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 노동해방문학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12:45
조회
1130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2


노동해방문학






“김사인이라고 아니?”

조세희 선생이 밤늦게 전화를 걸었다. 구로3공단 신발공장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한텐 후배고, 너한텐 선밴데, 걔가 문예지를 하려고 하는데,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외삼촌이 뭘 하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집 2층에서 외삼촌이 글을 쓰며 지냈다.

“내 꿈이 뭔지 아니?”

“뭔데?”

“문예지야, 멋진 문예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상이었던 외삼촌의 꿈이 소설이 아니라, ‘멋진 문예지’라는 건 그때 알았다. 그에게 꿈을 펼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럼, 해야죠.”

전화를 끊었지만, 김사인이 탐탁지 않았다. 광산지역에 있을 때 그는 나에게, 빨치산 선배들을 간신히 조직했으니,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옛 투쟁을 문학적으로 복원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솟구쳐 오르는 노동자 투쟁의 현장에 있던 내가, ‘현실의 시인’이기도 벅찬 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사인이 누구냐!”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다시는 전화가 오지 않게 하라고, 아버님은 처음으로, 밤늦게 들어온 내게 짜증을 냈다. 다음날 당장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아!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해왔던 일들을, 이제 조직적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혼자가 아니라 조직이, 현장투쟁과 결합하여 문예활동과 선전활동을 하자고, 그걸 내가 맡아달라고 했다.

문예선전활동가, 현장에서, 예술을, 선도적으로!

나는 예술적으로 훈련된 활동가가, 탁월한 선전선동능력을 가진 예술가가, 현장에 뿌리박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현장 동지들과 함께 한발 한발 전진하는 그런 운동을 꿈꿨다.

다시는 전화를 걸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갔던 나는, 다음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노동해방문학』 문예란을 채우는 일, 문인들을 조직하는 일, 현장 문예조직과의 연대사업 등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었다. 상반기 임투에도 결합해야 했지만 역량이 안됐다. 움직일 수 있는 나는 구로지역, 소설가 김하경 선생은 마창지역을 맡았다. 그때 파견된 김하경 선생은 복귀하지 않고 아예 마창사람이 되어버렸다.

KDK노조 파업투쟁에 결합해 문예선전작업을 하던 내게, 분신한 서광노조 김종수 열사 장례투쟁에 결합하라는 연락이 왔다.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 시인 다섯 명이 다섯 편의 추모시를 써 추모삐라 500마리를 만들었다. 영결식에서 노래패의 추모가 중간 중간에 추모시가 낭송됐다. 영결식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 인연으로 ‘노동자노래단’ 테잎음반 ‘전노협진군가’에 참여하게 됐다. 노래 중간 중간에 시를 하나씩 집어넣는 일이었다. 마땅한 시가 없으면 새로 썼다. 첫 시는 정인화 시인에게 맡겼다. 정인화 시인은 전노협출범기념시 「강이 되어 간다」를 보내왔다. 음반은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10년쯤 뒤 전국노동자문학회 시낭송회 찬조출연을 부탁하러 ‘꽃다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바쁜 일정으로 출연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실은 제가, 꽃다지에게 받을 빚이 좀 있거든요…….”

꽃다지가 노동자노래단이었던 시절 ‘전노협진군가’ 멘트작업을 내가 했다고, 그때 나도 바쁜 일정으로 작업이 불가능했었다고 말했다.

“아, 선생님! 저희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가겠습니다.”

그 음반 때문에 노래운동을 하게 된 동지가 여럿이었다고 한다.


『노동해방문학』 5월호에 실린 이정로 동지의 기고가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발행인 김사인 동지와 편집장 임규찬 동지가 구속됐다. 불똥은 나에게도 튀었다.

창간호가 나오자 나는 20부를 사북노동상담소에 보내 판매를 부탁했다. 창간호는 한 부도 팔리지 않고 반품됐다. 열차소화물로 온 책을 영업부에서 찾아가지 않자 다시 반송돼 상담소로 갔다. 상담소가 다시 반송한 책을 영업부가 또 안 찾아가자 또 반송됐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광산지역 노동운동 탄압으로 상담소 압수수색이 있었고, 구속된 동지에게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가 추가됐다. “노동문학사 김모씨(30세)에게 20부를 받아 광산지역에 배포하려고 소지한 혐의”라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흥분했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받고 있는 『노동해방문학』은 5월호고, 상담소에 있던 『노동해방문학』은 창간호였다. 검찰의 바보 같은 실수를 친절하게 알려줘야 했다. 나는 항의성명을 써 광산지역 운동단체와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에 팩스를 보냈다. 그 바보 같은 팩스질로 나도 쫓기는 몸이 되었다.

광산지역 형사가 나를 잡으러 서울로 왔다. 제작국 사무실 위층에 있는 어두운 조명의 이발소에서 내 사진을 들고 죽치고 있다고, 이발소 화장실에서 가끔 마주치던 핼쑥한 얼굴의 짧은 커트머리 아가씨가, 제작국 동지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광산지역 취재를 떠났다.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다.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이미 취해있었다.

경찰서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상담소에 들린 동지가 술을 마시고 있는 내게 빨리 피하라고 했다. 형사가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새끼를 빨리 잡아야 된다고 투덜거렸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마시고 새벽 첫차로 떠나려던 나는 취해서 뻗어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헐레벌떡 광산지역을 떠났다.


발행인과 편집장이 감옥에 있는 동안 편집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수배중인 편집주간 조정환 동지가 보내오는 기획안이 편집국 회의를 거쳐 확정됐다. 몇 달 뒤 두 사람이 집행유예로 나왔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고, 발행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수를 탔다. 그 사이 많은 사원들이 활동을 중지하거나 사표를 제출했다. 몇몇 사원은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퇴각하기도 했다. 『노동해방문학』은 점점 ‘멋진 문예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획되고 집필된 원고들을 제작하는 ‘보이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힘들게 만들어진 문예지가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분하고 원통했다. 이번에 실패하면 멋진 문예지를 만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총회소집투쟁’을 기획했다. 노동문학사 사원총회를 소집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멋진 문예지’ 『노동해방문학』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몇몇 동지와 함께 사원 성향분석을 했다. 개개인의 입사경로를 추적했다. 활동을 중단한 사원들까지 총동원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나는 잠수중인 발행인을 만났다.

“그만 둬…….”

발행인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수의 입사경로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보이는 곳’으로 경로를 거치며, 세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럼, 퇴각명령을 내리시지요.”

“각자 알아서 퇴각!”

나는 문예창작부 송별회를 소집했다. 나는 그렇게, 열정과 헌신의, 절망과 좌절의, 내 젊은 날과 작별했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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