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 '산 노동'으로서의 미지의 마르크스...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운 마르크스ㅣ강길모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07-29 08:40
조회
131
 

'산 노동'으로서의 미지의 마르크스...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운 마르크스


강길모 (현대정치철학연구회 회원)


엔리케 두셀의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에서 "미지의 마르크스"는 무엇일까? 엔리케 두셀은 마르크스의 미발표원고였던 <1861년-63년 초고>를 중심으로 마르크스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산 노동”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다른 마르크스 관련 저술들과 확실한 차별점이 있는 저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지의 마르크스”는 문헌학적으로는 <1861년-63년 초고>의 마르크스, 의미론적으로는 “산 노동”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마르크스라고 볼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미지의 마르크스’


이 책이 여전히 마르크스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정치적인 움직임이 활발한 중남미의 연구 저서라는 점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엔리케 두셀의 모국은 아르헨티나이고, 그가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를 저술했던 장소는 멕시코이다.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가 저술됐던 당대 정치·경제적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이 두 장소는 각별함을 지닌다.


1975년 엔리케 두셀은 아르헨티나에서 멕시코로 망명했다. 1970~198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 이후 최악의 군부독재를 겪었고, 1983년 직선제 선거로 민주화를 이룩하지만 이미 독재의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무엇보다 군부와 민주진영 양자 모두 20년 가까이 지속해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해왔지만,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등 여러 문제가 반복되었었다.


그의 망명지이자 지금까지의 활동 터전이 된 멕시코 역시 엔리케 두셀의 망명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에서 멕시코의 경제체제는 일시적으로 호황을 맞이하는 듯했으나, 82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책이 쓰인 88년 이후에는 더욱더 많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도입되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94년에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반발하여 사파티스타 항쟁이 시작되었고, 사파티스타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해방구 이외의 멕시코 산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멕시코는 악명 높은 마약 카르텔과 OECD 최장 노동시간, 엄청난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두 장소가 보여주는 신자유주의 폐해의 역사는 단순히 각각 국가 단위의 역사로 소급되고 멈추는 것이 아니다. 라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지역을 관통하는 정치·경제적 문제이기도 하다. 두 나라뿐만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지구상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명확하게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에 의한 착취경제체제의 극한을 보여주는 곳, 그리고 종속이론의 유효성을 증명하는 곳이라고 할만하다. 즉, 엔리케 두셀 본인의 주장처럼 “자본은 스스로 균열하고 지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산 노동이라는 외재성을 자기 존재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할만한 사태가 현존하는 곳이 바로 그의 작업이 이루어진 라틴 아메리카의 지정학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 노동


기존 마르크스 이론 연구가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미발표연구에 대한 전문적인 독해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이 책의 더 중요한 의미는 한국 마르크스 수용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됐던 이론적인 쟁점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특히 “산 노동” 개념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설명하는 부분은 중요하다.


“산 노동”은, 인격으로서 주체성의 현실화이자 인격의 존엄성의 표명인 인간 노동으로서, 외부에, 너머에, 초월하여 그렇게, 혹은 우리가 다른 여러 작업에서 명명했던 것처럼 자본의 외부 exterioridad 에 위치한다. “산 노동”은 “대상화된 노동”이 아니다. 전자는 인간인 그/그녀 자신은, 활동, 주체성, “가치의 창조적 원천”인데 반해, 후자는 사물, 생산물, 생산된 것(Dasein)이다. 따라서 (총체로서) 자본에 대한 비판은 ”산 노동이라는 외재성으로부터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산 노동은 자본의 존재(Sein) 너머, (결과적 사물인) 가치 너머의 선험적, 현실적 외재성이다. - 본문 306~307p 중 발췌


한국에도 다양한 마르크스 그룹들이 있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제각각 조금씩 다른 해석과 수용이 존재한다. “산 노동” 개념을 바탕으로 할 경우, 이 다양한 마르크스 그룹들 각각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것이며 각각의 비판의 합당성을 논하는 일은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개중에서도 속류화된, 노동 중심성을 부각하려 하는 특정한 해석들과 실천들은 이론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보다도 오히려 리카도 좌파에 가까운 면이 있다. 분명히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론적으로 리카도와 흡사한 이해를 보이는 것의 문제점은 자본주의의 현실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리카도적인 방식으로 타협하거나, 문제를 축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산 노동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 체계 전체를 설명하려 할 때 나타나는 장점이 있다. 산 노동 개념은 분명히 리카도와 명백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고전 정치경제학에 대해 메타적인 분석을 확보하는 노동개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토록 핵심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산 노동 개념이 개념적으로 충분히 설명됐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면이 없지 않다. 산 노동 개념 자체에 대한 충분한 개념 설명 대신 <1861~63초고>에 대한 문헌학적 분석, 그리고 문헌학적 분석을 통해 기존 마르크스 해석을 비판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은 독자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알튀세르 수용에 대한 두 가지 비판


마르크스에게 “과학”의 대립물이 (알튀세르에게처럼 단순히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물신”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경제 “과학” 담론이 빠져들었던 물신화 정도가 더 심해졌음을 마르크스가 점진적으로 이해했다는 측면에서 <노트>의 이 페이지들을 “잉여가치론”의 “결론”으로 간주할 법하다는 점이다. - 본문 234p 중 발췌


추가로, 두셀의 작업에서 주목할 부분은 알튀세르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8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사회에서의 알튀세르 수용은 2021년 현시점에서 본다면 크게 과학으로서의 알튀세르주의, 그리고 철학으로서의 알튀세르주의라는 두 가지 노선이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에서의 두셀은 이 양자 모두에 대한 비판점을 제공한다.


우선 과학으로서의 알튀세르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과학-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보고, 잉여가치론을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자체 모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있다. 이에 대해 두셀은 이 관점이 자본주의 체계의 외부, 잉여가치의 진정한 원천인 산 노동을 보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계가 내재적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체계 외부에 대한 착취로만 기능시키는 산 노동에서 비롯되고, 마르크스주의는 이 산 노동을 기반으로 사유, 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산 노동을 이미 자본주의적 상품체계 안에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물신이다. 따라서 두셀에게 과학의 대립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물신이며, 잉여가치론을 자본주의 체계 내부 모순으로 간주하는 것 또한 여전히 이 물신성에 머무르는 태도이다. 즉, 두셀의 관점에서 과학으로서의 알튀세르주의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자본주의적 경제이론만큼이나 여전히 물신화에 빠져있는 경제과학 담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마르크스 내의 두 번의 단절-철학도에서 청년 헤겔좌파로 변환한 마르크스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 이후 헤겔좌파와 단절된 마르크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적 알튀세르주의가 있다. 마르크스의 두 번의 단절은 철학적 알튀세르주의의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알튀세르 자신이 인간주의를 거부하게 되는 명백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두셀은 <1861-1863 초고>의 마르크스 분석을 토대로, 이 두 번의 단절을 단호히 부인하고 있다. 알튀세르가 단절의 시기라고 명명했던 것에 대해 결코 그렇지 않다는 문헌학적 증거로서 1861-1863년 초고를 제시하고 있다. 영문 편집자의 말처럼 두셀은


“마르크스가 취한 ‘개념의 전개’라는 논리적 방법과, 변증법 논리를 통해 기저의 본질(또는 “실체”)로부터 필연적 현상형태를 도출해내는 논리적 방법은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다.“ – 본문 29P 발췌


고 보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알튀세르는 완전히 틀렸다고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두셀은 마르크스가 헤겔을 “전도”하는 데 셸링을 이용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에서 눈여겨 볼만한 쟁점으로 여겨진다.


마르크스의 단절을 인정하는 쪽, 알튀세르를 위시한 여러 학자들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 작업은 마르크스 본인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은 인간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거부,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 엔리케 두셀이나, 가라타니 고진과 같이 마르크스 내부의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 쪽이 있는데 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마르크스과 엥겔스에 대한 해석 역시 마르크스주의를 관통하면서 갈라놓는 중요한 쟁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지금,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할 이유


마르크스의 미발표원고를 문헌학적으로 파고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는 실천적이고 첨예한 현실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소간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마치 상아탑 속의 연구 분야로만 여겨지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맥락, 정세, 상황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름이 주는 마력, 그리고 마르크스에게서 나온 많은 사회-정치 운동의 동력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내에 잠재되어 있다. 누군가는 그 잠재성이 단순히 선구자들이 뿌려놓은 학술적인 씨앗이거나, 혹은 과거 학생운동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름은, 그 잠재성이 씨앗이나 유산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의 모순에서 온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에서 엔리케 두셀이 강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강조점이 우리 사회에 소개되었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를 뿐이다. 분명히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는 문헌학적인 작업의 비중이 큰 책이기에 접근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또 다른 마르크스를 찾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도전해볼 만한 여정을 제공해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1년 7월 24일 <프레시안>( https://bit.ly/376gZd1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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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공산주의의 현실성 : 현실성의 존재론과 실행의 정치』(브뤼노 보스틸스 지음, 염인수 옮김, 갈무리, 2014)


브루노 보스틸스는 우리 시대 비판 이론의 떠오르는 별들 중 하나이다. 다니엘 벤사이드,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안또니오 네그리, 로베르토 에스뽀지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알바로 가르씨아 리네라 등 저명한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생각에 대한 포괄적인 전유와 예리한 문헌비판적 방식을 통해 저자는 잠재성의 존재론에 대해 현실성의 존재론을, 실행(the act)에서 유리되는 정치학에 대해 실행의 정치를 제안한다.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해리 클리버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8)


이 책은 맑스 탄생 200주년을 맑스에 대한 회의로 맞이하는 청산주의적 시류를 거부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맑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맑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책은 『자본』 읽기의 정치경제학적 읽기, 철학적 읽기라는 오랜 전통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자본』의 모든 범주들을 자본과 노동이라는 쌍방, 즉 두 계급의 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범주로, 이 갈등과 투쟁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역사적 범주로 읽어가는 ‘정치적으로 읽기’의 방법을 제안한다.


사빠띠스따』(해리 클리버 지음, 조정환‧서창현 옮김, 갈무리, 1998)


북미자유협정(NAFTA)의 발효에 때맞추어 1994년 1월 1일 멕시코의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하여 1997년 8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사빠띠스따 투쟁의 성격과 의미, 그리고 그것의 영향을 밝힌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흔히 '원주민 게릴라들'이라고만 알려져 있는 사빠띠스따들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하에서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지키고 또 발전시켜 나가는지, 또 그들이 자신들의 투쟁을 전 세계에 유통시키기 위해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스페이스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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