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전반부

작성자
evadongpachloe@gmail.com
작성일
2018-09-08 10:27
조회
554
앞서 살펴본 혁명과 자유 운동의 역사로부터 밝혀진 리더십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정치 행위의 사회 조건들이 어떠한 정도로 변화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현재의 정치적 난국은 정치 영역의 자립성에 기반을 둔 순전히 정치적인 방식으로는 적절하게 타개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시끄러운 정치적 담론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숨겨진 거처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가 근대성을 넘어서 다른 영토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 영토는 다중과 공통적인 것의 사이의 길에 놓이고, 그 길은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곳이다.

Blow the dam!

Machiavelli는 행운을 다스리고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사건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방어의 전선으로 제도화된 덕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날씨가 고요해지면 강의 물이 범람할 때 그 피해를 경감될 수 있게 우리는 수로와 댐을 세워야 한다. 전심전력으로 Machiavelli의 치밀함을 따라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운동은 지속되고 온갖 적대세력의 공작을 견디기 위해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한다.

중앙집중화된 지도와 권위를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구성(constitution)보다는 해체(destitution)가 필요한 때가 있다. 자본주의 세력이 오늘날 사회·정치적 관계들의 총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욕망을 신비화하고, 우리의 생산성을 그들의 목표에 묶어놓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삶정치적 지배의 울타리, 화폐의 명령, 정치적 권위, 경제적 기율을 폭파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저항— 반식민·반제국주의 투쟁, 반인종주의 운동, 페미니즘 운동, 노동자들의 봉기, 자본주의적 기율과 통제를 거부하는 여러 형태의 운동 등등—에 대한 대응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지배의 구조들이 등장했다. 이 투쟁의 효과 가운데 하나는, 주로 선진국들에서 공공지출이 그 한계를 넘고 공공 부채가 한 동안 발전과 사회불안에 대한 통제력 유지에 유일한 열쇠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는 확대된 사회적 억압과 사회질서의 재편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조직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가 핵심이었다.)그 이 후 몇 년 동안의 만연한 사회적 탄압과 사회질서의 재조직화를 통해서만 자본주의체제는 다시 조직화되고 유지되었다. 이 몇 년이 바로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탄생한 기간이다.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가 탄생한다. 1973년 칠레의 쿠데타가 신자유주의적 실험과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의 적용의 길을 열었다. 데쳐와 레이건은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각자의 국가에 시작했고, 블레어와 클린턴은 복지제도와 노동 보호의 파괴를 통해 그 전략과 전지구적 금융을 지배의 위치로 상승시킴으로써 그 전략들을 실제로 공고히 했다. 블레어, 클린턴, 슈로더는 자본가 계급을 위해서 ‘더러운 일’을 했으며 개량주의적 중도주의의 탈을 쓰고 “신자유주의 혁명의 승리(sic)”를 방관했다. 이 더러운 일은 공식적인 좌파 척결이었고, 오늘날 그 좌파의 시체들은 모든 사회민주당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민중계층을 대의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완벽한 장애물이다.

자본가 연합은 그 때 정치적, 경제적인 통제와 탄압수단을 통해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후기 산업, 디지털, 그리고 생명정치적 개혁과 생산 과정을 통해 디지털 방식의 개혁을 가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력의 사회적 구성과 자본의 새로운 기술적 구성 사이의 갈등에서 이전에 존재했던, 생산적 사회와 자본주의적 정치 사이의, 저항의 형태들과 지배의 형상들 사이의 모든 상응관계들이 무너졌다.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늘날 점점 더 권력의 순전한 행사로 기능하며 사회적 불안을 엄정한 한계 내에 잡아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권력의 주권적 행사가 증가하면서 혜택과 특혜의 다양한 메커니즘들, 즉 부패가 증가한다.



이것이 1968년에서 1989년까지의, 노동계급의 정치적 구성과 자본의 정치적 구조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약사이다. 그런데 사회적 투쟁들이 중지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저항의 새로운 경로들을 여는 길을 발견했다. 1995년 치아파스에서 혹은 1999년 시애틀에서 탄생한 대안지구화 투쟁의 주기(cycle)는 9·11 공격 이후에 ‘테러에 대한 전쟁’의 부산물로 종식되었으나, 그 핵심 요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주기—야영과 도시공간의 점거로 특징지어지는 여러 ‘봄들’의 주기—가 2008년 이후에 탄생했다. 이 투쟁들은 타올랐다가 급속히 사라지는 듯했지만, 다른 곳에서 훨씬 더 큰 힘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이 투쟁들도 아직은 오늘날의 필요에 부합하는 새롭고 효과적인 조직형태를 발명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왜 투쟁은 그토록 풍성한데, 조직화는 빈약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과거에는 즉자와 대자의 변증법을 활용했다. 계급의 경험적 실존에서 의식화로. 지금은 이것이 낡은 것이 되었다. 이 변증법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은 의식, 정신, 이성에서 더 상위의 자연을 보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의식, 정신, 이성이 삶, 신체, 열정, 존재 자체를 지배한다. 우리는 근대 정치사상의 켄타우로스(반인반수)로 되돌아간다. 오늘날 삶정치의 맥락에서는 조직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것이 가능하다. 켄타우로스의 두 반절을 전복시키는 데서 시작해서 재빨리 그 이분법을 거부하는 데서 끝나는 성찰이다. 욕구의 체제가 감각과 의식을 조직화하고, 상상력이 이성과 열정 사이의 관계를 가로지르면서 재설정한다. 그리고 성찰은 수행 과정들과 미래에 열려있는 장치들(dispositifs)의 구축을 통해 온다.

정치적 구성이 새로운 노동형식의 기술적 구성에 상응하거나 그로부터 직접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고맙게도 노동계급 혹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계급부문이 투쟁에서 다른 이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던 때는 지났다. 산업노동자들이 농민들 대표한다,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등등의 주장을 할 수 있던 때는 지난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본의 구조에 상응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조직화를 발명하는 것은 그것이 전복적인 형태일 때조차 공허한 몸짓이거나 더 나쁜 것이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들을 가로질러 뻗어가는 사회적 협동만이 조직에 적절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



정치적 구성과 기술적 구성의 관계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문화 및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경제적 토대가 결정한다는 전통적인 규정(이는 맑스적이기보다는 엥겔스적이다) 또한 무너뜨린다.


그람씨와 알튀세르는 오래 전부터 이 틀을 정신주의 철학의 간접적인 산물이며 조야한 유물론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이는 실로 정신을 물질에서 분리하는 형이상학의 단순한 반영으로서 탄생했다.

그람씨 : “만일 구조라는 것이 ‘사변적으로’ 파악된다면 그것은 분명 ‘숨은 신’이 된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사변적으로’ 파악되지 말고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인간들의 움직임과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으로서, ‘문헌학’의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하는 객관적 조건들의 집합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들은 순전한 환상들(‘오류’)이 아니라 제도들과 실천들 내에 존재하는 재현들의 집합들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들은 상부구조에 등장하며 계급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대목들을 거쳐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넘어가는 것이 현 맑스주의의 오래된 경험(투쟁이 위로부터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을 해석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삶권력의 새로운 특징들과 그것을 전복할 다중의 전략을 놓고 볼 때 훨씬 더 확연하다.


Second response: seek the plural ontology of cooperative coalitions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운동은 종종 지하로 숨었다 지상으로 드러났다를 반복하는 성격(a Carsic nature)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실천과 주체성의 축적을 발생시킨다. 흐름에서 사회적 존재의 지질학적 침전층들을 낳는다. 우리는 이 정치의 다원적 존재론을 특징짓는 불연속적이고 다양한 흐름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존재론은 우리의 집단적 실존에 굳게 뿌리를 두고 형성되는 존재(현존재, Dasein, being there)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다. 그런데 ‘역사성이란 상대주의를 함축하는데 역사에 뿌리를 둔 존재론적 방법을 어떻게 제안할 수 있느냐’는 이견이 가능하다. 존재는 필연적인 반면에 역사는 항상 우연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견은 확실성을 의식의 (초월적인) 토대나 초재의 숭고한 차원에서 찾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함축한다. 이와 달리 우리의 역사적 존재론은 경험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으면 경험의 역사성을 그 닻으로 삼고 있다. 현존재(Dasein)의 역사와 역사성은 무차별하거나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이 현상을 절대적 진리를 전제하고 위에서 보면 상대화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에서 그 행동에 의해 진실한 표현들을 창출한다. 그 진실은 새로운 공통적 존재를 구성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며 그 허위성은 공통적 존재를 파괴하거나 제한하는 정도에 의해 규정된다.



딜타이 (하이데거에 응답하면서) : 경험의 영역, 존재자적인 것(the ontic)의 체험의 영역에서 인간 행동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표현 활동(expressive operation)이 실존의 진실을 구축할 수 있다.



여러 운동들—2011년 도시공간 점거운동들, 2013년 터키와 브라질의 점거운동, 2011년 여름 이스라엘과 영국, 2012년 퀘벡, 2014년 홍콩, 미국의 경우 2014년 Black Lives Matter 시위.

이 운동들은 상이한 정치적 맥락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상이한 삶형태를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운동들은 동일한 삶의 실재의 동일한 순환과 형상들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일까?

① 투쟁의 레퍼토리를 공유한다. 즉 동일한 악보로 연주를 한다.

② 새로운 민주적 제도를 위한 요구를 공유한다.



이 뒤에는 더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운동들이 표현하는 다원적 존재론(plural ontology)이다. 특수한 지역(동네) 문제들에 초점을 두는 소그룹들과 공동체들은 강력한 네트워크 형태로 서로 연결한다. 이 연결과 공통의 언어가 본질적이다. 운동들은 의식하든 아니든 연방 모델에 의거한다. 국가주권의 연방주의적 전통들에서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연합과 마디결합의 연방주의적 양태들이다. 광범한 그룹들과 주체성들이 각자의 자율과 차이를 포기하지 않고 연합을 형성하고 공통의 사회적·정치적 기획들에서 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억압적 힘들이 연합 논리를 깨는 데 집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종교적 광신주의는 종종 분할을 창출하는 효과적 쐐기가 된다. 브라질과 영국에서는 인종주의적 운동들이 종종 성공적으로 도시와 교외의 집단들을 분할한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일부 시위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자극들이 불화를 창출한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구태의연한 경찰의 억압과 언론 캠페인들이 연결을 부수는 도구들이 된다.)



이 운동들은 다원적 존재론의 맥박치는 심장을 긍정한다. 상이한 전통들에서 나오고 상이한 목적들을 표현하는 다원적 주체성들, 다수적 시간성 모델들, 투쟁의 다양한 양태들이 협동적 논리에 의해 묶이는 강력한 떼(swarm)를 형성한다. 그 목적은 차이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제도들을 창출할 수 있는 구성적 민주주주의 모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에 맞서고 금융의 독재에 맞서며 지구를 파괴하는 삶권력에 맞서고 인종적 위계에 맞서며 공통적인 것의 자주관리에의 접근을 찬성하는. 그래서 운동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활성화하고 육화하는 이러한 의지를 긍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축에 아래로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운동이 주로 ‘다원성의 정치’(politics of plurality)를 구축다면 이제 운동은 다원성의 ‘존재론적 기계’(“ontological machine” of plurality)를 가동시켜야 한다.



[다중]

우리는 이 다원적 존재론의 행위자에게 ‘다중’(multitude)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다중은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 기획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의 근원적 다양성을 지칭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치적 기획으로 이해된 바의 다중은 다원적인 사회적 존재론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잇는 돌쩌귀( the hinge between the plural social ontology and the possibility of a real democracy)이다. 우리가 이 존재론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비전이 정치적 지형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강력한 시위들, 반란들, 봉기들을 분석할 때조차도 그렇다. 운동 자체는 다중의 일상적 실천과 능력에 구현된 더 깊은 사회적 실재의 징후,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회로들의 징후일 뿐이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220?category=57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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