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 다음의 발걸음을 위하여: 소영현의 『광장과 젠더』를 읽고ㅣ이진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3-08 16:54
조회
449
 

다음의 발걸음을 위하여: 소영현의 『광장과 젠더』를 읽고


이진아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과거의 기억은 사실로 남는가 감정으로 남는가.

나는 나의 어릴 적 시간을 되돌려보면 상세한 정보가 떠오른다기보다는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부모님과 함께 갔던 곳에서 무슨 일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까르르 웃었던 어떤 순간들, 혹은 언제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참 사소한 일로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던 순간들이 생각나고 그 회상과 함께 그 감정을 어렴풋이 다시 경험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감각에는 감정이 더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분명 나도 몰랐던 그러한 감정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의 나를,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와 나의 주변의 관계와 행동 방식과 태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아닌 집단은, 사회는,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어떠할까? 아니 더 정확히는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은 어떠할까? 그들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있으며 그 기억의 덩어리는 지금 현재 어떤 형태로, 무엇으로 떠오르는가? 한국전쟁은 몇 월 며칠 몇 시에 벌어진 몇 만의 병력, 몇 대의 탱크로 기억될까? 아니면 생존을 바로 턱밑에서 위협받던 두려움과 그 생존 투쟁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고통으로 기억될까? 민주화와 87년 체제는? IMF는? 2014년 4월 16일은? 이후의 촛불 혁명은?

교과서나 역사책에 선택되어 기록된 정보와는 달리, 사회에서 숨 쉬고 다른 이를 만나고 시대를 견디고 버티어 생존해 온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정, 정서, 분위기가 더욱 크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고,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를 만들고 심지어 미래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광장과 젠더>에서 들추어 보고자 한 것이 바로 사실로서의 기억이 아닌 집합 감정으로서의 한국 사회의 기억이다.

저자는 근대 이후 한국 사회의 시대변화에서 누적되고 연결되고 굴곡되고 강화된 그 감정을 추적하여 우리 앞에 그려내는데, 시대를 담지하고 있는 소설을 주 대상으로 비춘다. 그리고 그 소설을 통과한 빛은 ‘광장’이라는 장소와 시간에 모인다. ‘감정연구’는 그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틀인 구멍이 성근 체로는 미처 걸러지지 못했던 흩어진 것들,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어떤 것들을 다시 손에 쥐어 보기 위한 도구이다. 그래서 저자 또한 왜 감정에 주목해야 하는지 그리고 ‘감정 자체를’ 연구한다기보다는 ‘감정을 통해’ 연구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광장’의 내부와 외부, 주변과 아래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유동치고 흘러가고 있었던 다양한 주체들의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나아가 이 흐름이 생겨난 한국 사회의 맥락을 ‘이성적’으로 꼼꼼히 따져 묻는다.

저자가 이렇게 뽑아낸 오늘을 만든 우리들의 기억에는, 생존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정당화 되어 수치심을 잃었던 속물적인 면모와, 감당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라는 거인 앞에 풍자와 비꼼을 넘어선 대안을 마련할 수 없었던 무력한 이들의 열패감을 지나, 광장에서조차 소외되어 무시나 혐오 또는 망각의 대상이 되어버린 여성, 탈조선 청년, 이주민들의 그것까지 온통 뒤섞여 있다. 저자는 풍부한 인용과 치밀한 구성으로 이 사실을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타자의) 부정적 감정들이 내 안에서 일으키는 불편한 감정은 무엇 때문인지를 가만히 숙고해 보기를 권한다.

기억과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잘잘못을 따지고 저울질하여 평가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직시와 자기반성을 요청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다르게 보아야 다른 미래가 상상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다음을 위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자 따위의 진부한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를 형성하고 있고 또한 한두 마디로 규정할 수 없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수많은 물컹한 흐름들이, 한국 사회의 변혁을 가져왔던 광장이라는 시간에 걸쳐 있었고 광장 이후의 시간에도 여전히 함께 있을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다음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라 넌지시 알리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독자라면 자신의 기억과 함께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더듬어 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와 빗겨 있었던 독자라면 주변 사람들과 한국 사회 자체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새롭게 갖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운 좋게도 조금 일찍 저자의 신간을 접할 수 있었던 독자로서 이 책을 읽은 경험이 다른 소설이나 글을 읽거나, 사회의 여러 사건을 접하면서도 색다른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이 조금은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들여다보아야 다음의 발걸음이 가능하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


광장과 젠더


*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 마찰, 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움직이는 별자리들 : 잠재성, 운동, 사건, 삶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시론』(김미정 지음, 갈무리, 2019)


정동, 페미니즘, 공통장의 문제의식을 통해 한국문학사의 여러 장면들을 읽어가며 근대적 개인의 신화를 질문에 붙이고, 포스트 개인(post individual)의 사유를 전개한다. 이 책에서 정동적 모먼트로 언급되는 2014년 세월호, 2016~17년 촛불, 2016년 강남역 이후는 모두, 주어진 조건들을 사람들 스스로 전유하고 다른 것으로 만들어가는 장면들이다. 이 책이 문학을 통해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안의 잠재성, 사건의 계기들이다.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까판의 문법』(조정환 지음, 갈무리, 2020)


이 책 『까판의 문법』(그리고 이와 동시에 출간하는 『증언혐오』)은 2019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5년이 되는 날에 시작된 증언선 윤지오호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1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연구의 결실이다. 이 두 책은 하나의 사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까판의 문법』은 전 사회적 까판의 논리와 운동 메커니즘을 권력형 성폭력 가해권력이 사용하는 권력 테크놀로지로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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