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1_발제] 철학이란 무엇인가(p.233-253)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21-01-30 22:37
조회
115
#예술은 보존하며 자체적으로 보존된다
소설의 그 페이지, 영화의 그 순간을 다시 들추어 보면, 그는 다시 미소짓고 있을 것이다.
예술은 보존하며 또한 스스로 보존되는,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다. 사실 예술은 돌, 캔버스, 화학적 색채 등 그 바탕과 재료들이 지속되는 만큼만 존속할 뿐이지만(사실문제), 예술은 보존하며 자체적으로 보존된다.(권리문제)

#예술적-사물들
그림 속의 사물은 처음부터 자신의 ‘모델’로부터 독립되지만, 또 한편 있을 수 있는 다른 인물들로부터도 독립된다. 인물들이란 그림 속의 대기를 들이마시는 그림 속의 인물들인 한, 그 자체가 예술적-사물들이다. 마찬가지로 사물은 또한 관객이나 청중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다. (...) 그렇다면 창조자와는 어떠한가? 사물은 자체적으로 스스로 보존되는 피창조물의 자립을 통하여 창조자로부터 독립된다. 스스로 보존되는 것, 사물 혹은 예술작품은 감각들의 집적, 말하자면 지각들과 정서들의 복합체이다.

#지각들-정서들
지각들(percepts)은 지각작용들(perceptions)이 아니다. 지각들은 그것을 느끼는 자들의 상태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정서들은 감정 내지 감정작용들이 아니다. 정서들(affects)은 그것들을 경험하는 자들의 힘을 벗어난다.
감각들, 지각들, 정서들은 스스로에 의해 가치를 지니며, 모든 체험을 넘어서는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인간이 부재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표현된 바 그대로의 인간이란, 그 자체가 지각들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성물(compose)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
조화들이 곧 정서이다. 협화음과 불협화음, 음조나 색채의 조화들이 음악과 회화의 정서들이다. (...) 예술가는 지각들과 정서들의 집적을 창조한다. 그러나 창조의 유일한 법칙은 구성물이 혼자 힘으로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저 홀로 서게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술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다.

#마약, 아이, 광인, 예술가
마약. 과연 그것들이 우리를 진정으로 ‘지각작용의 문턱들’까지 이끌어주는지의 문제. 마약의 자극이 가해진 구성물들 대개가 이상하게 바스러지기 쉽고, 이루어지는 동시에 혹은 바라보는 동시에 해체되리 만큼 그 스스로 보존 불가능하다는 점.
아이들의 데셍을 보고 감탄하거나 감동하지만, 그것들이 저 홀로 유지되기란 드문 일
광인의 작품들은 더러 저 홀로 지탱이 되기도 하지만, 단 무언가로 꾸역꾸역 차 있어서 조금치의 여백도 남기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이다.
그렇지만 집적들은 공기와 여백을 담을 주머니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비어 있음조차 감각이며, 모든 감각은 자신과 더불어 구성됨으로써 공백과 더불어 구성되며, 모든 것은 땅 위에서 그리고 대기 속에서 서로를 지탱하며, 또한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를 보존함으로써 공백을 보존하고 공백 안에 보존되기 때문이다.

#감각들
우리는 감각들과 더불어 그리고, 조각하고, 구성하고 쓴다. (...) 지각들로서의 감각들은 대상을 반영하는(지시작용) 지각작용들이 아니다. 만일 그것들이 무언가와 닮아 있다면, 그것은 그들 고유의 방법들이 만들어낸 유사함이며, 따라서 그림 속의 미소란 오로지 색채들, 필치들, 빛과 음영이 만들어낸 것이다. 예술작품에 유사함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감각이 오직 재료에만 관계되기 때문이다. 감각은 재료 자체의 지각이며 정서이다.

#재료(표현적)
재료상의 구도가 어떻게 불가항력적인 상승작용을 일으켜 감각 자체들의 구성의 구도를 침식해들어가 그것의 일부가 되거나 혹은 그것과 구별 불가능하게까지 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 감각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재료와 동일하지 않다. 정당하게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재료가 아니다. 재료는 단지 사실상의 조건들만을 구축할 뿐이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는 한, 자체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지각이나 정서이다. 설령 단 몇 초 동안만 존속되는 재료일 망정, 재료는 감각에게 이러한 짧은 지속과 함께 공존하는 영원함 속에서, 존재하며 자체적으로 보존될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 재료가 감각이나 지각 혹은 정서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지 않고서는, 감각이 재료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모든 재료는 표현적이 된다.> (...) 세잔이 말했듯이, 감각에 색이 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 스스로 색을 칠하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
예술의 목적은 재료의 방법들에 의해, 대상에 대한 지각작용들로부터 그리고 지각하는 주체의 상태들로부터 / 지각을 떼어내는 것이며,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전이인 감정작용들로부터 / 정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즉 감각들의 덩어리를, 하나의 순수한 감각 존재를 추려내는 것이다. (기억은 예술에 그다지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기념비
모든 예술이 하나의 기념비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여기서 기념비라 함은 과거를 함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보존을 오로지 스스로에게만 돌리며, 사건에 그 사건을 기념할 만한 구성물을 제공하는, 현재의 감각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적이다. 기념비를 쌓아가는 행위는 기억이 아니라 허구이다. 우리는 유년의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재 아이가 되어가는 - 생성들인, 유년의 집적들을 통해 글을 쓴다. (...) “기억아, 나는 너를 증오한다.” 지각이나 정서를 지각하거나 느끼는 누군가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는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들로 향해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지각이나 정서에 가 닿을 수 있다.

#몇몇 기념비적 유형들이나 감각 구성물의 ‘다양함들’
1. 단순한 감각을 특징짓는 진동 : 그러나 그것은 이미 견고해져 있거나 구성된 상태. 왜냐하면 진동은 상승하거나 하강하며, 구축적인 단계의 차이를 함의하고, 뇌세포보다도 더 예민한 보이지 않는 어떤 현을 따르기 때문이다.
2. 껴안음 혹은 몸과 몸의 어우러짐 : 두 개의 감각들이 ‘에너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어우러짐 속에서 너무나 빈틈 없이 결함됨으로써 서로 서로의 안에서 울리는 경우
3. 물러섬, 분할, 이완 : 두 개의 감각들이 서로 떨어져나가고 헐거워지는 경우. 간극이 벌어질수록 모든 방향으로 펼쳐지면서, 더 이상 그 어떤 버팀대로 필요로 하지 않는 집적을 형성하는 이음쇠처럼, 오로지 감각들 사이로 혹은 그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빛, 공기, 혹은 공백을 통해 다시 합쳐지기 위해서임.
감각을 진동시키다 - 감각을 결합시키다 - 감각을 트이게 하거나, 쪼개거나, 비어낸다.

#창조, 생성
풍경이 본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작가치고 하루의 시간, 순간의 온도를 자기 안에 간직하는 감각 존재들을(포크너의 구릉들, 톨스토이 혹은 체호프의 초원들) 창조해내지 못했던 작가가 있었는가? 지각은 인간이 부재하는, 인간 이전의 풍경이다. (...) 어떻게 도시가 인간 없이, 인간 이전에 존재할 수 있는가? (...) 이것이 바로 세잔느가 제시했던, ‘풍경 속에 부재하는,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풍경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수수께끼이다. 인물들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체가 감각 구성물의 일부가 된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작가는 그들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 도시를 지각하는 것은 델러웨이 부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마치 ‘만물을 통과하는 예리한 칼날’과도 같이 도시로 스며들어 그녀 자체를 지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각들이 (도시까지도 포함하여) 자연의 비인간적인 풍경인 것처럼, 정서들은 정확하게 바로 이러한 인간의 비안간적 생성들이다. 세잔이 말했듯이, ‘흘러가는 세상의 한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그 순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생성되고 있다. 즉 세상을 관조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비전이며 생성이다. 우리는 우주가 되어간다. 즉 동물이며 식물, 분자로 되어가고, 제로로 되어간다.
“위대한 풍경들은 모두 비전을 제시하는 특성을 지닌다. 비전이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 풍경에 다다르려면, 가능한 한 모든 시간적, 공간적, 객관적인 규정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포기는 단지 대상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일체감?) (...) 우리는 풍경을 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으며, 풍경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한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한낮에 눈을 뜬 채 꿈을 꾼다. 우리는 객관적 세계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감각이다.”

#스타일
체험된 지각작용들을 지각으로, 체험된 감정들을 정서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작가의 문장, 음악가의 음계들과 박자들, 화가의 필치와 색채들과 같은-스타일이 필요하다.
창조적 허구는 더러 부풀려지기도 하는 추억이나 환상 따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사실 소설가를 포함한 예술가는 모름지기 체험의 지각적 상태들과 감정상의 전이들을 넘어서 있다. 그는 견자이며 생성되어가는 자이다. (...) 그는 삶 속에서, 너무나 거대하여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그리고 삶과 삶을 위협하는 것이 / 서로 옥죄고 있는 것을 목도했기에, 그가 지각하는 자연의 한 구석, 도시의 몇몇 구역들이 그 인물들과 함께 어떤 비전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 더이상 객체도 주체도 없이 오로지 그 자체만을 통하여 그러한 삶, 순간의 지각들을 구성하는 비전이다. 자코메티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정지된 그러한 비전들을 우리는 스타일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문제는 언제나 삶을, 그것을 가두어 놓는 곳으로부터 해방시키거나 불확실한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어떻게 세계의 한 순간이 지속하도록 혹은 제 스스로 존재하도록 할 수 있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글쓰기에서 뿐만 아니라 회화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을 하나의 답변을 제시한다. ‘각각의 원자를 충족시킬 것’, ‘쓰레기, 죽어버린 것, 잉여적인 모든 것을 제거할 것’, ‘일상적이고 체험된 우리의 지각작용에 묻어나는 모든 것, 평범한 소설가의 자양이 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우리에게 지각을 부여해 주는 충만함만을 간직할 것, ‘순간 속에 부조리, 사실들, 비열함을 포함시키되, 단 투명하게 다듬어져야 할 것’, ‘거기에 모든 것을 담되, 더더욱 충족시킬 것’.
유기체와 근육질로 이루어진 운동경기가 아니라 ‘정서의 경기’로서, 그것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것이 아닌 힘들을 드러내 보여줄 뿐인 생성의 경주인 ‘조형적 스펙트럼’이라는 또 다른 것의 비유기체적 이면일 것이다.
그들 대개가 손상되기 쉬운 병약한 건강상태를 지니는 것은 지병이나 신경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삶 속에서, 그 누구라도 감당키 벅차며,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그리고 그들에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언가란 또한 <체험의 병들의 꿰뚫고> 그들을 살게끔 해주는 원천이며 숨결(니체가 건강이라 부른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언젠가 사람들은 예술이란 없었고 오로지 약만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정서
지각이 지각작용들을 넘어서듯이, 정서는 감정들을 벗어난다. (...) 그것은 하나에서 다른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가는 거라고 도텔은 말한다. 그 무언가가 감각이라고 밖에는 달리 상술될 수가 없다. 그것은 결정 불가능함, 구별 불가능의 지대라서, 마치 사물들, 짐승들, 사람들이 (에이합과 모비딕, 펜테질리아와 암캐) 각기 그들의 본질적인 간극을 일시에 넘어서버리는 지점에까지 무한히 닿아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로지 삶만이 생물체들이 소용돌이치며 선회하는 그러한 지대들을 창조해내며, 또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공동-창조의 기획 속에서 거기에 도달하고 스며들 수 있다.
오히려 회화에서는 형체들을 해체시킬 수 있는, 또한 무엇이 동물이고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그러한 지대의 존재를 강요할 수 있는 바탕의 힘이 요구된다.
문제는 오로지 우리들, 여기 그리고 지금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 안에서는 동물인 것, 식물인 것, 광물인 것이 더 이상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희한하게도 그러한 구별에 다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최대 한정치는 그러한 인접함의 집적으로부터 마치, 섬광처럼 생겨난다.

#견해 너머의 정서
베르그송이 지적한 바와 같이, 견해는 정서적 상태들을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엉뚱한 것들을 통합하고 분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위대한 소설가란 무엇보다도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잘못 인식된 정서들을 창안해내고, 그것들을 자기 인물들의 생성으로 발현시키는 예술가이다.
프루스트가 그토록 꼼꼼하게 질투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견해에 의해 전제된 감정 상의 질서를 끊임없이 전복시키는 하나의 정서를 창출해낸다. 견해에 의한다면 질투란 사랑에 있어서의 불행한 결과 중의 하나여야 하겠지만,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질투가 곧 궁극점이요 지향점인 까닭에, 만일 사랑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질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즉 질투는 기호들의 의미이며 기호학으로서의 정서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작가에서 다른 작가로 넘어가면서, 위대한 정서들은 변형되고 진동하여, 어우러지거나 서로를 유도해낼 수 있다. (감각 존재) 예술가는 항상 새로운 다양성들을 세계에 덧붙인다. 개념의 존재들이 변주들이며, 기능의 존재들이 변수들이듯이, 감각의 존재들은 다양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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