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86호(2020년 겨울호)] 저항하는 자연 / 권범철 (도시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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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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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86호(2020년 겨울호)] 저항하는 자연 / 권범철 (도시연구자)



오늘날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매해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 녹아내리는 빙하, 사라지는 동·식물 등을 다루는 기사에 우리는 익숙해진지 오래지만, 21세기 들어 그 징후는 더욱 분명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 기사들은 대체로 지구가 혹은 자연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심하게 파괴될 것인지 보도하고 예측한다. 그 기사들의 논조는 대체로 어둡다. 지구는 서서히, 그러나 점점 속도를 내면서 망가져가고 있다.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는 바이러스 사태는 이러한 자연 파괴가 빚은 대표적인 사례로 이야기된다. 아직 원인이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지구적인 개발에 따른 동물 서식지 파괴가 바이러스 전파의 배경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한다. 요컨대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는 자연을 파괴한 인간에게 닥친 위기, 즉 ‘자연의 복수’라는 것이다.

지구의 파괴가 분명하게 감각되는 상황은 우리에게 우울한 감정을 안긴다. 실제로 기후 우울증을 겪는 사례가 종종 보도되고 있다. 이 우울증은 미래가 없을지도 모를 만큼 사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이런 무기력감을 동반한 우울증은 기후 위기를 다룬 보도들의 가장 분명한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급박한 위기의 시대에 출간된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가? 저자의 논의는 사태의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외려 차분한 느낌을 준다. 그 책이 무엇보다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시작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한가롭게 보일 수도 있는 관점의 전환이 이 비상한 시기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문제의 시급함이 그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석의 필요성에 우선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우울을 잠깐 거두고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그 길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오늘날 위기에 책임이 있는, 세계에 대한 기존 추상관념을 해체하고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저자가 오늘날 근대 세계의 폭력과 불평등, 억압에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카르트적 대립쌍은 “한낱 관념이나 환상, 일탈에 불과한 것으로서의 추상관념이 아니라, 세계에서 작동하는 힘으로서의 추상관념”(51)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앎의 방식이 실제로 자본주의가 자연을 조작 가능한 외부로 대상화 할 수 있었던 기초라고 파악한다. 자연과 사회를 서로 상호작용하는 독립된 체계로 이해하는 그 데카르트적 서사는 이렇게 전개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에서 출현했다. 그것은 자연에서 부를 끌어낸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교란하거나 훼손하거나 더럽혔다. 그리하여 지금, 또는 매우 이른 시기에 언젠가, 자연은 보복을 가할 것이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 붕괴가 곧 일어날 듯하다.(25)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형의 것이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팬데믹은 흔히 자연의 복수로 이야기된다. 우리가 자연을 복수의 주체로 여길 수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자연을 우리 바깥에 있는, 우리와 분리된 어떤 것으로 여기는 사고가 바로 저자가 근대성의 폭력을 작동시키는 추상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저자는 이러한 이원론 대신 이중 내부성이라는 방식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를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것 —“자본은 외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하게 이용되는 자연력이다”(316)— 에서 출발하며, “자연-속-자본주의/자본주의-속-자연”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내부화하고 거꾸로 자연은 자본주의를 내부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사회)은 자연을 파괴할 수 없다. 그 둘은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구조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데, 오로지 변환될 뿐이다.”(88) 이렇게 자연과 사회가 분리되는 쌍이 아니라는 것은, 그에 따라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변환’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위기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함의는 우리가 그 변형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자연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환경과의 관계 — 저자는 이 관계를 오이케이오스(Oikeios)라고 부른다 — 속에서 공동생산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 관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 당연하게도 — 자연과 함께 변형된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다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혹은 되어야 할 뿐이다. 이러한 함의는 오늘날 당면한 위기에 비추어 볼 때 충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 비상한 시기에 어떤 시점에서 출발해야 하는가를 알려 준다. 이 출발점에서 저자의 논의를 좀 더 따라가 보자.


자연과 자본주의를 상호작용하는 개별체가 아니라 연결된 관계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오늘날의 위기를 파악하는 데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에 따라 그에게 오늘날의 위기는 “자본주의가 자연에 행하는 바의 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행하는 바의 위기”(62)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생존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 모두)이 자신을 위해 무상으로 혹은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일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성장해 왔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생산양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닌데,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기보다는 상품화되지 않은 권역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둔 채로) 자신을 위해 무상으로 일하도록 만드는 것을 선호하고 실제로 그것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본은 두 가지 논리로 움직이는데, 생산의 자본화와 재생산의 전유가 그것이다. 전자에서 노동에 대한 착취가 일어난다면 후자에서는 무상으로 취하는 전유가 일어난다. 이것은 분명 비임금 가사노동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공장 노동 중 지급되지 않은 부분(잉여노동)뿐 아니라 공장 밖에서의 노동 중에서 지급되지 않은 부분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저자도 본문에서 인용하는 마리아 미즈는 자본의 축적 혹은 성장이 “인간적 그리고 인간 이외의 요소들이 식민화되는 조건 아래에서나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빙산의 비유를 사용한다. 자본과 임금 노동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 낸 생산”이 수면 아래에서 경제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1) 같은 맥락에서 페데리치는 “여성들의 가내부불노동은 결코 전자본주의적 잔재가 아니며 역사적으로 노동력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다른 모든 형태의 생산의 기둥”이라고 주장한다.2) 따라서 여성들의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 즉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생산적이다. 요컨대 자본은 여성들의 비임금 노동에 크게 의지한다.


이렇게 페미니스트 이론가/활동가들이 자본은 막대한 양의 부불가사노동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면, 무어는 그 전유의 대상을 더욱 확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은 크게 네 가지 저렴한 것 —노동력, 식량, 에너지, 원료— 으로 이루어진 “저렴한 자연”(Cheap Nature)에 의존하는데, 자본의 운명은 이 저렴한 자연을 얼마나 전유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을 무상으로(혹은 그것에 가깝게) 전유해야 자본의 가장 큰 관심사인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치법칙은 저렴한 자연의 법칙”(193)으로 나타난다. 이 저렴한 자연은 그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며, 저자는 그 생산의 방식을 프런티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는 프런티어 과정이며”(181), “전유의 프런티어는 상품 권역에서 노동생산성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자본 지출은 최소화하면서, 동원될 수 있는 미자본화된 일/에너지의 다발이다.”(237) 이 프런티어는 지리적 외부에서 구성되거나(식민지의 경우), 내부에서도 만들어진다(여성의 경우). 그리고 이 전유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문화적인 해결책이 동원된다. 가령 여성의 가사노동은 사랑의 이름으로 이상화되어 숭고의 대상이 됨으로써 경제 외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즉 저렴한 자연이 된다. 혹은 미즈가 말하듯이 “여성의 가사노동과 양육 노동은 그들의 생리 기능의, 그들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의, ‘자연’이 여성에게 자궁을 주었다는 사실의 연장으로 이해된다.”3)


오늘날 자본에게 닥친 문제는 이 전유의 프런티어를 구현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자본은 축적 과정에서 늘 재/생산의 구성적 관계를 소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소진은, 특정 자연이 더 이상 일/에너지를 자본에게 넘겨주기 어려울 때 일어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행하는 바의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자본은 새로운 프런티어를 구성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해왔다. 즉 그 위기들은 자본주의가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발전적 위기로 기능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을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프로젝트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거대한 축적 파동에 대한 필요조건”인 저렴한 자연의 회복이 의문시되는 상황에 도달했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21세기 자본주의가 이전 세기와는 매우 다른 역사적 자연에 직면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은 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가? 그것은 그가 “부정적 가치”라고 부르는 새로운 한계 때문이다. 이것은 ‘고갈’만이 아니라 쓰레기와 독성화라는 새로운 모순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자본에게 새로운 한계다. 더 이상 수도꼭지를 틀어도 제공할 ‘선물’이 없는 자연(고갈의 문제)과 더 이상 쓰레기를 무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개수대(쓰레기장)를 제공하지 못하는 자연(독성화의 심화)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기술적 재편이나 조직적 재편, 제국주의적 재편으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다. 기후변화와 슈퍼잡초는 저자가 꼽는 대표적인 부정적 가치의 양상이다. 자연의 ‘선물’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제 청구서가 날아들 시간이다. 그는 이 부정적 가치의 발생, 그로 인한 저렴한 자연의 회복 불가능을 자본주의 모형의 소진으로 이해한다. “다음 세기에 걸쳐 자본주의는 다른 모형, 또는 모형들로 대체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대체될 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부정적 가치의 흐름으로 인한 자연의 변형은 우리에게 고난의 시기로 경험된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자연은 우리 외부의 자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듯이 이 부정적 가치는 단순히 ‘환경적’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역적 맥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미 우리의 신체부터 오염되고 있다. 사실 우리를 포함하여 우리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변형 중이다.


가령 무어가 지적하는 여성이 직면한 이중고를 보자.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자본화와 전유의 두 과정에 동시에 얽혀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는 자본에게 한편으로 저렴한 노동력의 확보를, 다른 한편으로 여전한 무상 일의 제공을 뜻했다. 여성은 생산 영역의 저렴한 노동력이면서 재생산 영역의 비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이것은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주당 55시간의 가사노동이 주당 76시간의 가사노동과 (유상) 일로 바뀌”는 상태를 의미했다. 자본이 누리는 이중의 이점(착취와 전유)은 비/임금 노동자 여성의 혹사로 지탱된다. 페데리치는 자신의 책에서 많은 여성이 시달리는 이 이중의 짐이 일상생활의 위기로 번져가는 상황을 전한다. 삶의 불안정화와 매우 소모적인 정동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은 미국에서 우울증을 겪는 1,500만 성인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노동계급 여성의 경우 1990년과 2008년 사이 어머니 세대에 비해 기대수명이 5년이나 감소했다. 일상생활의 위기는 여성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의 돌봄을 해외 양로원에서 해결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2007년 미국에서 정신적으로 병든 아이들의 숫자는 1990년보다 35배 늘어났으며,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2001년과 2011년 사이 2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중 75퍼센트는 네 살 미만)이 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4) 요컨대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재생산의 위기다.


착취와 전유에 동시에 시달리는 여성의 상황 그리고 그에 따른 재생산의 위기는 인간 자연에 나타나는 부정적 가치의 두드러지는 사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무상 일/에너지의 전유는 반드시 더 큰 규모의 쓰레기를 수반한다. 여성에 대한 이중 압착의 결과로 나타나는, 여성들의 우울증과 아이들이 겪는 공포는 신체를 잠식하는 쓰레기다. 이 위기에 대한 페데리치의 대안은 재생산 영역을 집합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본이 그 영역의 무상노동에 의지하고 있다면, 그 토대를 자본의 가치화 영역에서 빼내어 다르게 구성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서 일상생활을 전환하기 위한 페데리치의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을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을 아우르는 더 넓은 맥락에서 좀 더 유의미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눈여겨볼 것은 저자가 앞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다른 모형으로의 대체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어는 저렴한 자연의 회복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내부 모순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가치증식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저항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쓰레기장으로서의 자연은 자본이 비용을 외부화하는 방식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자연이 무상으로 일하게 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러한 전유는 투쟁에 의해 제한된다. 환경운동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므로 그가 가치법칙의 다른 이름으로 제시하는 저렴한 자연의 법칙은 미래를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채우는 철칙이 아니다. 무어와 비슷하게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에 주목하는 —물론 무어는 “사회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겠지만— 맛시모 데 안젤리스는 가치법칙의 매 국면이 갈등과 위기의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M-C-M’은 미래를 결정하는 법칙이 아닌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사태는 노동력이라는 요소로 인해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저렴한 자연의 법칙 역시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 인간 자연뿐 아니라 비인간 자연 역시 그것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제초제에 대한 내성을 키운 슈퍼 잡초를, 자본의 길들임을 벗어나는 대항력의 사례로 이해한다. 요컨대 자연은 저항한다. 자본에게 노동계급이 생산 영역에서 등장하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라면,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의미에서의) 자연은 가치관계를 가로지르며 출현하는 예측 불가능한 힘이다.


무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이다. 오늘날의 위기는 그 조직의 방법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무어는 이 책에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니 그 자체가 위기인 우리가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려 준다. 우리가 문제화해야 하는 것은 ‘파괴된 자연’ 그 자체라기보다는 위기를 생산하는 그 조직의 방법, 그것이 이 사회에서 짜놓은 관계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연 변형의 여러 양상들(온난화, 바이러스 확산, 생물 다양성 감소, 각종 오염 등)만이 아니라 그것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삶의 양식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에 구조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연루된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페데리치의 전략을 다시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기사가 전하는 국내의 여성 자살률 급증은 자본의 전유에 따른 부정적 가치가 위기 상황에서 중첩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현 사태 이전부터 자본을 위해 무상으로 일하던 인간 자연이 위기 상황에서 극한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갈되고 병들어 가는 우리의 단면이며, ‘저항하는 자연’의 슬픈 측면이다. 어떻게 이 슬픔과 우울을 뒤집을 수 있을까. 일상의 재구성은 그 일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 마리아 미즈, 최재인 옮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23쪽.

2) 실비아 페데리치, 황성원·김민철 옮김,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9쪽.

3) 마리아 미즈, 앞의 책, 121쪽.

4) Silvia Federici, “From Crisis to Commons: Reproductive Work, Affective Labor and Technology, and the Transformation of Everyday Life,” in Re-enchanting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PM Press,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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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 제이슨 W. 무어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