 했다. 반면에 우리는 수세기 동안 서구적 사유를 거쳐 개념들을 소유하고,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거의 모르고 있다. 기독교의 초월성에 마음이 쏠린 나머지 진정한 구도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 오늘날의 우리는 개념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인들은 아직 개념들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구도를 갖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더이상 구도가 없다. (...) 바로 이 점이 횔덜린이 그토록 의미심장하게 표현했던 바로서, 그리스인들에게 ‘생래적’인 것이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라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며, 반면에 우리들에게 ‘생래적’인 것이 그리스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기에 획득해야만 했던 것이다. (...) 더이상 원주민과 이방인은 서로 다른 두 인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고 동일한 이중적인 한 인물로 나뉘어져, 그가 번갈아가며 현재와 과거라는 두 개의 판본으로 이분된다. 즉 원주민이었던 자가 이방인이 되며 이방인이었던 자는 원주민이 된다.

# 지리철학
철학적 재영토화는 따라서 현재의 형식 또한 갖는다. (...) 실제로 인간으로서 하나의 국가를 갖는 것은 철학자만이 아니다. 철학 역시 국가와 국민의 정신 위에서 (대개는 철학자의 국가와 정신이겠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재영토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프랑스의, 영국의, 독일의 철학에 대해서 국가적 특성들을 규정하고자 하는 지리-철학을 기초했다.

아마도 스페인은 교단에 지나치게 종속적이었고 이탈리아는 교황청에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영국과 독일을 정신적으로 구원한 것은 아마도 천주교와의 결별일는지도 모르며, 프랑스의 경우는 교회의 독립주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형태란 이렇게 언술된다 : 우리는 개념들을 갖고 있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아직 그 개념들을 갖지 못한 채, 먼 발치에서 관조하거나 예견할 뿐이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 인권을 표방하는 세 개의 대지들을 구현
1. 영국 : 끊임없이 혁명의 체험을 성찰하며, 정신 속에서는 그토록 전도양양하던 혁명들이 어째서 실제에 있어서는 그다지 엉뚱하게 방향전환을 하게 되는지를 자문하는 최초의 국가
2. 프랑스 : 정신들의 공화국과 ‘가장 널리 공유된 것’으로서의 사유하는 능력을 표방
3. 미국 : 프랑스에서는 그토록 인정받지 못했던 실용주의의 철학적 사고가, 민주적 혁명과 새로운 형제들의 사회의 연장선상에 놓임

독일 : 자신이 할 수 없는 것(프랑스 혁명)을 생각하는 것(자신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업을 삼음.

: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철학은 한 민중의 정신과 그의 권리에 대한 개념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만 현대사회 안에서의 재영토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역사는 국가적 아니 차라리 국가주의적인 성격들이 두드러지며, 이러한 성격들은 마치 철학적 ‘견해들’과 같다.

예 8)
우리 현대인들이 개념은 소유하지만, 내재성의 구도는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창설하다-토대를 세우다-거주하다 (삼위일체)
1. 토대를 다진 프랑스 : 그러나 철학에서의 프랑스적 특성은 반성적 인식의 단순한 질서, 이성들의 질서, 즉 ‘인식론’에 의해 개념을 견지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경향이 있다. (...) 프랑스인들은 코기토의 지대를 챙기는 영주들과 같다. 그들은 언제나 의식 위에서 재영토화한다.
2. 창설한 독일 : 반대로 독일은 결코 절대를 포기하는 법이 없다. 의식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것은 탈영토화의 수단으로서이다. 독일은, 그리스인들이 사라지고 난 뒤 유목민들에게 넘어간 무정부의 혼란스러운 땅, 이제는 자신이 갈고 다스려야 할 / 그 자신의 미개척지처럼 느껴지는 그러한 미지의 땅인 그리스의 내재성의 구도를 되찾고자 한다. (...) 즉 그리스인들이 원주민들을 통해 소유했던 것을 독일은 정복과 창설에 의해 소유한다. 비록 내재적 내재성을 다른 무언가에, 철학자의 행위 자체에, 철학하는 주관성 자체에 내어줄 망정 말이다.
3. 거주하는 영국 : 영국은 독일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이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내재성의 구도를 / 이동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토양이나 경험의 근본적인 장으로 , 바다 위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다니며 천막을 치기만 하면 되는 / 열도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로 취급하는 바로 그 유목민들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조각나고 분할되고 전세계로 확장된 오래 전 그리스의 땅 위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심지어 그들은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들처럼 개념을 소유했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체험을 통해 개념을 획득하며, 획득된 것만을 믿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의미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 아니라, 살며, 천막을 치며, 습관을 익혀 가면서 개념을 체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텐트만 있으면 된다. 그들은 <비범한 개념화의 습관>이 있다. 즉 관조함으로써 그리고 관조하는 바를 몸에 배게 함으로써 습관들을 익힌다. 습관이란 창조적이다. (...) 개념이란 진행되는 요소들을 관조함으로써 획득되는 습관이다. 우리들 모두는 관조들이며 고로, 습관들이다. 나는 하나의 습관이다. 습관이 있는 어디에나 개념이 있게 마련이며, 습관들은 기보적 경험의 내재성의 구도 위에서 만들어지고 해채된다. 이것이 곧 ‘관습들’(conventions)이다.그러므로 영국 철학은 개념들의 자유분방하고 야생적인 창조이다.

하나의 명제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어떤 관습에서 비롯되는가? 그 개념을 구축하는 습관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실용주의의 질문이다.

#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현대철학
독일 철학의 창설의 꿈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민주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있어서 보편적인 유일한 것은 오로지 시장이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초기호체계들을 행했던 고대국가들과는 반대로, 자본주의는 기호이탈의 흐름(돈, 노동, 상품의 흐름)에 내재하는 공리로서 기능한다. 국가들은 더 이상 초기호체계의 계열체가 아니라, 이러한 내재적 공리의 ‘실행 모델’들을 구축할 따름이다. (...) 그것은 마치 국가들의 탈영토화가 자본의 탈영토화를 제어하고, 그 보상으로 자본에 재영토화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실행모델들은 매우 다양하며 (민주적, 독재적, 전제적...) 현실적으로는 혼합될 수도 있지만, 세계 시장과 관련해서 보면, 그 세계 시장이 / 발전의 결정적인 불균등들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 그러한 불균등을 산출해내기도 하는 한, 이형동질들일 뿐이다. 흔히들 지적하는 바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민주국가들은 독재국가들과 너무도 밀착되어 타협하게 되며 그래서 인권의 옹호는 반드시 모든 민주주의의 내적 비판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 나치즘과 집단 수용소, 그리고 수치심
프리모 레비 : 나치즘과 집단 수용소들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그 이상이거나 그 이하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수치’이다
인권은 공리들이다. 그것은 시장 위에서, 인권에 역행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인권을 아예 무시하거나 유예시키는 다른 많은 공리들, 특히 소유보장에 관한 공리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다. 니체는 이것을 ‘불순한 뒤섞임 혹은 나란히 공존하는 불순’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들과 공존하는 막강한 경찰과 군대가 아니면 그 누가 빈곤과 빈민가들의 탈영토화-재영토화를 통제하고 관리하겠는가? (...) 비단 프리모 레비에 의해 묘사된 극단적 상황들에서 뿐만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조건들에서조차, 즉 민주주의들에 붙어다니는 존재의 야비함과 비속함 앞에서, 그러한 존재양식과 시장을 -위한- 사유 양식들의 파급에 당면하여,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치들과 관념들과 의견들 앞에서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수치’를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제공된 삶의 가능성들이 가진 가증스러움은 그 내부로부터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시대를 벗어나 있다고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끊임없이 시대와 더불어 수치스러운 타협들을 묵인하고 넘어간다. 이러한 수치감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그들 앞에 서 있다. 비열함을 모면하려면 동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으르렁거리거나 땅을 파거나 비죽거리거나 와들와들 떠는). 사유 자체가, 더러는 살아 있는, 그것도 민주적인 인간에보다는 죽은 동물에 더욱 가깝다.

소통이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도는 것이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창조이다. 우리에게는 현재에 대한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 개념들의 창조는 그 자체로서 미래의 어떤 형식에 구원을 청하며,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땅과 새로운 민족을 요청한다. (...)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 것이지만, 생성은 본질상 다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개념. 그는 민족, 땅, 혈통을 착각했다. 왜냐하면 예술과 철학의 부름을 받은 인종이란 스스로 단일하다고 자처하는 인종이 아니라, 억압받고 혼혈이며 열등하고 무정부적이고 유랑하는, 어떻게 손 써 볼 수 없으리만치 적은 숫자의 인종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칸트가 새로운 비판에 이르는 길에서 제외시켰던 자들이며, 또한 아르토가 문맹자들을 위해 글을 쓰다-실어증 환자들을 위해 말하다-두뇌가 없는 자들을 위해 사유하다라고 말했을 때의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위해서’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의 의사에 따라서’도, ‘...의 입장으로’도 아니다. 그것은 ‘...의 앞에서’이다. 그것은 생성의 문제이다. 사유가는 두뇌가 없지도, 실어증 환자도 혹은 문맹자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어간다.

생쥐 한 마리의 최후 고통이나 송아지의 도살은, 동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쪽의 무언가가 저 쪽으로 이행되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교환지대로서 사유 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곧 철학과 비철학과의 구축적 관계이다. 생성은 언제나 이중적이며, 바로 그 이중의 생성이 미래의 민중과 새로운 땅을 구축한다. 비철학이 철학의 땅과 민중이 되려면 철학자가 비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버클리는 ‘천민인 우리들 아일랜드 사람은...’하는 식으로 말했다.) 민중은 사유가의 내면에 있다. 민중은 ‘생성으로서의 민중’이며, 사유가 역시 무제한의 생성으로서 민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언어와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자와 철학의 고유함 내지 ‘스타일’, 이른바 철학적 횡설수설이 아닌가? 요컨대 철학은 세 번 재영토화한다. 한번은 그리스인들에 의거하여 과거 안에서, 또 한번은 민주국가를 토대로 현재에, 그리고 다른 한번은 새로운 민중과 땅에 기초한 미래 속에서이다. 그리고 바로 이 미래라는 거울 안에서 그리스인들과 민주주의자들은 기이하게 변형된다.

생성은 개념 자체이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생겨나서 다시 역사로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니다. 생성 그 자체에는 시작도 끝도 없이 그저 환경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지리학적이다.

예 9)
역사 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거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건 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며 우리 자신도 변화한다. (...) 그것은 더 이상 역사적이거나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고 페기는 말한다. 그것은 내재적인 것이다. (...) 다시 말해 영구불변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비역사적 운집, 그것이 없다면 역사에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그러나 역사와는 구별되는 그러한 생성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촛불혁명?} (...) 즉 ‘시간을 거스르며, 그러므로 시간 위에서, (바라건대) 다가올 시간의 도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과거를 거스르며, 그리하여 현재 위에서 (바라건대) 미래의 도움으로 작요하는 것. 그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지금, 플라톤이 이미 모든 현재와 구별지어 놓은 Nun으로서, 순간이 아닌 생성으로서의 강렬함 혹은 반시대성이다. 이것이 또한 푸코가 현행적(Actual)이라 명명했던 바로 그것이 아닌가?

푸코로서는 현재와 현행적의 차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새로움, 흥미로움은 현행적이다. 현행적이란 현재의 우리들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가는 그 무엇, 되어가는 도중인 무엇, 즉 타인, 타인이 되어가는 -생성으로서의 우리이다. 반대로 현재란 지금 그대로의 우리이며,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우리가 멈추어버린 우리의 존재이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몫을 구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깊이 현재와 현행적의 몫도 구별해야 한다. 현행적이란 것이 우리의 역사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의 이상향의 예시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칸트 자신에 따르면, 이는 혁명들의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와도 구별되는 혁명적 -생성이다.)

흘러가는 각각의 현재 속에서 생성들을 진단하는 일, 이것이 바로 니체가 의사, ‘문명을 돌보는 의사’ 혹은 새로운 내재적 존재양식들의 창안자로서의 철학가에게 떠 맡겼던 소임이다. 영원의 철학과 철학의 역사는 철학적 생성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내재적(Internal), 반시대적(Intempestif), 현행적(Actuel), 이것이 바로 철학 안에 있는 개념들의 실례들이며, 본보기적 개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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