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 포스트휴먼의 미래, 예술가·시인의 상상에 달렸다ㅣ한보희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07-13 16:13
조회
85
 

포스트휴먼의 미래, 예술가·시인의 상상에 달렸다


한보희 (연세대 문화인류학 강사)


지난 몇 년 새 ‘포스트휴먼’은 인문사회과학계의 중심적 주제로 급부상한 듯한 느낌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이 학계 안팎에서 이렇게 거창한 트랜드로 부상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이 알파고의 압승으로 끝난 사건일 것이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서


알파고 사건은 인공지능이 그사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했는지를 과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세돌 같은 천재를 가볍게 이기는 인공지능이 내가 수행하고 있는 업무에 도입된다면 과연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자동기계들이 블루칼라를, 컴퓨터 네트워크가 화이트칼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듯이, 조만간 AI가 전문직들마저 실업자로 전락시키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AI 관련 업체의 주주가 되는 길만이 생존전략인가? 아니지, 그렇게 거의 모든 인간들이 일자리에서 밀려난다면, 그래서 그들이 어떤 소비 여력도 가질 수 없게 된다면, 그 다음 차례에 위기에 처할 것은 기업들이 아니겠는가? 자본가들과 주주들이 아니겠는가?’ 꼬리를 무는 질문은 미래의 풍경을 암울하게 채색했다.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나? 하지만 사람들은, 러다이트 운동의 실패를 기억하는 가운데, 인간이 기술의 발전과 확산에 통제권을 쥐는 미래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 ‘해변의 모래톱에 쓰여진 글씨들처럼 사라질’ 미래를 상상하는 게 훨씬 용이하(고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금새 깨달았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그 담론에 참여한 사람들 개개의 이론과 철학과 비전이 뭐든 간에, 바로 이런 집단적 정서와 판단을 저류에 깔고 있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나의 생존의 토대를 허물 것이라는 불안과 그렇게 생존의 토대가 허물어질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공포. 포스트휴먼 담론은 바로 그 불안과 공포를 토양으로 삼아 자라난 것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포스트휴먼이 일상의 문제가 된 또 하나의 장면을 보자. 얼마 전 동물권을 옹호하는 시민단체(동물해방물결)의 워크숍 내용이 기사화되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이들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문제 삼으며 ‘인간중심주의’와 ‘종 차별적’ 문화를 개선할 것을 요구했고 다음과 같이 일상적 표현을 바꿀 것도 제안했다.


“느끼고 살아 있는 존재에 식용하는 동물의 살을 뜻하는 ‘고기’를 붙일 수 없으니 물고기 대신 물에서 사는 존재라는 뜻의 ‘물살이’를 쓰자. 수를 세는 단위도 ‘마리’가 아닌 ‘명’을 쓰자. 몇마리가 죽었다 보다 몇명이 죽었다고 말하면 확 더 피부에 와닿을 것이다. 머리를 대가리로, 입을 주둥이, 목을 모가지로 부르는 등 인간과 같은 부위를 비하의 의미로 부르는 것도 피하자. 동물에게만 쓰는 말인 암컷, 수컷, 폐사, 도축을 여성, 남성, 사망, 살해로 부르자.”


이 무슨 ‘관종스러운’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제안에 들어있는 선의와 그런 선의보다 더 심층에 놓인 시대의 변동―‘포스트휴먼’이란 단어로 통칭되고 있는 어떤 무의식적 흐름―에 신경이 쓰여서 가벼운 짜증과 냉소로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인공과 자연 사이에 낀 인간?


오늘날 인간(성)의 경계는 크게 두 개의 전선에서 흔들리고 있(으며 인간이 두 전선에서 크고 작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기술과 인간, 다른 하나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이다. 기술과 인간의 경계는 기술이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라 지성을 압도하고 감성마저 넘보고 있는—’인간보다 더 인간적인(more human than human)‘ 감수성을 ’보여주는‘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현실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기술에 비해 한 수 아래의 존재자로 전락하게 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려는 기술지배적 타자의 시선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인간이 자신을 여타 동물들보다 우월한 존재자로 간주하면서 동물들에게 가해온 착취와 수탈, 학대와 학살에 대해 반성하는 가운데 흔들리고 있다.


자신을 떠남으로써 자신이 되는 자, 인간


’기술/인간/동물‘이라는 구분 가운데 낀 인간은 양쪽에서 그 경계, 또는 자신의 지배적 영토를 침식(당)해가면서 서서히 기술에 흡수되거나 동물로 회귀하는—거기서 긍정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보든, 타락과 퇴폐의 어둠을 보든 간에— 중인 것 같다. 그런데 두 개의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쟁은 두 개의 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전쟁은 아닌 듯하다. 다시 말해, 인간이 기술과 동물, 자본과 자연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왜냐면, 기술/인간의 전투에서 기술 쪽으로 승기가 넘어갔다면, 인간/동물의 전투에선 동물이 승리하는 중이 아니라 완전히 패배해 거의 절멸의 위기로 넘어 가버렸기 때문이다. 동물은 인간의 보호나 관리 대상이 되었으며 자연은 국립공원처럼, 광대하더라도 본질상 야생이 아니라 정원에 가까운 것으로 추락해버렸다. 자연의 반격은 우회적으로 이뤄진다. 기후변화, 생태위기, 대규모 멸종 등등에 기겁하면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가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자신들의 생존의 발판을 허무는 사태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처럼 인간/동물, 인간/자연의 전투가 인간에게 ’승리함으로써 패배하는 아이러니‘를 가르쳤다면, 이제 인간은 ’패배하거나 놓아줌으로써 승리하는(공존하는) 아이러니‘를 실행해야 함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여기에 인간/동물 경계 허묾으로써의 포스트휴먼의 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을 떠남으로써, 내려놓음으로써, (타자에게)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이 되는 기이한 동물이었지 않은가.


포스트캐피탈이 사라진 자리의 포스트휴먼?


하지만 인간/동물 경계의 흐려짐의 다른 얼굴은 기술과의 전쟁에서 패배 중인 인간의 마지노선이 그의 생물학적 속성들의 수준에까지 밀려가면서 나타난다. 생명공학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여기서 인간은 자손의 번식을 위해 굳이 이성을 구하지 않아도 되며, 결혼을 통해 가족을 구성할 필요도 없어진다. 생물학적 속성들을 통해 인간을 규정하는 차원—태어나면서 인간이 되는 차원—에서마저 인간은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가질 수가 없게 됐다. 이것은 인간/동물(혹은 인간/자연)의 전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술/인간-동물-자연’의 전선이고 이 전선에서 승리하는 것 또한 인간의 상위 일부이다. 따라서 엄정하게 보자면, 포스트휴먼이란 문제설정에서 인간은 두 개의 전선을 갖는 게 아니라 ‘기술/인간’이라는 오직 하나의 전선을 가지며, 그 전선조차 정확히는 ‘기술/인간’이 아니라 ‘인간 내에 기술과 자본을 운용할 수 있는 집단—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쓰자면 ’생산수단‘의 소유계급—과 그렇지 못한 집단—’생산수단‘의 소유계급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이제는 자신의 신체와 생명, 사회적 소통이라는 정신적 생명마저 내주어야 하는 무산계급— 사이의 전선’이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은 휴먼을 상층과 하층으로, 기술-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그렇지 못해 기술-자본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는 무산계급으로 나누는 인간의 내적 전쟁의 전치(轉置)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포스트휴먼’이란 용어는 휴먼의 내전, 인간과 사회의 내적 분열과 대립, 갈등, 전쟁상태라는 불편한 진실을, ‘포스트’라는 접두어로 덮어버린 채 회피하고 오도할 가능성도 커 보인다. 포스트 뒤에 붙여야 할 합당한 쟁점은 휴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계급적 분열을 상징하는) 자본(캐피탈)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인공지능이 열어 줄 미래에서도 문제는 여전히 ‘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라는 낯익은 모순”(259쪽)의 반복이 될 뿐이다.


포스트휴먼 안으로의 거리두기와 틈새 열기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포스트휴먼 담론과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해왔다. 포스트휴먼이란 개념 자체가 (자본의 인간 혐오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정치경제적 프레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의 필자들은 나의 게으른 거리두기와 달리 포스트휴먼 담론의 면면들을 세심하게 따지고 성실하게 비판해간다.


이 책은 포스트휴먼에 관한 소개나 관련 이슈들에 대한 개괄이 아니며 트랜스휴먼이라는 기술결정론적 미래에 대한 분별 없는 열광이나 낙관론과도 거리가 멀다. 필자들은 다양한 전선에서 포스트휴먼을 둘러싼 테마와 논변들을 꼼꼼하고 검토하고 있다. 책의 서문 격에 해당하는 논문 「포스트휴먼으로 가는 길」에서 박인찬은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등의, 혼동하기 쉽지만 구분이 필요한 용어들을 잘 구획해주고 있으며, 「신유물론시대의 문학 읽기」에서 유선무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내에서 최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론적 경향들―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객체지향존재론 등―을 세심하게 구분하면서 각각의 맥락과 상호 간의 논점들을 잘 짚어주고 있다.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핵심 논점에 대한 필자의 견해도 잘 제시돼 있으며, 읽은 이의 고개를 끄덕이게 해준다(이 책의 제목에 ‘쟁점들’이란 단어는 어쩌다 들어간 상투어구가 아니다). 언뜻 훑어본 목차의 인상과 달리, 읽어보면 포스트휴먼 담론의 형세와 논제들—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공지능, 인간과 인공감정의 문제, 인간 개체와 다른 개체(다른 동물이나 기술적 사물들)를 관류하는 정동의 흐름과 안드로이드, 좀비, 사물 같은 경계선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 객체지향존재론, 신유물론 등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을 이끄는 이론들에 대한 검토에 이르기까지—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배치돼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이 영미문학연구회의 2017년 봄 심포지엄 ‘인간 이후의 문학: 기계, 좀비, 재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책에는 해당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 2편이 실려있다― 주로 문학비평과 연구 작업을 하는 학자들의 포스트휴먼 트랜드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 응답들로 구성돼있다. 저자들이 포스트휴먼 이슈를 보는 시각이 일관적인 것은 아니며 어떤 통일된 입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공통된 사고의 흐름이랄까, 유사한 분위기 같은 것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포스트휴먼 현상을 기존의 인문학적 사유 속에서 이해하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수용 또는 전유(appropriation)해보려는 어려운 ‘온고지신’의 시도다. 사실 휴머니즘은 휴먼(인간)에 대한 옹호이기만 한 게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한 비판을 구성적 핵으로 유지해 온 지적, 실천적 운동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속해 있는 인문학(humanities)부터가, 그 이름에 이미 드러나 있듯이, 고대 로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후마니타스 전통과 근대 계몽주의 이래의 인문사회과학의 성립 및 발전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포스트휴먼은 휴머니즘과의 불연속성 못지 않게 연속성도 상당히 가지고 있으며, 포스트휴먼 담론의 예기치 않은 효과는 그것이 인간의 자기 구성 전반을 낯선 시각에서 재고(再考)해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포스트휴먼이란 도전에 대한 인문학적 응전의 신호탄


이 책에서 내가 아쉽게 여긴 것은 포스트휴먼 트랜드 자체에 대한 메타적 비판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지젝이 언젠가 말했듯이, 오늘날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 일부로 살아가고 있는, 또한 그러한 삶에 의해 그것을 지탱해주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매트릭스가 붕괴되고 다른 시스템으로 대체되는 걸 상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구(생태계)가 부서지거나 인류가 (외계인의 침공에 의해서든 바이러스의 공격에 의해서든, 수퍼컴퓨터 네트워크로의 잠입을 통해서든) 멸종되는 것을 상상하는 게 차라리 더 쉬운 길인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휴먼 담론도 그런 손쉬운 아포칼립스의 길로 들어설 위험이 크다. 포스트휴먼 담론이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유전공학 등등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축적을 위한 글로벌 기획인 4차 산업혁명과의 연계 속에서 부각되고 있음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이 책의 필자들도 그런 배경들을 비판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포스트캐피탈리즘’이란 전망이 우리 시야와 논의에 사라지기 시작한 직후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맥락에서, 각종 포스트휴먼 텍스트들에는, 그것이 좀비물이든 사이보그물이든 디스토피아물이든, 현재의 계급적 양극화와 억압된 갈등들이 상당히 강하게 스며있기도 하다. 우리가 포스트휴먼 담론 ‘밖으로’만이 아니라 그 ‘안으로’도 비판적 거리를 도입해야 하는, 보다 정확히 말해 포스트휴먼 담론 안에 균열의 틈새를 여는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억압과 억압된 것의 회귀가 동일한 것’이라면, 포스트휴먼 담론이 구명하고자 하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에는 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그 너머에 대한 열망의 시나리오도 쓰여지고 있는 중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증상의 메시지들을 읽어내는 독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 책이 포스트휴먼 트랜드에 대한 이런 비판적 응전의 신호탄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포스트휴먼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


기술을 통한 인간과 사물의 융합이란 환상을 최첨단에서 실현 중인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트랜스휴먼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최근 코인시장을 요동치게 만든 그의 언행은 머스크와 그의 광신도들이 그리는 미래가 실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 깊이 결부돼 있다는 점—코인은 국가나 중앙은행이 필요 없는 탈중심적 ‘미래화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국가나 중앙은행이 그 가치를 보장하는 ‘현재화폐’의 부를 향유하고 축적할 수 있다는 식의 자가당착—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미래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현실의 연장선일 뿐이란 얘기다. 그런데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캐나다 출신 가수 그라임스가 최근 소셜미디어 틱톡에 ‘AI는 공산주의로 가는 첩경(AI is the fastest path to communism)’이라는 영상을 올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나는 머스크의 코인 선동이나 기괴한 뉴럴링크 프로젝트보다는 그라임스의 공동체적 미래에 대한 상상이 우리를 좀 더 ‘포스트휴먼’하게 자극해주는 것 같다. 역시 포스트휴먼의 미래는 기술자와 사업가보다는 예술가와 시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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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1년 6월 25일 <교수신문>( https://bit.ly/2UJPFyp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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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브뤼노 라투르 -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사변적 실재론과 객체지향존재론의 주창자 그레이엄 하먼의 『브뤼노 라투르 :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는 사회과학계에서 슈퍼스타가 된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브뤼노 라투르의 진화하는 정치철학에 관한 선구적인 해설서이면서 객체지향 정치학을 발전시키려는 실험적 시도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성의 정치철학은 정치가 전적으로 인간 행위자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상정하고서 시민과 국민국가 사이의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근대성의 정치는, 무지에 대립하는 진리의 이미지에 기초해야 한다는 진리 정치 관념과 어떤 초월적 진실의 심급도 없는 권력투쟁 그 자체가 진리라는 권력 정치 관념 사이에서 동요해 왔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레비 R.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칸트 이래로 철학은, 마음과 세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객체에 대한 인간의 접근과 관련된 인식론적 물음들에 사로잡혔다. 『객체들의 민주주의』에서 브라이언트는 우리에게 이런 전통과 단절하고 다시 한번 제일 철학으로서의 존재론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브라이언트는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뿐만 아니라 로이 바스카, 질 들뢰즈, 니클라스 루만, 아리스토텔레스, 자크 라캉,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발달 체계 이론가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칭 ‘존재자론’(onticology)이라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전개한다.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이 책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 던지는 독특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탈근대주의의 근대성 비판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인의 본질은 이분법이 아닌 ‘하이브리드’의 증식이다. ‘하이브리드’의 이해를 통해서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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