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 사변적 실재론의 오늘 / 그레이엄 하먼 『사변적 실재론 입문』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3-06 13:32
조회
928
 

사변적 실재론의 오늘


『사변적 실재론 입문』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그레이엄 하먼


김효진 옮김 (『사변적 실재론 입문』 옮긴이)


사변적 실재론은 2007년 4월 런던에서 개최된 한 행사에서 처음 개시된 이래로 지난 16년에 걸쳐서 대륙철학에 관한 우리의 구상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하이데거에 관한) 『도구-존재』라는 첫 번째 저서의 저자에 불과했던 2005년 봄에 브라지에는 저에게 런던의 미들섹스대학교에서 강연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제가 초청받았던 최초 강연 중 하나였습니다. 그 행사는 즐거웠습니다. 2006년 초에 니스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이상한 경유 비행 여정으로 인해 저는 우연히 런던에 있는 브라지에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그는 저에게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의 작업을 잘 알고 있는지 물었고, 저는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상 저는 그랜트를 장 보드리야르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저서들의 영어 번역자로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브라지에는 우리 두 사람이 공동 토론을 위해 회합할 것을 제안하였고, 저는 그 착상에 긍정적으로 호응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에 브라지에는 짧은 파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저에게 퀑탱 메이야수라는 인물이 저술한 『유한성 이후』라는 책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메이야수가 알랭 바디우의 제자라고 말했습니다. 브라지에는 몇 년 전에 니나 파워로부터 메이야수에 대하여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도, 막 출판된 그의 책을 그저 우연히 발견했었고 저에게 읽을 것을 권했습니다. 그는 그 책을 아직 읽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메이야수의 책을 즉시 주문하였고, 학회 참석을 위해 아이슬란드로 출장을 가는 길에 그 책을 가지고 갔으며, 며칠 만에 완독했습니다. 대단히 인상적인 저서였습니다! 저는 책무로 인해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했던 브라지에게 읽어볼 것을 강하게 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가 그랜트와 메이야수 둘 다를 포함하는 확대 모임을 갖자고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에게 즉시 이메일을 보내기로 했고, 그들은 모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브라지에는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소속된 그의 오랜 친구 알베르토 토스카노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토스카노는 그다음 해에 개최될 행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변적 실재론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후속 모임은 2009년에 그랜트의 도시, 즉 브리스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행사 참석을 위해 영국을 방문하라는 설득에 응할 수 없었던 메이야수를 대신하여 토스카노가 참석했습니다. 이것들은 단명으로 끝난 사변적 실재론 운동을 일으킨 행사였지만, 그 영향은 영속적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특히 브라지에가 그 자신이 고안한 착상을 부인하는 취지로 발언했지만 말입니다.

사변적 실재론의 탄생 맥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철학에서 분석철학/대륙철학 분열은 대략 일 세기 이상 거슬러 올라가며, 철학자임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각기 다른 모형을 따르는 두 가지 별개의 분과학문을 낳았습니다. 분석철학자들은 과학 같은 것의 실무자처럼 처신하고 그런 실무자로 자처합니다. 그들은 대단히 기술적이고 전문화된 연구 문제들에 집중하고, 짧은 저널 논문들을 그들의 주요 매체로 사용하며, 대체로 다른 분석철학자들의 최근 작업과 관련된 논쟁에 관여합니다. 대륙적 전통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인문학 분과학문으로 간주하면서 예술과 문학을 빈번히 참조하며, 그리고 그 지향은 주로 지난 이 세기 동안의 프랑스 및 독일 사상가들의 주요 저작들에 따라 정해집니다. 대륙철학자들은 유럽 언어들과 철학사에 대한 통달을 이 하위분과학문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분석철학-대륙철학 분쟁에 대하여,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이 존속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말과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들 의문을 논의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단지 사변적 실재론이 현시대의 철학적 풍경에 어떤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것들을 거론할 뿐입니다. 분석철학에서는 실재론이 언제나 하나의 당면한 철학적 선택지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그가 한때 탄복했지만 나중에는 등을 돌린 영국 관념론에 맞서, 특히 F. H. 브래들리의 작업에 맞서 어떤 실재론적 입장을 취한 방식을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분석철학의 실재론은 주로 자연과학이, 그리고 고등수학과 논리학이 이끌었습니다. 반면에 대륙적 전통은 그 지향을 이른바 ‘실재적 세계’는 모호한 사이비-문제라는,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견해에서 끌어내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미 세계에 관여했으며, 이는 추정컨대 현상학이 관념론이 아님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 외에도 세계 속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과학적 담론은 철학적으로 주요한 것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지향적 의식’이라고 일컫든(후설의 경우) 혹은 ‘현존재’라고 일컫든(하이데거의 경우) 간에 인간에 대한 세계의 소여가 우선하는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대륙적 전통에는 소수의 실재론적 입장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애초에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최초의 인물이었을 것이지만, 하르트만이 그의 동시대인 하이데거의 그림자에 가려서 그 존재가 철저히 희미해진 방식은 대륙철학 전체에서 실재론의 낮은 지위를 보여줍니다. 나중에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이탈리아에서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의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후에 독일에서는 청년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합류했고 미국에서는 멕시코 태생의 마누엘 데란다가 합류했습니다. 이것들은 실재론적 관점을 대륙철학에 제공해 주려는 최초의 집중적인 집단 노력인 사변적 실재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조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재론은 다양한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세계가 마음의 외부에 현존한다는 존재론적으로 실재론적인 주장에 한정하더라도 말입니다. 페라리스와 가브리엘은 주로 상대주의에 맞서는 무기로서의 실재론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점은 실재계가 사유의 외부에 현존한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유가 적절한 기법들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란다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관건은, 인간 지각의 외부에 현존하지만 주로 과학적인 다양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또한 밝혀질 수 있을 잠재적 위상-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들뢰즈, 과타리 그리고 첨단 현대 과학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물음이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에서도 이런 가정들에 관한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자들이 공유하는 주요 개념은 메이야수가 비판적으로 ‘상관주의’라고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상관주의자란 우리는 사유 외부의 세계에 대한 접근권도 없고 세계 외부의 사유에 대한 접근권도 없고 오히려 이들 두 영역 사이의 원초적 상관관계 혹은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접근권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종종 그릇되게도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를 경멸한다고 가정되며, 그리고 인간 사유의 출현에 앞서 존재한 대로의 우주에 관한 그의 언급을 참작하면 메이야수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상관주의에 맞서 과학적 실재론에 호소하고 있다고 가정됩니다. 사실상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를 대단히 찬양하고, 그리하여 그는 철학자의 과업이 상관주의의 통찰 과학적 실재론의 통찰을 동등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상관주의적 주장의 가장 명료한 정식화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유 외부의 무언가를 사유하지 않은 채로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품는 모든 사유는 사실상 사유에 관한 사유입니다. 어느 천문학자가 진술할 것처럼 우주가 140억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관주의자에게는) 사실상 그 우주가 우리에 대해서 140억 년 전에 창조되었음을 뜻합니다. 메이야수는 이것을 페라리스, 가브리엘 그리고 데란다가 옹호하는 그런 종류의 실재론에 맞서는 매우 강력한 논거로 간주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비록 그는 그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메이야수는 나머지 세 인물이 그럴 것처럼 상관주의적 논거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실재를 직접 다룰 수 있는 어떤 갱신된 사변철학으로 터널에서 벗어나는 그런 식으로 그 논거를 급진화하려고 합니다. 제1성질은 수학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메이야수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스승 바디우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들은 비슷한 목표를 향해 상당히 다른 경로를 택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메이야수의 책 제목이 『유한성 이후』입니다. 페라리스와 가브리엘은 철학에서 상대주의에 관해 가장 우려하는 반면에 메이야수는 칸트에게서 나타나고 하이데거에 의해 더욱더 강조되는 개념인 유한성에 관해 가장 우려합니다. 메이야수가 보기에는 최근의 대륙철학에서 유한성이 인기를 얻고 있는 점이 철학적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종종 헤겔에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헤겔 역시 그 속에서 칸트의 본체적 영역이 변증법적 과정에 통합될 수 있기에 제거되어 잊히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무한에 호소하여 칸트주의적 유한성을 비판합니다. 그렇지만 메이야수는 자신의 철학이 헤겔의 철학보다 사유 외부의 것에 더 열려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메이야수의 경우에 이런 외부는 여전히 수학적 사유에 의해 장악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메이야수는 실재론에 이르는 최선의 지적 수단으로서의 수학에 대해 낙관적인 반면에 브라지에는 자연과학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수학이 우리에게 실재계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권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를 알기는 쉬운 반면에 과학은 일 세기 동안 과학철학자들에게 난제를 제기한 이론 변화의 더 명백한 상황에 처합니다. 예를 들면 뉴턴의 중력 법칙은 20세기 초에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뉴턴 물리학을 무너뜨릴 때까지 이 세기 동안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또한 아직도 양자론과 양립 불가능합니다. 이는 이들 이론 중 어느 것도 결국에 영원한 진리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단지 아직 미지의 더 광범위한 물리학 이론의 잠정적인 단계들로 여겨질 수 있을 뿐일 것임을 뜻합니다. 여전히 이것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면서 뉴턴 이론에는 더 나중의 아인슈타인 이론에서 유지되는 수학적 진리들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증이 토머스 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물질’과 ‘에너지’ 같은 주요 용어들이 아인슈타인에게는 뉴턴의 경우와 동일한 것을 더는 뜻하지 않기에 그 두 가지 과학 이론은 공약 불가능하고, 따라서 과학과 그것이 서술하는 실재 사이의 어떤 동형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토머스 쿤은 지적합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도, 실재에의 특권적인 접근 양식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브라지에의 강력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은 메이야수가 거부하는 칸트주의적 유한성에 대하여 놀랄 만큼 큰 공감을 품고 있습니다. 브라지에는 실재와 우리가 그것에 관해 구성할 수 있을 모든 이론 사이의 영구적인 간극을 역설한다는 사실을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주지하다시피 브라지에는 이것을 허무주의적 용도로 돌림으로써 모든 지식의 목표는 우리를 우주의 궁극적인 죽음에 대한 지각과 그것의 수용에 끊임없이 더 가까이 데려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메이야수는 우리가 지금은 현존하지 않지만 미래에는 현존하여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고 그가 현존하게 되기에 앞서 발생한 모든 불공정한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 어떤 잠재적 신의 가능한 도래를 기다려야 한다는 기묘하지만 꽤 독창적인 낙관주의적 주장을 제기합니다. 심지어 메이야수는, 이런 신이 도래하기 전에는 그리스도 같은 매개자, 즉 가능한 좋은 소식을 퍼뜨린 다음에 신이 언젠가 필시 도래한 후에 보통 시민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일시적인 메시아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브라지에와 메이야수가 전자는 과학을 선호하고 후자는 수학을 선호하면서 사변적 실재론의 합리론 진영을 대표하지만, 앞서 우리는 그들이 유한성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한 어떤 면에서 대립적임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저 자신의 객체지향 존재론(또는 간략히 OOO)이 제시하는 상관주의에 관한 매우 다른 견해에 반대합니다. 제 경우에 상관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옹호하는 유한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칸트와 하이데거가 유한성을 지각함으로써 영구적인 진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불만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칸트와 하이데거는 둘 다 유한성을 인간 존재의 특수한 조건에 한정시킵니다. 칸트의 경우에는 물자체를 지각할 수 있지만 자신이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가련한 비극적인 인간들뿐이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Sein)에 대한 인간 현존재(Dasein)의 관계는 사정이 마찬가지인데, 존재는 시적 언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언급될 수 있을 뿐입니다.

달리 진술하면, OOO는 현재 철학이 처한 교착상태는 사유-세계 관계가 모든 진지한 철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OOO는 사유와 세계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유한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솜이 서로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식적 지각과 유한성은 어쨌든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의식적 지각은 유한할지라도 모든 유한성이 사유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점은 아무튼 모든 관계가 (설령 사유가 그 항 중 하나가 아닐지라도) 그 항들의 완전한 실재를 망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이슬람 철학에서 인기 있는 사례를 사용하면, 불이 솜을 태울 때 불은 단지 제한된 범위의 솜-성질들과, 연소와 관련된 성질들과 상호작용할 뿐입니다. 솜뭉치가 우연히 불이 아니라 물과 마주쳤다면 물은 전적으로 상이한 범위의 솜-성질들에 관여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곤충, 고양이 혹은 인간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달리 진술하면,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모든 관계는 동일한 기반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투덜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유가 세계와 맺는 관계에는 직접 접근할 수 있지만, 솜과 불이 상호작용할 때 솜 혹은 불이 겪는 경험에는 직접 접근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유의 실재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그것의 외양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의식적 삶에 완전히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현상학도 정신분석학도 절대 필요하지 않을 것임을 뜻하는데, 사실상 그것들은 필요한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에도 직접 접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눈을 뜰 때 저는 ‘유한성’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저는 칸트의 논증 같은 논증을 사용하여 저의 유한성을 추론해야 하며, 그리고 정확히 동일한 논증을 사용하여 불과 솜 그리고 사실상 다른 인간들의 유한성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OOO의 경우에 인간 사유는 많은 다른 것 가운데 그저 한 가지 특별히 흥미로운 객체 종류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사유는 더는 철학의 특권적인 출발점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관념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석적 전통에도 대륙적 전통에도 사실상 결코 부합하지 않았던 최근의 위대한 철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 의해 제창되었습니다. OOO의 견지에서 화이트헤드와 관련된 문제는 칸트의 유한성을 수용하기를 꺼려하는 그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자들에 관한 순전히 관계적인 구상을 품고서 존재자들이 상호 관계들로 서로 철저히 망라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메이야수와 브라지에에 관해 언급했을 때 우리는 사유와 세계 사이의 긴장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OOO에서는 그것이 사유가 현장에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객체들과 관계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더 일반적인 긴장으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또한 OOO는 메이야수에게서도 브라지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후설에게서는 강한 형태로 찾아볼 수 있는 두 번째 원리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객체와 그 자체의 성질들 사이의 구분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객체는 ‘성질들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영국 경험론적 관념을 수용했습니다. 객체는 그저 그것들이 매우 자주 함께 나타나서 어떤 덩어리에 함께 속하는 일단의 성질을 가리키는 별칭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객체는 이런 특질들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런 추정은 바로 후설의 현상학이 기각하는 것입니다. 후설의 경우에 한 객체는 그것이 특성들의 변화를 많이 겪을 때에도 여전히 동일한 객체로 남아 있습니다. 전문 용어로 표현하면, 한 객체는 다양한 ‘음영’(adumbration)(독일어로는 Abschattungen임)을 현시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한 객체는 그저 어떤 성질들의 경험론적 다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채로 어떤 성질들을 획득하고 어떤 성질들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래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와 그 성질들 사이의 차이에 관해 말한 것입니다. 앉아 있는 소크라테스와 서 있는 소크라테스는 둘 다 동일한 소크라테스입니다. 후설의 혁신은 그가 이런 동일한 구분을 현상학적 층위에서 전개한다는 것인데, (데카르트와 근대 철학보다 오래전에 실존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층위를 실재의 자족적인 차원으로 사실상 결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설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또한 현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어떤 차이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제한합니다. 후설이 보기에는 결코 사유될 수 없는 어떤 물자체도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OOO가 한 가지 이원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두 가지 별개의 이원론으로, 실재적 대 현상적(우리는 ‘감각적’이라고 일컫는 것) 그리고 객체 대 성질의 이원론으로 실재에 접근함을 뜻합니다. 이렇게 해서 실재적 객체, 실재적 성질들, 감각적 객체 그리고 감각적 성질들의 사중 구조가 산출되며, 이 구조는 몇 가지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감춰진 실재적 객체 및 그것의 실재적 성질들, 그리고 지각할 수 있는 감각적 객체 및 그것의 감각적 성질들과 더불어 혼성 결합들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도구-분석과 미학에서 나타나듯이) 감각적 성질들을 갖춘 실재적 객체 그리고 (후설이 지향적 객체 역시 본질적 성질들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때처럼) 실재적 성질들을 갖춘 감각적 객체가 있습니다. 후설은 현상적 객체의 이들 본질적 성질이 실재적이어야 하고, 그리하여 감춰져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감각적 객체-실재적 성질들 결합은 후설이 발견했던 것처럼 보이는 결합입니다.

그런데 더 일반적으로, OOO가 정말로 관계하는 것은 직서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직서주의자란 객체는 그 성질들의 총합과 동일하다고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권고하는 반反-직서주의는 객체와 그 성질들 사이에 언제나 분열 혹은 단층선이 존재한다는 통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OOO의 경우에 이런 분열은 네 가지 상이한 유형의 객체-성질 결합에 따라 네 가지 상이한 종류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지식인 것은 아닌 진리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닌데, 이 방법은 과학철학이 이론 변화를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미학과 철학이 아무튼 지식과 다른 인지 형태를 다룬다는 점을 함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일반적인 결합이 각각 상이한 종류의 객체-성질 결합에서 생겨나는 시간, 공간, 본질 그리고 형상의 사중체로 확대되는 새로운 우주적 지도를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다소 다른 쟁점들을 다루는 그랜트의 철학적 입장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들뢰즈뿐만 아니라 독일 관념론자 F. W. J. 셸링의 영향도 크게 받은 그랜트의 경우에 중대한 통찰은 자연이 단일한 생산력이라는 것입니다. 사유 역시 자연의 또 다른 생산물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사유는 (메이야수와 브라지에를 포함하여) 대다수 근대 철학자들이 가정하는 방식으로 존재론적으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산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일자이며, 그리고 그것은 ‘지연’(retardation)과 마주칠 때에만 개별적 객체들로 분할됩니다. 자연이 본질적으로 일자라면 그것이 왜 자신을 다자로 변환하는 장애물들과 대관절 마주쳐야 하는지는 명료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또한 그랜트는 ‘관념론’이라는 낱말에 대하여 여타의 사변적 실재론자들보다 더 긍정적인, 어떤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보다 젊은 동료 제레미 던햄 및 션 왓슨과 공저한) 그의 후속 저서는 러셀에 의해 궁극적으로 거부당한 영국 관념론자들에 대한 변론이었습니다. 그랜트에게 관념론은 사유의 우선성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 자체 속 관념의 우선성을 뜻합니다. 이렇게 해서 관념론은 그랜트의 철학에서 긍정적인 용어가 됩니다.

이와 같은 짧은 강연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철학적 입장들을 모두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세부 내용을 이해하려면 저의 책을 읽어야 하며,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모두 즐겁게 읽으리라 희망합니다.


『사변적 실재론 입문』 화상강연과 대담 영상
 강연과 대담 : https://bit.ly/3ygJgLo
 질의응답 : https://bit.ly/3KZwj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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