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11/27 『한국사와 농민』 '속편: 양반론' 전반부(pp.279~367)

작성자
bomi
작성일
2021-11-18 16:54
조회
434
11월 27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에 『한국사와 농민』 '속편: 양반론' 전반부(pp.279~367)을 공부합니다.

책을 읽으며 생각난 질문거리나 토론거리를 가져오시면 좋습니다.
질문, 토론거리를 세미나 시작 전에 게시판에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물론, 세미나 당일에 자유롭게 제기해 주셔도 좋습니다.

초겨울 감기 조심하세요. 세미나 시간에 뵙겠습니다.





<지난 세미나(11/13) 후기>

『한국사와 농민』 '후편: 양인론'


첫 번째 토론거리.
1. 신분제가 이렇게 삼중으로 발전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필연적인가?)
(국가) - 지배층 - 양인- 노비
사실은 (삼중 보다) 더 다양할 수도 있었지 않을까?

신분제에 세 층이 있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 원인은 아닌 듯. 결과적으로 삼중이라 표현했는데 ... 양인의 경우는 분화와 분해의 과정을 계속해서 받는 중간층. 전형적이지만 불안정한 하나의 층으로 설정이 되어있으므로 사실상 이중으로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는 생각. 역사적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세 개의 층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
노비 같은 경우는 어쨌든 지배층이라고 표현되어있는 것을 꼭 필요로 한다. 주인 없는 노예라는 건 생각하기 힘드니까. 그 두 개는 갈등적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런 관계라 볼 수 있겠고, 양인층이라 하면 부분적으로는 지배층이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피지배층. 어느 한쪽으로 딱 말할 수 없는 유동적인 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토론거리.
187쪽에 재밌는 각주가 있다. 백정들의 발생을, 유랑을, 지배자에 반대하는 투쟁의 초보적인 형태로 보는 것 (탈주). 일본인 학자 점패방지진. 그 사람이 이러한 신분 계층의 존재. 백정을 이민족으로 보았다고 한다. 실제로 백정, 죄인, 거란이나 위쪽 민족들, 전쟁에서 지면서 한반도로 정의. 그런데 그게 아니고, 농민 분화의 결과이고, 지배자를 반대하는 투쟁이었다는 것. 재밌게 느껴졌다.
<대서양의 무법자>라는 책에서도 탈주 반역자가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과 연결되면서 유랑이나 백정이나 이런 것들이 자유를 많이 가지는 직종을 택하는 것인데 그런 게 재밌었다.

이 대목을 보며 지금의 닭 도살 현장에서 저변을 이루고 있는 이주자들. 한편으로 딱 잘라서 너무 옛날 일이어서 고증은 어렵겠지만, 탈주자들 측면과 더불어서 분명 그 당시에도 외지인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세 번째 토론거리.
192쪽. 레닌이 말하는 농민층 분화 원인이 무엇인가? 현물지대가 원인인가?
레닌 인용. 농민층 분화의 맹아가 현물 지배에서 나타난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농민층 분화의 원인이 현물 지배에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먹고사는 것을 충족한 이후, 남는 부분.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을 때에 잉여 생산물을 축적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분화가 나타난다. 일단 가장 큰 원인은 관계시설이라거나, 농민들의 조직화. 사회적 조직화. 협력이라 말할 수 있겠다. 혹은 기계의 발전과 같은 주로 농업기계를 생산하는 공산품 생산 영역에서 나온다. 농기구가 철물로 되어있고, 도시나 수공업장 같은 데서 기계가 발전되어 나온다거나 그러면 생산성이 발전된다. 이모작 삼모작 그런 경작방식의 변화도 잉여를 낳는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다양한 방식의 생산력 발전 요인들이 작용해서 잉여 생산물을 낳을 수 있게 될 때 농민 중에서 일부가 예컨대 지주 소작 관계에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자기 가족 능력을 동원한 것 이상으로 타인 노동을 경영할 수 있는 여력. 더 많은 땅을 빌려서 경작을 하려는 동기가 생기는 거다. 그래서 더 많은 땅을 빌리면 빌릴수록 그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더 많은 노동을 고용할수록, 잉여 생산물의 양은 늘어나는 것이므로, 농민층의 분화가 일차적으로 늘어나고 지대의 문제는 현물 지배하고 화폐 지배. 그 이전에는 지대라고 하는 걸 부역의 형태로 했는데, 그런 정도의 역사 발전 단계에서는 잉여를 제공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최소한 현물로서 지대를 납부할 수 있거나 화폐로 납부할 수 있을 때, 잉여를 팔아서 화폐적 축적을 하고 그걸로 또 땅을 빌리고 고용도 할 수 있는 사회적 순환 환경도 생각난다. 할 수 있고, 그런 게 농민 분화의 프로세스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토론거리.
노비, 천민과 자유민을 가를 때 “자유”는 어떤 의미의 자유인가? 자유민에서 자유가 무슨 자유인지? 나 자신이 판매되는 것인지 아닌지의 구분. 그것과 자유가 연결되는 것일까?

책에서 저자가 자유를 어떻게 명확히 암시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저자가 자유라는 말을 쓸 때 이 책에서 반복되는 예속이라는 말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예속이 자유의 상실, 법제의 상태와 일치시켜 생각해 본다면, 예속되어 있지 아니한 상태를 자유라고 머릿속에서 상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속의 매매라는 것. 인신의 매매 판매 가능성은 예속의 가장 극단적 한 측면, 매매 되느냐 아니냐가 그 자체로 예속의 기준이라기보다는, 매매되지 않더라도 강제적으로 부역을 해야 한다거나 조세를 납부해야 한다고 한다면, 자유민이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않지 않은가 하는 생각. 양인의 경우에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기보다,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다고 본다. 노비는 더욱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양인들에게 여행의 자유가 없었다는 대목도 있다. 국가의 목적은 양인을 만들려고 하는 것. 양인을 토지에 결박하려는 것. 연결되는 것 같다.

다섯 번째 토론거리.
왜 수군은 다른 군대에 비해 천시받았을까? 군대 중에서도 천시받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원인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는지, 천시받아서 그게 반란의 원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다 위. 선상에서 선장이 모든 전권을 지고 가혹한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바다로 뛰어내리거나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기본적 조건들이 선상에서의 일들을 기피 하게 만들고, 탈출병도 많고... 다른 어떤 병사의 일들보다 수군의 일이 가혹하다. 거칠다. 이런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수군이 한국에서는 다른 병사들보다 늦게, 육지의 병사들을 보조하는 것에서 출발. 그래서 위상의 차이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현대는 수군, 그러니까 해군이 육군보다는 천시받는 것 같지는 않고, 가치평가 측면에서는 해군의 마도로스. 공군의 파일럿 이런 거는 육군의 땅개라고 부르는 형태보다는 로맨틱하게 이상화되어 평가되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군대 생활도 보면 공군이나 해군들이 육군에 비하면 좀 더 여유 있고, 상관들한테 가혹한 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적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물 위에서 전쟁한다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육지와는 다르게 위험을 수반하는 환경이다. 그러니까 육지에서는 웬만해선 ‘자빠져 죽는’ 그런 경우는 없는데, 엥겔스의 비유. 엥겔스가 아나키스트와 논쟁할 때, <위계와 권위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권위는 불필요하다고 할 때 엥겔스는 권위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항해를 예로 든다. 항해는 굉장히 위험.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날씨나 이런 것들이 자주 바뀌고, 그래서 선장이 권위를 가지지 못하면 배가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배 위에 탄 모든 사람이 위험해지므로 선장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함. 권위, 위계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다라고 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위험이라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배의 고유한 환경적 측면을 들 수 있고, 그런데 동양은 문제가 좀 다른 것 같다. 관점이나 가치관에서 차이가 나는데, 서양은 바다를 통해서 일어난 세계이지 않은가, 제국주의화되고, 문제였다고 하지만, 어쨌든 서양은 유럽이라는 아주 좁은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서 바다를 항해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바다를 가로지르고 서인도 제도,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이런 쪽으로 나아갔다. 엄청난 모험스토리를 바다로 만들어낸 지역들. 바다로 나가기 전 유럽은 중국에 비하면 뒤처진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바다에 대한 가치평가가 유럽은 높은 데 비해서 동양은 낮은편. 정하선단이 수에즈 운하까지 진출한 적이 있는데, 대대적인 수군의 위력을 보여 준 후로 중국은 물이라고 하는 거를 기피했다. 수군을 키우지 않고, 육군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몽고 북방 쪽에서 한족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성장해오고 있었으므로 몽고, 거란, 이런 세력들과 싸우는 것이 중국의 중요과제로 되고, 따라서 해군이 필요 없었던 거. 유럽은 약했었고, 한반도 같은 경우는 삼면이 바다로 애워싸이고, 일본이라는 섬나라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해 왔다. 임진왜란이나 근대화. 일본제국주의 침탈 이전, 칠백이십년대에도 일본이 신라 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준비했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700년대부터 신라와... 그런것까지 상기하면 일본으로부터의 계속된 위력이 있었으니까 해군을 무시할 수 없었음에도 상대적으로 육군에 비하면 해군을 육성하는 데는 소원했었다. 이순신같은 경우가 예외적 케이스. 상인은 장보고가 예외적.
해양 세계라는 것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주력 무대는 아니었다. 중국보다는 한반도가 더 발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고려, 조선의 해군을 빌려서 경쟁 같은 것도 벌어지고 하는데, 해군이 상대적으로 천시당하는 그런 상황에 있었던 거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여섯 번째 토론거리.
206쪽 "신분칭호들의 역사적 기원은 국가와의 이러저러한 의무관계에 두고 있다" 서양에서도 그런가? 예를 들어 젠트리라던지... 서양에서도 국가와의 관계에 따라 신분 칭호가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양인만 그런가?

180,1페이지에 직업들이 많이 나온다. 녹사, 서리, 그다음 제원, 화원, 그림을 그린다는 것, 도류, 서제, ... 서원은 또 나오고, 율생, 묘군, 간수군, 반치, 방지, 약부, 진부, 수부, 빈부, 원주, 목자, 장인, .... 그 한자들이 전부 역과 상관이있다. 글을 쓴다거나, 묘를 지킨다거나, 누구를 치료한다거나 아니면 제사 지내는 곳을 지킨다거나 약을 짓는 곳을 지킨다거나 바다의 배가 드나드는 곳을 지킨다거나..... 이런 식으로 어떤 형태의 행동을 해서 수행해 내는 의무를 표현하고 있는데, 206페이지, 세 번째 줄. 봉건 국가의 역은 양인이 분화된 계층을 근거로 편성되었고, 그 역의 종목은 하나의 세분된 신분으로서 작용하였다. 요 구절이 재밌는 내용. 주목했다. 역이면 일하는 거니까 한편에서는 양인들이 국가나 지주, 지주를 집어넣는 이유는 국가가 삼국 시대나 고려시대 같은 때는 지주에게 직접적으로 예속된 노비나 이런 경우고 군역 같은 경우도 노비에게는 안 지우고 했으므로, 지주에게 역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국가와의 관련 속에서 역을 당하고 있는 양인 경우, 어떤 역을 하느냐, 신분하고 상관이 있었다. 그래서 가치관에서 천한 사용가치면 신분이 낮고, 고귀한 거를 하면 높고, 의사나 이런 경우는 조선시대로 가면 중인, 율사도 그렇고 중인 정도로 분류, 서원 등도 아주 천시 당하지는 않았으므로, 보통 중인 레벨. 이처럼 중간이냐 하층이냐 상층이냐가 역의 사용가치와 긴밀한 연관관계.
하나 덧붙이면, 양반들도 국가에 대해서 역을 지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다. 양인들만이 아니라 양반도 국가에 대한 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대부나 이런 사람들이 예컨대 반란을 이룰 경우.... 반정을 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사육신이나 이런 경우는 반정까지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와 유사한 운동, 이럴 때 사대부들의 고유한 역이 있었다고 보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조차, 스스로 왕이 잘못했을 때 바로 세우는 것을 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성공하면 성공, 실패해서 죽거나 귀향을 가더라도 스스로는 정당하게 생각. 그래서 역의 문제가 양인의 신분 규정의 근거일 뿐 아니라 양반의 경우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주장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겠다.

새로운 토론거리 1번.
::3. 양인농민의 경리에서 ”노비증감경향: 13,4세기 노비 증가>15세기 감소>16세기 증가>18.9세기 증가. 18,9세기 노비증가는 13,4세기 노비증가와 질이 다르다”: 이 증감, 변질의 이유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인데, 네 개의 국면에서 노비의 증가, 감소 오르내리는 그래프가 나타나는데 시대별로 증감이라거나 노비의 성질이 바뀌는 이유가 뭘까. 책에 부분부분 나오는 것을 정리해 보면 좋을 듯.

흐름만 보면, 13,4세기 노비 증가 여기부터 짚어보면 좋을 듯. 이때는 고려말. 1392년에 역성혁명 일어나니까, 이때, 최씨 무인 집권기라 할 수 있고, 또 몽고가 고려를 침략해 와서, 거의 고려의 정치적 위치가 반식민지에 가까운 그런 상황이었다. 지금의 식민 개념은 아니지만, 몽고로 넘어간, 원나라로 불렸는데, 넘어간 시기에 무인집권과 외세침략의 결과가 (노비의) 급속한 증가로 나타났다.

170페이지 고려에 관한 이야기. 그 페이지에 여덟째 줄 보면 노비변정사업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노비를 잘 가려서, 양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양인으로 만들자는 것. 대체로 세종 전후기에 이런 변정사업이 펼쳐지면서 노비 중에서 억울하거나 아니면 조건이 양인으로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은 신분적으로 양인으로 전환해주는 사업. 노비 감소.
그 전 페이지 밑, 15세기 초는 소위 양천의 법이 확립된 시기이다.

경국대전은 태종 이방원이 시작을 해서 성종 때, 일, 이백년 뒤에 완성되지만, 경국대전의 합법적인 질서를 만들어가면서 어지럽던 신분 규정들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양인과 천민 사이에 경계를 분명히 하고 노비가 아닌 사람은 양인으로 만들 수 있는 법률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볼 수 있다.

16세기는? 설명이 나온 지는 잘 모르겠지만, 16세기,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임진란인데, 임진란 직전의 사회적 상황이 초기에 태조, 이성계라거나 태종 이방원이라거나 이방원의 아들이 세종이라거나 문종이라거나 이런 사람들은 혁명 직후에 통치 질서를 잘 갖추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들. 태종은 정치적으로 문란이 많지만, 혁명 주도 세력의 한 사람이고 통치 과정에서도 성과를 많이 낳았고, 세종은 한글 창제 등 문민 통치 기반 확립. 통치 질서를 세력화 시키는 데 기여. 그러니까 임진란 전을 한 시기로 구분했을 때 그 초기, 태조에서 태종 연관 초기는 조선이라고 하는 질서를 갖춰나가기 위한 질서를 갖추는 시기인데 비해, 사림이 등장하고 사림과 훈구세력. 훈구는 혁명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세력 기반이 사림의 등장과 더불어 몰락해 가고, 사림이 등장하면서 내부의 논쟁이 당쟁같은 것으로 발전되어가고, 노론과 서론 등등 장쟁으로 이 사림내부의 투쟁이 격화되어 가는 그런 상황에서 통치질서가 엄청 문란해져갔고 이완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양인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리라 생각되고 그러면서 노비의 수가 급증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16세기에 대한 설명이 잘 나온 건 아니고, 풀어보자면 그렇다.

18,9세기 증가도 뚜렷하진 않은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노비 증가의 질이 다르다고 한 것도 고려를 해야겠다.

실제 노비가 늘어나는데, 18.9에는 이 책이 강조해서 설명하는 것처럼, 농민집단의 분화와 분해 이 둘을 다른 용어로 쓰던데, 분화는 층별 구분이 나타나는 걸 말하고, 분해는 농민집단이 갈라져서 아예 농민집단이 장인으로 가거나 임금 노동자로 도시로 가거나 해서 농민적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할 때, 분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18,9세기에는 바로 이러한 분화와 분해의 결과 농민 중에서 잘살게 된 사람들은 부농이라거나 또 벼슬을 한 양반이라거나 그런 쪽으로 가고, 노비로 전락하는 그런 경우를 볼 수 있고, 두 번째 케이스는 양반 중에서도 몰락하는 사람들이 많다. 13,4세기, 후에 감소 되었다고는 하지만 태조 이성계에서 ... 혁명의 정착 과정에서 고유의 충신들 그런 사람들이 말을 안 듣고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이 사람들을 잡아서 우두머리는 죽이고 그 일가는 노비화. 노비의 감소만 있는 건 아니고 증가도 있었는데, 18,9 세기. 혁명기, 민란이 아래로부터 올라오고, 지배권 내부에서도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 격화. 지배 세력은 점점 18세기에는 노론으로 수렴되고 19세기에 가게 되면, 김씨라거나 외척 지배기로 되어서 노론이라는 당보다도 부인의 가정이 통치를 하는 그런, 독제화 되어가는 과정을 밟는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양반층 내부에서의 ... 많은 노비가 생산될 수 있는 조건 제공. 투탁같은 경우 몰락하는 양반들이 지주 등 잘사는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 그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미 이때가 되면 노비라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굳건하게 예속되는 그런 노비가 아니었다는 것. 성질이 달라지는 노비였다는 것.

2번은 ::려말선초 병역부과: 삼정일호...인정이 하나 있는 세 집을 합하여 1호를 짜고 그 1호에서 [각-아멜라노] 한 사람의 수성군인이나 수군의 군정을 내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의 봉족(보인)으로 했다. 201….탈자? 토론거리라기보다는 읽으면서, 계산이 안 맞았다.

3번은 ::4절 ”노비는 양반들의 착취대상이므로 봉건국가가 건드리지 말 것. 양인은 국가에 역을 제공하여야 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봉건 국가하고 양반의 관계가 뭐냐 하는 것과 두 항의 관계 속에서 노비라고 하는 거는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 하는 것을 질문한 것이다.
봉건 국가가 양반에게 귀속된 노비는 건드리지 않는다. 역을 부과한다거나 조세를 걷는다거나 그런 거를 안 한다는 것. 그럼 양반은 살맛이 날 것이다. 오로지 양인에 대해서만 역을 부과한다는 건데 양인만이 아니라 양반도 역을 제공했다는 의견이 있다는 말을 했었는데... 노비는 일단 공노비를 제외하면 역을 부과받지 않고 자기 주인에게만 하는 거니까. 노비를 빼고 만약에 양반도 역을 부과하지 않는다면, 이견은 있지만, 남는 거는 양인뿐이라는 것. 양인이라는 것이 국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전형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라고 하는 게 저자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득 양인에 상응할 오늘날의 존재, 이런 것도 스쳐가긴 한다.
4번 ::”역=세분된 신분. 신분칭호는 국가와의 의무관계에 역사적 기원을 둔다 206”: 양반도 역을 갖는가? 아까 이야기와 겹치는 이야기다.

5번 이야기는 현재와 조선 비교 이야기.
::”15세기 조선초기 부병제도: 정규군 17만, 봉족 51 도합 68만(봉족을 3인이 아닌 2인으로 하면 45만-50만 정도) 양인상층부 출신 군인: 1만5천 내외”…현재의 병역제도와 조선조의 부병제도를 비교해 보자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정규군이 17만에다가 봉족이 51만. 하면은 68만. 굉장히 대군이다. 지금 우리의 군인이 육군은 49만2천. 해군은 6만 8천, 공군은 6만 오천. 보통 60만 대군이라 부르는데, 보통 60만 전후로 형성. 예비군은 따로. 방위병. 민병같은 경우는 또 따로 있고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봉족은 3정1호. 한 집에 세 명있게 되는 거니까. 17만이 호별로 된다면 3인일겨우, 2인일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론 3정 1호인데 두 케이스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에 양인 상층부 출신의 군인은 일만 오천 내외. 지금으로 치면 장교에 가까운 클래스라 볼 수 있겠다.

봉족에는 여성도 해당되는 듯. 그리고 양인. 아까 3번에서 양인들은 국가에 대해 역도 지지만, 양인들 ... 토지를 가진 사람도 있고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양인은 이중의 역,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매매되는 건 아니다.

수치적인 것 말고. 육해군의 분석이라거나, 장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를 비교해 볼 순 있을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꽤 많은 인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떨까?

이때 군인들은 상설 군인은 아니고, 농민들이기 때문에 농사짓다가 전쟁이 나면은 군역을 수행해야 했다. 중국같은 경우는 전쟁은 항상 겨울에 일어나는데 왜냐면 가을까지 추수하고, 다시 봄 되면 씨뿌리로 돌아가야 하므로.

상설, 상비군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6번으로 넘어가자.
::“양인의 소유권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이 소유권에 대하여 봉건국가는 자기의 통제권 내지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213): 소유권과 통제권의 교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소유권, 통제권. 지난번에도 잠깐 나왔는데, 보통 소유 그러면 타인의 영향력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걸로 우리 시대에는 이해하고 있다. 전적인 통제권. 그런데 이게 근대적으로 사적 소유권의 영향으로 그런거고. 삼국시대, 조선조까지의 소유권은 우리의 사적 소유와는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유권과 통제권이 겹치면서 영향력의 우열을 다투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로 그 점을 유의해서 보자는 취지였다.

당시의 소유권은 사적/공적 소유, 점유권 이런 개념을 전부 포괄한다고 생각하면 될까?

토지라는 것은 누가 갖고 있던 간에 사실상은 왕의 것이라는 것이 대전제로 깔려있고, 왕을 공적 존재로 파악한다면, 토지 공개념이 적용되고 있는 거고, 왕을 사적으로 하면 다 왕의 사적 소유지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 근대의 개념으로 과거를 생각해 보는 것.
소유권이 과전제라거나 정전제라거나 이게 다 왕이 귀족들에게 일정하게 토지를 불하하는 그런 케이스다. 민간에게 줄 수도 있고 그랬을 때에 그 귀족들이 소유하는 소유권이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원래는 당대에 공을 세운 사람이나 효도를 다해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나 그런 사람들이 토지를 왕으로부터 받았을 때에 그 소유연한이 죽을때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었는데, 죽은 다음에도 계속 소유권을 주장하는 현상이 발생해서 그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 정도전 같은 사람이 혁명하면서 토지를 몰수해서 국유지로 돌린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세대에 그쳐야 하는 것이 가문 귀속으로 되는 경향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소유권이라는 게 사회주의 나라들, 중국 인도네시아 이런 곳을 보면 토지를 외지인들이 살 수가 없다. 100년 이상은 임차도 안 해 준다. 그런 식으로 소유개념과 점유 개념이 크게 구분이 안 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조선 후기로 가면서 노동의 발전과 더불어서 사적 소유를 확립하려는 그런 움직임들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는데, 일단 지금 일반적 차원에서 양인의 소유권은 왕의 통제권, 지주의 통제권 이런 것들과 섞여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미분화의 상태인 걸로 볼 수도 있겠다.

7번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215쪽 이후에 등장하는 김석형의 농노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봉건 국가와 봉건제도의 이중적 억압하에 있는 양인 농민이라 할지라도 농노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를 아무도 매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농노라고 말하는 것은 유럽의 농민 봉건농민층을 번역하여 농노라고 할 때 그 농노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농노다.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농노는 생산수단에 대한 점유자로서의 자기의 경리와 생산 도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에 대한 불완전 소유자인 봉건들이 매매할 수 있는 존재임은 전기한 바도 있다 우리의 양인은 그 불완전 소유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서양인이 소위 권귀들과 사원들에 의하여 억양위천 당하여 노비로 되고 매매 당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그는 어디까지나 노비로서 매매를 당하였지 양인의 자격을 가지고 매매 되지는 아니하였다”

김석형 저자가 농노를 서구적 개념에서의 농노와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지점이 재밌는 것 같다. 이건 9번과 같이 봐야 할 건데, 노비는 노예인가?
9번: ::노비가 노예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설정은 서구적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가? 비교계급학이 서구계급학을 척도로 하는 동양 재기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비, 양인, 양반 등의 동학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후에 비교계급학적 관점에서 둘 이상의 사회를 비교해 보면 된다. 삼국시대가 봉건시대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그러한 서구주의가 틈입한 결과가 아닐까?

농노 얘기는 없지만, 조선시대의 양인, 농민, 중간층 정도는 농노인가, 이런 식의 질문을 던졌을 때 농노라거나 노예라거나 이런 것들은 우리가 주로 맑스주의 담론에서 개념화된 것이고 정교하게, 서구라고 하는 역사 무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 그러니까 노예, 농노라는 개념을 쓸 때 이미 서구주의가 깃든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한 건데, 김석형 저자는 그게 아니고 내 나름의 농노 개념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농노라는 범주가 없는데, 서구에서 나온 어떤 용어와 일치하는 말을 다른 개념을 불어넣어서 과학적 개념이라면서 지금 사용을 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지만, 이때 그러면 농노가 뭐냐 하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논해야 한다는 생각.

저자는 농노 개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쓴다. 두 가지 차원, 생산수단에 대한 점유자로써 (소유자라고는 안 함) 양인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소유라고 해도 괜찮은 ... 생산도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봉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완전 소유자로서 매매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농노로 본다라고 하는 것.

저자는 한국에도 농노가 있다. 농노가 양인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인데, 한국에도 농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농노로 본다는 거다. 농노라는 개념을 써서 보겠다는 것. 문헌 속에 농민, 민, 역에 따른 여러 이름들은 등장해도 농노다 라는 말을 쓴 문헌들은 있다 없다는 말은 안 했지만, 문맥에서 보면 등장하지 않은.... 그리고 우리 사회에 보면 농노가 있다는 거다. 양인 농민 중에서 ... 농노 사회인데, 농노가 압도적으로 많았느냐 하면 숫적으로는 적으나 농노라고 말할 수 있는 농민층이 엄연히 존재했고, ... 왜 농노가 적었느냐 매매될 수 있는 농노가 적었다는 것.

보편으로의 맑시즘 아니면 당시에 지금보다 훨씬 보편으로써의 정치경제학을 배워오고 그 베이스에서. 근대 이전의, 보편과 특수라고 하는 그런 구도를 상정하기 이전의 상황을 서구의 보편이라고 하는 프레임으로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자각하는 그 대목이라는 생각도 들고. 저자도 스스로의 방법론이 아이러니한 작업을 하는 ...

이 책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와 특히 삼국시대는 봉건시대였다라는 학술적 주장을 내려는 거다. 그러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봉건시대인가? 하면 농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거고. 그건…. 앞선 정의에 들어가는. 그런 그 논리 전개의 배후에는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제 사회라고 하는 역사 발전의 단계론이고, 그것도 보편주의적 단계론. 그 단계론에서의 봉건시대를 삼국, 고려, 조선이 경과 해 왔음을 입증하려는 것이 이 책. 그런데 그 보편으로서의 단계론을 떠나서 생각해 보면, 삼국시대 때부터 조선시대까지는 백성의 시대였다라고, 농노라고 하지 말고, 예를 들어 그렇게 아이디어를 내보는 것. 백성의 시대는 이러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런 층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다음에 봉건에 해당하는 존재도 삼국시대 고려시대 다 명료하지는 않다. 그런데 조선에 가면 양반이라는 게 등장하고 고려나 삼국시대에는 호족이라는 게 있고 그런데 이게 서구의 봉건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호족사회. 이런 식으로 해서 이 한반도 역사에 있었던 역사적 정치체들을 규정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여러 나라들을 러시아라거나. 태평양의 섬나라라거나 이런 곳을 노예제-봉건제-자본제라는 걸로 다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 속에 서구 맑스주의의 기본적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역사의식이 깔려있다. 그게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는데, 그 효과와, 한반도 역사 행정의 고유함이 있었던 그 언어들 개념들을 가지고 또 다른 역사 행정을 만들어내는 것 사이에서 무엇이 더 효과적이고 실용적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그 문제의식을 이어받아서. 217쪽... 계층화를 다시 한 거는 서구의 그 틀을 가져와서 재규정해보려는 시도라고 얘기해 볼 수도 있을까? 예를 들면 노비, 양인 사회, 백성 시대, 노비-양인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텐데....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어쨌건 우리의 역사적 체험을 서구의 방식으로 번역하는 건데, 번역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고, 번역을 위해서는 비교라거나 그런 것들이 수반... 번역하는 것의 효력이 아주 좋을 때는 번역을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노비라고 하는 것을 노예와 농노와 예속 ... 서구 언어로 반드시 번역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런 시각에서 노비를 분해하고 ... 해체되어 버리는 방법론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역사적 체험 속에서 가지고 있는 법률적 규정이건 간에, 그런 걸 사용해서 우리 사회의 역사를 분석한다면 서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등장할텐데, 그 안의 다이나믹을 규명 할때는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씀 들으면서 거리를 좀 두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 남한에서도 70년대는 김용석 선생의 책.
국문학에서 김현 김윤식이 역사를 새로 쓰면서 영정조 시대에 맹아를 발견하려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보편주의에 대한 강박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생산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생산 관계를 중심에 두고 사회를 분석하는 것. 물론 이것도 맑스주의의 영향이긴 할 텐데. 8장 결론 부분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257쪽 “양인의 계급적 내용이 노비농민의 그것과 함께 전체적으로는 복잡하여져가는 것, 그 내부의 계층이 더욱 생겨나는 진정한 원인은 저러한 양천규범의 변천이라는 형식적인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력의 점차적 발전과 농민계급 내부의 이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분화에서 찾아야 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어쨌든 역사를 분석할 때 ‘농노’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설사 그게 실제 전통적인 문헌에 등장하는 용어는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적 변화에서 생산의 문제를 부각해주는 효과가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백성’이라는 용어는 좀 모호하다는 생각도 든다.

계급이라고 하는 것 자체도 바깥의 것들이고 ... 계급이라고 하는 방법론 자체가 이미 다른 방법론인데,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할 때의 딜레마 같은 것도 좀 느껴진다.

8번 ::7장 1절에서 삼국시대 신분제도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삼국시대는 신분제도가 고려조선조보다 미발달. 양천의 계선이 불명료. 천인은 노비+알파. 향부곡의 천민은 매매대상은 아니지만 사여, 증여의 대상은 됨. 후세의 공노비와 유사.” “삼국의 양인농민: 국가에 대한 예속, 봉건지주에게 이중적으로 예속되어 있지는 않았다(즉 고려조선보다 양인이 덜 예속적이었다: 예속성의 역사적 심화 행정=공동체적 관계의 해체와 위계관계의 심화)”

예속성 부분. 고려, 조선이 중세라는 것은 대체로 역사학회에서 합의된 내용인데 삼국시대가 봉건시대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삼국시대가 어떠했느냐 하는 질문이 던져질 터인데, 일단 그 이후에 비하면 예속성의 정도가 낮았다. 왜 그랬냐를 조금 설명하고 있다. 공동체적인 관계가 해체되면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건데 공동체적 관계가 아직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예속의 정도라고 하는 것은 후세에 비하면 훨씬 낮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게 주된 주장이고, 그래서 향리나 부곡 같은 곳에 사는 천민이 매매 대상이 아니라는 것. 이것도 중요한 측면. 그러면 농노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 김석형 저자의 농노 개념엔 들어가지 않는 것. 매매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물 같은 것이 되기도 했던 ... 향, 부곡이라는. 대목마다 많이 등장을 한다. 항몽전쟁 때라거나 몽고에 대한 전쟁, 일본에 대한 전쟁때 향이나 부곡의 인민들이 승전을 끌어내고 그런 게 굉장히 많이 발견되어서 하층 예속민들이 어떻게 보면 애국적 투쟁이다.

10번 ::”삼국은 원시공동체의 붕괴기로부터 출발한다. 이웃종족들에 대한 정복으로 충만. 피정복민은 피정복 종족 내 계급분화에 따라 노비, 천민, 양인 등으로 차별화됨. 공동체 붕괴기의 노비, 천민, 자유민이 전쟁을 통해 가혹하게 예속되는 방향으로 정비. 피정복지는 군현으로 만들거나 부곡 향으로 만들어.”: 그렇다면 고조선은 국가사회인가 원시공동체 사회인가?

공동체적 관계가 서서히 와해되어 가면서 삼국이 등장을 하는 건데, 삼국시대 고조선이 삼국 뿐만이 아니라 12국, 동예, 옥저, 부여, 분화가 되어가는데, 최근 들어서 고조선도 국가 형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원시공동체 사회로 보지 않고 그러니까 계급 사회로 보는 것이다. 앞까지의 맥락으로 보면 김석형 저자는 삼국시대 이전의 사회는 공동체적 관계로 파악을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이거를 우리가 어떻게 좀 섬세하게 분별해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국가의 형태로 보는 것과 공동체로 보는 것 (고조선을)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조선을 국가 형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면 고조선이라고 하는 단일한 정치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조선. 원시 공동체는 씨족, 부족 사회 그런 사회들로 분산되어서 존재했던 것일테니까. 그럼 고조선이라고 하는 국가가 있고, 고조선의 강력이 어디까지였나가 역사학회에서 오랜 논쟁거리인데, 원시 공동체 사회라면 강력 자체를 논할 수가 없다. 고조선을 국가 형태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지금의 역사 논의가 허구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럼, 고조선의 유물. 단군 능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해서,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것을 구경하게 만들어놓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그런 능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학술적 논란들이 제기되는 것 같다.

지금은 대체로 고조선을 국가 형태로 바라보고, 유물, 유적들, 문헌은 별로 없다. 삼국유사에 신화에 가까운 기록이 남아있을 뿐. 그것도 한참 후에 정리한 건데, 도대체 고조선 사회는 뭐였다는 말이냐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겠다.

지금 당장의 역사 논쟁이다. 당연히 고조선이 국가였다고 해야 유리한 것이겠고. 이 책에서는 원시 공동체 쪽으로 ... 삼국 이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어서 어떻게 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의 서술만으로는 국가 제도가 갖춰진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설명하는 것만은 분명. 그럼 그 이전은 설명하는 것이 불분명하다는 것인지 ... 잘 모르겠지만, 삼국시대 이전의 십이국 시대라거나 고조선 시대는 원시 공동체 사회이거나 그에 가까운 무언가이거나.

잠깐 찾아보니까 저자는 고조선을 국가 형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여기 서술 방식, 삼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전쟁을 하는 통에 노비계급이 발생했다. 이런 부분은 더 세밀하게 서술되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고조선만 하더라도 단군조선하고 위만등 세 개의 역사적 구분이 있고, 단군조선만 하더라도 단군이 하나만 취하는 것은 아니고, ... 하나의 시기. 삼국 시대. 고려시대 그런 식으로 역사적 세분화가 가능하므로 원시 공동체 사회라하면 지금의 역사관에서는 역사적 시기를 칭하는 걸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도 서구의 개념이지만, 도시국가 같은 것도 떠오른다.

부족들이 밑바탕에 있다 하더라도 국가 형태를 갖춘 연맹 형태. 기자조선. 기자같은 사람은 중국에서 온 사람. 중국에서 와서 역사적 중간 시기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걸 설명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 기자조선은 단군조선 옆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고조선은 별개이고 요서 지역에 따로 있었던 나라다라고. 어떤 사람은 기자가 고조선을 점령해서 왕풍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하고 등등 논란거리들이 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근대국가의 이미지로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한 정도의 권력 집중은 이루어져 있어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중앙 집중까지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0

전체 293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새책공지] 클라우스 뮐한, 『현대 중국의 탄생 - 청제국에서 시진핑까지』 - 3월 9일 시작!
ludante | 2024.03.06 | 추천 0 | 조회 494
ludante 2024.03.06 0 494
공지사항
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다중지성의정원 | 2022.01.11 | 추천 0 | 조회 1787
다중지성의정원 2022.01.11 0 1787
공지사항
역사비판 세미나 기록과 사회 순서
ludante | 2020.10.24 | 추천 0 | 조회 2766
ludante 2020.10.24 0 2766
공지사항
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회원님들께 요청드립니다.
다중지성의정원 | 2019.11.03 | 추천 0 | 조회 3056
다중지성의정원 2019.11.03 0 3056
공지사항
역사비판 세미나 - 매월 2, 4주에 진행됩니다.
ludante | 2019.07.04 | 추천 0 | 조회 3194
ludante 2019.07.04 0 3194
공지사항
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
amelano joe | 2019.03.02 | 추천 2 | 조회 4065
amelano joe 2019.03.02 2 4065
287
현대 중국의 탄생 2장 중화세계의 재구성(1800-1870) 토론거리
amelano joe | 2024.04.13 | 추천 0 | 조회 31
amelano joe 2024.04.13 0 31
286
4/13 토요일 오후 7시 30분 <현대 중국의 탄생> 공지
voov11 | 2024.03.23 | 추천 0 | 조회 69
voov11 2024.03.23 0 69
285
현대 중국의 탄생 1부 청의흥망 1장 영광의 시대: 1644년~ 1800 토론거리
amelano joe | 2024.03.23 | 추천 0 | 조회 58
amelano joe 2024.03.23 0 58
284
3월 23일 토요일 저녁7:30 『현대 중국의 탄생』 두 번째 세미나 공지입니다.
ludante | 2024.03.09 | 추천 0 | 조회 87
ludante 2024.03.09 0 87
283
『현대 중국의 탄생』(클라우스 뮐한) 첫 세미나 <서론> 토론거리
amelano joe | 2024.03.09 | 추천 0 | 조회 116
amelano joe 2024.03.09 0 116
282
3월 9일 현대 중국의 탄생 첫 세미나 공지
voov11 | 2024.02.24 | 추천 0 | 조회 211
voov11 2024.02.24 0 211
281
원톄쥔, 여덟번의 위기 4장 ‘1997년과 2009년에 발생한 두 번의 외래형 위기’ 독서노트와 토론거리
amelano joe | 2024.02.24 | 추천 0 | 조회 127
amelano joe 2024.02.24 0 127
280
2월 24일 『여덟 번의 위기』 세미나 공지
bomi | 2024.02.17 | 추천 1 | 조회 175
bomi 2024.02.17 1 175
279
원톄쥔, <여덟번의 위기> 3장 토론거리
amelano joe | 2024.01.27 | 추천 0 | 조회 160
amelano joe 2024.01.27 0 160
278
1월 27일 (토) 7시30분 <여덟 번의 위기> 3장 세미나 공지
ludante | 2024.01.08 | 추천 0 | 조회 237
ludante 2024.01.08 0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