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선악의 저편> 6장 '우리 학자들' 발제문

작성자
qjwskan
작성일
2022-05-11 08:58
조회
669
제6장. 우리 학자들

204. hen kai pan, pan kai hen. 하나 속 전체, 전체 속 하나.

니체에 따르면, 도덕을 말하는 것은 “겁내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위험한 것이다(169). 그도 그럴 것이 학문이 아닌 진정한 ‘도덕’이란 언제나 “나쁜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169). 도덕이란 객관적인 학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종할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도덕은 나의 명령 체계에 가깝다. 도덕에 있어서 나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어야 한다. 도덕이란 맨사람의 내가 온갖 낯설고 타자적인 세계와 마주치는 경험 속에서 스스로 정립해나가는, 때마다의 가치체계인 것이다. 그것은 늘 다시-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니체는 거꾸로 된 도덕, “모든 주인에게서 벗어나자!”는 “천민적 본능”이 지배함으로써 “오만과 무분별에 가득 차 철학에 법칙을 부여”해버린 ‘학문’에 대해 반발한다(169-170). 그리고 그것에 대해 “여성이나 예술가”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169).

“아, 이러한 고약한 학문이여! 이것은 언제나 진상을 알아내는구나!”(169)

『도덕의 계보』 서문 첫 문장에서 니체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꿀벌로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으며 우리는 “항상 그 벌통을 찾아가는 중에” 있다고도 말한다. 진상을 다 알아버렸다면, 더 이상 진상을 찾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진상을 찾아나서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진상을 알아낼 수 없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수께끼를 남기는 자’여야 하는 것이고, 도덕은 ‘한 번’이 아니라 ‘수만 번도 넘게’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학문하는 인간들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객관성이라는 우산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이들은 창조의 능력, “종합적인 과제와 능력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방관자”였으며(170), 근면한 노동 속에서 “철학자의 영혼의 가계 운영”을 사치스럽게 평가한 천민들이었으며(170), 철학 따위에는 “사치스런 낭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색맹의 공리적 인간”이었다(170). 이들에게는 “철학에 대한 오만한 경시”가 있는데(170),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어떤 철학자”의 “나쁜 영향” 때문에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경멸”에 도달한 것이었다(170).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하나의 사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는 “헤겔에 대한 비지성적인 분노로 독일의 최근 세대 전체를 독일 문화와의 관계에서 분리시켰”다(170-1). 적어도 헤겔의 경우는 철학에 대한 외경을 잃지 않으면서 “역사적 감각의 높이와 예언적 섬세함을” 지니고 있었다(171). 그 내용에 대한 평가에 앞서서, 헤겔은 자신의 철학을 역사 속에서 전개하였으며, 새로운 도덕에의 창조를 통해 미래를 견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민적 본능이 근대 철학을 지배함에 따라, 더 이상 신적인 것과 믿음은 사라지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만이 남게 되었다(171).

“우리는, 우리의 현대 세계에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it, 플라톤Platon,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같은 전체적 본성을 지닌 사람이, 그리고 이 모든 제왕 같은 웅장한 정신의 은둔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모자라는지 시인해야 한다.”(171)

‘전체 속에서 하나를, 하나 속에서 전체를’(Hen Kai Pan, Pan Kai Hen) 파악했던 위대한 철학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모자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니체는 제안한다. 자연은 늘 자기 자신을 숨기며 있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이란 본래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이사야 45:15). 자연은 감춰져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신적인 창조자의 역할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인간적인,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들은 ‘다 알았다’고 스스로를 잘못 속이고 만다. 더군다나 학자들은 자신이 “좀더 나은 소질과 혈통이 있다고” 느끼는데(171), 니체는 이들을 두고 “최상의 경우라 할지라도 학자나 전문가일 뿐”이라 말한다(171). 창조자나 예술가가 아닌 것이다. 또 이들은 “모두 실패한 자이며 학문의 지배 아래로 되돌아온 자들”이다(171). 왜냐하면 니체의 믿음에 따르면, 인간이란 “그 이상이 되기를 원”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 역시 “언젠가 한번은 자신이 그 이상이 되기를 원했으나 이러한 ‘그 이상’에 대한 권리도 자신의 책임에 대한 권리도 가지지 못했던 것”과 같았다(171).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점잖게 분노를 품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철학의 주도적 과제와 지배에 대한 불신을 말과 행위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172).

이로써 철학은 한낱 “‘인식론’으로 격하”되어 버렸다(172). 니체는 마지막 숨을 내쉬는 철학을 보며 다시 묻는다. “어떻게 이러한 철학이 - 지배할 수 있을까!”를(172).


205. 진정한 철학자

진정한 철학자는 누구인가? 니체에게 이는 “‘비철학적으로’ ‘현명하지 못하게’, 무엇보다도 영리하지 못하게 살아가며, 인생의 수백 가지 시련과 유혹에 대한 짐과 의무를 느”끼는 자이다(174). 여기서 ‘비철학적으로’와 ‘현명하지 못하게’라는 말은 물론 세상에서 흔하게 말해지는 말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철학자는 “스스로 끊임없이 모험을 감행하며 좋지 않은 그 게임을 한다……”(174)

그러나 이러한 철학자가 육성되기에, 현대의 학문은 견고하고 거대했다. 전체 속에서 하나를, 하나 속에서 전체를 파악하는 종합의 활동, 다시 말해 정상에 이르러 “전망하고 둘러보고 내려다보는 일을” 하기에 학문의 탑은 너무나도 커서 결국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다(172). 또는 “뒤늦게 정상에 오르게 되어도”, 이때는 이미 늦어버린 때다(172). 기껏해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데 그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시선과 가치 판단 전체는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172) 이로써 현대의 학문은 스스로를 공고히 하는 것이며, 세상에는 천개의 눈이 아닌 한 개의 눈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학문의 장벽 앞에 주눅들은 대개의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함으로써, “인식자로서도 더 이상 명령하지 못하여 더 이상 지도할 수도 없”는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173). 우리 안의 본능, “천 개의 다리와 천 개의 촉각을 지니도록 유혹받는 것”이 더 이상 즐거운 자극이 아닌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173). 이런 무리적 본능과 학문의 압박 속에서, 철학자들은 학문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삶의 가치”에 대해서도 “판단할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173). 즉 “그는 싫더라도 이러한 판단을 해야 할 권리나 심지어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법을 배우게” 된다(173). 삶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삶은 탐구할 것이라기보다 판단되어야할 것이다. 따위의 말 속에서 철학자는, “혼란을 일으키며 파괴적일 것인” 광대한 체험 앞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도 사회의 조류에 떠밀려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다(173).

대중들이 누군가를 두고 “‘현명’하게 살고 있다거나 ‘철학자’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거의 ‘영리하게 세상을 피해’ 살고 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73) “지혜라는 것, 이것은 천박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도피처럼 보이며 좋지 않은 게임에서 잘 빠져나오는 수단이자 기교처럼 보인다.”(173)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는, 바로 그 ‘좋지 않은 게임’을 끝까지 수행해본다. 혼돈 속에 자기를 던져놓기를 주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던져진 곳에서 우리는 절망하면서도 고양될 것이다. 끝끝내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점은 철학하는 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한 관심은 시간에 대한 복수감의 발로이다. 철학자는 시간 속에서, 밀려오는 시간과 함께 시간을 떠밀어가는, 시간의 물결을 과감히 정주하는 자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어떤 복수감과 아쉬움 없이, 그는 그저 ‘긍정하는’ 자이다.


206. 두 종류의 천재, 그리고 두 종류의 반-천재

니체에게 천재란, ‘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천재와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천재가 있다. 니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비유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특히 84번 구절과 131번 구절에서) 공부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생산과 출산은 하나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천재, 즉 생산하든지 아니면 출산하는 존재”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174), 존재는 하나이고 거기에는 생산과 출산이라는 서로 다른 측면이 부각되는 것이지, 출산하는 존재와 생산하는 존재가 따로는 아니다. 니체는 이러한 천재에 비해 “학문을 하는 평균적 인간은 언제나 늙은 처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74). 다소 논란이 될 수 있는 이 ‘늙은 처녀Jungfer’라는 구절은 206번 구절 외에 50번 구절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우리 책에서는 “노처녀”(88)라고 번역되었는데, 거기서 ‘늙은 처녀Jungfer’는 “최후의 허영심”(88)으로 묘사된다. 즉 새로운 창조를 허용하지 않는, 폐쇄된 믿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도 ‘늙은 처녀’는 “인간의 가장 귀중한 두 가지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74). 즉 생산하고 출산하는, 다시 말해 창조하고 종합하는 인간의 예술가적 활동과 거리가 먼 존재가 바로 남성의 경우에는 “학자”로, 여성의 경우에는 “늙은 처녀”로 묘사되는 것이다(174).

- 그렇다면 학자란 누구인가? 해설할 것 없이 니체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그는 고귀하지 못한 천성의 인간, 즉 고귀하지 못하고 다시 말해 지배력이 없고 권위가 없으며 자족할 줄도 모르는 천성의 덕목을 지닌 인간이다 : 그는 근면하고, 참을성 있게 질서에 적응하며 능력과 욕구에서도 균형과 절도를 지니고 있다.”(175)

학자란 스스로 지배하고자 하기보다, 이미 세워진 학문의 질서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이다. 여유 속에서 철학을 하기보다 근면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이며, 자신의 충동과 본능을 늘 절제함으로서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자이다. 또 니체는 이어서 학자가 맺는 관계 대해서도 묘사한다.

“당연하지만 학자는 고귀하지 못한 조류의 병폐나 악습도 지니고 있다 : 그는 하찮은 질투심에 잔뜩 사로잡혀 자기가 오를 수 없는 높이에 있는 사람들의 저급함을 꿰뚫어보는 살쾡이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는 붙임성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감정대로 행동하는 사람의 붙임성이지, 도도히 흐르는 것 같은 사람의 붙임성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위대하게 흘러가는 인간 앞에서 그는 좀더 냉담해지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175)

학자는 명령하는 위대한 정신 앞에서도 제대로 복종할 줄을 모른다. 니체에 따르면 그는 민주주의라는 평균적 인간의 본능 속에서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명령하는 자도 거부하는 자인 것이다. 그런 학자가 가진 ‘붙임성’이란 그저 우연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시간에 대한 긍정에서 행해지는 관계맺음이 아니다. 니체는 이와 같은 관계의 파탄이야말로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는 결국 ‘평범함의 본능’ 때문이다. 팽팽한 긴장과 대립을 늘 거부하고, 이완과 동정만을 신봉하는 예수회 교의도 그러한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은 그의 속성 중 평범함의 본능에서 온다 : 즉 비범한 인간을 본능적으로 근절하려고 하고, 팽팽한 활을 모두 꺾으려고 하거나 -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활시위를 이완시키려고 하는 평범함의 예수회 교의에서 온다. 즉 배려하면서 물론 부드러운 손길로 활시위를 이완시키며, 친밀한 동정으로 활시위를 이완시킨다 : 이것은 동정의 종교로 스스로를 언제나 세상에 유입시킬 줄 알았던 예수회 교의의 본래의 기술이다. -”(175)


207. 염세주의자 : 도구, 아무것도 아닌.

“객관적인 정신을 맞이”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175).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각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 헤매고, 환희하고 또 좌절했는가? 나에게서 나는 주관적인 생각이 진리인지. 진리까지 아니더라도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타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것인지는 모든 생각이 한 번쯤은 거치고야 마는 의문의 통로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우리가 객관적인 정신을 발견한 것처럼 느끼고, 그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도, 우리는 “감사에 대해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176). 특히 니체가 본 당대의 유럽은, ‘객관적인 정신’ 그것이 너무나도 거대해진 나머지 ‘자기’가 숨 쉴 공간마저 사라져 버린 모습이었다. 오직 “자기 부정”과 “비인격화”만이 “목적 그 자체”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176).

이러한 세태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염세주의였다. 그러나 염세주의 역시 또 하나의 “객관적인 인간”이었으니, 그는 “‘무관심한 인식’”이라는 것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최고의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176). 염세주의자는 “더 이상 저주하거나 비방하지 않는 객관적인 인간, 수천 번의 완전한 실패나 절반쯤 실패한 후에 학문적인 본능이 언젠가 만발했다가 지는 이상적인 학자”이다(176). 더 이상 비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방할 대상뿐만 아니라 비방하는 나의 생각마저도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염세주의자는 ‘이상적인’ 태도까지도 버리지는 못했고, 결국 ‘의지하지 않음’, ‘무관심한 인식’을 이상화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에서 객관적인 정신을 맞이했던 것이다.

우리는 19번 구절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공부했었다.

‘주체’라는 허구의 자리는 ‘자아’에게만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쇼펜하우어는 그곳에 ‘의지’를 대입했다. 그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진리로 여겨졌던 ‘자아’의 허구성을 폭로하였으나, 그 역시 작용 원인으로서의 어떤 본질을 상정하고자 하는 그러한 편견(특히 가치들의 대립에 관한 믿음“(17))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칸트의 현상(Erscheinung)과 물자체(Ding an sich)라는 도식을 계승해, 의지를 물자체로 파악하며 의지가 인간의 의식대상이 아닌 표상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개체화하고 표상으로 자신을 현상-생성g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니체가 볼 때, 쇼펜하우어 또한 “철학자들이 하곤 했던 일을 실행했을 뿐”(37)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자신의 미신을 가졌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33).


그런데 니체는 이들이 “이 세상에 있는 가장 귀중한 도구”라고 말한다(176).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이 힘에의 의지임을 깨우치고 오직 자기에 대한 긍정만을 실천하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염세주의자는] 좀더 강한 자의 소유가 된다. 그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 그는 하나의 거울인 것이다. - 그는 ‘자기 목적’이 아니다. 객관적인 인간은 사실 하나의 거울이다”(176)

염세주의자는 모든 주관적인 것에서 허무를 본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게’ 인식하고자 한다. 그에게 “‘개인’적인 것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면, 그것은 그에게는 우연적인 것으로 때로는 자의적인 것으로 또 때로는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된다.”(176) 그리고 이로써 그는 “스스로 낯선 형태와 사건의 통로나 반영이 되어버”린다(176). 모든 새로움의 근원이 되는 어떤 낯선 사건과 체험 앞에서도, 마치 그 자신이 스쳐가는 통로처럼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염세주의자의 목적이다. 그리고 염세주의자는 이것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가 볼 때, 이러한 사고는 “이미 … 좀더 일반적인 경우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것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진지함을 잃어버”린 것이었다(177). 염세주의자에게는 “자신의 고난을 다룰 손과 조작 능력”이 없다(177). 조작하기보다 그는 그저 무관심하게 대처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관심에서 그에게는 “모든 사물과 체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습성”이 생겨난다(177). 그는 “긍정할 줄도 부정할 줄도 모른다.”(177) 그렇게 그는 “명령하지 않으며 파괴도 하지 않는다.”(177) 그런데 이런 무난함이 사회에서는 미덕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것도 경멸하지 않는 염세주의자는, “누구도 앞서가지 않으며 뒤따라가지도 않는다.”(178) 아무와도 진정으로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어느 쪽에 편을 들”지도 않는다(178). 당시 대중들은 염세주의자를 철학자로 판단했으나, 니체가 볼 때 이는 크나큰 오해였다. 진정한 철학자에게 염세주의자는 “하나의 도구이며, 가장 고상한 종류의 노예”, 나아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노예”,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178). 니체는 계속해서 염세주의자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갖는 존재가 아니고, 그저 사물적 도구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체는, “그는 성분이나 내용이 없는 인간이며, ‘몰아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덧붙여 말하자면, 여성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라고 말한다(178). 그 어떤 새로운 체험도 가지지 않는 염세주의자에게서 가상을 덧붙이고 꾸밈과 아름다운 거짓말을 통해 창조해낼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염세주의자는 도래할 진정한 철학자에게 있어서 도구인가? 207번 구절에서 니체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56번 구절에서 이를 조금이나마 확인했었는데, 해당 발제문을 다시 돌이켜보도록 하자.

힘에의 의지라는 무한한 깊이를 가진 바다를 탐구하는 사람, 그는 거대한 숲과 원시림 앞에서 고독을 체험하고 바다에는 어떤 디딤판도 온전한 디딤판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가 허무와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염세주의를 밑바닥까지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92-3). 그렇게 만약 우리가 염세주의에서도 해방된다면, 즉 “세계를 가장 부정하는 사유방식으로 꿰뚫고 들어가 바닥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이상에 눈을 뜨게”될 것이다(93). 반대되는 이상이란 힘에의 의지가 넘실대는, 긍정으로 가득한 세계다.


208. 위대한 정치의 필연성

염세주의자는 회의론자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정신을 섬기는 자였다. 그리고 당시의 유럽에는 이런 염세주의적 태도가 팽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회의론자가 아니면서도 객관적인 정신을 섬기는 자가 있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그것을 듣기 싫어”할 것이다(179). 그러니까, 어떤 믿음을 가졌는데 그 믿음이 세상이 허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는 무엇이 있다는 믿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두고 “위험한 인물”이라 부른다(179). “마치 어디선가 새로운 폭약의 실험이 이루어진 것처럼”(179), 마치 “정신의 다이너마이트”처럼(179) 위험한 믿음은 등장한다. 오직 부정을 말하고 부정을 원하는, ‘선한 의지’로 포장되어 “실제로 활동하는 삶을 부정하고자 하는” 염세주의가 아니라, 진정한(동시에 두려운) 긍정이 등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긍정의 소리를 “두려워하면서 엿듣는”다(179).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유약한 염세주의자는 “너무 쉽게 깜짝 놀란다.”(179) “그의 양심은 어떤 부정에도, 더욱이 단호하고 엄격한 긍정의 말 한마디에도 경련을 일으키며 마치 무엇에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끼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79). 니체에게 염세주의자는 어떤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절제의 인간이다(179). 니체는 몽테뉴와 소크라테스에게서 염세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또 염세주의자는, 믿음을 말하는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되물을 것이다. “너무 성급한 가설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혀 아무런 가설도 세우지 않는 것이 아마 좋은 취미에 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180)라고. 니체는 회의(의심)에 대해, “신경쇠약이나 허약함이라고 불리는 어떤 복잡한 생리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정신적인 표현”(180)이라고까지 비난한다.

그러나 동시에 니체에게 회의란, 염세주의란 진정한 철학자가 도래한다는 전주(前奏)이자 서곡(序曲)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심과 회의, 허무는 마주침의 첫 번째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종족이나 신분이 결정적으로 갑자기 뒤섞이게 될 경우에 항상 일어난다.”(180) 서로에게 타자인 A와 B가 관계를 맺을 때, A와 B가 갑자기 뒤섞여 하나가 될 때(그러니까 서로 사랑할 때), 각자가 지니고 있던 믿음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로써 그들은 믿음 자체가 애초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기준이나 가치를 피 속에 물려받게 되는 새로운 세대에서 모든 것은 불안이고 혼란이며 의혹이자 시련이 되는 것이다.”(180)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가장 깊이 병들고 퇴화되는 것은 의지”라고 니체는 지적한다(181). 결과적으로 허무에 빠진 자들은, “결의에 찬 독립심이나, 의욕에 깃들여 있는 용감한 쾌감을 전혀 알지 못한다.”(181)

“오늘날 우리의 유럽은 … 때로는 초조하게 무엇을 탐내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 뛰는 저 불안한 회의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의문 부호를 가득 실은 구름처럼 음울해 하며 - 자신의 의지에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로 싫증이 난다! 이것이 의지 마비증이다 : 오늘날 이 불구자가 앉아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때로는 … 얼마나 유혹적으로 꾸미고 있는가! 이러한 병을 위해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속임수의 의상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객관성’, ‘과학성’, ‘예술을 위한 예술’, ‘의지에서 자유로운 순수 인식’으로 진열장에 전시된 것 가운데 대부분은 단지 성장(盛裝)한 회의나 의지 마비증에 불과하다.”(181)

니체는 중간 지역인 러시아에 주목한다. 러시아는 “의욕하는 힘이 오랫동안 비축되고 저장되었”는데(182), 니체는 러시아를 두고 “여기에서는 의지가-이것이 부정의 의지인지 긍정의 의지인지는 불확실하더라도-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좋아하는 말을 빌려 말하자면, 위협적인 방식으로 방출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182). 즉, 니체는 당시의 러시아가 어떤 위협적인 존재로서 유럽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예견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럽에게는 “러시아 제국이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작은 단위의 나라로 분열되고, 특히 ... 의회 제도라는 어리석음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82). 물론 니체 자신은 의지의 폭발, 정신의 다이너마이트가 현실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다만 니체는, “내가 의도하는 것은 러시아의 위험이 그렇게 커짐으로써, 유럽이 그와 같은 정도로 위협적이 되고자 결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182).

“즉 하나의 의지를 획득하려는 결의를, 유럽을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이라는 수단을 통해 수천 년에 걸쳐 목표를 세울 수 있는 오래되고 무서운 자신의 의지를 획득하려는 결의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오랫동안 늘어진 유럽의 소국주의라는 희극이, 또한 그 왕정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의지 분열이 종결될 것이다. 작은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다. 틀림없이 다음 세기는 대지의 지배를 위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고 - 어쩔 수 없이 큰 정치[위대한 정치]를 하게 될 것이다.”(182-3)


209. 새로운 독일 정신

이처럼 당시의 유럽은, 분명 “새로운 전쟁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으며, 염세주의적 회의와 함께 “다른 강한 유형의 회의가 발달”하고 있었다(183). 니체는 이를 당시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 대왕에 비로소 ‘존재성’을 부여해준다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라는 비유로 표현한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사적 천재이자 의심의 천재”이고, 대왕의 아버지는 “새로운 독일인의 유형”을 탄생시킴과 함께 대왕에게도 존재성을 부여하는 존재이다(“einem militärischen und skeptischen Genie”, 183). 이는 즉,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는 프리드리히 왕의 존재이유는 새로운 독일인의 유형의 탄생에 기여하는 도구로서만 비로소 그 존재성이 생성된다는 니체의 비판이 담긴 비유인 것이다.

좌우간 이러한 비유 속에서 니체는, “젊은 프리드리히에 대한” 아버지의 반감은 “남자다운 남자들이 없었다는” “어떤 깊은 본능의 불안감”에 있다고 말한다(183).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무신론, 재기발랄한 프랑스인들의 향락적 경박함, 그 정신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 - 배후에 커다란 흡혈귀, 회의의 거미가 있는 것을” 본 것이다(184). 그러나 니체는 이런 반감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포착한다. “그 사이에 그의 아들 안에서는 좀더 위험하고 강인한 새로운 종류의 회의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184). 이 새로운 회의란, “과감한 남성성을 지닌 회의”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독일에 처음으로 진입했던” “전쟁과 정복을 위한 천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84).

‘남성성을 지닌 회의’는 염세주의적 회의와는 다르다. 염세적 회의는 그저 경멸할 뿐, 어느 것도 소유하거나 무너뜨리지도 않고 세우지도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그러나 새로운 종류의 회의는 “경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탈한다.”(184) “상대를 무너뜨리며 소유”하는 것이다(184).

“이것은 믿지 않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잃지도 않는다.”(184)

니체는 이를 “의심의 독일적인 형식”이라 부른다(184). 독일은 프랑스와 달리 자신의 사유를 끈기 있게 해나감으로써 “독일 정신의 새로운 개념”을 확립해나갔다(184). 여기서 니체는 새로운 독일 정신의 개념임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책 58절에서 니체는 독일인을 두고 ‘근면한 학자들’이라 평가하며, 다소 엄숙주의에 빠져 있어 경쾌한 리듬 속에서 사유를 해나가지는 못하지만 끈기있는 민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좌우간 니체는 “유럽을‘ 독단의 잠’에서 깨우게 된 독일 정신의 ‘남성성’”에 주목한다(185). 생각하면 니체는 여기서, “이 남성성이라는 개념으로 극복해야만 했던, 이전의 개념을 상기해보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185). * 바그너와의 관계


210. “비판가들은 철학자의 도구이다.”(187)

앞에서 언급된 ‘남성성을 지닌 회의’와, 이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독일 정신의 탄생은, 분명 미래 철학자들의 한 특징이기는 하지만 이는 속성일 뿐, “그들 자신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186)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실험의 인간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186). 우리는 니체가 미래의 철학자를 두고 ‘시도하는 자’, ‘수수께끼를 남기는 자’ 등으로 묘사한 구절들을 이미 많이 보았다. 이들은 의심하는 자들과, 믿는 자들 사이에 걸쳐서 자신의 ‘회의를 품은 믿음’, 그리고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회의’를 시험해보는 자들인 것이다. 이는 단순한 비판철학이 아닌, “훨씬 광대하고 위험한 의미에서의 실험”일 것이다(186).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정열 속에서 과감하고 고통스러운 시험을 계속하면서 민주주의적인 세기의 부드럽고 유약한 취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더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186)

니체는 독일의 비판가들(뒤에서도 언급되지만 대표적으로 칸트)과 미래의 철학자로서의 회의론자가 다음의 점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가치 척도의 확실성, 의식적으로 통일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 기지 있는 용기, 독립성과 자기 책임 능력 등”이 그것이다(186). 쉽게 말해 미래의 철학자는 잔인하고 “가혹”한 자들이다(186). 그는 “부정을 말하는 것과 해부하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고, “피를 토할 듯 아픔을 느끼는 경우에도” “정교하게 메스를 잡을 줄” 안다(186). 그러니까 파괴와 몰락을 두려워 않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려움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공을 들여 세워 놓은 믿음의 탑을 대담하게 폭파시킬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그에게 진리란 체계적으로 잘 건축된 탑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리란 자신의 감정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무엇이 아니다. 혹자는 “어떻게 그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겠는가?”라면서 자신에게 감동을 준 작품과 사상을 진리로 맹신한다(186). 그러나 미래의 철학자는 이에 대해, 즉 “모든 열광적인 것, 이상주의적인 것, 여성적인 것, 암수동체적인 것에 미소뿐만 아니라 진정한 구토를” 느낄 뿐이다(187). 물론 미래의 철학자는 “비판적인 훈육과 정신의 문제에서 정확함과 엄격에 이르게 하는 습관을 자기 스스로에게”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독일적이다(여기에 ‘남성적’인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187). 그러나 그는 당대 독일에서 유행했던 철학처럼 비판가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철학에 가하는 적지 않은 모욕으로 생각한다.”(187) 왜냐하면 우리가 읽었던 것처럼, 니체에게 철학이란 보다 엄밀한 진리의 탑쌓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탑을 세우고 또 그것을 부수는 섬세한 손의 활동과 거기에 깃드는 우리의 의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판가들은 철학자의 도구이다.”(187) 정신의 비판적 노동을 통해 우리는 정교한 탑을 쌓고, 바로 그 정교성만큼의 대담함으로 탑을 부숨으로써 위대한 철학자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211. 철학적 노동자와 학문하는 인간 / 그리고 철학자

“결국 철학적 노동자와 일반적으로 학문하는 인간을 철학자와 혼동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188)

니체가 말하고자 한 것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자는 것이다. 굳이 위계를 따지자면, 일반적으로 학문하는 인간이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학문하는 인간은 ‘철학’과는 무관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144번 구절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학문적인 성향’이란 ‘객관적’이라는 가치를 통해 모든 서로 다른 주관적 해석들을 말살함으로써 힘들 간의 활발한 관계맺음을 저해시키는, 그렇게 힘에의 의지의 자연스러운 창조와 몰락의 운동을 방해하는 성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철학적 노동자’는 누구인가? 그의 모범은 “칸트와 헤겔”이다(188). 철학적 노동자는 앞의 구절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사상의 ‘체계’와 ‘형식’에 몰두하는 이이다. 물론 철학자에게도 이러한 엄격성과 정확성의 덕목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엄격과 정확을 도구로 명령과 창조를 수행하며, 스스로 입법해낸다. 반면 철학적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은 “그 어떤 거대한 가치 평가의 사실을, 즉 지배적인 것이 되어 한동안 “진리”라고 불렸던 이전의 가치 정립과 가치 창조의 사실을 확정하고, 논리적인 것의 영역에서든지 정치적인 것(도덕적인 것)의 영역에서든지 예술적인 것의 영역에서든지, 이것을 일정한 형식에 밀어 넣어야만 한다.”(188) 흥미로운 점은 니체가 이들의 작업을 두고 “과거 전체를 극복하는 일”이라고 묘사한 데 있다(189). 왜냐하면 철학적 노동자들은 엄격하고도 확실하게 토대에서부터 하나씩 체계를 세워 올리는 자들이기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나 평가되었던 모든 것을 개관하고 숙고하고 이해하고 다루기 쉽게 하는 것”을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188).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체계에 갇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시간을 살아내기보다 시간에 대한 복수감 속에서 시간을 극복하려 한 대가로 벌을 받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마지막으로, 진정한 철학자들은 “명령하는 자이자 입법자이다.”(189)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189) 그들은 의무 속에 있지 않고, 의무 바깥에서 의무를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를 규정하며, 이때 모든 철학적 노동자와 과거를 극복한 모든 자의 준비 작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 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189) 그들은 인식하되, 기존의 것을 그저 반복할 뿐인 그러한 인식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식은 곧 창조와 같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리란 부동의 첨탑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과 창조의 과정 자체에 있는 무엇이다. “그들의 진리를 향한 의지는 - 힘에의 의지이다.”(189)

“오늘날 이와 같은 철학자들이 존재하는가? 이미 이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했던가? 이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해야만 하지 않을까? ......”(189)


212. “인간의 새로운 위대함”에 대하여(190).

명령하고 입법하는 미래의 철학자들은, ‘힘에의 의지’라는 그들 자신의 진리에의 의지를 갖는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란, 존재자 전체를 포괄하면서도 그것들을 특정 체계에 가두지 아니하고 그것들의 끊임없는 생성을 도모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힘의 상승을 이끄는, 그러한 존재의 양식이다. 니체는 212절에서 이 힘에의 의지라는 위대함의 양식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위대함이란 “새로운 위대함eine neue Grösse”(190)이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비단 과거에 이러저러하게 규정되었던 위대함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니체는 이전에 위대하다고 여겨졌던 것에 반발해 어떤 새로운 위대함을 규정짓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니체가 ‘새로운neue’이라는 단어에 강조 표시를 하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위대함이란 ‘늘 새로운 것을 향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드문 것, 낯선 것”을 향한 의지, 새로움에 대한 의지에 위대함이 깃든다는 것이다(191). 반대로 모든 안주함, 머무름, 익숙함, 무리지음, 반복에 대한 의지에서 위대함은 자취를 감춘다. 즉, 니체의 ‘위대함’은 ‘미래’라는 시간의 형식을 포섭하고 있다. 이런 니체의 ‘위대함’은 ‘힘에의 의지’라는, 의지의 근본형태로서의 진리체계로부터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지함wollen’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 우리는 바로 늘 여기,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에서 의지한다. 그리하여 니체에게 있어 위대함이란, 언제나 미래를 향하여 있는 현재이다. 그런데 ‘현재’란 사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지금을 ‘지금’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이미 과거의 것으로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위대함이 깃드는 힘에의 의지란 다시 말해서, 과거의 것으로 사라져가는 현재를 붙잡아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내고자 하는 의지, 즉 흐르는 시간 자체를 긍정함으로써 인간이 ‘죽은 과거’라는 지하로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생성하고 상승하도록 하는 의지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니체는, 진정한 미래의 철학자가 어떠한 시간 속에 있는지부터 언급한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필연적으로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는 언제나 그 자신이 사는 오늘과 모순된 상태에 있어왔고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나는 더욱 생각하게 된다. 그의 적은 언제나 오늘의 이상이었다.”(189)

창조하고자 하는 철학자는, ‘필연적으로’ 내일과 모레, 즉 미래를 상상해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오늘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조란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그는 규정된 지금, 즉 ‘오늘’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자의 위대한, 그러나 동시에 혹독한 과제이다(189). 철학자란 “시대의 미덕의 가슴에 해부의 메스를 댐으로써”, 그렇게 스스로 “시대의 나쁜 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189).

그가 반대하는 ‘오늘’에는 “위선과 안일, 방임, 자포자기” 따위가 깃들어 있다(190). 거기에는 ‘진리’라는 이름표로 포장된 “많은 허위가 숨어 있”다(190). 진리로 포장된 허구적 체계는, 우리에게 편안함을 제안하면서 현대의 이념에 스스로를 가둘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철학자, 미래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은 편협한 ‘오늘’에 대항하여 위대함이라는 개념을 “그의 광범위함과 다양성”에서 찾을 것을 제안한다(190). 여기서 ‘광범위함’과 ‘다양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에 한계가 없다는, 진리의 무제약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의 위대한 양식에 대해서 “생성하는 것 전체의 무조건적인 항존화”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이나 조건 따위는 없다는 것으로, “위대한 양식에서 초인은 자신의 유일무이한 규정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힘에의 의지라는 양식에서 ‘규정성’이란 오직 초인인 그 자신에게 있는데, 이때의 초인이란 ‘위버-멘쉬über-mensch’, 즉 ‘넘어서는-인간’으로 그 본질이 ‘넘어섬’에 있는 까닭에 힘에의 의지라는 양식에서 성립되는 ‘규정성’이란 규정을 이루는 내용을 따지자면 무제약적인 것,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위대함이란 오직 넘어서는 것에만 깃든다는 말이다.

“초인의 외관상의 불명확함은 힘의 본질을 특징짓는 모든 고정화에 대한 본질적인 반감(反感)이 힘에의 의지의 이러한 본래적인 주체를 관통하면서 파악되는 경우의 그 예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선악의 저편』으로 돌아와 보면, 우리는 니체가 ‘광범위함과 다양성’을 ‘다면적 전체성’이라는 말과 동치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을 한쪽 구석이나 ‘전문성’에 가두고 싶어하는 ‘현대적 이념’의 세계에 직면하여 철학자는 … 인간의 위대함을, ‘위대함’의 개념을 바로 그의 광범위함과 다양성에, 그의 다면적 전체성에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190, 강조는 발제자)

여기서 ‘다면적 전체성’이라 번역된 것의 원문은 ‘간자이트 임 피엘렌Ganzheit im Vielen’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다수 속 전체성’ 또는 ‘다수 속 총체성’이라 번역해볼 수도 있다. 생각하면 ‘전체’라는 개념은, 서양 형이상학에서 모든 존재자들 전체를 포괄하는 초월적인 ‘하나’를 찾고자 했던 시도 속에서 사유되었는데, 여기서 니체는 이러한 가치체계, 즉 ‘다수’는 존재자들에 대한 부분적 인식일 뿐이요 오직 세계의 있는 것들을 ‘하나’ 속에서 사유하고자 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러한 전통적 가치체계를 전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를 단지 ‘다면적 전체성’이라 표현하는 것은, ‘전체성’이 다양한 면을 지닌다는 말로 해석되므로 니체가 의도한 가치전도의 기획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니체는 친절하게도 이어서 우리에게 ‘광범위함과 다양성’ 또는 ‘다수 속 전체성’의 의미에 대해 직접 설명해준다.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개념에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것을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멀리 자신의 책임을 넓힐 수 있느냐”의 문제가 담겨 있다(190). 하나의 규범에, 하나의 믿음에 거주하지 않고 드물고 낯선 것으로 나아갈 때, 그 나아감 속에서 겪을 고난과 고독을 감당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로,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191). 그리고 앞에서 충분히 공부하였다시피, 이 나아감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니체의 위대함이란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위대함’이 아니라 ‘새로워짐의 위대함’이기에,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결의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끊임없이, 여러 번] 결의할 수 있는 능력이 ‘위대함’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되어야만”한다고 니체는 말한다(190).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 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의 주인, 의지가 넘쳐나는 자가 될 수 있는 자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하면서도 전체적이고 폭이 넓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는 이것이야말로 위대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191)


213. 육성되어야 하는 철학자

이런 철학자의 일, 낯선 것을 향한 대담한 전진, 자기 자신을 격리시키는 일, 선악의 저편에서 세상의 미덕과의 싸움 등은 결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92).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앎’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가 하는 일은,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 일이다(192). 이 ‘경험으로 앎’이란 학문적 인식이나 일반적 판단 이전의, 그러니까 인식과 판단의 원천을 가리킨다. 진정한 철학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스스로’ 육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개체의 자기를 힘에의 의지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도야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그는 철학자로 거듭날 수 있다. 철학자란 단순한 지식의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지식의 학습은 ‘아는 것’의 양을 늘릴 수는 있어도, 학습의 주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진정 “배운다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221) 때문에 철학자란, 그 어려움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의 몫이기도 하다(192). - 체험 : 믿음의 문제, 태도의 문제 // 인식보다 깊은 층위에 있는 문제..!

아울러 인식과 판단 이전에 경험의 문제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경험과 믿음을 가진 자들 사이에 해소할 수 없는 깊은 간극을 말해주기도 한다. 예컨대 사유를 무겁게, 그리고 느리게 받아들이는 학문하는 인간은 엄격하고 필연적인 태도와 “가벼운 것이나 신적인 것, 춤이나 들뜬 기분”을 상호 연관시키는 철학자의 사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192). 철학자가 아닌 학문적 인간들은 사유를 진지하고 중요하고 무겁게 받아들이는 식으로 “‘체험’ 해왔”기 때문이다(192). 그들은 모든 것을 필연성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불합리로 넘쳐나는 충동의 현실을 외면한다.

반대로 철학자에 가까운 ‘예술가들’은 보다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니체가 묘사하는 예술가의 ‘예민한 후각’이란, “필연성과 ‘의지의 자유’”가 하나가 될 때 “충만된 힘에 관한 그들의 감정이나 창조적 조정, 처리 형성의 감정이 절정에 달한다는 것”을 아는, 그러한 섬세함이다(192-3). 얼핏 보면 ‘의지의 자유’와 ‘필연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쪽의 것 어느 것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그런 섬세함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는 창조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공부했던 것처럼, 세계에 가면을 씌우고 화장을 통해 존재를 가리되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어떤 곳에서는 민낯을 허용하는, 믿음을 가지되 회의(懷疑)를 허용하는 세련됨을 아는 것이 철학자와 예술가에게는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한 철학자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철학자란 그 자신만의 노력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자리인가? 니체에 따르면, “모든 높은 세계에 이르기 위해 사람들은 그렇게 타고나야만 한다.”(193) 철학에 대한 특권은, “오직 자신의 출신 덕분이며 조상이나 혈통이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193) 심지어 니체는 “철학자의 덕은 모두 … 보호되고 유전되고 동화된 것임이 틀림없다”라고 까지 말한다(194). 이러한 말에 따르면, 철학자로 태어나는 인간과 철학적 노동자로 태어나는 인간과 학자로 태어나는 인간이 애초에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니체는 이와 함께,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 세계를 위해 육성되어야만 한다”라고도 말한다(193). 또 출신과 조상의 혈통을 강조한 이유로는, “철학자가 태어나기 위해 많은 세대가 미리 기초작업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부연한다(193). 아울러 철학자의 덕에 대해서 그것이 유전되는 것이면서도 이때의 유전이란, “하나하나 획득되고 보호”되어 온 것임을 추가로 설명한다(194).

언뜻 보면 철학자가 타고난다는 말과, 육성된다는 말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니체의 말을 음미해보면, 이 말들이 모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니체에게 인간이란 ‘개체’로 포섭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독립된 개체라기보다도, 힘에의 의지 자체이다. 이때 인간이 힘에의 의지 자체란 말은, 모든 인간 각각이 이미 무수히 많은 다른 인간들 사이에, 그 관계망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힘에의 의지로서의 인간은 서로 다른 인간들 간의 관계망이자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벌어지는 투쟁 자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망들 속에서의 투쟁과 마주침으로 인해, 힘의지는 상승하고 고양된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한 인간의 영혼’이란 인류 전체의 만남의 결과이기도 하다. 철학자의 탄생은,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의해 육성되는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무수한 관계들이 빚어내는 거대한 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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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선악의 저편> 6장 '우리 학자들'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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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선악의 저편> 203번 구절까지의 발제문 전체
qjwskan | 2022.03.04 | 추천 0 | 조회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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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선악의 저편> 1-190번 구절까지의 발제문
qjwskan | 2022.02.10 | 추천 0 | 조회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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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선악의 저편> 1~159번 구절 발제문 통합본
qjwskan | 2022.01.07 | 추천 0 | 조회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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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읽기 : <선악의 저편>, 매주 토요일 10:30~12:00 진행됩니다.
qjwskan | 2022.01.07 | 추천 3 | 조회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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