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호] (연재) 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니체와 인식론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8:13
조회
996
니체와 인식론

김상범


1.

니체가 객관적인 사실 혹은 객관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 철학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니체는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객관적 사실에 대립하는 '주관적 해석'을 긍정하는 철학자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해석하는 주체'라는 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덧붙여-꾸며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7[60] 참조)

이렇게 니체의 인식론은 그의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의식과 신체,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 먼저 존재하는 것은 힘과 권력의지, 그리고 이러한 힘과 의지에 의해 구성된 의미-지평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서 ‘순수인식’이라는 것은 없고 모든 인식은 ‘해석’으로서 일종의 의미-인식이다.

또한 니체에게 있어서 인식은 가치-인식이기도 하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개의 인식론상의 근본적 입장(유물론, 감각론, 관념론)이 어디까지 가치평가의 필연적 귀결인가 하는 문제. 즉 지고의 쾌 감정(<가치감정>)의 원천이 실재성의 문제에 관해서도 또한 결정적이라고 간주되고 있다니!”(<권력의지>§580)

그러나 이러한 의미-인식과 가치-인식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해석하고 평가하는 최종 심급은 동일하게 권력의지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에 있다는 점,...종래의 해석들은....관점주의적 평가들이라는 점.”(<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2[108])

해석하고 평가하는 최종심급이 권력의지인 이유는 권력의지가 힘들의 양적 차이를 결정함으로써 이러한 힘들에 의해 부여된 사물의 의미 중에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를 결정하고, 또한 힘들의 양적차이의 결정은 힘들의 서열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인 현상인 한에서 사물 속에 표현되어 있는 힘들의 서열이다.”(<니체와 철학>p.29)

니체는 인식이 항상 의미-인식이자 가치-인식이라는 것을 강조했고,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니체에게 있어서 사물의 본질은 곧 그 사물의 의미와 가치를 뜻한다고 말한 것은 옳다. 니체는 실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란, 무언가 저것과는 다른 것으로부터 보여진 하나의 의미 정립이다. <본질>, <본질성>은, 무언가 원근법적인 것이며, 다수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항상 근저에 있는 것은 <이것은 나에 대해서는 무엇인가?>(우리에 대하여, 생명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등등)이다.”(<권력의지> §556)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이 ‘누구’에 대하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2.

모든 인식이 의미-인식이라는 것은 현상이 일종의 ‘기호’ 혹은 ‘징후’라는 말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현상이란...실제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이며 징후이다. 모든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과학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니체와 철학>p.20)

니체는 <우상의 황혼>의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이라는 꼭지에서 도덕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도덕적 판단의 근본적인 가상적 성격을 폭로한다. 그런데 니체는 도덕이 ‘징후학’으로서는 큰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도덕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던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징후언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인간은 원인, 결과, 상호성, 상관성, 수, 법칙, 자유, 동기, 목적 등으로 구성된 ‘상징’들을 사물들에 투사함으로써 인식이라는 것을 해왔다고 말한다.(<선악을 넘어서> §21)

종합해 볼 때 어떤 사물이나 문화 혹은 내면세계를 그것들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일종의 기호, 상징, 징후 등을 통해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이 처럼 우리의 사유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언어(기호, 상징, 징후를 포함한)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부조화나 문제를 사물 속에 넣어 읽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의 형식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우리가 언어의 강제를 받아 사고하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되면 사고하는 일을 멈춘다. 우리는 여기서 한계를 한계로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데, 가까스로 말하고 있다.”(<권력의지> §522)

그리고 이러한 언어는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범주를 날조해온 발명적인 힘은, 욕구에 봉사하고 일해 왔다. 즉 확실성을, 기호나 음향에 기초한 신속한 이해를, 간략화의 수단을 요구하는 욕구에. 즉<실체>, <주관>,<객관>, <존재>, <생성>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진리는 아닌 것이다.-사물의 명칭을 법칙이 되게 하는 것은 권력 있는 자들이며, 게다가 범주를 조작한 것은, 이들 권력 있는 자들 중에서도 추상화의 최대의 예술가들이다."(<권력의지>§513)

이렇게 범주의 생산과 조작은 힘과 권력의지와 무관하지 않으며, 언어체계의 재생산은 이러한 언어체계에 적합한 힘과 의지를 가진 신체를 생산해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언어체계는 이에 적합한 힘과 권력의지에 대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처럼 평행적인 것이지, 언어체계가 힘과 의지를 일방적으로 규정짓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는 좋음/나쁨의 대립으로 구성되는 언어체계와 담론체제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는 선/악으로 구성되는 언어체계와 담론체제를 통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언어체계나 담론체제, 특히 도덕적 언어체계나 담론체제는 그 언어의 사용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징후 언어가 될 수 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저서의 제 1논문은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강자와 약자의 심리, 감성이나 권력의지에 대해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우상의 황혼>에서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이라는 꼭지는 다음과 같이 언어체계의 변화가 어떻게 힘과 의지의 변화와 대응되는 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고귀한 튜튼인들을 <개선>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개선>되어 수도원으로 인도되어 들어갔던 튜튼인이 나중에는 어떻게 보였던가? 흡사 인간을 희화화해 놓은 그림처럼 팔푼이 같았다. <죄인>이 되어버렸고,...,그지 없이 끔찍한 개념들 속에 감금되어 버렸다. 그곳에서 이제 튜튼인들은 병들어, 비참한 모습으로 자신에 대한 악의를 가득 품은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삶에의 충동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 차서, 여전히 강하고 행복해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에 가득 차서, 요컨대 <기독교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우상의 황혼>,'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2)

좋음/나쁨으로 구성되는 언어체계나 담론체제는 '좋음'과 '나쁨'이 각각 '힘의 느낌'이 강화 또는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차이'를 생산하는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에 부합하는 반면, 선/악으로 구성되는 언어체계와 담론체제는 이러한 선/악에 영원불멸의 지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동일성'에 고착된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에 부합된다.

그리고 권력의지는 감정이나 감성 속에서 자신을 표명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니체는 권력의지란 개념을 완성하고 그것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기 바로 직전에 이미 어떤 권력감정에 관해 말했다. 권력이란 니체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의 문제로 다루어지기 전에 감정과 감성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가 권력의지란 완전한 개념을 구상하게 되었을 때, 그 최초의 특징은 사라지지 않고, 권력의지의 표명이 되었다....다시 말하자면, 권력의지는 힘의 감성으로 표명된다."(<니체와 철학>,p.123)

<도덕의 계보학>에서 강자들의 권력의지는 '거리감'을 통해서, 약자들의 권력의지는 '원한'을 통해서 표현된다. <니체와 언어학>이라는 꼭지에서 감정과 언어체계의 대응과 연결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권력의지가 특정한 감정을 통해서 표현되므로, 우리는 권력의지와 언어체계의 대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의지와 언어체계의 대응은 언어체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해석이 곧 권력의지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3.

니체는 <우상의 황혼>의 '실재세계가 마침내 어떻게 신화가 되고 말았는가'라는 절에서 인식론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니체는 오랜 세월 동안 '실재세계'는 피안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즉 도달할 수 있는 세계였다고 말한다.

"1.실재세계. 현명한 사람, 신심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그는 그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며, 바로 그 세계 자체이다."

그런데 유대-기독교적 사유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러한 '실재세계'는 피안의 세계를 뜻하게 된다. 니체는 이러한 피안으로서의 실재세계가 자신을 감춤으로서 신비롭게 인간을 유혹한다는 면에서 '여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2. 실재세계. 아직 도달할 수 없으나 현명한 사람, 신심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그리고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약속되어 있는 세계.

(그 관념의 진보. 그것은 더욱 정묘하고, 더욱 솔깃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된다-그것은 여성이 되고, 그것은 기독교적이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실재세계'는 '약속되는' 세계였지만, 근대적 인식론을 종합한 칸트에 의해 그것은 '물자체'의 세계, 혹은 '본체계'로서, "도달할 수도, 증명할 수도, 약속할 수도 없는"세계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물자체'에 대한 믿음은 도덕이나 실천이성의 차원에서 요청된다.

"3.실재세계. 도달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고, 약속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의 위안으로서 생각될 때 조차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인 세계.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옛날의 태양. 그러나 안개와 회의를 통해 빛나는 그것. 숭고하고, 창백하고, 북국적이며, 쾨니히스베르크적이 된 그 관념.)"

그런데 이러한 '물자체'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이러한 '의무'와 '명령'이 사라지게 된다.

"4. 실재세계-도달할 수 없다? 어떻든 도달되지 못한 세계. 그리고 도달되지 못했다면 알 수도 없는 세계. 따라서 위안도, 보상도, 의무도 없다.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의무를 질 수 잇겠는가?

(여명의 어스름. 이성의 첫 하품. 실증주의의 닭 울음 소리)"

이렇게 '실재세계'에 대한 도덕적 요청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실재세계'라는 관념을 폐기해버리게 된다.

"5. 실재세계-더 이상 쓸모가 없고, 더 이상 의무감도 느낄 수가 없는 하나의 관념-쓸모없고, 불필요하게 남아돌고 있는 하나의 관념. 자, 그 관념을 없애버리자!"

그러나 이러한 '실재세계'의 폐지는 곧 '가상세계'또한 폐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우리는 실재세계를 없애버렸다. 무슨 세계가 남아있을까? 보이는 세계일까? 아니다. 실재세계와 함께 우리는 보이는 세계도 없애버렸다."

왜냐하면 가상세계는 실재세계와의 대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른바 '객관적 인식'을 하기 위해 인식자와 인식대상(=실재세계)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 않기를, 즉 거리를 두기를 요청하지만, 인식의 역사(=인식론의 역사) 속에서 인식자와 실재세계 사이의 '거리'가 무한이 되고, 따라서 인식자와 실재세계의 상호관련이 없어짐에 따라, 아이러닉하게도 '실재세계'는 더욱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결국에는 폐기되게 된다. 우리가 참된 인식, '객관적 인식'을 위해 설정한 것이 참된 인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니체는 다음과 같은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인식자는 그가 인식하고자 욕구하는 대상이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욕구하거니와,...인식하고자 하는 의욕과 그것이 스스로와 상관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요망...속에는 한 가지 모순이 있으며,..."(<권력의지>§555)

니체의 인식론에 있어서 모든 인식대상(사물)은 이미 인식자에 관련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이것은 무엇인가가'가 아니라 '이것은 나에 대해서(관해서) 무엇인가?"이다.

4.

그러나 인식자와 인식대상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주관'의 산물, 혹은 구성물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객관이란 내부에서 보면 주관임에 틀림없는 그 무엇이다' 라는 따위는, 생각하건대 한 때 각광을 받았던 시대도 있었으나, 하나의 우호적인 날조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의식하는 것의 척도는, 의식화의 조잡한 유용성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권력의지> §474)

오히려 의식적 사고 이전에 사고는 '무의식적 이성'에 의해 정돈되어 있다. '내적 세계'야 말로 이러한 신체 또는 무의식의 현상에 불과하다.

"나는 내적 세계에 대해서도 그 현상성을 고집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것은, 철두철미, 먼저 조정되고, 단순화되고, 도식화되고, 해석되어 있다."(<권력의지> §477)

주관/객관 이전에 의미-지평이 먼저 존재하고, 이러한 의미-지평은 '힘','권력의지'와 이에 상응하는 언어체계에 의해 구성된다.

인식자와 인식대상이 서로 상관적이라는 것은 어떤 힘과 권력의지에 의해 구성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도 의미-지평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를 대표하는 '주인'들의 의미-지평과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를 대표하는 '노예'들의 의미-지평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니체에게 중요한 질문은 '누가'?인데, 이것은 의식주체를 묻는 물음이 아니라, 어떤 힘과 의지인가를 묻는 물음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향상은 보다 비좁은 해석의 초극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 모든 강화나 권력 확대의 달성은 새로운 원근법을 열고 새로운 지평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것은 나의 여러 저작을 일관하고 있다."(<권력의지> §616)

힘의 양적 증가는 새로운 의미-지평을 열게 되는 것이다.

5.

니체의 인식론은 소박한 실재론과 같이 주관에 독립적인 객관적 실재를 가정하지 않고, 관념론이나 칸트와 같이 선험적 주체를 가정하지도 않는다. 니체는 <주체>와 <객체>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라고 말한다. 니체는 인식이라는 것이 이처럼 언어(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언어, 즉 기호, 상징, 징후를 포함하는 언어)와 범주에 의해 제약된 것이며, 이러한 언어와 범주의 조직 및 조작은 힘이나 권력의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권력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인 '주인'은 좋음/나쁨의 구분에 기초한 언어체계로 사물을 바라보며,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권력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인 '노예'는 선/악의 구분에 기초한 언어체계로 세계를 해석한다.

따라서 니체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어떤 힘과 권력의지가) 말하는 가이며, 같은 기호(good, gut)도 '누가'(어떤 힘과 의지가)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좋음/선)

또한 언어체계의 재생산은 이러한 언어체계에 적합한 힘과 의지를 가진 신체, 혹은 주체를 생산해낸다.

이렇게 언어체계와 '힘과 의지'는 서로 대응된다. 그러므로 언어체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해석은 곧 이 언어체계에 대응하는 힘과 권력의지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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