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호] 들뢰즈주의적 실재론 /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2-08-10 18:11
조회
685
 

들뢰즈주의적 실재론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


김효진 옮김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옮긴이)


서론


질 들뢰즈는 20세기의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자로서 들뢰즈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일반적으로 1968년에 출판된 『차이와 반복』에서 발견되는 한 특정한 이론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저는 들뢰즈의 평판 중 이 부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 연속성에 반대한다』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들뢰즈의 가장 좋은 형이상학 이론이 『차이와 반복』에서 발견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펠릭스 과타리와 공저한 책들과 『의미의 논리』 같은 후기 저작에서 발견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들뢰즈가 명시적으로 『차이와 반복』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차이와 반복』 다음에 저술한 『의미의 논리』라는 책의 서문에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형이상학이 “고전적 상층”과 “의고적 심층”의 이론이었다고 진술합니다. 이 강연에서 설명되듯이, 들뢰즈가 어떤 이론이 ‘상층’ 혹은 ‘심층’에 속한다고 말할 때 뜻하는 바는 그 이론이 기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서문에서 또한 들뢰즈는 자신이 『차이와 반복』에서 도입한 철학적 용어법 중 일부를 계속해서 사용할지라도 이들 용어는 『의미의 논리』 이후로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라는 진술을 추가합니다.


달리 말해서 『차이와 반복』 이후에 들뢰즈는 다른 철학으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제 주장은 들뢰즈가 엉뚱한 형이상학으로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이 저술한 후에 곧 거부한 이론으로 유명하며, 그리고 그가 후속적으로 고안한 대안 형이상학은 지금까지 적절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책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일반적인 착상입니다.


저는 오늘의 강연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 싶습니다.


첫째,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들뢰즈의 첫 번째 형이상학에 대한 개요를 진술하겠습니다.


둘째, 첫눈에 그 이론이 유망해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 후에 그런데도 자세히 조사하면 그것이 미흡한 이유를 논의하겠습니다. 이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제 책의 제목에 “연속성에 반대한다”라는 구절이 포함된 이유도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들뢰즈가 이들 결점을 깨달은 후에 전개하는 두 번째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면모들을 서술하겠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시당한 형이상학입니다.


1.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형이상학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실재 전체가 두 가지 영역 혹은 두 가지 상이한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이들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현실적인 것들의 영역이 있습니다. 현실 영역은 일상 경험과 경험 과학에 따라 실재가 포함하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객체들뿐 아니라 생명 있는 객체들로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와 분자, 바위와 다이아몬드, 독수리와 호랑이, 강과 산, 인간과 로봇, 국가와 기업, 이 모든 것은 현실적 존재자들입니다.


둘째, 잠재적인 것들의 영역이 있습니다. 잠재 영역의 거주자들은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우리에게 그것들이 ‘특이점’(singularity)들이라고 말합니다. 특이점이란 무엇일까요? 특이점이란 질적 변화가 산출되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주지하다시피 섭씨 0도는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점인 것처럼 섭씨 100도는 물이 수증기로 바뀌는 점입니다. 그런 점이 특이점입니다. 그래서 특이점은 전환의 순간입니다. 그것은 변환입니다.


이제 당분간 물의 사례에서 물을 그것이 섭씨 0도 혹은 100도에서 겪는 변화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상상합시다. 의미를 작성된 텍스트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변화를 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상상합시다. 그래서 물은 이 방에 두고 그 두 가지 변화점은 저 방에 둘 수 있다고 상상합시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에는 두 개의 매우 특이한 존재자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물처럼 축축하지도 않고 온도처럼 뜨겁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추상적 존재자들일 것입니다. 그것들 각각은 그저 변화일 따름일 것인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벌써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변화를 변화하고 있는 어떤 사물과 별개로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훨씬 더 복잡한 것을 상상합시다. 끓고 있는 물이 얻어질 때까지 서서히 가열되고 있는 어떤 부피의 얼음을 상상합시다. 이 경우에는 단지 고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기체가 되는 두 가지 변화점만이 있지는 않습니다. ‘평범한’ 변화점도 많이 있습니다. 섭씨 50도의 물이 51도의 물이 되고 있는 변화점이 있습니다. 섭씨 84도의 물이 85도의 물이 되고 있는 변화점이 있습니다. 기타 등등이 있습니다. 사실상 이제는 무한정 많은 변화점이 있습니다.


또 다시 물을 이 모든 변화점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상상합시다. 물은 이 방에 두고 무한정 많은 변화점은 저 방에 둡시다. 이들 변화점 역시 물 같은 현실적 존재자들이 지닐 수 있는 그런 종류들의 성질들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변화점들은 얼어 있지도 않고 축축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순수한 변화일 뿐입니다. 혹은 들뢰즈가 일컫는 대로 그것들은 순수한 차이입니다. 그것들은 순수한 과정입니다. 그것들은 변화하는 현실적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변화 자체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종합하면 물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특이점들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잠재 영역은 현존하는 모든 현실적 사물에 대한 그런 순수한 과정들을 포함합니다. 물뿐만 아니라 불, 인간, 로봇, 다이아몬드, 바위, 국가, 기업 등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두 영역 이론은 흔히 소크라테스 이전 이론들의 한 특이한 변양태로 일컬어졌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만물이 궁극적으로 불 혹은 물 같은 원초적 실체라고 상정했음을 떠올립시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그런 이론들의 더 추상적이고 더 역동적인 판본을 단적으로 제시합니다. 들뢰즈는 개별적 사물들로 가득 찬 현실 세계가 있다는 것, 이 세계의 ‘아래에’ 혹은 ‘배후에’ ‘특이점’이라고 일컬어지는 순수한 변환점들로 가득 찬 전前개체적 영역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 특이점 사이의 관계들이 현실 세계에서 생겨나거나 변경되거나 혹은 파괴되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잠재 영역이 변화인과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견지에서 문제는 현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변화와 인과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사물들이 변화함을 보지만 변화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더는 이발사를 찾아가지 않게 되어서 제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점점 더 길어질 것이라고 합시다. 또한 제가 더 늙어감에 따라 제 머리카락이 점점 더 세어버리기 시작한다고 합시다. 저는 상이한 시점에 제 머리카락의 상이한 길이를 분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상이한 시점에 제 머리카락의 상이한 색깔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길이와 색깔을 비교함으로써 제가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알 수 있지만, 변화 자체에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는 저에게서 벗어납니다. 변화는 제 주변 곳곳에서 일어나지만, 제가 그것을 분리하려고 할 때마다 저는 단지 길이 혹은 색깔 같은 어떤 다른 성질을 얻을 뿐입니다. 저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무언가를 얻지만, 변화 자체는 결코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우리는 변화를 사물들 속에서 찾아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물들 속에서 우리는 변화해 버린 것들을 찾아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변화 자체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인과성의 경우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주어진 사건들의 연쇄에서 저는 언제나 무언가를 초래한 현실적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저는 제 물컵을 넘어뜨린 고양이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인 자체를 현실적 사물로부터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넘어뜨림’을 물컵을 넘어뜨리는 고양이로부터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변화와 원인은 우리의 주변 어디에서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길이와 색깔이 현실적 사물들의 특성들인 그런 방식으로 현실적 사물들의 특성들이 아닙니다. 변화와 원인은 사물들 사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물들 사이를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더라도 우리는 변화도 원인도 결코 찾아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가 종류의 현실적 존재자를 실재 속 모든 인과적 작업을 행하기로 되어 있는 특권을 지닌 존재자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예를 들면 원자론자는 실재 속 모든 인과적 작업이 어떤 미시적 층위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우리 경험의 거시 세계는 이런 분자적 세계에서 비롯된 결과들의 계열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이 ‘기회원인론자’라고 일컫는 사람은 실재 속 모든 인과적 작업이 어떤 초자연적 유일신에 의해 행해지고, 그리하여 우리 주변의 자연 세계는 그 유일신의 행위들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론들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것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전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의 해법은 실재의 어떤 층위에서 사물들에 일어나는 변화가 실재의 어떤 다른 층위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규칙에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 사정이 그렇다면, 따라서 만약 현실 세계에서의 사건들이 어떤 미시 세계에서의 변화에 의해 설명된다면 우리는 그 미시 세계에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실재의 세 번째 층(어떤 미시-미시 세계)을 도입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이어집니다. 한편으로 만약 현실 세계에서의 변화가 유일신의 행위들에 의해 설명된다면 우리는 유일신에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유일신을 넘어서는 유일신들을 무한히 도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찬가지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재의 어떤 다른 층을 상정함으로써 현실적 세계에서의 변화를 설명하기를 바라는 한에서 그 층에 대하여 동일한 문제가 단적으로 반복될 것입니다. 즉, “그런 사물들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층이 도입될 수밖에 없기에 무한 소급이 촉발됩니다.


그러므로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들뢰즈 형이상학의 창의적인 특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 영역을 설명하는 것은 사물들의 또 다른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들 자체로 이루어져 있는 영역입니다. 잠재 영역은 순수한 과정들의 영역, 순수한 원인들의 영역입니다. 현실 영역은 원인과 변화의 영역이 아니라 단지 결과들의 영역일 뿐입니다. 모든 자동차, 모든 나무, 모든 소리 그리고 여타의 현존하는 사물은 잠재 영역에서 전개된 순수한 과정들의 생산물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지각하는 변화는 잠재 영역에서 순수한 과정들에 의해 산출되는 상태들의 계열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길이 혹은 색깔을 지각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변화를 지각할 수 없는 이유는 변화가 이른바 “무대 뒤에서” 단적으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봅시다. 현실 세계에서 모든 단일한 사물, 그리고 모든 단일한 사물의 모든 단일한 특성은 어떤 영화의 단일한 프레임과 유사합니다. 그 영화의 관람자들인 우리에게는 그 영화 자체의 투사된 영상 인과성과 변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한 명의 강도가 은행에서 총을 꺼내는 장면을 보고, 그다음에 은행원들이 손을 올리는 장면을 봅니다. 우리는 자신이 먼저 본 장면이 두 번째 본 장면을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한 프레임의 영화적 내용은 그다음 프레임의 외양의 원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프레임들의 순서열의 현실화에 대한 원인은 무대 뒤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영사기입니다. 들뢰즈의 초기 형이상학에서 현실 영역은 스크린 위에 투사된 영상과 유사합니다. 그 영역은 그것에 깊이 몰입해 있는 우리가 모든 것을 어떤 순서열로 연결하는 원인과 변화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 영역입니다. 반면에 잠재 영역은 그 투사된 영상 전체를 은밀히 산출하는 기계류 전체와 유사합니다. 그 영역은 현실적 실재의 이미지들을 사건들의 순서열로 결합하는 원인과 변화들이 자리하는 실제 장소입니다.


2.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형이상학은 왜 실패하는가?


들뢰즈가 이 형이상학을 포기한 이유는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여전히 자신이 “고전적 상층” 및 “의고적 심층”과 연관시킨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립시다. 이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시도해 봅시다.


이런 시도에의 핵심은 “관계는 그 항들의 외부에 있다”라는 철학적 원리입니다. 하여간 무엇이든 하나의 ‘항’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나무, 자동차, 축제, 분자, 뇌 혹은 새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리는 “사물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외부에 있다”라고 바꾸어 진술될 수 있습니다. 외부성의 원리는 1958년에 출판된,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에 관한 그의 바로 그 최초 저서에서 1990년대 초의 마지막 저작에 이르기까지 줄곧 들뢰즈의 사유를 고무합니다.


사물은 무엇과 관계를 맺을까요? 첫째, 사물은 자신의 부분들을 이루는 더 작은 사물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둘째, 사물은 자신이 한 부분을 이루는 더 큰 사물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자신의 부분들을 이루는 신경, 장기 그리고 기억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더 작은 사물과 관계를 맺습니다. 동시에 인간은 그 자체로 언어, 문화, 민족, 가족 그리고 전통 같은 다양한 더 큰 사물의 한 가지 기능적 부분입니다.


사물이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외부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물이 그처럼 더 작은 사물로도 더 큰 사물로도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생물학적 및 인지적 부분들에 관한 모든 사실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자신의 부분으로 삼는 사물들에 관한 모든 사실도 알고 있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그 특정한 인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물이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외부에 있다는 것은 각각의 사물에 자신의 부분들과 환경에 불과한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뜻합니다.


들뢰즈는 언제나 외부성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사물을 아래로 환원하는 것은 그 사물을 “의고적 심층”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 실재에 독자적인 기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물이 모든 실재적인 인과적 작업을 행할 더 작은 부분들의 수동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위로 환원하는 것은 그 사물을 “고전적 상층”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또다시 그것은 어떤 사물이 독자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 그것의 모든 움직임을 결정하는 ‘더 상위의’ 법칙들 혹은 구조들의 수동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에 따르면 사물을 심층으로 ‘아래로’ 환원하는 고전적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따르면 만물은 궁극적으로 어떤 원초적 실체이거나 혹은 그런 원초적 실체들의 조합입니다. 그리고 사물을 상층으로 ‘위로’ 환원하는 고전적 방법은 플라톤주의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설명하는 이데아들의 영원한 천상의 현존을 상정하는 한에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물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외부에 있어야 할까요? 왜 사물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어야 할까요? 들뢰즈는 자신의 저작 전체에 걸쳐서 다양한 논증을 제시하지만, 저는 그 중 단 두 가지에 한정하여 논의하겠습니다.


첫째, 만약 우리가 사물을 그 관계들로 용해한다면, 만약 존재자의 존재가 순전히 관계적이라면, 각각의 존재자는 자신이 처한 현행의 사태에 망라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현재 자신이 자신의 부분들 및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약 여타 사물의 경우에도 사정이 마찬가지라면, 이전 관계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비(非)관계적 잉여를 갖추고 있는 사물은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만약 사물이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내부에 있다면 변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둘째, 만약 우리가 사물을 그 관계들로 용해한다면 사물의 특정한 특성들은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인데, 특히 특성들이 창발적일 수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창발적 특성이란 사물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성입니다. 예를 들면 물은 그것의 부분들을 이루는 수소 및 산소와 다른 온도들에서 폭발하고 얼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물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외부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물은 자신의 부분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리고 물론 사물은 훨씬 더 큰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단일한 사물은 언제나 자신이 자신의 부분들 및 환경과 맺은 관계들 이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사물이 실재 속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차이를 설명하는 어떤 ‘더 하위의’ 층위 혹은 ‘더 상위의’ 층위에 자리하는 존재자들의 수동적 표상에 불과한 사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생물학적 부분들로 환원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고, 자신을 둘러싸는 이데올로기들의 작동으로 환원될 수 있는 인간 역시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부성의 원리가 초기 들뢰즈의 두 영역 형이상학을 무효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이 형이상학이 방금 고찰된 것의 제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현실 영역의 존재자들은 잠재 영역으로 환원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동차, 나무, 바위 그리고 허리케인은 실재에 독자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잠재 영역에서 전개되는 순수한 과정들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특이점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변화들의 수동적 표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특이점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우리는 잠재적 특이점이 현실적 사물들이 지닌 그런 종류들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이해했습니다. 특이점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특이점은 순수한 과정, 순수한 차이, 순수한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특이점을 규정할까요? 들뢰즈의 답변은 특이점이 ‘미분적 관계들’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미분적 관계란 무엇일까요? 그것이 뜻하는 바는 특이점이 그것이 인접 특이점들과 맺은 관계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특이점은 단지 그것이 다른 특이점들과 맺은 변별적 관계들일 입니다. 그런데 이들 다른 특이점 역시 자신의 인접 특이점들과 맺은 관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서 잠재 영역과 관련된 문제는 특이점이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특이점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어떤 다른 특이점들과 맺은 관계들일 뿐입니다. 특이점은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특이점은 다른 특이점들과의 이런 관계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타의 특이점 역시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또다시 그 이유는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 사정의 다른 특이점들과의 관계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들뢰즈가 잠재 영역을 순수한 변화의 차원으로 규정했더라도, 자세히 성찰하면 그 영역에 거주하기로 되어 있는 이들 특이점이 결코 변화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들이 변화할 수 없는 이유는 잠재 영역이 연속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어떤 사적 측면을 갖추고 있는 특이점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특이점은 자신의 인접 특이점들과 완전히 연속적인데, 이들 특이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고찰된 이유들로 인해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를 기점으로 두 번째 형이상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별개의 존재론적 영역에 자리한 잠재적 특이점들 사이의 연속성의 형이상학 대신에 이 두 번째 형이상학은 언제나 서로 완전히 분리된 채로 있는 개별적인 잠재적 본질을 갖춘 존재자들 사이의 불연속성의 형이상학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에 “연속성에 반대한다”라는 구절이 명시되었습니다.


3. 들뢰즈의 두 번째 형이상학


들뢰즈의 두 번째 형이상학에 따르면 실재는 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실재 전체는 단 하나의 영역인데, 들뢰즈는 종종 이것을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서 ‘내재성’이 단적으로 뜻하는 바는 하나의 토대처럼 실재의 근거를 짓거나 인형조종사처럼 실재를 통제하는 실재의 후속 층위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재성 영역은 들뢰즈가 “기계” 또는 “회집체”라고 일컫는 존재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들뢰즈가 이들 존재자를 “기계”라고 일컫는 이유는 그것들이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모든 작업을 행하는 다른 것들의 수동적 표상에 불과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재에 독자적인 차이를 첨가합니다. 모든 현존하는 존재자는 기계입니다. 그러므로 기계에는 전기톱과 스마트폰처럼 인간에 의해 제조된 기술적 인공물만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분자, 항성, 축제, 종교, 이론, 얼룩말, 강 그리고 환상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항성에서 헬륨을 생산하는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든, 인간의 마음에서 사유를 생산하는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든,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든 간에 실재 속 모든 것은 그런 기계들의 상이한 배치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생산적 관계들의 결과입니다.


그런 ‘기계’들의 형이상학적 지위 혹은 구조는 무엇일까요? 그것들은 외부성의 원리에서 도출될 수 있습니다. 사물이 자신이 맺은 관계들의 외부에 있다면 모든 현존하는 사물은 자신의 부분들과 환경에의 관여를 넘어서는 어떤 차원 혹은 사적 내부가 있어야 합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기계의 “신체” 혹은 “기관 없는 신체”라고 일컫습니다. 이 신체는 기계의 물리적인 유형의 신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적 실존에서 스스로 물러서 있는 신체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형이상적인 존재자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신체라면, 또한 그것들은 모든 신체가 서로 완전히 동일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무언가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또한 각각의 신체는 들뢰즈가 그것의 욕망이라고 일컫거나, 혹은 덜 반직관적인 용어로 그것의 역능 혹은 역량이라고 일컫는 것에 의해 규정되어야 합니다. 역능은 신체가 자신의 부분들 및 환경과 맺은 관계들 덕분에 갖추게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역능은 이들 관계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성의 원리는 위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역능이 있습니다. 저는 교과서 및 교사들과 맺은 어떤 관계들 덕분에, 그리고 제 뇌의 부분들, 제 기억 등과 맺은 어떤 관계들 덕분에 이 역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저의 역능을 생성하고 재생하며 변경하는 존재자들이지만, 그것들은 정말 이 역능이 아니고 그것들은 이 역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 역능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들 덕분에 그렇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사물의 경우에도, 요컨대 모든 기계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실재의 형이상적으로 기본적인 요소들은 일단의 역능에 의해, 말하자면 다른 기계들과의 관계들 덕분에 갖추게 되지만 이들 관계로 환원될 수는 없는 어떤 역량들에 의해 규정되는 기계들입니다.


그런데 역능은 언제나 현시될 필요는 없습니다. 물은 언제나 끓을 필요는 없으며, 그리고 어떤 언어의 화자는 언제나 그 언어를 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한 역능이 어떤 다른 존재자에 현시될 때 그 역능은 결코 직접 현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역능 자체로서 결코 현시되지 않습니다. 현재 여러분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제 역능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영어로 발화되는 어떤 문장들을 경험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들 문장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제 역량을 증명하는 것이지, 이런 역량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끓을 때 우리에게 현시되는 것은 우리 피부에 화상을 입힐 수 있는 뜨거운 액체입니다. 우리에게 현시되는 것은 끓을 수 있는 역능 자체가 아닙니다.


달리 말해서 역능은 잠재적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역능은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잠재 영역과 다릅니다. 그리고 어떤 역능이 현시될 때 그 역능은 본연의 것으로서(즉, 하나의 역능으로서 직접) 현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뢰즈가 “부분적 객체”라고 일컫는 것을 나타냅니다. 부분적 객체는 역능의 번역물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적 존재자들의 세계는 온전히 그런 역능들의 언제나 변화하는 표현들의 풍경입니다. 게다가 물의 사례에서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이들 역능을 결코 직접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유일한 것은 이들 역량의 현존을 증명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초기 들뢰즈의 잠재 영역 형이상학에 대한 한 가지 이유가 변화와 인과관계가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임을 떠올립시다. 이제 우리에게는 잠재 영역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두 번째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기계들의 존재론이 있습니다. 이런 기계 존재론에 따르면 각각의 기계는 역능들로 이루어진 나름의 사적인 잠재적 내부를 갖추고 있는데, 이 내부는 상이한 두 존재자의 역능들 사이의 직접 접촉을 방지하는 부분적 객체들 혹은 표현들로 철저히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것은 인과성과 변화의 문제에 대한 더 나은 해결책을 제공할까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봅시다.


한 기계가 다른 한 기계를 등록할 때마다 그것은 이 다른 존재자를 부분적 객체에 의거하여 등록합니다. 그런데 그 기계의 어떤 측면이 이 다른 존재자의 영향을 등록할까요? 이 다른 존재자는 어디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까요? 그것은 어디에 자신의 표식을 새길까요? 그것은 어떤 기계의 역능들에 자신의 표식을 남깁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영국인과 시간을 보내면 그 결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그의 역능은 향상됩니다. 어떤 휴대폰이 GPS 추적기를 장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역능을 얻게 됩니다. 어떤 나무창 끝에 강철을 덧붙임으로써 그 무기는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역능을 부여받게 됩니다. 어떤 어린 동물은 자신의 어미와 아비를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먹이를 사냥할 수 있는 역능을 발달시킵니다.


이들 사례는 기계들의 존재-자체가 어떻게 해서 다른 기계들에 의해 경험되는 것닫혀 있는지 증명합니다. 다른 기계들은 언제나 부분적 객체들을 등록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기계들의 존재-자체는 부분적 객체들에 의거하여 다른 객체들을 경험하는 것열려 있습니다. 이들 경험은 어떤 기계의 존재로서의 역능들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변경하는데, 그리하여 이는 어떤 기계가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기계와 마주치기 전에는 어쩌면 전적으로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현시하기 시작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인과관계와 변화가 주어집니다. 역능이 원인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언제나 자신이 갖추고 있는 역능들에 의거하여 세계를 등록할 따름입니다. 혹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가 빈정대는 대로 눈은 보기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제 역능들이 제가 다른 존재자들을 등록하는 방식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들을 등록하자마자 그 결과로 제 역능들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세계에서 등록하는 것과 제가 그것을 통해서 조작하는 방식이 변화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저는 새로운 부분적 객체들과 새로운 경험을 겪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또다시 제 역능들이 변화할 수 있게 되는 등의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이 들뢰즈가 존재자를 ‘기계’라고 일컫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역능들에 의거하여, 자신의 역능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식들로 세계를 가로지르는데, 이렇게 해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날 수 있게 됨으로써 역능들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존재자는 조작합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두 번째 형이상학은 변화와 인과관계가 직접적으로 가시적이지 않은 이유도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단지 부분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가시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실재 속 모든 인과적 연결은 두 가지 극이 있습니다. 이들 극 중 하나는 부분적 객체인데, 이는 그 극이 어떤 존재자에 의한 어떤 역능의 표현임을 뜻합니다. 바로 지금 제가 발화하고 여러분이 듣고 있는 문장들이 그런 표현입니다. 이 첫 번째 극은 완전히 경험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극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런 특정한 종류의 부분적 객체에 열려 있는 어떤 수용 기계의 역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사례에서 이들 역능은 영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의 역능들로, 여러분이 영어에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향상되거나 저하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얼마나 많이 향상되거나 저하되는지는 우리가 직접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데, 그 역능들을 새로운 영어 단어들과 숙어들로 현실화함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변화와 인과관계를 현실적 사건들의 계열로부터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변화와 인과관계가 개별적 존재자들의 잠재적 측면에 끊임없이 ‘파고듦’으로써 그 역능들을 생성하거나 재생하거나 혹은 변경하고, 그리하여 그것들이 새로운 표현들로 현실화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기계주의’(machinism)는 실재에 대하여 들뢰즈의 초기 형이상학보다 더 구체적이고 궁극적으로 더 정합적인 설명입니다. 들뢰즈의 초기 형이상학은 모든 변화와 인과성을 전적으로 별개의 잠재 영역, 즉 실재의 역동성 전체를 보증하게 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변화가 내부 관계들의 철장에 영구적으로 동결될 수밖에 없는 장소인 것으로 판명되었던 영역으로 추방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끌 만한 가치가 있기 마련인 것은 들뢰즈의 두 번째 형이상학입니다. 『의미의 논리』와 들뢰즈의 후기 저작은 그의 나머지 경력 동안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로 있을 초기 형이상학의 연속이 아닙니다. 들뢰즈의 초기 형이상학은 기각되었고 더 유망한 대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들뢰즈의 유산의 핵심 요소이어야 하는 것은 이런 기계들 혹은 회집체들의 존재론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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