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발제문

작성자
qjwskan
작성일
2022-05-11 09:00
조회
988
제7장. 우리의 덕

제6장 ‘우리의 학자들’에서 니체가 학문과 학자라는 주제로 가치를 전도시켰다면, 제7장에서는 도덕을 중심으로 가치 전도를, 미래의 도덕을 기획한다. 여기서 니체는 양심, 태도, 사랑, 행복, 동정, 남성과 여성 등 보다 현실적인 가치들에 대해 기존의 편협한 가치관을 부수고 ‘자신의’ ‘새로운’ 도덕을 비유적으로 내비친다.

214. 우리의 덕이란? _ 우리의 덕

니체는 철학, 도덕, 믿음, 인식 등을 말할 때, 습관처럼 ‘자신의’를 붙인다. 굉장히 많은 사례들 중 몇 가지를 들자면 다음이 있다.

“자신의 미덕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 가장 낫다.”(122) /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122) /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게 되면, 곧 그것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다.”(128) / “시인은 자신의 체험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른다 : 그들은 그것을 악용한다.”(128) / 그는 기품 있는 절제로 자신의 덕을 축하하는 것을 좋아한다.”(180) /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 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의 주인, 의지가 넘쳐나는 자가 될 수 있는 자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191)

이러한 언어적 습관 혹은 의도적 언어사용은 아마 니체가 서문에서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으로 “관점주의적인 것”을 제시했던 것처럼, 그의 관점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10). 그런데 왜 여기서 니체는 ‘자신의 덕’이 아닌 ‘우리의 덕Unsere Tugenden’에 대해 이야기할까? 자신의 덕과 이상을 키우는데 ‘우리’와 ‘우리의 선조’, ‘우리의 조부’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덕을 찾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라고 함께 물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197) 대답의 열쇠는 우리가 이미 공부했던 213번 구절에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개체적 자기로 있으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다른 나’들과도 더불어 있다. 그리고 단순히 함께 있는 것만 아니라, ‘얽혀’있다. 힘에의 의지라는 하나의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우리이기에, 나의 의지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아가 나의 의지는 이미 무수한 의지들의 총합이자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나’라는 관념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였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생각한다 Es denkt.”(35) 내가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상은 ‘그 사상’이 원할 때 오는 것이지, ‘내’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35)

‘우리의 덕’이니 ‘자신의 덕’이니 하는 말도 사실은 하나의 사태를 다른 측면에서 비춘 말이다. 결국 ‘그 덕’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때 ‘그 덕’의 형성에 기여한 관계망을 중심으로 사유할 때, ‘그 덕’은 ‘우리의 덕’으로 불린다. 한편 ‘그 덕’이 개체의 의지를 통해 현실화됨을 강조할 때, ‘그 덕’은 ‘자신의 덕’으로 불린다.

니체가 생각하는 미래의 덕의 주체, 즉 “모레의 유럽인”이자 “20세기의 첫 아이”인 ‘우리’는 “위험한 호기심과 다양성과 변장의 기술과 정신과 감각에서 무르익은, 말하자면 감미로움이 첨가된 잔인함”을 지닐 것이다(197). 그리고 이런 ‘우리’의 덕은, “은밀하고 진실한 경향이나 강렬한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 덕”일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197). 그런데 이러한 덕은 오직 “미궁 속에서”, 잃어버린 길 위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197). 미리 정해진 길은 위험하지도, 은밀하지도, 또 우리 자신에게 잔인하지도 않다. 니체는 “자기 자신의 덕을 찾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에서 ‘찾는’을 강조하고, 또 “이것은 거의 이미 자기 자신의 덕을 믿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에서도 ‘믿고 있음’을 강조한다(197). 이는 오직 길 아닌 곳에서만 우리가 길을 창조해내고 만들어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미리 정해진 길, 주어진 덕이 아니라 잃어버린 장소 위에서 자신의 덕을 ‘찾는 일’은, 오랫동안 자신이 간직해왔던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믿음에 대해 니체는 “이것은 근본적으로 전에 ‘훌륭한 양심’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197). 니체가 이전에 ‘훌륭한 양심’이라 불렀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4번 구절에 대한 발제문에서 우리는 이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니체에게 진정한 양심이란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죄책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에서 주권적 인간의 양심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권에 대한 자부심, 이 진기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러한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깊디깊은 심연에까지 내려가서 본능, 지배적인 본능”이야말로 주권적 인간의 양심이라 말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했던 “모든 순수함과 훌륭한 중립성”(50)으로서의 양심인 것이다. 그러니까 양심은 모든 주관적 해석들, 관점들에 대해서 순수하게 중립적이다. 이러한 중립적 태도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심연이 발산하는 힘에의 의지에 따라 그것을 창조해낼 수도, 또 몰락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우리 발제문 4-5쪽 참조)

그리고 니체는 이 믿음이 “우리의 조부가 자신의 머리 뒤에 그리고 때때로 그들의 오성 뒤에 길게 늘어뜨린 저 존경할 만한 개념의 땋은머리가 아닌가?”하고 묻는다(197). 우리(미래의 철학자인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지가 힘에의 의지의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의 발산이며 또 다른 지배적인 해석 또한 그것의 발현이기에 모든 해석들이 동등하다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훌륭한 양심을 지니고, 미리 기초 작업한 선조들의 사상들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훌륭한 양심을 가진 우리 최후의 유럽인들 : 우리도 여전히 그들의 땋은 머리를 몸에 지니고 있다.”(198)

215. 태양들, 도덕들 _ 우리의 태양

이성은 빛으로 묘사되고는 했다. 그리고 모든 빛의 기원인 태양은 단 하나의 진리에 대한 비유였다. 하지만 니체는, “어떤 경우에는 각기 다른 빛깔의 태양들이 때로는 붉은 빛으로 때로는 초록의 빛으로”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198). 그리고 이러한 다채로운 빛이 가능한 까닭은, 결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역학” 때문이다(198). 이 복잡성과 다양성 덕분에, 도덕 또한 ‘서로 다른’ 도덕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행위, 의지에는 ‘다채로운’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216. 자신의 적을 사랑한다? _ 우리의 사랑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자 한다. 사랑하는 너와의 사이-공간, 틈, 거리는 허용될 수 없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오래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에로스는 반쪽짜리 인간이 진정한 ‘하나’가 되기 위한 본질적 열망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 즉 같은 것이자 같은 편이 되는 것이며 이를 방해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반발과 같다. 그런데 니체는 다르게 말한다. 그는,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때, 특히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경멸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라고 말한다(198). 이 문장에 대해 우리는 앞에서 종종 언급했었다. 그때는, 어떤 새로운 이상을 상상하고 형성하되 ‘비개인적인 경멸감’을 지녀야 우리는 형성했던 이상을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뜨리고 이상을 다시-창조해낼 수 있다는 맥락에서 위 문장을 인용했었다(발제문 27쪽, 30쪽, 38쪽, 48쪽 참조).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멸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경멸할 줄 모르는 사랑은, 조금 부드럽게 말하자면 거리를 둘 줄 모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만남이며, 이질적인 타자와의 만남으로 남아야 한다. 우리는 타자를 결코 온전히 그 자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인식의 겸손 아래 사랑도 지속될 수 있다. 니체가 <아침놀>에서도 말했듯, 사랑은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파악하고 내 속에 거두어들이되, 타자는 결코 소화되지 않는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대가란 바로 사랑하는 너와의 영원한 거리이다. 그러나 마치 믿음에 회의를 허용하는 것처럼, 여기에는 대담성과 용기가 요구된다. 때문에 사랑은 소수만이 할 수 있다.

아무튼 다시 돌아오면, 니체는 “자신의 적을 사랑한다?”고 묻는다(198). 이러한 물음에는, 무엇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적으로 대하라는 니체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럴 때 “참으로 고귀한 일들이, 더욱 숭고한 일들이 일어난다”(198).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착함이라는 미명 아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경멸을, 그를 위한 경멸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만 행하고 기껏해야 “선의의 부끄러움이나 감춤으로”만 행하는 것이다(199). 이는 니체의 “취향에 거슬린다.”(199)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거슬림’도 하나의 중요한 ‘진보’로 보았다.

217. 도덕의 광신도들 _ 우리가 경계하는 이

도덕적 요령,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덕적 안목으로 명성을 얻는 데 중대성을 두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그 시대의 특정 도덕만을 진리로 섬기는 이들일 것이다. 이들은 결코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반성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돌이켜 자신을 생각하기는 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그 시대의 도덕에 비추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들 자신이 믿고 있는, 바로 ‘그 시대의 도덕’ 자체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어떤 도덕적 체계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이들은 “한 번이라도 우리 앞에서 (또는 더욱이 우리에게) 잘못된 일을 하면 우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199)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믿는 도덕에 대한 광신도들이기에, 그것에 반하는 일을 스스로 저질러도 그 일의 탓을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도덕’이 문제시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도덕’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아닌 남에게 그것의 책임을 지운다.

반대로, “망각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이 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짓도 ‘끝내버리기’ 때문이다.”(199) 끝내버리기 때문에, 망각하는 인간들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들이 새로 시작하는 짓이 또다른 어리석음 일지라도,

218. 정교한 본능 _ 우리의 본능

니체는 당시 유럽에서, 그나마 프랑스 작가들이 부르주아적 도덕 이면에 숨겨진 삶의 충동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들 또한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을 여러 가지로 신랄하게 비꼬”기보다는 은밀하게 드러냈지만 말이다(200). 그 예로 니체는 플로베르Flaubert를 든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유명한 소설로는 『마담 보바리』(1857)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의사였던 샤를 보바리가 시골에 살던 미모의 엠마와 결혼하게 되는데, 엠마가 연애 때와 다르게 보바리에 권태를 느껴 다른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빚까지 지면서 재산을 압류당하면서 결국 엠마와 보바리 모두 죽게 되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보바리와 엠마가 만나는 부분은 낭만적으로 서술되다가, 이후 지극히 사실주의적이고 비극적으로 서술되는 작품으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이 소설 때문에 풍기문란과 종교 모독죄로 기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니체는 플로베르의 은밀한 고발도 지루하다고 평가하면서, 보다 정교한 본능에 대해 언급한다. 그 정교한 본능이란 바로 “모든 선량하고 뚱뚱하며 정직하고 평범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좀더 높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사명을 대할 때의 무의식적인 교활함”이다(200). 그러니까 평범한 정신이 위대한 정신을 마주할 때 취하는 간교한 태도, 모든 “‘예외’와 싸우는 ‘규범’의 철학”, 이는 “천 배나 더 정교”하게 이루어진다(200). 앞에서 말한 『마담 보바리』를 예를 들면, 불륜을 저지르고 재산까지 압류당한 엠마의 삶에 대해 플로베르는 샤를 보바리라는 선하고 규범적인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또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정교함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선보인 이러한 정교함은 지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본능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교함이 본능에 의한 것이라면, “‘본능’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종류의 지성 가운데 가장 지성적인 것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 아닌가?(200)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의 심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자, 특히 스스로 규범적인 인간이면서 본능의 인간에 대해 은밀하게 말하려고 했던 프랑스 작가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부할 때 보다 섬세하게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니체는 제안한다. 그러니까 플로베르는 당시 신문에 실렸던 실제 사건(유부녀가 불륜 중 파산으로 자살)을 보고서 『마담 보바리』를 집필했는데, 그보다도 신문에 실렸던 유부녀의 불륜과 자살이라는 사건을 바라보면서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 자신에 대해 썼다면 몇 배나 더 정교한 인간에 대한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219. 엄격함과 관대함 사이 _ 우리의 높은 정신성

특정 도덕에 사로잡힌 편협한 사람은, 복수심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판결을 내린다.”(201) 니체는 이런 도덕적 인간에 대해 자연의 재능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 깎아내린다. 이들이 고상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심에서 비롯된 정신뿐이다. 편협한 인간, 도덕적 인간은 도덕적 잣대를 통해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을 평가함으로써 마치 그러한 위대한 인간과 자신이 동등한 것처럼 느끼고 흡족해 한다. 그들 도덕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필요한 믿음이란, 오직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고귀한 목적에 봉사하는 믿음뿐이다(201). 그들은 이런 고귀한 믿음 뒤에서 자신의 위선과 복수심을 감춘다.

고귀한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심을 가진 평범한 인간에게 “높은 정신성이란 오로지 도덕적일 뿐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직함이나 존경받을 만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들을 미친 듯 날뛰게 만들 것이다”(201). 때문에 니체는 보다 은밀하고 섬세하게, 평범한 인간들의 환심을 사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명제를 제안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말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한다 : 즉 높은 정신성 자체는 오로지 도덕적인 특성의 마지막 잘못된 산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높은 정신성은 모든 상태 하나하나가 오랜 훈육과 연습을 통해 아마 여러 세대를 거치는 전체적인 연속 과정에서 획득된 후에, ‘단지 도덕적일 뿐’인 인간이라고 주장된 저 모든 상태의 종합이다. 높은 정신성은 정의와 저 관대한 엄격함이 정신화된 것이며, 이 엄격함은 인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서도 세계의 위계질서를 올바로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201)

이에 따르면 첫째, ‘높은 정신성 자체는 오로지 도덕적인 특성의 마지막 잘못된 산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 믿음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믿음이 끝내 단념시키지 못한 마지막 의심, 바로 그것으로 높은 정신성은 이루어진다.

둘째, ‘이 높은 정신성은 모든 상태 하나하나가 오랜 훈육과 연습을 통해, ‘단지 도덕적일 뿐’인 인간이라고 주장된 저모든 상태의 종합이다.’
→ 지금의 ‘도덕적인 것’도 결국 수많은 높은 정신성의 자기극복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지금의 ‘도덕적인 것’ 역시 오랜 훈육과 연습에 불과하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평범한 인간에게 니체는 이를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셋째, ‘높은 정신성은 저 관대한 엄격함이 정신화된 것이며, 이 엄격함은 인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서도 세계의 위계질서를 올바로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고 있다.’
→ 여기서 ‘관대한 엄격함’에서 ‘관대함’이라는 표현을, 평범한 인간은 도덕적인 관대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니체의 의도는 이 세계가 도덕적 질서로 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20. “결국 진리는 여성이다 : 우리는 진리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203)

당시 유럽은 “‘무관심한 사람’이 대중의 칭찬을 받게” 된 때, 냉소와 허무가 지배하던 때였다(202).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태도가 강조되던 때지만, 니체는 오히려 “대중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그리고 “일반인이 철저하고도 깊이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목해본다(202). 왜냐하면 냉소와 허무 역시 또 하나의 표상과 숭배의 대상이며, 어떤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섬세한 취향을 가진 자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진다(202). 냉소주의의 평범한 인간이 어떤 일에 몰두할 때, 그는 스스로 그 일을 “무관심한 것”이라 부르면서 어떻게 ‘무관심하게’ 행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202).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쇼펜하우어와 같은 허무주의자에게서 그 자체로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피안의 일로 여겨진다.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태도에 대해 “그들이 더 높은 본성을 경험으로 알지 못했던 탓은 아닐까?”라고 되묻는다(202). 그러면서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진정으로 공정한 진리를 제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무관심한’ 행위도 어떤 조건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 있고 관심을 끄는 행위”임을 자각할 것을 제안한다(202). 즉 ‘객관적인’, ‘중립적인’, ‘무사심의’ 태도란 허구이며, 모든 것은 주관적인 관심과 흥미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개념도 그 예외는 아니다. 많은 이들은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기에, 여기에는 이기적인 흥미나 관심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실제로 희생을 치른 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 대신 어떤 것을 … 바라고 얻었는지를 알고 있”다고 반박한다(202).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희생한 자는, 또 다른 그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기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추구했던 그의 이상은,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진리로 포장된 것이자 화장술에 따라 아름답게 꾸며진 것이자 주관적인 믿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결국 진리는 여성이다”라고 말한다(203). 어떤 이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시대였다면, 아마 니체는 ‘진리는 남성적인 것에 의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으려는 회의주의 시대에서 니체는 결국 모든 진리는 전달될 수 있는 언어로, 포장된 이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말해야 했다. 그리하여 “결국 진리는 여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진리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203).

221. 한 사람에게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다.

고루한 도덕주의자는 사심이 없어 보이지만, 니체가 보기에 그는 실제로 사심이 없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한 자이기 때문이다(203). 그러니까 실제로의 문제는 오직 “그가 어떤 사람이며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203). 니체가 볼 때 어떤 사람, 즉 “명령하도록 정해져 있고 만들어진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부정이나 겸손한 후퇴는 덕이 아니라, 오히려 덕을 낭비하는 것”이다(203). 모든 사람에게 이타적인 태도를 강요하는 것은 각각의 사람마다의 취향과 개성에 죄를 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니체는 자신이 말하는 양심, 객관적이라는 허울로 우리에게 강요하는 도덕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양심을 도구삼아 박애(博愛)라는 도덕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옳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이 부도덕함을 깨우칠 것을 제안한다(203).

222. 동정과 자기멸시

‘자신의’ 도덕을 찾지 못하고, 타인의 도덕을 강요받는 이들은 결국 자기멸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것이 아니고 또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무엇임에도, 이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하고자 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좌절하고 자기분열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정’이 그렇다. 동정이라는 강력한 도덕적 규범은, 그것을 말하는 설교자 자신마저도 멸시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에 반응하고 또 응답해야 한다는 도덕적 이상과 달리, 나의 몸은 그렇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 동정을 말해야 한다는 현실 속에서 그는 점점 자기를 멸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괴로움을 겪는 이들이 복수심 속에서 타인들도 자기와 같이 괴로워할 것을 바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동정의 규범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악으로 매도한다.

223. 맞는 옷

이념은 때로 옷으로 종종 비유되고는 한다. 옷은 부끄러운 알몸을 가리는 수단이자, 내가 결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문제는 “어떤 의상도 몸에 잘 맞지 않다는 것”에 있다(205). 다양한 새로운 사상들이 일어나고 졌던 19세기의 유럽은 이를 잘 보여준 시기였다. 이때에는 어떤 한 옷을 성급하게 이상화하기도, 때로는 “우리에게는 맞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기도 했다(205). 니체는 당대의 시대를 “과거나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소재가 되풀이해서 시도되고 갈아 입혀지고 벗겨지고 포장되고 무엇보다도 연구”되었던 시대로 평가한다(205). 그러면서 니체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시대의 사상과 이념이 “발명의 영역”이라는 점이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205). 옷은 입어야할 것이기도 하지만, 벗을 것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갈아입고 벗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또 거듭날 수 있다.

224. 역사적 감각

- 역사적 감각 : “한 민족, 한 사회, 한 인간이 그것에 따라 살아온 가치 평가의 순위를 재빨리 알아맞히는 능력이나 이들 가치평가의 관계나 가치의 권위가 현재 작용하는 힘들의 권위에 대해 갖는 관계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 본능’”(206)

니체는 ‘역사적 감각’을 가치평가들의 위계 또는 가치평가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서술한다. 첫째로 여기서 우리는, ‘가치들의 위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아니라 ‘가치평가들의 위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말해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치들의 위계’는 니체가 비판했던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도, 염세주의적 세계관 속에서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여기서 ‘가치평가들의 위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가치평가들의 위계’를 따지는 곳에서는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진리로 설정해야하는가?’ 또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리를 찾아야 위대한가?’가 물어진다. 권위가 작동하고 있는 어떤 ‘가치’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점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작용하는 힘들’이다. 그런데 이 ‘힘들’이란 어떤 실체적인 것이라기보다 복합적으로 있는, 관계들 속에 있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역사적 감각’은, “가치평가의 관계나 가치의 권위가 현재 작용하는 힘들의 권위에 대해 갖는 관계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 본능”(206)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가치를 평가하는 다수의 도덕들 간의 위계를 따지면서 동시에 그러한 도덕들이 힘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역사적 감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니체가 동시적이라 말했던 까닭은, 도덕들의 가치평가가 힘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도덕들 간의 위계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가치평가가 힘들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힘들을 고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가치평가의 위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감각’은 편견 없이(우리가 공부했던 용어를 쓰자면 ‘훌륭한 중립적인 양심’에 따라) 다양한 도덕들을 바라보기에,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감각과 본능, 모든 것에 대한 취미와 미각을 의미”하기도 한다(206).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것에 대한 호기심은, 특정 도덕에 사로잡혀 있는 자의 눈으로 볼 때 “고귀하지 않은 감각”으로 비춰진다(206). 니체는 ‘역사적 감각’을 결여한, 특정 도덕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들 미각의 단호한 네와 아니오, 그들의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구토, 그들의 모든 이질적인 것에 관한 주저함, 활발한 호기심조차도 두려워하는 그들, 그리고 낯선 것에 대한 경탄 또는 그 자신의 조건에 대한 불만족과 새로운 욕망을 맹세하는 모든 성공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 모든 이러한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거나 노획물이 될 수 없는 것이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해도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는 바로 역사적 감각…은 없을 것이다.”(재번역, 207)

반대로 역사적 감각을 지닌 “우리는-바로 이러한 거친 다채로움을, 가장 섬세한 것과 조야한 것, 예술적인 것의 혼합을 은밀히 신뢰하고 받아들인다.”(207) ‘역사적 감각’을 지닌 자들은, 힘들의 고양을 기준으로 가치평가의 방식들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조야하다고 불리든 거칠다고 불리든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더 이상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더 이상 힘의 고양을 자극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완성된 것, 틈이 없는 것, 이미 고귀하다고 불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우리 ‘역사적 감각’의 인간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 사랑하기 어려운 것, … 그것은 바로 모든 문화와 예술 속의 완벽한 것과 최후에 성숙된 것이며, 작품과 인간에게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며 … 완성된 모든 사물이 나타내는 황금빛과 차가움이다.”(208)

225. ‘우리의’ 동정 our sympathy

니체는 쾌락과 고통에 따라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반대했다. 앞선 절을 생각하면, 그러한 방식의 가치평가가 아마도 우리의 힘을 고양시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쾌락과 고통, 즉 수반되는 상태나 부차적인 것에 따라 사물의 가치를 재는 이러한 모든 사유 방식은 표면적인 사유 방식이자 단순함이며, 스스로의 조형하는 힘이나 예술가적 양심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조소와 동정 없이는 이것들을 내려다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209)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209) 그러나 미래의 인간, 하나의 태양이 아닌 다수의 태양들을 믿는 인간, 사랑할 때 하나가 되고자 하기보다 상대를 적대시할 줄 아는 인간, ‘역사적 감각’을 지닌 인간은 반대로 “고통을 지금까지 있었던 것보다도 오히려 더 높고 힘든 것으로 갖고자” 한다(209). 니체의 ‘우리’에게 안락함이란 곧 ‘종말’과 같다(210). 왜냐하면 우리는 안락함 속에서 어떠한 영혼의 힘도 고양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의 모든 향상이 곧 고통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져왔음을 상기시킨다(210). 인간이 하나의 창조자라면, 그에게는 동시에 피조물도 있다. 이 말은, 인간 안에 대상적인 것, 사물적인 것, 죽은 것, 무의미한 것, 그저 소재인 것이 있음과 함께 동시에 “창조자, 형성자, 해머의 강인함, 관찰자의 신성함”도 있다는 것이다(210). 그런데 서로 대립하는 피조물적인 것과 창조자적인 것이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210).

니체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정’ 역시 “인간 안에 있는 피조물이라고 말한다(210). 그리고 이것이 ”부서지고 단련되고 찢기고 불태워지고 달구어지고 정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10). 그러면서 이러한 과정을 ‘고통’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니체에게 고통이란,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이 기존의 창조된 것에서 벗어날 때 발생하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니체에게 고통이란 장려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렇기에 니체가 행하는 동정이란, 기존의 ‘동정’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안락함에 사는 이들을 향해 어떻게 그렇게 작은 인간이 되었는지 바라보는 동정인 것이다.

226. 비도덕주의자인 우리!

니체가 삶,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이중적이다. 한쪽에서 삶이란 두렵고 낯선 무엇이다. 다른 한쪽에서 삶은 일상적이고 친근하다. 두렵고 낯선 무엇이라는 의미에서, 삶과 세계에는 ‘명령의 정서’가 대응한다. 한편 일상적이고 친근한 의미에서의 삶과 세계에는, ‘복종의 정서’가 대응한다. 그런데 문제는 삶이 두렵기만 한 것도, 또 친근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있다. 삶이란, 두려우면서 동시에 친근한 것이다. 이점에서 명령이나 복종도, 전적인 명령과 전적인 복종이 아니라 “미묘한 명령과 미묘한 복종”인 것이다(211). 니체는 이러한 세계를 “‘거의’라고 하는 세계enie welt des 'beinahe'”라고 묘사한다(211).

미래의 ‘우리’를 비도덕자라 부르는 니체지만, 이런 니체 역시 우리가 ‘의무의 인간’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211). “우리는 의무라는 엄격한 그물과 셔츠에 갇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211) 그러나 우리는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칼’을 쥐고서 춤추는 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갇혀 있지만(즉 어떤 도덕의 체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러한 상황 아래 이를 갈며 우리 운명의 모든 비밀스러운 가혹함에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도 대단한 사실이다.”(211) 비도덕주의자로서의 우리는, 의무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211)

227. 우리의 성실함

“모든 미덕은 어리석음이 되고, 모든 어리석음은 미덕이 되는 경향이 있다.”(212) 우리는 이제 니체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실함이라는 미덕도 쉽게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는데, 우리의 존재가 하나의 믿음에 갇혀버릴 때 ‘성실’은 ‘권태’가 되고 더 나아가 ‘악마성’까지 된다(212-3). 만약 참된 의미의 신앙이 회의를 허용하는 신앙, 신앙에 대한 신앙이라면, 단 하나의 신앙에만 봉사하는 성실함은 ‘신앙에 대한 신앙’에 반발하는 악마성일 것이다.

니체는 성실함을 “모든 악의와 사랑으로” 행하자고 제안한다(211). 니체가 악의와 사랑이라는 이중적 마음으로 성실함을 수행하자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성실함을 ‘같은 것의 반복’이라 부를 수 있다면, ‘성실함’이란 ‘어떤 덕’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저녁 노을처럼” 몰락하는 운명일지라도 말이다(211). 하지만 ‘미래의 우리’는 오직 완성된 것의 반복을 위해 성실함의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성실하고자 하는 이유는, 완성함과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리고자 함에 있다. 그리하여 니체는, “그리고 이 덕을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오직 악마성으로 가지고 있던 것만을 보내도록 하자”고 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악마를 데리고 우리의 ‘신’을 도우러 가자!”라고 말하는 것이다(212). 다시 말해, 모든 ‘도덕’이 완성과 함께 동시에 몰락할 운명임을 잘 알고 있는 ‘미래의 우리’에게는 어떤 도덕에 대한 성실성이란 그러한 도덕을 몰락시키고자 하는 성실성과도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우리’에게는 오직 그러한 태도야말로 신을 위한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228. 도덕과 도덕 사이의 위계질서

특정 도덕에 갇힌 자의 성실성, 그의 권태에서 니체는 이제까지의 모든 도덕철학을 지루한 것으로 파악한다(213). 니체는 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도덕을 숙고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말한다(213). 왜냐하면 ‘도덕에 대한 숙고’는 결국 도덕에 대한 복종과 종속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도덕은 ‘만인을 위한 단 하나의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도덕에 대한 숙고는 도덕을 너무나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니체에게 “만인을 위해 하나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높은 인간을 침해하는 것”과도 같다(215).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는 것처럼, “도덕과 도덕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있”기에, ‘하나의 도덕’은 필연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을 폭압하기 마련이다(215). 미래의 우리에게 도덕이란, 결국 언젠가는 그 생명을 다할 무엇이다. 그렇기에 도덕은 완성되면서 동시에 몰락할 무엇이며, 늘 다시-세워져야 할 무엇인 것이다(213).

229. 우리의 잔인성

‘잔인함’이란 무엇인가? 기존 도덕은, “잔인성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 말한다(217). 이러한 관점은 “‘사납고 잔인한 동물’에 대한 공포”를 야기했고(215), 나아가 고통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는 데서 고통이 발생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고통을 긍정하고 장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잔인성’이라는 말에 기입된 편견을 전도시킨다.

“잔인성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어리석은 심리학을 추방해야만 한다 : 자기 자신의 고통,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것에도 풍부한, 넘칠 정도의 풍부한 즐거움이 있다.”(217)

잔인성이란 사실 “고통스러운 쾌락을 만드는 것”으로서, ‘보다 높은 문화’라는 것은 바로 이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한 데 바탕을” 둔다(216).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도 이러한 잔인함으로 인한 숭고함을 찾는다. 결코 투명하게 인식될 수 없는 몸과 운명의 주체인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잔인함을, 그 즐거운 자기고통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216)

나아가 이런 잔인성은 사실 우리에게 이미 가까이 와 있는 무엇이다. 예컨대 기독교인이 행하는 자기부정의 도덕에도, 은밀한 쾌락이 숨어 있으며, 인식하는 학자도 “가끔은 마음에서 원하는 소망에 거슬리면서까지 인식하는 것을 스스로의 정신에 강요”하는데, 이러한 “정신의 근본의지에 대한 폭력”과 “고통을 주고자 함”에도 “잔인성이 포함되어 있”다(217).

230. 정신의 근본의지

니체에게 ‘정신’이란 이미 그 자체로 ‘명령적인 어떤 것’이었다(217). “정신의 근본의지”라는 니체의 말에는(217), 모든 정신이 근본적으로 의지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지적인 정신이 작동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여기에도 두 가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원리가 혼합되어 있다. 우선 정신은,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힘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218). 정신은 낯선 것을 자신에게 친숙한 것으로 해석해내고, 꾸며내고, 덧씌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순화시키거나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강한 경향”을 가진다(218). 어떤 의미에서 정신은 세계를 “제멋대로” “왜곡”한다(218). 그런데 니체는, 바로 이러한 왜곡을 통해서 우리가 힘의 성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정신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고 새로운 사물들을 낡은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데 - 즉 성장시키는데 있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성장의 느낌, 힘이 커졌다는 느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218)

니체에 의하면, 힘이 커졌다는 느낌, 성장의 느낌은 새로운 ‘경험’이 정신의 의도에 따라 동화될 때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어떤 낯선 것을 마주한 정신이 그것을 자신에게 익숙한 무엇으로 동화시킬 때, 성장의 느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익숙하고 친숙한 체계에 머물기보다 낯설고 새로운 것, 두렵고 공포가 가득한 곳으로 나아가라고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는가? 동시에 익숙하고 친숙한 것 속에 머무르는 정신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정신이 낯선 것을 낡은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서 힘의 고양이 발생한다는 니체의 말은 자기-모순적이지 않은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니체가 이어서 말하는 “상반되는 듯한 정신의 충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218).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는 정신의 의도와 상반된다는 또 다른 충동이란, “알고자 하지 않거나 임의로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스스로의 창문을 닫아버리며 이러저러한 사물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충동이다(218). 이러한 정신의 또 다른 충동은 낯선 것 앞에서 “일종의 방어 상태”를 취하는 것과 같다(218).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방어적 태도는, 니체에 따르면, “그 정신의 동화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218). 다시 말해, 낯선 것에 대한 소화력이 낮은 정신일수록 그는 새로운 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하게 되는 것이다(218).

이처럼 니체는 정신의 의도와 충동에 대해 묘사하는데, 이때 정신의 충동은 ‘겉보기에 상반되는 듯하지만’ 실상에서는 힘의 고양을 추구하는 정신의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218). 이것의 의미를 서술하기에 앞서, 니체가 구분한 정신의 ‘의지’와 (그것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정신의 ‘충동’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 앞의 것은 정신이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 그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고자 하는, 정신의 의지이다. 그리고 뒤의 것은 동일한 사태 속에서 정신이 취하는 방어적 태도인데, 즉 정신이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 (그것을 동화하는 힘의 부족 때문에) 그것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자 하는 충동이다. 그런데 정신의 충동도 결국에는 정신의 의지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그 둘은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정신’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정신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느냐, 혹은 충동을 발휘하느냐를 결정짓는 조건은, 바로 ‘힘의 정도’이다. 어떤 새로운 것을 해석해내기에 힘이 턱없이 부족할 때, 우리의 정신은 방어적 충동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것을 해석해내고자 하는 의지가 발휘될 때는 동화하는 힘이 그만큼 있는 것이다.

정신의 의지와 충동을 이분법적으로만 구분하지 않고, 보다 섬세한 감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니체가 말하고자 한 바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우선 정신에 대하여 중립적으로, 즉 어떤 긍정도 어떤 부정도 취하지 않는 태도로 보자면 정신의 본질은 해석하는 것, 포착하는 것, 동화시키는 것에 있다. 니체가 제2장 ‘자유정신’의 장 처음에서 “오,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인간은 얼마나 기묘한 단순화와 위조 속에서 살고 있는가!”라고 외치고 “앎(知)에의 의지는 더욱 폭력적인 의지를, 즉 무지, 몽매, 허위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해서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외쳤던 것도 이러한 정신의 본질적 행위에 기대어 있다(49).

그렇다면 모든 낯선 것을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신은, 어떻게 하면 니체가 말하는 힘의 고양을 추구하는 미래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우리가 대답할 때, 우리는 우리가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 즉, 니체가 서술한 ‘정신의 의지’ 또는 ‘정신의 의도’가 자신의 철학과 자기모순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대답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아마도 니체는, 자신 철학의 정수는 정신을 다르게 파악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정신이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힘의 상승과 힘의 퇴화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낯설고 두려운 새로움으로 나아가라는 자신의 주장과, 그러한 것을 동화시킴으로써 힘의 상승이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발언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고, 오히려 정신의 원리와 힘 간의 관계는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정신은 늘 새로운 것과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힘의 정도를, 자신의 소화력을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때 정신에는 새로운 것을 소화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동시에 무지에의 의지인 충동도 발휘될 것이다. 그로써 낯선 것에 대한 화장이 이루어지되, 어느 정도는 민낯으로 남겨진다. 어느 정도는 무지의 영역을 남겨놓을 때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계속해서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정신의 충동이 ‘겉보기에 상반되는 듯하지만’ 실상에서는 힘의 고양을 추구하는 정신의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고 말한 니체의 의미이다.

정리.
1. 정신은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힘을, 즉 새롭고 낯선 것을 자기에게 맞는 익숙한 것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근본의지로 갖는다.
2. 이러한 정신의 근본의지가 명령하는 정서affekt이자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이다.
3. 정신의 의지가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왜곡과 화장술을 성공시켰을 때, 힘이 성장하였다는 느낌이 발생한다.
4. 한편 정신의 충동은, 낯설고 새로운 것 앞에서 무지에의 의지를 발동하고 방어적 태도를 취한다.
5. 이러한 충동은 복종하고자 하는 정서이자, 피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충동이다.
6. 예컨대 니체가 비판했던 기독교인들의 경우,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자 하는 정신의 근본의지를 외면하고 정신의 충동에 종속되어 오직 낡은 것만을 반복적으로 되새기기만 하는 자들이다.
7. 니체는 이들에 반발하여, 새로운 것으로 늘 나아가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또 낯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정복함으로써 힘의 상승을 도모하라고 주장한다.
8. 그런데 정신의 충동은 결국 정신의 근본의지에 봉사하게 된다.
9. 그 이유는 니체가 비유적으로 말했던 두 가지 천재, 여성적 천재와 남성적 천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즉 어느 정도 무지에의 충동이 발생해야,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지 않고 약간은 낯선 것으로 남겨놓을 때, 정신의 근본의지는 그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으며 힘 또한 계속해서 고양될 수 있는 것이다.

231. 우리의 신념

232번 구절부터 제7장의 마지막인 239번 구절까지 니체는 ‘여성 자체’에 대해 서술하는데, 그에 앞서서 니체는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에 대해 서술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이, 본질적으로 “가르칠 수 없는 것”(221)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여성에 대해 말할 ‘자신의’ 신념이 주관적인 것이면서도 읽는 이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음을 미리 전제한다.

니체는 ‘신념’에 대해, “때때로 바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문제의 해결책”이라 부른다(221). 이 신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땅 속의 화강암처럼 오래 전부터 미리 정해져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결정짓는 무엇이다.

“우리는 그 신념 안에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발자취를, 우리 자신이기도 한 문제에 이르는 이정표를 보게 될 뿐이며 …, 우리의 정신적인 숙명에 이르는, 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222)

니체는 이 신념을,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커다란 어리석음”이라고도 말한다(222). 그러니까 신념은 가르칠 수 없이 우리 안에 깊숙이 새겨진 무엇과도 같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낯선 존재로 감각하면서 발견해내야 할 무엇인데, 이것은 절대적 진리라기보다 ‘주관적 진리’, 즉 본질적이지 않은 어떤 ‘어리석음’인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의 신념이 결코 가르쳐질 수 없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매개로 전달하고자 한다. 이는 니체 자신의 주장과 같이, 자신의 깊은 신념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와 관계하고, 그 스스로 낯선 것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남으로써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복하라고 도발하는 것일 것이다.

232.
책세상 번역에 따르면, 이 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222)

여기서 ‘여성이 자립하기를 원한다’는 말과, 이 때문에 ‘남성들이 ‘여성 자체’를 계몽시킨다’는 말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들을 생각하면 무리 없이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문장, 즉 “이것이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는 당시 유럽의 세태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 관점을 드러내는 말로, 이 문장의 주어가 바로 앞의 문장을 가리키는 ‘이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바로 앞에 나오는 문장은 니체의 주장이 아니라 당시 세태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영문 번역과 같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그 때문에 그녀는 남성들을 ‘여성 그 자체’로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Woman wishes to be independent, and therefore she begins to enlighten men about "woman as she is"—THIS is one of the worst developments of the general UGLIFYING of Europe.

니체가 볼 때, ‘학문’이라는 가면 속에 숨어서 더 이상 어떤 새로움도 찾지 못했던 당시 세태는 남성들까지도 ‘여성 그 자체’로 계몽되었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진정한 ‘자립’이란, 더불어 자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관계가 되어줄 수 있는 의미의 자립이지, 결코 남을 자기에게 동화시키는 자립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의 인간들은 ‘여성성’으로 동화되어 버렸다. ‘여성성’이 나아가는 ‘학문성’과 ‘자기-폭로’는 모든 것들을 ‘빛 아래’ 가져다 놓는다. 즉, 어떤 낯선 것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성과의 관계 속에서 절제되어야만 하지만, 유럽은 여성성으로 지배되어 버렸고, 그렇게 유럽은 ‘권태’로 빠져 들어갔다. 니체에게 여성과 남성의 관계함은 다른 무엇보다 복잡하고 은밀한 것이었음에도, 근대 유럽에서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환원되어 버렸다(223).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223)

본래 계몽은 “남성의 일”이자 “남성의 재능”이었다(223). 니체에게 진정한 계몽이란, 기존의 틀을 깨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리’를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여성”이지만(203), “여성은 진리를 바라지는 않는다”(223). 진리는 결국 여성이지만, 이때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 있는 여성을 의미하지, 남성을 배제하고 홀로 있는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꾸로 말해 결국 진리는 남성은 아니지만, 남성은 진리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성의 큰 기교는 거짓말이요 그 최고의 관심사는 가상이며 아름다움이다.”(223) 그리고 남성들은 “여성의 바로 이러한 기교와 이러한 본능을 존중하고 사랑”한다(223). 나아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하여 남성들은 여성이 형성한 아름다운 가상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남성이 ‘여성’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는 “결국 진리는 여성이다 : 우리는 진리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203)라고 말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거짓말과 가상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과거의 이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상을 길어내고자 함이지, 이상을 길어내는 행위 자체에 대한 파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될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성 역시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규정될 때, 그 존재가 드러난다. 그리하여 “여성은 여성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224) 여성의 진정한 자립은, 남성을 배제함으로써가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남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233, 234는 생략.

235.
니체는 드 랑베르트de Lambert 부인의 말을 인용해, 이것이 “아들에게 보낸 말 가운데 가장 어머니답고 가장 현명한 말”이라고 평가한다(225). 그 말은, ‘그것이 크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면 터무니없는 짓이더라도 하라’는 말이었다. 이는 흔히 터무니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니체에 따르면, 여성이 추구하는 성향과는 배치되는 가르침이다. 생각하면 니체는, 남성에게 ‘그것이 크게 즐거움을 준다면, 터무니없는 짓을 하라’고 말하는 그러한 여성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반대를 생각하면, 여성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면, 이상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남성 역시 니체에게 위대하다고 평가받지 않을까?

236.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니체는 괴테를 거쳐 단테로 소급시킨다. “단테와 괴테가 여성에 대해 믿어왔던 것. 단테는 ‘그녀[베아트리체]는 위를 올려다보고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고 노래했고, 괴테는 이를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끌어올린다’고 번역했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제시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니체는 ‘이원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초월적 구원’의 메시지로 이해한다. 순수한 여성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그 사랑을 통한 남성의 초월적 구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이 베아트리체와 단테와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암시했다면, 파우스트에서 그것은 그레트헨과 성모에 의한 파우스트의 구원으로 직접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유형의 초월적-구원적 사랑에 대해 불만이 많다.파우스트를 패러디하고 있는 <시인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시인은 불멸에 대해 노래하고, 자연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면서, 자연의 비밀에 접근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으스댄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녁 무렵에 늙은 여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것들까지도 갈망하고 있지. 그것을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라고 부르지.”라며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문제시한다.” 백승영, 니체의 여성-라비린스, 그리고 모성이라는 아리아드네의 실, 2015, 246쪽, 강조는 발제자.

그리고 “고상한 여성은 모두 이러한 믿음”, 즉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믿음에 저항할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226). 그 여성에게 오히려 이것은, ‘영원히 남성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226).

237. 여성을 위한 일곱 가지 잠언

① 남자가 우리에게로 기어 다가올 때, 기나긴 권태는 날아가버린다!
* 어떻게 기나긴 권태는 날아가는가, 남자가 우리에게 기어들어올 때이다!
- 남성은 낯선 세계를 안고 여성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러한 낯선 세계를 여성이 맞이할 때, 하나의 새로운 친숙한 이상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기나긴 권태는 날아가고, 고통스러운 쾌락이 찾아온다.

② 아! 나이와 학문은 나약한 덕에도 힘을 준다.
- 나이, 그리고 학문과 같이 우리를 안주하게 하는 것은 ‘나약한 덕’에 어울리는 것이다. 니체는 ‘나약한 덕’에 힘이 아닌 절망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것에 가까이 하라고 말한다.

③ 검은 옷을 입고 침묵을 지킬 때 어떤 여성도 영리하게 보인다.
* 음침한 옷차림과 침묵의 만남 : 모든 여성을 위한 옷차림 - 신중함
- 자신을 가리고 치장한 채 기존의 앎을 반복하는 말 따위를 하지 않을 때 여성은, 낯선 세계를 모험하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이상을 길어내고자 하는 남성을 매혹할 수 있다.

④ 행복할 때 나는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신인가! - 아니면 내 재단사인가.
- 니체에게 여성의 행복은, 자신을 치장함으로써 타인을 매혹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의 행복은, 신이 아니라 재단사에게서 오는 것 아닌가?

⑤ 젊다는 것은 꽃으로 장식된 동굴. 늙으면 한 마리 용이 그 안에서 기어나온다.
- 젊음 아래서 여성은 자신의 동굴을 꽃으로 장식하며 가린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꽃으로 가려지지 않을 때, 오랜 시간 동안 그 안에서 자란 용이 기어 나온다. 이때 용의 의미는, 289번 구절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289번 구절은 은둔자에 대한 글인데, 여기서 은둔자는 자신의 심연을 바라보는 자로 긍정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은둔자의 저술에서는 언제나 … 고독의 속삭임이나 두려워하며 주의를 살펴보는 태도와 같은 것을 듣게 된다. … 해마다 밤낮으로 홀로 자신의 영혼과 은밀히 다투거나 대화하면서 함께 앉아 있었던 자, 자신의 동굴에서 … 동굴의 곰이 되거나 보물 채굴자가 되거나 보물 수호자와 용이 되어버린 자, 이러한 사람의 상념 자체에는 마침내 어떤 특이한 어스름 빛을 띠고, … , 무어라 전달하기 어렵고 불쾌한 것이 있다. … 모든 근거의 배후에, 모든 ‘근거를 마련하려는 작업’ 아래 하나의 심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의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철학은 전경(前景)의 철학이다. - 이것이 은둔자가 내리는 판단이다:”(307)

⑥ 고귀한 이름, 아름다운 다리, 게다가 남성 : 오 그가 내 것이었으면!

⑦ 말은 짧게, 의미는 길게 - 이것은 암탕나귀가 주의해야 할 미끄러운 빙판길이다!
* 간결한 말, 그리고 긴 의미 - 이것은 암당나귀를 위한 빙판길이다!
- 빙판길은 조심해야할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유혹하는 길이다. 많은 의미를 품은 말에 여성은 쉽게 미끄러질 수 있다. 이것을 니체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237.
“이제까지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어떤 높은 곳에서 그들에게[남성들에게] 잘못 내려온 새처럼 취급되어왔다. 좀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거칠고 경이로우며 감미롭고 영혼이 넘치는 어떤 것으로, - 그러나 달아나지 않도록 가두어두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 그러나 여성들이 높은 곳에서 남성들에게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무릎 아래로 남성들이 기어 들어와야 한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는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길을 잃은 남성들이다.

238.
니체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긴장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 “헤아릴 길 없는 대립”을 긍정하자고 말한다(227). 왜냐하면 인간의 진리, 즉 힘에의 의지로서 늘 자신 안의 심연을 체험하며 새로운 자기로 거듭나는 그러한 진리는 오직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필연적인 긴장과 대립,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관계하는 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긴장 관계를 탐구하지 않는 자는,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228)

하지만 이러한 긴장과, 긴장을 통해 생성되는 진리의 방식을 깨우친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를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228)

239.
니체는 당대의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에 대해 크게 불만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적 경향과 취향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즉 당시의 여성은 여성 자신의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229) 다시 말해, 여성은 더 이상 여성 자신을 경멸하지 않고 있다. 꾸밈과 화장술, 치장하는 근본 성격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학문과 기독교적 믿음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 부끄럽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 공부했듯, 니체는 여성이 여성 자신에 대해 ‘비개인적인 경멸감’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여성적인 천재성이 발휘되는 꾸밈과 가면쓰기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가리는 옷이기에, 그것에 대해 어떤 부끄러움, 경멸감을 지녀야지만 여성은 특정 옷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체가 “여성은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 의미일 것이다(229).

그런데 여성은, “또한 취향도 잃어가고 있다.”(229) 이 말은, 여성이 더 이상 남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229). 혹자는 여성이 왜 남성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한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니체 자신이 말했듯, 진리는 여성이며, 남성은 그리하여 여성의 발밑으로 기어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자신의 발 아래에서 다가오는 남성을 왜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성이, 어떤 두려운 것을 자신 안에 품고서 여성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즉, 여성은 어떤 두렵고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남성과 (두려워하면서도) 만나야 한다. 그럴 때,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탄생하고, 인간은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늘 자신에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남성을 찾는 것, 그것은 “자신의 가장 여성적인 본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229). 때문에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남성에게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 더 명확하게 말해 남성 안에 있는 남성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남성이 크게 육성되지 않게 될 때, 여성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또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229)

이때 이 “남성 안에 있는 남성”은 분명 어떤 낯설고 두렵고 또 공포스러운, 그러나 새로운 이상의 씨앗을 품고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바로 그 두려운 것을 원함으로써, 퇴화하지 않고 자신의 심연을 계속해서 길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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