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세미나 기록]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장

작성자
케이
작성일
2021-02-21 19:15
조회
384
안녕하세요. 브로델 첫 세미나 기록을 남깁니다. 정리하면서 재밌어서 계속 두근두근했습니다.. 3월 13일(토)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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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머리말, 서론 얘기부터 해보자.

아멜 : 13쪽 ‘삼분법적 도식’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 도식이 뭔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손봄 : 일단 주석에 ‘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문명(혹은 물질생활)’이라고 정리한 것 같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맨 아랫부분에 물질문명 혹은 물질생활, 그 위에 시장경제, 그 위에 자본주의가 있는 모습이다. 이 책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니까 이 도식을 제목에서 다 표현하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일상생활의 구조는 제일 하단의 물질문명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브로델이 어떻게 얘길하는지 보니 이게 공간적으로 생각할 때도 물질문명이란 기본 토대가 있고 그 위에 시장경제가 있다는 식인데, 역사적으로도 3분법 도식을 활용하는 것 같다.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모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와 관련해서 궁금한 건 ‘물질문명’이란 말이 브로델 설명 속에서 이해되긴 하지만, 물질문명이란 말 자체를 다른 말로 표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도 들었다. 이게 경제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것? 이런 생각이었다. 중간에 시장경제란 말이 있으니 경제라는 말을 살려서 물질문명이란 말 대신에 다른 이름을 붙여볼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생명경제? 이런 이름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었다. 즉 생명경제-시장경제-자본주의 이런 식의 생각도 해봤다.

아멜 : 일단 ‘삼분법 구조’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보고 ‘물질문명’이란 말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어가면 좋겠다. 헤겔 같은 경우 세계사 분석할 때 이분법으로 설명했다. 시민사회라는 하층, 국가라는 상층. (헤겔이 쓴 말은 아니고 나중에 맑스가 여기에 건축학적 이미지를 부여한 거다.) 아무튼 시민사회-국가 도식이 헤겔... 지금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는 헤겔 이분 도식에서 시민사회에 해당될 것이 셋으로 갈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사회를 상세하게 분화시켜낸 구조라는 생각이다. 맑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적 운동 도식으로 생산양식을 설명했는데 그 과정에서 계급관계를 도출했다. 시민사회라 불리는 게 하나의 통일된 장이 아니라, 그 안에 적대적 계급이 적대적 투쟁의 공간으로 본 게 맑스다. 상부구조에 국가만 있는게 아니라 문학, 예술, 법 등의 문명적 요소들이 물질적 생산을 담당한다고... 즉 맑스는 이분 도식을 가져가되 이분 도식을 계급 적대 개념으로 재해석했다. 상부구조에 대한 하부구조의 규정성, 속박을 매우 강조하면서 유물론적 재해석을 했다. 그람시 같은 경우는 다시 이분 도식으로 돌아간 셈... 시민사회와 국가 개념을 가지고... 즉 우리 삶,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걸 염두에 두면서 브로델의 삼분법 도식의 함의, 문제점 등을 이후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물질문명이라고 말 붙인 것은... 12쪽 물질생활... 이걸 우리 말로 ‘생활’이라고 하니 좀 그렇지만 ‘물질적 삶’이라는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질문명이란 말을 브로델이 선택한 건 문명 개념에 무게를 많이 부여하려 한 탓인 것 같은데 아날학파의 기본 연구 흐름이 주로 문화, 심성사 등 관념적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과 무관치는 않지 않나. 차라리 난 물질적 삶(물질생활)이란 표현이 우리 시대에 더 적절한 용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기후위기, 코로나 상황 등에서 브로델을 다시 읽을 때 ‘물질적 삶’이란 것과 맥락이 많이 닿고 있다.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등의 이론적 흐름 생각할 때에도... 일단 브로델은 임시적 용어로 물질문명이란 것을 채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14쪽에 ‘하부경제’란 표현도 썼는데 그 땐 경제란 개념을 갖고 물질문명으로 지시하고자 했던 차원들을 생각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시장경제와는 구분되는 영역, 하부경제라고 해버린다면 시장경제와 하부경제라는 게 모아지면서 ‘경제 vs. 자본주의’ 식의 이분도식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경제, 삶경제 이런 것도 재밌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손봄 : 시민사회 부분을 셋으로 갈라놓은 거다. 맑스의 이분 도식을 염두에 두면서 삼분 도식을 봤을 때 문제적인 부분이 시장경제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비판적으로 본다면 시장경제가 완충지대 같은 느낌도 든다. 완충지대에서 투쟁의 힘이 떨어지거나 약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 그런데 시장경제를 중간에 넣음으로써 흥미로웠던 게 시장경제가 구속력을 가진 질서가 있고, 자본주의는 힘의 논리로 작용하는 이미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선명해지는 부분도 있다. 최근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때 정의, 공정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사람들 머릿속 사회는 어떤 것일까 생각할 때 이 삼분 도식을 갖고 생각하면 시장경제 수준의 그림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멜 :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특히 2권, 3권에서 나오게 될 거다. 3권은 자본주의와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심층 영역이 1권, 중간층 영역이 2권, 표층에 해당되는 영역이 3권. 이런 식의 얼개를 갖고 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이야기는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사회 : 그럼 1장으로 들어가 보자. 게시판 질문부터 보자.

아멜 : 늘 본문의 첫 문장, 문단은 중요하다. 그러니 한번 보자. “물질문명은 인간과 사물, 사물과 인간이다. 사물을 연구하는 것만이 인간의 일상적인 존재를 측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대지의 산물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의미가 있다.”라고 시작한다. 이 문장 의미를 생각해보자. 1장 ‘수의 무게’는 결국 인구분석이다. 그 인구의 수를 연구 전체의 가장 처음에 비중있게 제기하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맑스 <자본론> 1권 1장 첫문장은 “부르주아 사회는 상품들의 더미다.”로 시작한다. 부르주아 사회를 자기 연구대상으로 삼고, 상품들을 분석하는 접근법을 채택한다. 그렇다면 인구에서 시작하는 이런 분석법은 어떤 의미일까. 얼핏 브로델은 인간 바깥의 많은 걸 얘기하는 것 같은데 결국 인간의 수, 즉 인구수라는 걸 초점에 놓는 방법론을 선택한다는 게 특이하다.

루드 : 24쪽 첫 단락은 인간에서 시작하자고 시작하는데...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를 떠올렸다. 인류세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손봄 : 첫 문장이 제일 흥미로웠다. 물질이란 말에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문명 하면 물질=사물 도식이 떠오르는데, 물질문명을 연구하는 건 사물에서 시작하는 걸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브로델은 한번 뒤집기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물질은 인간 수의 무게, 인간 물질에서 출발한다는 식으로 읽혀서 흥미로웠다. 인간을 대상으로 삼긴 하는데,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인문주의에서의 인간 바라보는 방식과는 다른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의 무게도 인간 한 명 두 명이 아니라 무게로 달아버리는 것... 또 한편, 사물을 인간으로 격상시키는 방향, 그리고 인간을 사물로 격하시키는 방향도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사물 이분법 작동하는 상황에서 /를 빼면 그런 식의 두 방향성이 발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상, 격하의 뉘앙스가 좀 그렇지만...

아멜 : 사물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식의 정리도 가능하겠다.(사물자체보다도) 23쪽 2단락 문명/문화 구분하는 것을 보자. 어원적 접근을 하면 culture는 경작하다, civilization은 city의 문제와 관련된다. 브로델은 이런 어원적 접근으로부터 문명/문화를 구분한다.

사회 : 오늘날 저출산, 고령화 식으로 인구를 기준으로 사회현상을 읽어내는 것과, 브로델이 사물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차이가 뭘까.

아멜 : 누가 사람들의 사회를 수로 볼까라는 질문일 것 같다. 정책 결정할 때 사람을 숫자로 보고, 인구조절 차원에서 사람들 삶을 바라보는데 그게 누구의 시선, 욕망일까. 당연히 우리 시대에 그런 시선은 자본의 필요,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욕망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겠다. 푸코가 인구 분석할 때 인구 분석은 확률 분석과 상통하고, 일정한 인구가 살아남게 만드는 권력의 필요와 연결짓는 것이었다. 수로서의 인간에 대한 접근은 권력이나 자본의 필요의 문제와 분리불가능하다. 대가족 사회에서 한 가족 가장의 시선은 농업 사회에선 아이들을 무조건 많이 낳기였다. 아이들을 낳으면 생존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으니 수적으로 일부가 살아남아서 가계 생활을 유지하고 가문을 지속해나가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 하나, 농경 사회에서는 인구 자체가 노동력으로 직접 활용되기 때문에 노동력 증대의 필요와 연결되었기에 자녀를 수로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국가 뿐 아니라 가부장 시선 속에 있었다. 그랬을 때 그 역시 권력, 경제적 부의 문제와 구분하기 어렵다. 개개인들이 스스로를 수로 생각할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철학에서 수는 보통 양의 문제이고, 양보다는 질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선호되지만 경제학 쪽은 질보다 양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존재를 수로 헤아리려는 경향이 있다. 브로델의 수로서의 접근이 지금 말한 일반적 케이스로 환원될지 어떨지는 계속 읽어가보자.

손봄 : 일정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25쪽 밀물, 썰물 서술 부분 보자. 인구증가가 폭발적일 때 사회가 가능성의 한계에 도달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 아래쪽엔 부양 가능성 이야기를 한다. 즉 노동력 차원, 부양해야 할 식솔로 헤아리는 인식이 있어 보인다.

사회 : 35쪽... 실제 수치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에게 없다... 이런 대목을 보면, 수의 관점을 개입시키지만, 실제 수는 포착하기 어렵다는 뉘앙스가 계속 있다. 계속 질문을 보자.

아멜 : 4-5세기에 걸친 장기기간의 불변성을 이야기하는데, 밀물과 썰물의 요동 속에서도 불변하는 균형의 지점이 있다는 식의 측면이 있다. 균형점의 실제성을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이 균형이란 사실 추상이다. 그리고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지 않고 사물성 속에서 고찰하고, 인간 외 사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허약하고 휩쓸리는 존재고, 고통받고 죽는 과정마저도 어떤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브로델 고유의 인간관이 있는 것 같다. 수의 무게라는 게 인간이란 존재가 짊어진 짐이란 생각도 든다. 인간의 능동성을 제약하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구속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바라보자는 이야기 같다. 브로델의 인간관은 이 책에서만의 방법론이 아닐 것 같은데, 능동성을 강조해온 근대적 인간관에 대한 부정으로서 오히려 수동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그런 관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총량적인 수치를 구해보는 것” “하나의 전체집단으로 여겨지는 인류의 생물학적 변화”(28) “매우 느리게 밖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비율”(35) “수는 문명이며 힘이며 미래이다”(118)라는 구절들의 방법론적 함의, 브로델이 갖고 있는 세계사에 대한 전제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처음 시작에서 필요했을 것 같다. 근대성은 인간에 대한 능동성을 강조해왔던 시기다. 그 지점은 맑스주의도 공유했다. 그게 노동(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자기에게 맞게 가공해서 사용하는 능력)이라는 기본적으로 능동성이므로, 어떤 제약에 자기가 던져져 놓인 조건들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주어진 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생명력이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것이 맑스주의에 있다. 그런데 브로델이라면 뛰어봐야 벼룩이야라고 말할 것 같다. 설령 그런 능력이 있어도 수라는 것 앞에선 별 수 없어..라는 식 아닐까. 한편에선 견제할 수 있는 관점, 또 한편에선 세계의 불변성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생각... 이 양극 사이에서 사고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손봄 : 인간을 사물로 바라보게 되는데 두 개의 다른 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관점들이 실제로 적용될 때는 혼동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영 :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인구, 수라고 했을 때 수를 실제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거고, 그것의 증감에 대해서만 확인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 인구를 출생과 사망으로만 놓고 보는 것 같다. 능동/수동으로 완전히 분할해서 보기 어렵다고 생각이 드는데, 특정 시기에는 인구수가 급속히 늘어난다고 하는데, 개개인의 노력은(능동적 활동은) 유효하지 않지만 전체 흐름 속에는 능동 같은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푸코가 인구를 얘기하고 인간을 숫자로만 환원할 땐 인간의 능동성은 없었지만, 지금 여기엔 그게 좀 있다는 생각이다. 흐름을 파악하려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봄 : 산업사회, 자본주의가 왜 19세기일까... 어떤 조건에서 산업사회,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걸까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다.

김보 : 우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는 거 잘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자체는 의식의 세계가 14,15,16세기부터 탄생, 시작했고, 16세기에 이르면 자본주의 세계는 많은 부분 변했다는 것.... 방법론적으로 브로델은 물질문명으로부터 끌어올려서 자본주의를 연구하려는 의도가 있다보니 14-18세기의 물질문명을 갖고 자본주의를 설명하려는 건데, 그 중간에 시장경제를 갖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왜냐면 그게 수의 세계니까... 물질문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수의 세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멜 : 85쪽 생물학적 앙시앙레짐이란 표현이 나온다. “18세기와 함께 무너진 것은 생물학적 앙시엥레짐이었다”(85). 이 말의 의미가 뭘까. 18세기에 생물학적 앙시앙레짐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이유 조건이 무엇일까. 즉, 그 이전은 기본적으로 구체제인데, 그걸 생물학적으로 규정하는데, 이 생물학적 규정과 수로서의 규정은 브로델 내부에선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생물학적이란 표현을 브로델이 정의한 건 아니지만, 번식의 차원, 인간 종의 존속을 위한 번식의 노력이 다른 종들과의 관계 속에서 제약당하거나 부추겨지거나 하면서 종의 수를 일정한 정도로 유지해가는 것을 생물학적이라고 특징짓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이후 일어나는 변화를 그 이전 세기를 바라보는 관점 속에선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가 궁금해진다. 일단 산업화 이전 시대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간을 물질적, 사물로서 바라본다는 건, 위계적 구분 없이 생물학적 존속을 해가고 있는 동등한 존재 중 하나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에, 앞에 물질로서 사물로서 인간을 다루겠다는 표현의 연장선상이고, 그걸 종합하는 의미가 생물학적 앙시앙레짐이란 표현이 아니었을까.

사회 : 이어가 보자. ‘참조를 위한 척도’ 쪽으로도 자연스럽게 가보자.

아멜 : 50쪽 이후에 기후변화 영향력 쪽은 지금 읽어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기후라는 조건을 인간의 허약함의 징표로서 서술하는 건데, 우리 시대의 기후위기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힘이 너무 거대해서 기후라는 것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가하는 힘으로 인간의 힘이 성장한 결과 변화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기후위기라고 불러야 할 만큼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고 보기 때문에, 똑같이 기후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지위를 새기는 방식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대에는 인간이 거대했고 그 전엔 허약했던 것일까? 어떻게 봐야할까.

손봄 : 브로델은 지금의 기후 위기 같은 것에 이름 붙인다면 자본세라고 할 것 같다. 인간이 18세기 이후로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래로 자본주의적 인간, 자본주의 체제 하의 인간이 그 위험을 야기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아멜 : 브로델 식으로 보면 균형의 파괴, 상실 등을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건데, 그 균형점의 파괴나 해체가 인간의 힘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본다면 물리적으로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이 허약하다는 식의 표현들이 19세기 이후 상황에서는 설명력이 없게 되는데, 그럴 때 심층적인 것들은 어떤 작용을 할지 물어볼 수 있을 것 같고... 생태주의자들의 경우는 인간에 의해 초래된 현재의 기후 위기가 인간의 종말인 것이지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브로델이 말하지 않은 의미에서의 인간의 미약함이란 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루드 : 생태주의자는 인간 자체가 갖는 허약함이 있다고 본다는 말인가?

아멜 : 모든 생태주의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건 126쪽 얘기와도 관련될 것 같다. 거기엔 문명과 유목민의 대결에서 유목민의 패배 대목이 있는데, 이 말에서 유목민 자리에 인간을 놓고, 문명 자리에 자연을 놓아버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로델의 논법을 한번 외삽해 본다치고... 그럼 인간이 19세기 이후에 마치 위대한 것처럼 보이고 인간이 비인간 세계에 대한 승리를 구가한 사건들이나 시기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건 세계 전체의 운명이란 차원에선 탈선에 지나지 않았고 인간의 승리란 단기적, 일시적인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입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대입은 근본적 생태주의 관점에서 나올 수 있는 관점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손봄 : 흥미로웠던 건 유목민의 일탈이란 것도 승리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좀 미묘했는데 유목민 vs. 정주민 느낌도 들었다. 유목민이 승리할 때도 유목민이 유목민으로 문명에 승리한다기보다, 문명의 맛을 봤달까, 유목민이 문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즉, 유목민이 문명의 요소를 갖고 승리했다고 읽을 때, 이걸 자연과 인간의 대결로 치환해본다면, 인간이 승리한 것도 인간 스스로가 승리했다기보다 자연의 능력을 일정정도 보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예외적 인간들이 우연히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을 뿐이다... 식의 이야기도 가능할 것 같다.

사회 : 그럼 인간이 문명을 활용해서 승리를 한 거라면 어쩌면 더 능동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우연이라 하더라도 그런 걸 활용하면 계속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게 정말 단기적인 걸까라는 궁금함이 있다. 브로델이 그렇게 그냥 읽고 싶은 것 아닐까 생각도...

소영 : 추가 질문이 있다. 문명vs.야만 구도에서 문명의 공간은 인구밀도가 높은 곳인데, 인구밀도가 높은 것과 문명의 발달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아멜 : 문명을 기술이란 범주와도 연결을 짓는다. 근데 기술을 수와 분리시킬 수 없다는 전제를 브로델은 갖고 있다. 질문 다시 한번...

소영 : 문명이 있는 곳에 인구수가 많다고 얘기하는 게... 왜 문명을 인구수로 설명할까라는 게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아멜 : 문명은 기술싸움과 상관이 있는데, 그 전제는 인구수다라는 전제인 것 같다.

소영 : 그럼 문명/문화 나눌 때, 한국 중국 등은 문화로 분류하는 대목들이 있고, 우리가 평소 분류하는 것과 다른 느낌이 있어서인데, 문명의 공간을 리본띠로 문명을 이루었는데 아시아가 문화적으로 원시적 상황에 놓이고 서구의 문명이 18세기 이후 진보했다는 식의 구도로 설명하는지... 이 변화는 뭘로 설명하나라는 궁금함이었다.

아멜 : 66-67쪽 이야기일텐데... 난 동아시아 쪽을 문화지대라기보다 문명지대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 <마르코폴로> 시리즈물도 참고할 수 있겠다.

소영 : 아까 질문 다시 조금 더 하자면... 지금 관점으로 보면 문명의 리본띠가 반복된다는 느낌이었는데 19세기 넘어서의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동양 쪽은 문명과 거리가 먼 문화로 분류해야 하지 않나. 그 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가 궁금했다. 또 중국과 주변 나라 관계가 일탈이나 일시적인 것이라기보다 진짜 그럴까, 타당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의 중심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아멜 : 그렇다. 들뢰즈 관점과는 완전히 충돌하는 관점이다. 들뢰즈는 유목민의 삶의 양식을 미래적, 대안적으로까지 서술했다. 브로델의 관점을 이상화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은 하고, 이렇게 서술하면 처음에는 사물들의 민주주의가 있을 것처럼 서술하고, 서술 과정에서는 문명주의를 강조하는 딜레마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관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손봄 : 이런 시선, 관점이 아까도 얘기된 균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생각할 수 있을텐데... 예를 들면 강자/약자, 포식자/피식자, 썰물/밀물 같은 도식... 유목민은 떠돌이, 가난한 자들 식의 인식... 그랬을 때 부자/가난한 자 이런 식으로 세계가 구성되는 것인데, 이때 탈선이란 뭘까. 가난, 떠돌이 위치의 사람들이 문명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는 관점 아닐까. 각자의 자리가 있는데 그게 무너져서 긴장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식의 관점?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의 탈선? 이렇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멜 : 맑스주의와 아날학파 사이의 차이도 그렇고, 전형적인 균형이론인 케인즈주의와 혁명이론인 맑스주의 사이의 차이도 그렇고... 케인즈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론을 역사속에서 브로델이 찾고 있는 것 같다. 역사 속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균형선이 있다고 보는 것... 들뢰즈는 균형선 같은 것 안좋아하고, 관심이 완전히 다르다.

김보 : 그렇다면 브로델의 입장은 어떤 부분 균형, 전체적인 것, 숫자 등에 관심이 있는데... 숫자나 통계 등도 취사선택된 이미지라고할 때, 숫자를 만들어낸 권력의 문제가 계속 남는다. 심층에서 이루어지는 행동감 같은 건 날려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적이지 않은데 인간적인 척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냉소적인 것 같다.

루드 : 마르크스, 브로델 석사논문 찾아봤는데, 마르크스가 진보사관이었다면 브로델은 순환사관에 근거한 보수주의자였다는 얘기가 있었다. 아직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학 책을 많이 접해왔어서, 세계를 만들어가는 민중사학 관점에 가까워서 자꾸 비교가 되는데, 지금 말씀하신 냉소적인 느낌은 확실히 있다. 페데리치 같은 경우는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을 생각할 때 중세를 이야기하는데, 브로델은 예전 야생문명 찬양을 하다가도 그게 끝이라는 느낌이다. 서술 방식 자체가 순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회 : 질병의 계급성 읽을 때 그런 게 많이 와닿았다. 질병이 계급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지점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유의미하게 느껴졌다.

아멜 : 브로델도 피티, 계급 이런 말은 쓰니까 관심은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관심을 어떤 각도에서 다루는가는 다른 문제란 생각이 든다. 질병의 계급성을 논할 때, 그 계급을 희생양으로 그린다는 것 같은 것... 가난한 이들을 일차적으로 타격하는 것으로서의
질병.... 가난한 이들의 일차적 타격을 필연처럼 서술한다. 그들이 그걸 벗어나기 위해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손봄 : 91쪽 부르주아들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잔혹한 걸 잔혹하지 않게 서술하는 방식이 특이했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끔찍한 상황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사회 : 앞에서 질병, 기근 이야기할 때, 질병, 기근이 균형을 맞춰주는 요소처럼 이야기되는 것 같았다. 이게 계급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불어닥친 것이고 계급의 탓이 아니므로 굳이 바꿀 필요가 아니라, 그냥 현상이야... 이런 느낌이 컸다. 그런데 한편 지금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통계로 잡히는 게 오히려 무기가 되기도 한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데, 통계 자체가 아예 무용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떤 목적에서 갖고 가고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건 느낀 것 같다. 때로는 수로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보 : 이 부분은 요즘 상황과 비슷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손봄 : 아까 균형이론 얘기 나왔는데, 피드백도 균형이론과 관련이 있을까.

아멜 : 균형 함수 중 하나로 봐야 하지 않을까.

손봄 : 피드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많았던 것 같다.

조재 : 얘기를 들으면서 많이 흥미로웠다. 일단 14세기와 18세기의 인구증가가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랬다는 것... 개인적으로 이전엔 위생의 개선 같은 게 원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기후가 요인이었다는 식으로 읽고 이해를 했다. 19세기 이후에도 인구가 많이 증가했는데, 이건 인간이 좀 질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이전 같은 기후 변화 때문이라기보다 의술 발달, 수명연장 등의 요인... 그리고 요즘 관심있는 게 인간이 그냥 육체적인 존재일 뿐이냐, 아니면 육체 이상의 존재냐에 대한 것인데, 과거엔 육체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요즘엔 인간이 육체 이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과도하게 의미부여하고 그러는 게 안 좋은 모습으로 경험되곤 했다. 내 경험을 검토해봐도 그냥 인간은 육체일 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관점에서는 사람을 수나 무게로 생각하는 것들이 요즘엔 재밌다는 생각을 한다.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신민 : 읽으면서 인구에 대한 관점으로 책을 시작하는 게 왜 낯설까 했는데,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인구로 재생산을 다루는 것과의 대결구도가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왜 보수적인 사관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된 것 같고, 이후 논의들이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해졌다.

사회 : 다들 수고 많으셨다. 3월 13일(토)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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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공지] 클라우스 뮐한, 『현대 중국의 탄생 - 청제국에서 시진핑까지』 - 3월 9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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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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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판 세미나 기록과 사회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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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회원님들께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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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판 세미나 - 매월 2, 4주에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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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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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토요일 오후 7시 30분 <현대 중국의 탄생>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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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탄생 1부 청의흥망 1장 영광의 시대: 1644년~ 1800 토론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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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토요일 저녁7:30 『현대 중국의 탄생』 두 번째 세미나 공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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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탄생』(클라우스 뮐한) 첫 세미나 <서론> 토론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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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현대 중국의 탄생 첫 세미나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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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톄쥔, 여덟번의 위기 4장 ‘1997년과 2009년에 발생한 두 번의 외래형 위기’ 독서노트와 토론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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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토요일 7시30분 윈톄준 <여덟 번의 위기 : 현대 중국의 경험과 도전> 역사비판 세미나 공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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