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호] 바뤼흐 스피노자,『정치론』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09:43
조회
711
바뤼흐 스피노자,『정치론』(비홍출판사, 2013) 읽기

김상범


1.

『에티카』의 논리적 형식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책의 「서론」 부분이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스피노자는 「서론」에서 자신이 추상적인, 살과 피가 없는 보편적 인간, 혹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관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경험적인 인간, 즉 강렬한 욕망과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들이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는 철학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험의 지도를 받아왔으므로, 실제와 동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1;2. 강조는 인용자)

“나는 사랑, 미움, 분노, 질투, 기만, 동정등과 같은 인간적 감정들과 그 외의 정신적 작용들을...인간 본성에 속하는 특성들로서 간주했다.”(1;4)

“인간은 필연적으로 강렬한 감정들에 종속되며...”(1;5)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 세계를 탐구하는 방식은 철저히 이성적이며 ‘과학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적 탐구’는 곧 ‘자유로운 탐구’인데,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체계 속에서 이성은 인간 정신의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의 한계만큼만 정신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이 학문에 관련된 문제들을 수학연구에서 보통 보이는 것과 같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탐구하기 위하여...”(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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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의 자연권은 곧 그의 능력인데, 이 능력만큼 그는 자유롭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자연은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고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만을 금지”(2;8)했으므로 자연상태에서는 선/악이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인간이 시민상태로 나아갈 때만 선/악과 정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자연권 개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정의’로서의 루소식 자연권 개념과 대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사회의 구성에 대해서도 사회계약론자들과는 다른 기본 원리를 제시한다.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두 사람이 힘을 합한다면, 그들은 자연에 대해서 혼자인 경우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이런 식으로 연합을 형성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다함께 더 많은 권리를 소유한다.”(2;13)

여기에는 주권자에 대한 권리의 양도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주체의 소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상태를 ‘두려움’에 기초한 ‘적대’의 감정이 지배하는 일종의 전쟁상태로 파악하지만, 사회의 구성과정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러한 두려움이 사라짐에 따라 사회 전체의 능력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할 수 있음’=능력이 증대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증대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연권의 증대, 자유의 증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사회의 구성은 홉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개인들의 자유를 확장시킨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자연상태’ 속에서 인간의 ‘자연권’은 ‘시민상태’ 속에서의 그것에 비해 미미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류에게 특유한 자연권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권리를 가지고, 자신들이 거주할 수 있고 경작할 수 있으며, 자신들을 지킬 수 있고, 전체 공동체의 판단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영토를 함께 성공덕으로 방위할 수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생각될 수 없다고 결론 짓는다.”(2:16)

스피노자는 또한 정치체들(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사이에 가치의 위계를 결정하는 데, 인간의 능력이 그의 육체를 지도하는 정신적 능력, 즉 이성에 의해 측정되듯이, 민중을 지도하는 최고권력의 ‘이성’에 의해 정치체들의 능력이 측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원리에 의해 ‘최고권력의 이성’을 측정한다.

“인간의 지력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통찰하기에는 너무 둔하지만, 다른 사람과 토의하고 경청함으로써, 그리고 토론함으로써 예리해진다.”(9;14)

이것은 정확히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차이’와 ‘다양성’의 ‘소통’에 의한 ‘떼 지성’ 혹은 ‘집단지성’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토의하고 토론할수록 집단의 지력, 혹은 이성은 더 뛰어나게 되므로, 중앙집권형 귀족정은 군주정보다, 지방분권형 귀족정은 중앙집권형 귀족정보다, 민주정은 지방분권형 귀족정보다 더 우월하다.

이렇게 최고권력의 ‘이성’이 뛰어날수록 ‘시민상태의 목적’을 잘 실현시키기가 용이한데, 스피노자에 의하면,

“시민 상태의 목적은 생활의 평화와 안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5;2)

‘평화’와 ‘안전’? 이것은 너무 보수적이지 않은가? 이것은 ‘안보’를 통해 사람들을 예속시키려는 ‘극우’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지 않나? 그러나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예속과 야만과 황야를 평화라고 부른다면, 인류에게 있어서 평화보다 더 비참한 것은 있을 수 없다...왜냐하면 평화는...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일치 또는 화합에 있기 때문이다.”(6;4)

이처럼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평화’와 ‘안전’은 ‘전쟁’의 부정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이자 정신의 일치이고 화합이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스트르가 말하는 원시사회의 ‘전쟁’은 사회 내부의 계급의 분화로 인한 사회의 분해를 막고 정신의 일치와 화합을 추구하며, 군주에 대한 예속을 막고 자유를 지켜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가 ‘민주정’을 ‘절대적인 국가’라고 부른 것은 시대가 부여한 용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국가’는 사실상 ‘절대적인 비국가’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여기서 모든 초월적이고 위로부터 결정하고 명령하는 권력은 모두 사라지고, 다중의 내재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수평적인 특이성의 네트워크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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