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호] 이것은 들뢰즈의 책이지만 들뢰즈의 책이 아니다ㅣ김미정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2-08-03 09:52
조회
430
 

이것은 들뢰즈의 책이지만 들뢰즈의 책이 아니다


김미정(문학평론가)


들뢰즈, 연속과 생성의 철학자인가, 불연속과 물러남의 철학자인가

‘편지와 기타 텍스트들’(Lettres et Autres Textes)이라는 제목의 질 들뢰즈의 유고 텍스트가 『들뢰즈 다양체』로 번역, 출간되었다. 1부에는 펠릭스 과타리,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미셸 푸코 등 들뢰즈의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들에게 쓴 편지가, 2부에는 들뢰즈가 직접 그린 그림, 책에 대한 리뷰나 서문, 흄에 대한 교수자격시험 강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대담이, 그리고 3부에는 그의 20대 초 저작으로서 1945-1947년에 쓰여진 글들이 실려 있다. 일관된 주제나 스타일을 찾기 어려운 이질적인 텍스트가 하나의 몸체를 형성하고 있는 이 책은 과연 한국어판 제목 ‘들뢰즈 다양체’라는 말에 값하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다양체’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단지 다양한 차이들의 총합이 아니다. 이질적인 것들의 단순한 접속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들뢰즈·과타리가 고안한 ‘기계’ ‘배치’ ‘기관없는 신체’ 등과 같은 계열 속에서, 한 시절 다른 욕망과 혁명의 상상력을 자극한 개념의 하나였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21세기 들어 들뢰즈는, 소위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등 ‘물질로의 전회(turn)’ 측에서 다양하게 재독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독해의 스펙트럼은 꽤 넓어서 정동론, 생기론 등으로부터 사변적 실재론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의 실천적 담론의 범위를 이미 넘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들뢰즈를 형이상학자, 사변적 실재론의 선구자로 규명하고자 하는 작업은, 들뢰즈를 사건 철학, 생성의 철학 계보에서 이해해온 통념을 정면에서 질문하는 것으로서 기존 들뢰즈 독자에게 다소간의 혼란을 주는 면도 있었다.

가령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에서 저자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들뢰즈를 형이상학자, 사변적 실재론의 선구자로 규명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가 규명하는 들뢰즈는 “개별적이고 환원불가능한 존재자들과 그런 존재자들 사이의 [근본적:인용자] 불연속성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론”의 철학자이고 또한 “환원 불가능성과 물러섬의 사상가”(20쪽)다. 또한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의 책을 읽은 그레이엄 하먼 역시 들뢰즈를 “무정형의 궤적과 생성의 사상가”가 아닌 “이산적인 개별적 존재자들의 사상가”(앞의 책, 16쪽)로 규정한다. 그들의 들뢰즈 독해는 분명 기존의 통상적 들뢰즈 독해를 이탈한다. 즉 ‘개별적’ ‘불연속성’ ‘환원불가능성’ ‘물러섬’ ‘개별적 존재자’ 같은 그들의 말은, 들뢰즈를 연속성, 운동, 힘, 사건, 생성 철학의 계보에서 읽어온 바에 대한 과감한 재독해라 할 만하다.

동사가 아닌 일종의 명사형의 철학을 환기시키는 이러한 들뢰즈 읽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전제 혹은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의 저자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사변적 실재론의 아이디어를 들뢰즈로까지 소급하는 과정에서 들뢰즈, 과타리의 공동저작을 ‘들뢰즈’라고만 언급하겠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들뢰즈의 존재론이 반드시 과타리의 존재론인 것은 아니기 때문”(47쪽)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들의 공동저작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의 사상이나 이론을 개별자 단위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식에 익숙한 사유 속에서 이러한 방법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공동의 사유를 표방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할 차이와 고유성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인헤이런브링크의 사유와 방법에 특별한 설득장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들뢰즈 다양체』를 읽으면서, 실제 들뢰즈는 그 고유명에 값하는 그의 특질을 추출하는 이런 ‘방법’에 선뜻 동의했을까라는 회의를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가 취한 ‘방법’은 사변적 실재론 측에서 ‘환원 불가능’ ‘개별적 존재자’ ‘불연속성’ 등의 술어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내용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이때 클라인헤이런브링크가 추출하고자 하는 “절대적 특이성”은 들뢰즈-과타리로부터 들뢰즈를 구출하고자 하는 취지에 한정되는 듯 여겨진다. 하지만 원리적으로 생각할 때, 들뢰즈-과타리에서 과타리를 소거하면서 들뢰즈를 추출한다는 것, 들뢰즈와 과타리의 차이를 통해 들뢰즈를 추출한다는 것이 적어도 산술적으로 가능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또한 “절대적 특이성”이 하나의 ‘사건’적인 것이지 어떤 개별 신체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떠올려야 한다.

즉, 예컨대 과타리가 제안한 ‘기계’ 개념에 대해 들뢰즈/과타리의 차이를 논할 수는 있어도, 각자의 고유의 사고를 분별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 절대적 특이성으로서의 계기와 그 지점을 명확히 지목하여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들뢰즈 다양체』의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러한 추출 방법은 늘 비율과 정도의 문제 혹은 근대 학문 체계 내에서 필요한 것일 따름 아닐까.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나 그레이엄 하먼의 관점처럼 들뢰즈를 불연속, 개별적 존재자, 물러섬 등의 철학자로 보는 것은, 근대 학문 체계의 깊숙한 전제들과 그것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온 들뢰즈-과타리의 충돌을 결과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들뢰즈의 책이지만 들뢰즈의 책이 아니다 : ‘다양체’로서의 책

두 권 책을 겹쳐 생각할 때 자연스레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책이란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오늘날, 책이 인간의 지적, 정서적 집적의 물리적 형태라는 상식에는 부연할 것이 많아졌다. 우리는 지금 법적, 제도적으로 지식과 정서에 조밀한 소유의 권리를 상정하고 부여하는 것에 익숙하다. 책은 이미 법적·제도적으로 배타적 소유의 대상물과 분리해내기 어려워졌다. 저자의 이름=서명이 상징해온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믿음, 혹은 지식과 정서가 개체적으로 구획 가능하다는 믿음은 오늘날 책, 글에 대한 이미지에 강하게 들러붙어 있다. 이것이 근대적 지식 체계의 기본 조건이기도 했음을 이쯤에서 잠시 떠올려둔다.

그런데 일찍이 『천의 고원』(1980)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책이 “하나의 다양체”(12쪽)라고 했다. 이 다양체란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12쪽, 밑줄:인용자)이며,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없는 몸체들과 관계맺고 있”(13쪽)다고 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말한 ‘기계’를 설명하기 위해 든 사례, 혹은 『천의 고원』 체제에 대한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즉, 그들이 말한 다양체로서의 책이란 도서관의 분류 체계 하에 아카이빙된 사물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세계와 관계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용하고 증식하는 생물에 가깝다. 이것이 근대적 의미의 글쓰기나 책, 즉 개인 저자에게 사유와 내면을 독점적으로 할당시켜온 관습에 반(反)하는 이야기임은 더 강조할 것도 없다.

실제로 『들뢰즈 다양체』에 실린 성격 불분명한 텍스트 모두가 그들이 말한 ‘기계’ ‘다양체’의 의미를 증거하고 있고, 그것은 나아가 근대적 글쓰기와 저작의 의미를 질문케 한다. 들뢰즈의 삶과 연결 접속해온 무수한 이름과 익명의 신체와 사건이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한 통상 들뢰즈의 작업에서 과타리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작업을 논할 수 없음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과타리와 들뢰즈가 함께 작업한 책들의 목록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요 개념의 고안과 발전 자체가 그들의 지적 협업의 과정이자 산물이기 때문이다. 가령 1969~1982년 사이 과타리에게 쓴 들뢰즈의 편지에서는 ‘집단환상’ ‘횡단성’ ‘기계’ ‘분열분석’ 등 개념에 대한 과타리의 주도적 역할을 엿볼 수 있고, 실제 그들의 작업이 들뢰즈/과타리 식으로 명료하게 분할하기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며, 그것은 사유·지식·정서 등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재고하게 한다.

그럼에도 당시 항간에서는 과타리의 이름을 지우고 들뢰즈를 “추상화”(62쪽)하는 식의 반응들이 빈번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시 철학교사이자 들뢰즈에게 논문지도를 받고자 한 아르노 빌라니에게 쓴 편지에서도 들뢰즈는, “들뢰즈-과타리-푸코-리오타르-클로소프스키라는 리좀에 시작이 있습니까?”(101쪽)라는 식으로 들뢰즈를 위시하여 다른 이들을 후경화하며 추상화하는 질문에 대해 “그런 것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리좀은 펠릭스와 나 사이에만 있답니다”(101쪽)라고 응수한다. 이 말은 스스로의 작업의 리좀적 관계를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펠릭스 과타리의 이름을 지우고 들뢰즈의 이름만을 전경화하려는 이들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 아르노 빌라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계속 들뢰즈는 과타리의 이름을 빌라니가 지우고 있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항의하고 있다.

한편,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출간 이후 레이몽 벨루와 주고받는 인터뷰(1973)도 저작물이라는 것과 그 성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이 인터뷰는 (『들뢰즈 다양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일 텐데) 두 사람의 미묘한 차이뿐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책일지, 또한 출간 당시 서구 담론계에서의 반향 등을 짐작케 한다. 인터뷰 내내 들뢰즈, 과타리의 공세와 레이몽 벨루가 수세에 몰리는듯한 상황이 흥미진진하다. 이때 반대자의 포지션으로 상대를 도발(?)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핵심을 잘 이끌어내는 레이몽 벨루의 역할도 꽤 중요하게 보인다. 즉, 질문자 혹은 반대자의 포지션조차(이기 때문에 더욱) 어떤 의미를 보충하고 확정하는 데에 늘 중요하다.

이 인터뷰에서도 들뢰즈는 말한다. “우리는 이 책을 한 권의 책으로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책으로 체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외부 집합 속의 ‘책’이라 불리는 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그것의 내부성에 의해서, 그 안에 포함된 지면들에 의해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은 책 밖의 수많은 연결들과 관련해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255-256쪽) 이 말은 앞서 인용한 ‘다양체로서의 책과 글쓰기’에 대한 풍부한 암시로 흘러넘쳤던 『천의 고원』의 아이디어를 이미 충분히 담고 있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니라 “일반적인 저항 운동과 접속하는 책”(253쪽)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책 ‘읽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는 통상적으로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방식, 즉 “책을 책 아닌 것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는”(270쪽) 읽기를 강조한다. 그는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서 모든 페이지마다 모든 문장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따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글, 책이란 읽는 이들마다 수용의 편차가 크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마다의 독해력, 이해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읽기란 개별 역량의 문제 이전에 결국은, 어떤 배치 속에 그의 신체가 접속해왔는지의 문제와 관련될 것이다. 잘 읽힌다는 것은 그 책의 흐름에 순조롭게 승선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다른 읽기의 의미에 따르면 ‘정확히 읽기, 올바르게 읽기’ 같은 것은 모두 불가능하고 그것에 강박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읽기의 와중에 나의 신체(손, 눈)와 종이의 질감과 활자의 기표/기의와 그 너머의 신체들이 접속하는 흐름, 운동이 각자에게 무언가를 생성시킬 것이다. 그의 말을 좀더 적어본다. “만일 잘 흘러가면 읽는 사람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 개념이 무엇인지, ‘흐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관없는 신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 개념들은 “단지 그에게 무언가를 생각나게 할 뿐”(271쪽)이다.

들뢰즈는 ‘기계’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 사례를 들었다. 하지만 이것이 읽기의 와중에 나-우리의 신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생하게 설명하는 문장임도 분명하다. 읽는 이의 신체 혹은 읽는 기계에서 주체와 객체의 변별은 무의미하다.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불식중 계속 다른 무언가가 되어 간다. 자명한 ‘나’ 이전에 사건의 연쇄가 선행한다. 물론 이 말은, 읽는 일이 미세한 단어나 조사적 차이를 지우면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거나 그래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미세한 차이 자체가 나-우리의 신체에 틈입하는 메커니즘을 여기에서 환기해야 한다. 이러한 읽기의 정동적 메커니즘 하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환기하고 사유하고 습득한다. 레이몽 벨루(반대자, 질문자)가 “이 책이 좋은 것은, 이 책이 일으키는 효과,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 때문이었습니다.”(256쪽)라고 말한 것도 어쩌면 ‘읽기 기계’ 혹은 (레이몽 벨루 아닌 무언가) ‘되기’를 경험한 것에 대한 고백인 셈이다.

요컨대 『들뢰즈 다양체』의 텍스트들이 들뢰즈의 글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들뢰즈의 삶과 접속한 존재들이 곧 들뢰즈 사유의 날실과 씨실이 되는 과정을 이 글들은 고스란히 증거한다. 이것은 분명 들뢰즈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들뢰즈를 만든 사건들의 회집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들뢰즈의 책뿐 아니라 들뢰즈라는 존재 역시 그 고유성과 오리지널리티를 질문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대적 특이성”(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으로서의 들뢰즈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또한 그것과 충돌하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연결되고 접속하는 신체란, 특이성들의 배치물이고 그것이 들뢰즈적 의미의 ‘기계’(the machnic)다. 하지만 이러한 특이성의 문제가 개체로 환원된다거나 혹은 누군가(들)의 소유/점유로서 상상되거나 표현되는 것에 들뢰즈는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의 학문 체계 그리고 점점 더 조밀해지는 법적·제도적 정비 속에서, 지식과 정서는 늘 구획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것이라고 자명하게 믿는 오늘날 우리의 감각에 대해서도 말이다.

들뢰즈가 쏘아올린 화살

마지막으로 (아르노 빌라니에게 쓰는 편지에서) 들뢰즈가 인용한 니체의 말을 잠시 적어본다. “한 사상가가 어딘가에서 화살을 쏘면 다른 사상가가 그 화살을 주워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이다.”(110쪽) 이것은 자신들의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한탄하는 대목에서 인용되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공부하던 지인과 10여 년이 지나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그건 철학이나 비유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실제 내 가족과 그때까지의 내 세계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이야기였다’고.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용감하게 왜곡과 오독을 하며 처음 들뢰즈를 읽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 시대(2000년대)의 모호하고 불안한 낙관의 정체를 짐작케 하는 것에, 그리고 자본주의와 가족 삼각형의 서사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용기와 베짱을 갖게 했다. 이 자기민족지적(autoethnography) 메모는, 들뢰즈가 쏜 화살이 본격적으로 한국어로 읽히기 시작한 시절의 맥락을 규명하는 데에 약간의 참조는 될 것이고, 여기부터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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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다양체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2년 8월 2일 <르몽드디플로마티크>( https://bit.ly/3bsg4tg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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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개념무기들』(조정환 지음, 갈무리, 2020)


들뢰즈 사후 25주년을 맞아 우리 시대의 삶에서 들뢰즈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되새기고 성찰하도록 하는 책. 이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c)을 행동학(ethology)으로 읽었듯이 들뢰즈의 철학을 행동학으로 독해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실체가 슬픔으로 정동되는 수동상태를 넘어서 기쁨으로 정동하는 능동상태로 이행함으로써 구원과 지복에 이르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진화과정을 서술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이 행동학적 이행과정을 운동과 역량이라는 두 차원의 교차 속에서 규명하는 철학적 인물로 그려진다.


들뢰즈 사상의 진화』(질 들뢰즈 지음, 김상운, 양창렬 옮김, 갈무리, 2004)


<들뢰즈의 사상을 초기 저작부터 후기 저작까지 일관되게 분석하여, '제국' 이론과 '다중' 이론의 철학적 뼈대를 찾아간다. 저자는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사회사상의 발전을, 그의 철학적 핵심을 지배하는 비판적 문제의식들의 발전으로 시기별로 치밀하게 추적한다.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라는 현대 철학의 계보학에서 초기의 들뢰즈가 받은 영향들을 뿌리부터 살펴보며, 이를 후기 들뢰즈의 저작과 연결시키면서 살펴본다.


들뢰즈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갈무리, 2005)


들뢰즈의 소수정치(학)과 맑스의 자본주의 동학 비판 사이의 정치적, 개념적, 문화적 공명점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도발적인 탐구인 이 책은 들뢰즈를 부재하는 책, <맑스의 위대함>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첫 번째 책이다.이 책은 첫째로 소수정치학, 소수적 관점에서 들뢰즈, 맑스, 네그리를 독해한다. 둘째로 들뢰즈가 맑스를 다루는 특유한 방식을 고찰한다. 셋째로 들뢰즈의 텍스트들 속의 잠재적 맑스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들뢰즈의 텍스트들 외부에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고찰한다.


들뢰즈 개념어 사전』(아르노 빌라니·로베르 싸소 책임편집, 신지영 옮김, 갈무리, 2012)


들뢰즈가 하나의 생소한 개념을 주조해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하나의 비평문을 제시해줌으로써 우리에게 개념에 대한 특이한(singulier)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21명의 철학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한 87개의 개념어(키워드)는 ‘들뢰즈 월드’로 독자들을 깊이 있으면서도 친절하게 안내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안내지도 삼아 들뢰즈 사상을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들뢰즈를 사변적 실재론의 선구적 철학자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들뢰즈주의의 정설로 여겨진 이론은, 들뢰즈의 형이상학이 이산적인 존재자들을 흐름과 사건의 연속적 세계로 용해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책은 이러한 관념과 근본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들뢰즈를 과정철학자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해석이 정밀한 조사를 견뎌내지 못하는 이유를 제시하면서 들뢰즈의 실제적인, 하지만 지금까지 간과된 존재론을, 들뢰즈의 출판된 저작과 미출판된 세미나에서 나타나는 주요 개념들과 주장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를 통해 신중하게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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