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 “객체는 외부에서 조종될 수 없다”ㅣ김대식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03-26 11:19
조회
805
 

“객체는 외부에서 조종될 수 없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이 책은 종래의 철학사적 흐름에서 주체 중심으로 말미암은 객체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비판하며 객체적 존재론으로 전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철학에서 주객의 문제는 근대 이후에 끊임없는 논쟁거리였다. 근대철학에서 주체의식과 주체가 생각한다는 cogito의 선언은 가히 혁명적이었다는 평가는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 만큼 뼈아픈 고통과 치명적인 세계사적 전쟁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은 다 사실이다.

주체에 의해서 비추어지고 구성되어진 객체는 열등한 타자이거나 종속적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인식의 주체가 되는 존재자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인간은 대중과 자연을 통제, 조정,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주체는 사실상 객체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저자는 일찌감치 수평적 존재론, 평등한 존재론, 나아가 객체적 존재론의 입장을 드러낸다.

우선 저자는 객체 혹은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실재론을 주장한다. “존재론적 실재론은 객체를 인간의 구성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한다”(20). 여기에 더하여 주체 없는 객체, 주체와 다른 극에 있는 객체가 아닌 독자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를 규명하려고 시도한다. 인간 주체와 객체 사이, 그리고 객체와 객체들 사이에서도 어떤 특권적 지위나 종류의 다름이 아니라 정도의 다름이 있다는 주장에서 온갖 종류의 객체들의 존재론적 지위의 평등성을 전개하는 것도 저자의 빼어난 이론적 통찰력이다.

임마누엘 칸트에서부터 니클라스 루만, 라캉, 지젝, 들뢰즈, 칸토어, 알랭 바디우 등 다양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학자들의 이론과 논리를 잘 정리한 것도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객체는 주체에 대해서 구성되거나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석과 번역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할 관계적 존재자다. 이것은 저자가 역설하듯이 “객체는 외부에서 조종될 수 없다”(290). 객체는 다른 객체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독자적인 내부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객체의 독립성, 독자성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객체들은 서로 갈등하고 우열을 다투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객체들을 위해서 자율적인 제3의 객체가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객체의 수평성이나 평등성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자칫 객체가 또 다른 객체들과 연관되면서 다른 객체들을 구성하거나 없애버릴 수 있다. 하지만 객체는 자신 앞에, 자신의 주위에 수많은 객체들이 ‘있음’을 알고 제3의 자율적인 객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체계와 객체들은 다른 객체들과 고착화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객체는 해체되거나 분열된다. 여기서 저자는 루만과 베르그손의 이론을 끄잡아 들인다. 결국 객체의 실체성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구조와 조직, 그리고 다른 객체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규명된다.

이 책에서 저자의 핵심은 평평한 존재론과 객관적 존재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평평한 존재론은 다른 존재자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것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객체들 중에 객체, 혹은 존재자들 중에 한 존재자일 뿐이다. 인간은 많은 종류의 객체들 중에서 한 종류의 객체라는 점에서 코로나 사태와 현재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저항하는 미얀마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논파하듯이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객체들에 대한 무시와 대립이란 다른 객체들이 ‘서로 물러서 있음’과 ‘자기를 타자화’(자신에게서 물러서 있음)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에 저자는 모턴(Morton)의 말을 인용한다. “민주주의는 공존을 함축하고, 공존은 기묘한 낯선 존재들의 만남을 함축한다”(380; Morton, The Ecological Thought, 81 재인용). 새겨야 할 말이다.

평자가 볼 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저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 존재자론과 객체지향 철학은 기호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복수의 종류를 옹호함으로써 존재를 민주화한다. 평평한 존재론은, 양자 입자들과 같은 한 가지 종류의 객체를 여타의 객체가 근거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환원되는 정말로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환원 불가능한 모든 규모의 층위에서 존재하는 객체들의 종류의 다원성을 옹호한다. (…) 평평한 존재론은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이바지한다는 논제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든 객체가 동등하다는 논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평등주의로서의 평평한 존재론이 거부하는 것은 어떤 객체든지 그것을 한낱 또 다른 객체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면서 삭제하는 행위다”(395, 410). 저자의 주장이 고스란히 담긴 좋은 철학적 수사가 아닐까 싶다.

깊이 있는 책인 만큼, 이 책을 읽는 내내 번역자의 노고가 매우 컸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동시에 좋은 책을 선별, 기획한 갈무리출판사의 안목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번역상의 오류 내지는 애매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보통 칸트 철학에서는 ‘transcendental’을 ‘선험적’(최재희 역본), 혹은 ‘초월(론)적’(백종현 역본)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번역자는 ‘초험적’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Dasein’은 크게 보아서 ‘현존재’(이기상), ‘거기-있음’, ‘터-있음’(신상희) 등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번역자는 영어의 ‘existence’를 ‘지금-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초심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책에 번역어가 가중된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번역자 나름의 주관이 개입된 번역어였더라도, 미리 국내 번역서를 참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성격상 상당한 학문적 소양이 갖춰진 사람이거나 철학과 사회학 등의 전문적 식견이 두루 갖춰진 사람이 읽어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주체-객체 문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독자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저자의 문제의식을 읽어간다면 자신과 세계, 혹은 타자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혹여 철학적 배경 지식이 없다고 염려하는 독자가 있다면, 서문만 읽어도 이 책의 진가를 쏠쏠하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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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1년 3월 25일 함석헌평화연구소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31hqbs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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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이 책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 던지는 독특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탈근대주의의 근대성 비판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인의 본질은 이분법이 아닌 ‘하이브리드’의 증식이다. ‘하이브리드’의 이해를 통해서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유물론 : 객체와 사회 이론』(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사회적 세계에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정한 피자헛 매장은 그 매장을 구성하는 종업원과 탁자, 냅킨만큼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매장이 종업원과 손님의 삶에 미치는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과 피자헛 기업, 미합중국, 행성 지구만큼 실재적이기도 한가? 이 책에서 객체지향 철학의 창시자인 저자 그레이엄 하먼은 사회생활 속 객체의 본성과 지위를 규명하고자 한다. 객체에 대한 관심은 유물론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흔히 가정되지만, 하먼은 이 견해를 거부하면서 그 대신에 독창적이고 독특한 '비유물론' 접근법을 전개한다.


네트워크의 군주 :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19)


현대 철학의 ‘사변적 전회’를 선도한 하먼의 ‘객체지향 철학’과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만나는 풍경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브뤼노 라투르를 현대의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설득력 있게 고찰하고 있는 이 책은 ‘자연’과 ‘문화’의 이분화를 넘어서는 ‘실재론적 객체지향 형이상학’을 인류세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철학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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