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0.31] 통과하고 투과하는 관계, 『종과 종이 만날 때』 / 전우형(중앙대학교 접경인문학연구단 교수)

서평
작성자
갈무리
작성일
2022-12-01 20:30
조회
110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0.31] 통과하고 투과하는 관계, 『종과 종이 만날 때』 / 전우형(중앙대학교 접경인문학연구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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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고 평화로운 세계화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종과 종이 만날 때: 복수종들의 정치(원제: When Species Meet)』는 “내가 사는 세계를 묶는 활기찬 매듭들에 대한 감사의 글”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이 책을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에 관한 발견이자 동시에 그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생명에 관한 경의로 읽게 한다. 이 책은 두 가지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째, 내가 나의 개를 만질 때 나는 도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만지는 것일까. 둘째, ‘함께 되기’는 어떤 의미에서 세속적이게 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도나 해러웨이는 대안-세계화(Alter-globalization)와 또 다른 세계화(Autre-mondialisation) 등,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계화’를 위한 방법론을 인용한다. 이 질문과 응답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상(예를 들어 반려종)에 대한 앎의 한계를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예를 들어 반려종과) 함께 되기라는 존재의 전환은 이용하고, 이용되면서 함께 살고, 일하고, 놀고, 죽고 죽이는 일상의 현전임을 깨닫는, 결국 그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가 ‘살 만한 세계’의 지속을 위해 의존하는 동시에 의존되는 사회적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연구 동료들, 어질리티의 선배들과 동료들, 그리고 친구들과 나눈 이메일들을 직접 인용하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을 소묘한다. 2부 ‘스포츠기자 딸의 노트’에서 하반신 마비였던 아버지 프랭크 해러웨이를 기억하면서, 해러웨이는 목발과 휠체어에 새겨있는 도구주의적 프레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를 인간의 신체를 통과하고 투과하는 만남이 이뤄지는 현장으로 제안한다. 이것이 꼭 도나 해러웨이가, 그리고 그녀의 책이 전해왔던 사유의 기원은 아닐지라도 이 책의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일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만남에 대한 발견에서 시작해 존재의 취약성과 그로 인한 상호의존성, 그리고 이것이 인간 너머 동식물, 환경, 인프라 등 생명이 사회적으로 조직돼 있는 세계와의 ‘접촉지대(Contact zones)’와 그 안에서 빚어지는 수행성을 찾는 여정이 이 책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반려종과, 또는 그 사이의 관계에 집중한다. 도나 해러웨이의 선언은 이 책 곳곳에도 반복되고 증식되는데, 종과 종 사이의 중요한 윤리로서 ‘레스페체레(Respecere)’, 즉 존중은 “그녀가 그녀의 개를 만났어!”라는 ‘함께 되기’의 정치적 상상계로까지 확장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공존

제목에서 시작해 본문에도 반복해서 술어로 등장하는 ‘만남’은 어쩌면 이 책의 주어에 가깝다. 보다 많은 만남의 양상을 담으려 하는 이 책은 만남의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에 근접하면서 그 만남이 빚어지는 일상의 현장을 더욱 선명하게 제시한다. 만남의 수에 비해 술어가 부족한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는 논증의 불철저함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만남 자체를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노드(Node), 이 책에서 쓰인 단어대로라면 끈들, 매듭들, 연결망, 그물망 등으로 재구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만남을 ‘이 세계의 존재론’이라고 해석해 온 사유체계 너머 이 책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만남과 만남 사이의 지속적인 연결이라는 실천적 행위다. 반려종과의 만남은 경계 바깥에서 가치와 애도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형상화되어 온 존재와의 만남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공명하는 레스페레체와 함께 되기, 그리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계란 평등주의적 상상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공존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공존을 위한 실천에서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것은 상호의존성이다. 8장 ‘접촉지대에서의 훈련: 어질리티 스포츠에서 권력, 놀이, 그리고 발명’은 접촉지대를 상호의존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제안한다. 어질리티는 개와 인간이 협력해 일련의 장애물을 통과하는 스포츠다. 어질리티의 코스로서 접촉지대(Contact zones)는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 들어가는 장소”를 가리킨다. 동의어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접촉지대라 하면, 주체와 타자, 중심과 주변, 심지어 이편과 저편, 현재와 과거의 이분법하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간(생명), 공간, 시간으로 취급 받아왔다. 8장은 이 접촉지대를 권력, 놀이, 그리고 발명이 비롯되는 현장으로 재위치시킨다. 접촉지대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만나는 함께 되기의 공간이고, 해러웨이는 어질리티의 접촉지대를 통해 그 방법으로서 상호의존을 위한 열림(The open)을 제안한다.

방법으로서의 접촉지대

접촉지대, 상호의존, 열림 등이 빚는 세계에 관해 상상해 보자. 접촉지대란 이제 더 이상 국경 주변이나 다른 국민·민족·인종을 우연히 만나는 장소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간의 접촉지대가 권력이 작동하는 장이었음은 분명한데, 서로 다른 종이 만나는 순간이 두려움과 공포로만 가득했을까. 다른 종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가장 신비롭거나 그 첫 만남에서 나와 결코 같지 않을 당신이라는 편견이 조금이라도 깨지면 즐겁기도 한 놀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삶, 굳이 조금 특정하자면 문화와 문명은 다른 종 사이의 만남을 통해 공명(Resonance)하고 발명된 세계다. 도나 해러웨이의 이 책은 종과 종 사이의 만남, 무엇보다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매듭으로서 접촉지대를 제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접촉지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통과하고 투과하는 열린 세계의 기원이자 방법이 된다.





『종과 종이 만날 때』 |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 최유미 옮김 | 갈무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