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호]<도덕의 계보학>과 의미의 과학ㅣ김상범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4 09:42
조회
872
<도덕의 계보학>과 의미의 과학

김상범(대학생)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전개하고 있는 사상은 의미에 대한, 의미의 복수성에 대한, 그리고 의미의 변주에 대한 사상이기도 하다.

1)파울 레와 같은 공리주의자는 ‘gut(good)'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유일하며 그 단어가 처음 쓰이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그 의미가 변화되지 않았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의 ’계보학‘에 의해 부정된다. 니체는 여러 언어에 대한 어원학적 분석에 의해 ’좋음‘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추적한 결과 ’좋음‘이라는 단어는 본래 귀족계급이 자신의 신분이나 특징, 행위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좋음’이라는 판단은..좋은 사람들 자신, 즉 고상한 사람, 강한 사람, 보다 높은 위치에 이쓴 사람과 고매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모든 저급한 것과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것, 비열하고 천민적인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훌륭하다고, 즉 최상급의 것으로 느끼고 행한다.”( 제 1논문 §2)

그런데 사제계급은 이러한 ‘좋음’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누가’ 말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같은 단어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전사적 귀족계급에게 있어 ‘좋음’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단어였지만 사제계급이 전사계급과 담론적/물질적 투쟁을 전개해나가게 됨으로 인해 사제계급이 민중을 선동하게 되고, 이러한 담론적 선동 속에서 ‘좋음’은 ‘선’을 의미하게 된다. 사제계급은 다음과 같이 민중을 선동하는 것이다.

“가련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선한 자이며, 또한 고통받는 자, 궁핌한 자, 병든 자,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자 선에 귀의한 자이며,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제 1논문 §7)

이렇게 사제계급은 ‘가치전도’를 수행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이렇게 힘 없는 자, 무력한 자를 ‘선’으로 규정짓는 것은 ‘주체’라는 환상을 매개로 한다. 이때의 주체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기체를 의미한다. 사제계급과 민중계급은 이러한 ‘주체’라는 환상을 통해서 “약자의 약함 자체가...자유의지에 의한 일종의 능력이고, 의욕되고 선택된 것이며, 하나의 행위이자 공적처럼 보이”(제 1논문 §13)도록 만든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작용으로부터 분리된 작용자를 가정하는 것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직자를 포함한 약자는 자기기만을 통해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누가’ 말하는 가에 따라서 ‘좋음’이라는 단어에 부여되는 의미는 다른데, 이러한 의미 규정과정에서 강자는 어떠한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좋음’이라고 규정하지만 약자는 자기를 규정하기 위해서 ‘타자의 나쁨’을 전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반대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자신을 ‘선함’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주체’와 ‘타자’라는 변증법적 매개항을 필요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성직자에 의해 ‘좋음’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가치투쟁, 즉 가치에 대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담론투쟁이 시작되었고, 오늘날에 들어서 이러한 투쟁은 더 이상 실정적인 계급투쟁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정신화되어 개인의 내면 속에서 좋음/나쁨의 가치체계와 선/악의 가치체계의 충돌과 투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좋음’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그 단어를 ‘누가’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강자에게 있어서 행복은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다면, 약자에게 있어서 행복은 수동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강자의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는 자신에게 즐거운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고, 약자의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부정’하도록 만 요구하기 때문이다.

“...원만하고 힘이 넘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인 인간인 그들은 행복이 행위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력한 자, 풀이 죽은 자, 악의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으로 곪아 있는 자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행복’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자들에게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마취, 마비, 안식, 평화, ‘안식일’, 긴장을 풀고 사지를 뻗어 휴식을 취하는 것, 요컨대 수종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제 1논문 §10)

2) 니체는 또한 사물이나 제도, 기관의 의미도 지배적인 힘과 의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힘 관계가 달라지면 그 의미도 변한다고 말한다.

“현존하는 어떤 것, 어떻게든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것보다 우월한 힘을 지닌 것에 의해 번번히 새로운 견해로 재해석되고 새로 독점적으로 이용되거 새로운 용도로 유익하게 바뀌고 전환된다. 유기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의 제압이자 지배이며, 그리고 다시 모든 제압과 지배는 하나의 새로운 해석이자 정리인데, 이로 인해 종래의 ‘의미’와 ‘목적’이 필연적으로 모호해지거나 지워질 수 밖에 없게 된다.”(제 2논문 §12)


니체가 ‘유기체’에 대해 말한 것은 ‘사회체’에 대해서도 옳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진화론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진화론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니체는 전략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란 결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진보가 아니며...”( 제 2논문 §12)

니체는 이러한 목적론적 사회진화론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기계론적 무의미함과 화합”(제 2논문 §12)하지도 않는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기계론적 역사해석은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이며 우월한 힘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지배자 혐오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은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요술로서 슬쩍 없어지게 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적응’이 삶의 본질인 것처럼 말하곤 한다.

“..삶 자체도 외적 환경에 대한 점점 더 합목적적인 내적 적응이라고 정의되기에 이르렀다.”(제 2논문 §12)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이론은 “삶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삶의 본질을, 생명이 지닌 힘에의 의지를 오해하고 있다. 이 정의는 자발적이고 공격적이며 침략적인,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방향을 정해 형태를 부여하는 여러 힘, 그것들의 작용으로 비로소 ‘적응’이 이루어지는 그 힘들의 원칙적인 우선권을 간과하고 있다.”( 제 2논문 §12)

3)‘금욕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은 <도덕의 계보학> 제3 논문의 제목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구’의 금욕적 이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자나 학자에게는 높은 사유능력을 갖는 데 가장 유리한 전제조건을 위한 직감이나 본능과 같은 것이다.....사제에게는 사제로서의 본래적인 신앙이나 권력을 부리는 최상의 도구, 또한 권력을 얻는 최상의 면허를 뜻한다.”( 제 3논문, §1)

니체가 중요하게 다루는 유형은 철학자나 사제이므로 다른 많은 유형들은 생략했다. 니체는 독립적인 정신을 소유한 철학자들이 왜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보인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삶을 부정하고 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신성을 추구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 제 3논문 §7)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생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긍정하는 것이다.”(제 3논문 §7)

그렇다면 왜 금욕주의가 독립적인 정신성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위대하고 생산적이며 독창적인 정신”에게 청빈, 겸손, 순결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바꾸어 물어야 한다.
먼저 그들의 정신성은 “사치벽이나 정선된 물품을 좋아하는 성향에 맞서,...‘사막’에의 의지를 유지”(제 3논문 §8)하고자 하는데, 독립적인 정신에게 있어서 정신성은 다른 모든 본능에 대해 우월하고 지배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청빈’이라는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그들은 그들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것, 즉 그들 자신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은밀한 사랑”으로서의 “모성본능”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고 이 때문에 “어떤 종속이나 등화 관제”도 견디어내게 된다. 이것이 그들이 ‘겸손하게’ 보이는 이유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겸손이 나타나는 것은 “분수와 소박함에 대한 기특한 의지” 때문이 아닌 셈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이유는...그들의 최고 지배자가 그들에게 그러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교활하게 가차 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최고 지배자는 한 가지 일에만 의미를 두며, 모든 것, 즉 시간이나 정력, 사랑이나 관심과 같은 것을 오직 그 일을 위해서만 저축하는 것이다.”(제 3논문 §8)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힘과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발산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순결’하게 생활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예술가가 작품에 “모든 힘과 동물적 활력”을 쏟아 붇기 위해 섹스를 자제하는 것과 같다. 니체는 이것을 “더 큰 힘이 더 작은 힘을 다 써버리는 것”(제 3논문 §8)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독립적인 정신에게 있어 금욕주의는 긍정적인 의지, 적극적이고 우월한 힘, 지배적인 본능으로서의 정신성의 올바른 표출에 의해 나타나며 금욕주의적 이상은 이러한 힘, 의지, 본능이 잘 발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금욕주의적 사제에게 있어서 금욕주의적 이상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금욕주의적 이상은 자신들을 고양시키기는 수단이 아니라 맹수와 같은 민중들을 길들여서 순한 양떼로 만드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렇게 민중들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사제는 매우 강해야 하며, 그들의 권력의지 또한 뚜렷해야한다. 그리고 고통받고 불행한 민중의 의사이자 간호사, 목자를 자처하며 민중들을 지배하라고 명하는 것은 그의 본능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통 받는 자에 대한 지배가 그의 왕국이고, 그의 본능은 그에게 그렇게 지배하라고 지시하며, 그러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솜씨, 대가다움, 나름의 행복을 얻게 된다.”(제 3논문 §15)

그리고 금욕적 사제의 힘과 권력의지, 본능은 비틀린 방식으로 표출되며, 마치 자신은 권력과는 무관한 것처럼 말하곤 한다.
또한 독립적인 정신과 금욕적 사제는 그 힘과 의지, 본능의 작동방식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기에는 비길 데 없는 원한이, 즉 살아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삶의 더없이 심원하고 강력하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탐욕스러운 본능과 힘에 대한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는 힘의 원천을 폐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행해진다.”(제 3논문 §11)

이와 같이 철학자와 금욕적 사제에게 있어서 금욕적 이상의 의미는 힘, 의지, 본능이 표출되는 방식과 힘, 의지, 본능의 작동방식의 측면에 따라 다르다.

4) 니체는 이와 같은 금욕적 이상이 대다수 민중들에게 삶의 의미, 생존의 의미를 부여해왔다고 말한다. 또한 본질적으로 병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고통에 시달렸는데, 금욕적 이상은 여기에도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증폭시키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금욕적 사제들은 고통을 죄라는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비 의사로서의 금욕적 사제들 때문에 인간은 더욱 병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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