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 문학의 미래? / 구라카즈 시게루 / 번역 한태준(한국어)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5 23:43
조회
660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출간 기념 저자 화상 강연
“문학의 미래?”



주최
다중지성의 정원 (http://daziwon.com)
도서출판 갈무리 (http://galmuri.co.kr)
2015. 4. 25


강연 구라케즈 시게루
통역/번역 한태준
사회 이종호


(저자의 허락을 받아 강연문을 온라인에 게재합니다)
일본어 원문 : http://blog.daum.net/kurakazushigeru/21


안녕하세요.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의 저자 구라카즈 시게루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오늘 이 장소를 마련해준 갈무리 출판사 여러분, 통역의 한태준 씨, 그리고 이 장소에 모여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 아시아 속의 일본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의 여러 사람들과 서로 이야기할 기회는 있었지만, 어쩐지 현재까지 한국 분들과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친구도 없고 한국 문화 상황에 관해서 잘 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한국에 관해서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오늘 모임의 타이틀인 ‘문학의 미래?’란 말에 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무언가 제목을 지어야 할 때, 곧바로 떠올랐던 것이 이 말이었습니다. 일본의 문예 저널리즘에서는 “문학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화제가 정기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물음은 “문학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지금은 판에 박힌 말처럼 되어 버렸지만, 현 상황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기운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 왔습니다. 제목의 마지막에 붙은 물음표는 그러한 저의 빈정거림을 넣은 의도였습니다.

왜 ‘문학의 위기’를 문제시 하는 것에 공감할 수 없는 것인가? 실은 절반 정도는 공감하고 있지만, 동시에 절반은 그러한 문제 제기는 문예 저널리즘의 관례 의식이고 장사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에 관한 복잡한 감정에 관해서도 오늘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첫 번째로 어떤 서적을 언급해 보겠습니다. 오늘을 위해서 일전에 읽은 책입니다. 한국의 문예비평가 김명인 씨의 『투쟁의 시학』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쓰신 김명인 씨가 어떤 분인지 저는 여기에 쓰여 있는 것 외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서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고,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느낀 점은 한국과 일본의 문학 상황의 기본적인 공통성과 부분적인 차이였습니다. 김명인 씨도 이 저서에서 ‘문학의 죽음’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문학 작품이 사회적인 의의나 주장을 잃어버리고, 자본주의 안에서 왜소한 상품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근대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2005년의 문장이었군요. 이 해는 저에게는 매우 의미가 깊었던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제가 개인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일본에서 1990년대에 지도적인 비평가였던 가라타니 고진이 쓴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그가 2005년에 발표한 책입니다. 실은 저는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가라타니 선생님께 사사 받았었고, 그 전년도에 다른 대학으로 막 옮겼을 때였습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갔고 점점 문학의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결의한 순간에 선생에게 문학은 끝났다고 선고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가라타니 선생님의 인식에 충격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부터 문학의 지위 저하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이야기 되어 왔었기 때문입니다. 가라타니 선생님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닌, 누구나 말해 왔던 것을 다시금 환기시킨 지점이었습니다.

가라타니 선생님은 문학은 사회 비평이란 역할을 방치해 버린 이상, 정말로 ‘문학’에 뜻을 품은 사람은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회운동에 뛰어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극단적인 주장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문학의 죽음이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문학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그때부터 저는 ‘문학의 죽음’ 이란 문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문학이 죽었다고, 적어도 왜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죽음’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바뀐 것일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근대 문학’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근대 문학’은 ‘근대화’Modernization라는 보다 거대한 국가 규모의 프로젝트의 일부였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 문학이 에도시대까지 존재했던 문학과 다르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문학이 전통이 풍부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도시대까지 문학자=통속 작가라는 생각이 만연했고 문학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존재였습니다. 통속작가는 연극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대중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특수기능자이자 장인이었습니다. 또한 와카 등은 천황제와도 관계되어 그 나름대로의 문화적 지위를 유지해 왔었습니다만, 그러한 것들은 심미적인 심정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회비평의 요소를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근대 문학은 문학의 세계에 어떤 종류의 사회성, 이념성을 불어 넣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서양에서 유입된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작가들은 자신이 계승한 에도시대로부터의 문학으로 길들여진 감각으로 서양적인 ‘근대문학’의 이념을 억지로 접목시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습니다.

메이지 이후 ‘문학’은 자유나 자립 그리고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개인주의’입니다. 나츠메 소세키에게 ‘나의 개인주의’라는 유명한 강연이 있습니다만, 나츠메야 말로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개인주의의 필요성과 곤란에 가장 의식적이었던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말하면, ‘문학’도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근대화’라는 백년 규모 프로젝트의 일부였던 것입니다.다만 그것은 국가 주도의 근대화에 항의하는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것에 주도적인 계층은 지식인들이었지만, 민중으로부터의 체제비판, 사회비판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학이 근대적 이념을 짊어지고 있는 이상, 작가는 단순한 스토리텔러 장인이 아닌, 사상가 내지 문명비평가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문학 등이 대표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문학은 내셔널리즘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문학은 국민국가의 문화적 중추로 간주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구조는 일본뿐만이 아니라 후발 근대 국가에서 폭넓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980년대에 근대화 프로젝트가 종언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80년대 후반에는 일본은 근대국가로서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이념을 짊어지는 필연성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스토리텔러로 간주된듯이 보입니다. 에도시대의 통속작가에 대한 격세유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다만 그 후의 장기 불활 속에서 격차나 빈곤 그리고 과잉 노동이라는 형태로 일본 사회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즉 전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억압을 타파하여 인간을 해방한다고 하는 ‘근대’의 이야기가 그 빛을 되찾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치의 기능 감퇴나 혁명이나 개혁이라는 외과 수술적인 조치의 어려움만이 의식되는 듯이 보입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나 금융, IT에 의한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란 것이 하이브리드로 서로 뒤얽힌 것으로서 계속되는 ‘산다는 고충’이 존재하고 있는 이상, 단순한 해결책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감각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상대적인 사회비판이나 이념의 제시를 행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사회학자, 경제학자, 심리학자, 관료라는 로컬한 전문가가 각각의 분야에서 부분적인 이해 조정을 행한다는 형태로만 지식인은 존재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렇게 작가가 사상가였던 시대는 그 끝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근대문학’의 해체가 20년 정도 걸려서 진행되었습니다. 김명인 씨는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 사이에 단절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조금 더 사태가 급격하게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는 특히 2000년 전후에 문예비평의 쇠퇴가 확실시 되었고, 젊은 비평가와 예비군은 일탈하여 서브컬쳐 비평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은 그 서브컬쳐 비평도 침체하여 비평 자체가 부재가 된 것 같은 상황입니다.

문예비평이란 것은 개별의 작품 저편의 사회적인 의미나 문맥을 읽어 내는 것이지만, 현대에서는 사회를 말하는 것에서 왜 픽션을 매개로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게 된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근대문학의 죽음’의 경위입니다. 확실히 근대 문학은 끝났다는 인식은 옳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단순히 문학의 사회적인 역할이 바뀌었을 뿐은 아닐까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평가는 작품에서 어떠한 사회 상황을 끌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일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다릅니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우선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이미지나 스토리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는 이후에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문학’이 끝났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지금도 계속해서 방대한 작품들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일까요?

물론 오늘날의 문학에 비판적인 사람은 그것이야말로 확실히 상업주의의 지배다라고 하겠지요. 다시 말해, 시장의 요청에 따라서 출판사는 작가를 재촉하고, 작가는 시장의 유행을 쫓으면서 어떻게든 한몫 챙기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일면적인 견해입니다. 물론 시장의 압력이 크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렇겠지요. 이 말을 가장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 이후, 문예작품이 시장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에는 시장에서 자립한 평가의 한 축이 어려워졌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우선 자신의 내면의 모티브에서 출발하는 자입니다. 그곳에 상업주의적인 제약이 있다고 해도, 그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모티브를 유지하고 상상력을 개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작가의 자연스런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시장의 요청과 작가의 모티베이션을 대립하고 갈등한다는 이항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관념적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어떠한 환경에 있어도 끊임없이 말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존재입니다. 말로 픽션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근원적인 본능이자, 어떠한 사회이든 멈추지 않을 것은 명백합니다.

저는 인간이 지닌 유니크함은 현실을 확인하는 데 반드시 허구fiction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허구작성능력=상상력의 근원에는 언어능력이 있습니다. 즉,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생물학적 특질이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합니다. 그중 하나가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근대문학’이 역할을 끝내고 사회가 어떤 식으로 모습을 바꾸어도 말과 글자에 의해 픽션을 뽑아낸다는 행위가 문화 속에서 사라질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갑자기 너무 추상적으로 흘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문학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히라타 오리자라는 극작가가 있습니다. 90년대 연극을 혁신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자신들의 연극에는 전달하고 싶은 것이나 독자에게 향한 메시지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의 연극에는 주장이 없다, 또는 적절한 주제를 설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제, 주장의 부재가 무엇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실은 단적으로 말해서 팔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히라타 오리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객이 몰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커플이 데이트하러 오기에는 맞지 않다는 등 자신들의 연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있는 작품이란 것은 다 본 후에 서로 이야기 하고 싶어집니다. 논의하고 싶어집니다. 상대 의견을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커뮤니케이션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연극에서도 영화에서도 또는 소설에서도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주제란, 작가와 독자 관계 위에서는 메시지이며 주장이지만, 독자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보자면,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 공통의 장소에 모이게 하는 것, 동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제라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치적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햐쿠타 나오키라는 사람입니다. 작가이며 동시에 우파 오피니언 리더입니다만, 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원의 제로』란 특공대를 소재로 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일입니다. 그는 노골적으로 ‘태평양 전쟁 옹호’라는 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중의 동원에 성공한 것입니다. 문학작품으로서는 졸렬한 것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대성공한 예입니다.

히라타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연극을 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말이 없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가만히 혼자서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연극. 그는 이것을 주제가 아닌, 존재를 묘사한 연극이라든지, 새로운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문학의 어쩐 종류의 조류에서도 잘 들어맞는 듯이 생각됩니다. 2000년대에 나온 작가들 속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리얼리즘하고는 완전히 다르지만, 확실히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 다른 말로 하면 주제라는 형태로 축소할 수 없는 생명/삶의 복잡함을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바사키 토모카, 이소자키 켄이치로, 야마시타 스미토 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화자로서 비상하게 기발하고 전위적인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명/삶의 섬세하면서도 불안정한 실질을 표현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어딘가 정물화적이기도 합니다.비평가로서 바라보면, 가장 다루기 힘든 작가들이겠지요.

다만 현대문학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류이기는 해도 지배적인 경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을까요? 여기에 하나 상기해 보고 싶은 것은 19세기에 태어난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급속하게 복잡화되는 사회에 적합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성립한 시민사회는 신분에 의해 구분지어졌던 그 이전의 사회보다 돈의 흐름이나 권력의 작용이란 점에서 훨씬 복잡했기 때문이지요. 그 이전의 서사시나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사건’의 시간적 흐름에 의한 관계로만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서, 소설의 묘사는 사회관계의 공간적인 확장을 묘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본과 같은 후발 국가에서 근대문학이 필요로 된 것도 신분이나 출신이라는 기반을 잃어버린 개인이 복잡한 사회를 방황하는 모습을 근대문학이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대의 이념이 실추한 결과, 우리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런 복잡성을 표현하기에 뛰어나다고 하는 소설의 특징, 그리고 말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사변성은 소설이 지니고 있는 큰 우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사회를 사는 의미를 새롭게 질문하기에 소설은 아직도 유효한 장르라는 점입니다.

한 가지 더 부연 설명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연구자인 피터 브룩스가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이란 책에서 서술한 주장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멜로드라마’라는 이야기 형식은 신을 잃어버린 근대사회가 신성함이나 초월성을 어떠한 형태로 유지하고자 해서 탄생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멜로드라마라고 하면 우리들은 바로 눈물을 짜내는 텔레비전 드라마 등을 떠올립니다. 약 10년 전에 일본에서 가장 인기를 끈 멜로드라마는 한국의 <겨울연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멜로드라마는 그다지 고급스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브룩스에 의하면 멜로드라마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탄생하여 파리의 극단에서 대유행했던 이야기 패턴인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멜로드라마를 독자를 등장인물에 강하게 감정이입시켜, 그 인물의 잇따른 고난과 최종적인 승리에 의해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부여하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생각해 둡시다. 그러면, 드라마, 영화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현재 모든 대중적인 스토리콘텐츠에 넓게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멜로드라마는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것을 중시한 나머지, 논리성이나 진실성을 경시하는 것으로 그다지 지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브룩스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속의 논리에서는 배제되어 버리는 신성함이나 초월성을 추구하는 대중의 욕망이 그러한 멜로드라마에 심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비평가가 ‘문학의 죽음’을 문제시할 때, 사실은 문학은 죽어 버린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이야기의 범람에 휩쓸려 버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는 이전에 없던 방대한 이야기가 나날이 유통하고 소비되어 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 속에서는 구조상에서 고도로 세련된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브룩스의 멜로드라마론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서브컬쳐적인 콘텐츠가 지닌 양식을 경시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는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허구를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것은 그 언어능력의 말하자면 직계 후손인 것입니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에서는 ‘미적 경험’이란 말을 사용했지만,픽션이나 예술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삶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은 어떤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TOOL(도구)나 표현형식은 점점 바뀌어 가겠지요. 문학의 세계에서는 19세기에 탄생한‘소설’이란 장르가 그 중심을 떠맡아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것도 바뀌어 갈지 모르고, 소설 자체가 지금까지 것과는 다르게 변해 가겠지요. 비평가가 해야 할 일은 그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리얼로 파악할 수 있는 가 고뇌하면서 우선은 써보는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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