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이론의 전투성(The Militancy of Theory)ㅣ마이클 하트(듀크 대학교) / 김군용 옮김(Univeristy of San Diego 영문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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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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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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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전투성(The Militancy of Theory)

마이클 하트(듀크 대학교) / 김군용 옮김(Univeristy of San Diego 영문과 조교수)


비판(critique) 은 이론 (theory)—적어도 정치적인 개입으로서 파악된 이론—을 실천하는 주요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는 요즘 비판이 지닌 정치적 역량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비판이라는 용어는 광범위한 실천 방식들을 모두 아우른다. 비교적 일반적인 흠잡기의 수단에서부터 권위의 진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 지배적 담론 혹은 이데올로기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의 수사를 드러내는 기술,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오성, 이성, 판단력의 한계를 조사하는 칸트식의 구체적 절차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들이 모두 비판에 해당한다. 이러한 비판 양식들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내가 볼 때 이들 모두는 기존의 권력 구조를 변혁시키고 대안적인 사회 구성체를 창안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한 정치적 방법론으로서 불충분하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사실 나는 멜랑콜리가 여러 현대 이론에서 주요한 정동 (affect)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상 또한 비판이 변혁에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는 데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비판에 대해 불만이 표출되고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 개입으로서 이론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제안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사실 이론적 가능성의 장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탓에 가끔은 비판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무비판적인 이론, 즉 기존의 권력 형식에 대해 긍정하고, 협력하고, 편의를 도모하는 방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미셸 푸코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철학적, 정치적 전투성이 오늘날의 이론에 대해 풍부한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푸코는 칸트의 짧막한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매료되어서 자신의 강연과 대담에서 그것을 여러 차례 분석한 바 있다.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1983년 1월 4일 콜레주 드 프랑스 (Collège de France) 에서 “자아와 타자들의 통치”에 대해 두 해 동안 펼쳐질 일련의 수업을 시작하면서 행한 강연으로서, 여기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진실 말하기 혹은 자유롭고 솔직한 발화 행위의 고고학을 탐색하고 있다. 이 기조 강연은 바로 뒤에 이어질 강연들과 견주어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성과 계몽에 관한 칸트의 연구가 어떻게 푸코가 이후의 강의에서 탐구하게 될 고대의 문제틀을 “소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질문을 뒤집어 보면, 어떻게 고대인들이 칸트가 제기한 과제와 문제를 성취하고 해결해 내는가? 나는 칸트의 에세이가 푸코로 하여금 비판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론과 이론가의 새로운 모델을 규명할 수 있도록 했다고 읽고자 한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푸코는 자율과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사회적 과제로서의 ‘소수성 (minority) 으로부터의 탈출’을 이론의 기능으로 확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칸트와는 반대로 푸코는 비판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 불충분한 수단임을 인식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를 가로지르는 긴 우회로를 거쳐 푸코는 결국 비판을 넘어 자율과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적절한 수단이 될 철학적, 정치적 호전성이라는 개념에 도달한다.

푸코는 칸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먼저 이론이 현재와 어떤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규정된다고 제안한다. 근대에 있어 이론의 과제는 우리의 현재, 우리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 그리고 어떤 공동체적 주체가 거기에 속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푸코는 이론이 현재의 겉모습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Gouvernement 14면). 그는 이론이 현재 그리고 현재의 구성 주체와 관련해 갖는 임무야말로 칸트의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유럽 철학 전반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구분이라고 해석한다. 칸트 사상의 주요 노선 그리고 그의 핵심 저작에서 개진된 비판의 개념은 지식의 조건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푸코에 따르면, 오늘날 칸트 사상의 이 주요 노선을 계승해 나가고 있는 것은 주로 영미의 분석 철학이다. 그러나 계몽에 관한 논문을 포함, 칸트의 철학에는 또 다른 소수적인 (minor)노선이 존재하는데, 이는 비판을 현재의 인간 경험의 영역과 그러한 경험의 가능 조건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인식한다. 나는 우리가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이 소수적 노선의 유산을 대표하고 있다고 본다. 푸코는 이 소수적인 노선을 “현재의 존재론”이자 “우리 자신의 존재론”이라고 특징짓는다 (같은 책 22면). 분명히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존재론은 전통적 개념에서와 같이 영원 불변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와 우리 자신의 존재론, 다시 말해 현재에서의 우리 자신의 존재론은 오직 되기/생성 (becoming)의 과정이다. 존재론을 이처럼 현재에서의 과정, 되기/생성의 상태 (a being of becoming)로 개념화하는 것은 얼핏보기에 역설적이지만 이론과 이론가의 잠재적 역할에 관한 푸코의 사상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철학이 현재와 맺는 관계는 능동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로서, 단순히 현재를 기록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실천을 통해 현재를 변화시킨다. 이론의 직무는 현재를 만들어내는 것인 동시에 현재를 만드는 주체—즉 현재에 속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를 규정짓고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가 어째서 우리들이 이 변혁적이고 생성적인 직무를 해낼 수 있다고 상상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칸트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에 부여하는 명령은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칸트가 사용하는 용어인 Unmündigkeit는 종종 “미성숙성”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법적으로 성행위를 하거나 술을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할 수 없는 미성년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칸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체적인 형태의 소수성은 반드시 나이와 관계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벗어나야할 소수성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탈출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칸트가 소수성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아성 내지 젊음의 비유를 무시해야 한다고 푸코는 역설한다. 일례로 칸트는Gängelwagen, 즉 혼자의 힘으로 걷지 못하는 유아들을 위해 고안된 바퀴와 안장이 달린 보행기와 같은 장치에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언급한다. 만약 소수성의 상태를 인간이 자연적으로 거치기 마련인 유아 상태로 해석한다면, 소수성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이—청소년이 시간이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성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거나 혹은 생물학적 발달의 모델에 따라 이미 결정된 과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아와는 달리 우리는 소수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수성(majority)을 발휘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힘을 얻기 위해 “어른이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힘은 이미 우리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어 우리가 단순히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에게 있어 소수성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과감하게 생각하라 (sapere aude!)는 명령으로서, 그것은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한편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이 이미 가진 수단들을 행동화하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탈출은 개개인이 이루어내기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공공 주체 내지 사회적 주체가 스스로를 계몽하여 소수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간의 협력 하에 권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복종의 습관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실현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이것이 푸코가 칸트의 글에서 고무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주장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또한 이론이 현재와 맺는 구체적인 관계에 의해 자리매김된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신의 시대가 이미 계몽된 시대 (an englightened age)가 아니라 계몽의 시대 (an age of enlightenment)—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을 기획하는 시대—라는 칸트의 결론은 현재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현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하고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와 같은 능동적인 탈출과 구성의 과정이 푸코가 역설하는 현재의 존재론과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실현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론에 부여된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역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를 푸코가 오년 전에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연에서 칸트의 텍스트를 독해했던 것과 비교해 보자. 그 강연에서 푸코는 자율성과 계몽에 대한 칸트의 요청을 비판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비판적 태도”와 동일시 하고 있다. 푸코는 여기서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기획을 권의에의 거부 그리고 권력과 통치에 맞서는 불복종의 행위로 여기고 있다:

통치화 (governmentalization) 라는 것이 사회적 실천 속에서 개인이 진리를 좇는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종속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는 주체가 진리의 권력 효과에 대해서 진리를 심문하고 또 권력이 내세우는 진리의 담론에 대해서 권력을 탐문하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과정이 바로 비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게 되면 비판은 자발적인 불복종의 기술이자 성찰적인 불순응의 기술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비판은 소위 ‘진리의 정치학’의 컨텍스트에서 주체의 탈주체화를 근본적으로 실행하게 될 것이다.

푸코는 비판 그리고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이 “통치되기를 거부하는 의사 결정의 의지”라는 점에서 일치함을 주장하며 자신의 강연을 끝마친다.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을 살펴보면 푸코가 이와 같은 결론을 완전히 굳히지는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강연을 경청하던 칸트 학자 장-루이 브루흐 (Jean-Louis Bruch)는 푸코의 강연이 지닌 모호함을 지적한다. 강연 도중 곳곳에서 푸코가 비판에 대해 “대단한 정도로 통치되지는 않는 기술”과 같은 상대적인 표현을 써가며 언급하는 반면, 강연 말미에 오면 “통치되기를 거부하는” 의지와 같은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다소 동요된 푸코는 자신이 강연의 끝무렵에서 적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 비판이 자칫 “근본적 무정부주의” 그리고 “어떠한 통치화에도 절대적으로 전력을 다해 거부하는 근원적인 자유”로 비추어질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설명하려했던 것은 “이리 저리 좌지우지되어 통치되지 않으려는” 기획이란 측면에서의 비판이라고 덧붙인다. 내가 읽기에 푸코의 이러한 “오류”는 이론적 기획을 부정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에 대해 그가 가진 불만을 드러낸다. 아마도 푸코가 볼 때 상대적인 저항의 개념—이런 저런 방식으로 통치되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것—은 자율성에 대한 칸트의 명령이나 자신의 야심에 부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치되지 않으려는 의지’와 같이 더 영웅적으로 들리는 절대적 표현을 써서 비판을 규정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만족스런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푸코는 이 강연에서 비판을 장려하면서도 내가 앞서 말했던 이유—현존하는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거나 대안적 형태의 사회를 창안하지 못하는 무기력함—때문에 비판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비판의 태도는 칸트가 자신의 글에서 인용하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말—“네가 원하는 것에 대해 원하는 만큼 논쟁하되 복종하라!”—과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푸코가 1983년 강연에서 칸트의 에세이를 되짚어볼 때 그는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비판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현재와 우리 자신의 존재론으로서 제시하고 있으며, 적어도 내가 읽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존재론은 대안적인 주체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구성적 기획을 요구한다.

1983년 강연에서 푸코는 칸트의 기획 속에 내재한 모순내지 패러독스를 드러내는 비판의 또 다른 한계에 대해 천착한다. 사실상 푸코는 칸트가 시사한 바 탈출의 기획은 개인적인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이라는 논리를 발전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텍스트를 다소 뒤틀어 소수성의 개념이 그가 명시적으로 의도했던 것처럼 의존적인 상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적 소수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수성을 사회적 소수성으로 확대하는 이와 같은 “오독”은 영어와 불어에서는 가능하지만 독일어 단어인 unmündigheit의 경우에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소수성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또 그럼으로써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위계 질서를 담지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어떤 의미에선 모든 사람이 자율성에 이르는 능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나, 현 사회적 조건 하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능력을 현실화시키지 못하고 그 대신 복종을 강요당한다. 따라서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기획은 현재의 위계와 복종의 구조를 전복하는 한편 모든 사람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공동체적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이 지니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연계시키는 것은 다시 말해 자율에의 갈망과 민주주의에의 갈망을 연계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지도자와 지식인이 수행해야 할 계몽의 역할은 비판을 넘어서 자신들 스스로의 소수성의 위치를 파괴하는 것이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이 실천하는 자율적인 사고와 행동의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시키는 것이다.

푸코는 이와 같은 임무가 지니는 모순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칸트의 텍스트 속에서 하나의 구절을 독창적으로 읽어낸다. 칸트는 우리가 지식인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이고 순종적으로 머무는 것에 대해 다음의 세가지 예를 들고 있다: “내가 나의 이해력을 대신해 줄 책과 나 대신 양심을 갖춘 영적 지도자, 그리고 나를 위해 적절한 식이요법을 판단해 줄 의사 등을 갖고 있다면, 나는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책을 집필하는 철학자, 도덕적 지침을 제시하는 목사, 그리고 의료적인 조언을 주는 의사는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와 같은 의도와 무관하게 이들의 권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율성이 아니라 복종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측면을 더 극적으로 강조하고 보다 더 설득력있게 하기 위해 푸코는 책, 목사, 의사라는 일상에서의 세가지 실례를 칸트의 세 비판서와 연결지어 읽는다.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책의 예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처럼 오성 (Verstand)이 주요한 문제로 부각되며, 목사는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의 경우처럼 도덕 의식과 도덕적 실천의 문제를 다루며, 그리고 마지막으로—여기서 푸코는 자신의 해석에 다소 무리가 있음을 인정한다—의사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 관여한다. 칸트가 들고 있는 실례들을 이처럼 칸트 자신의 저서에 대한 자기지시적인 (self-referential) 내용으로 읽어냄으로써 푸코는 계몽의 기획에서 지식인인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한층 더 강하고 날카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칸트의 비판적 기획은 주로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어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지를 규정짓는 것에 집중되어 있지만, 자율성을 향한 기획 또한 (명시적 혹은 암시적으로) 그의 저작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가령, <순수이성 비판>의 핵심적 논지는 분석적 이성이 노정하는 한계 안에서 우리가 각자 개별적으로, 어떠한 외부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우리들의 오성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권위는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혹은 가져올 수 있다): 즉,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내게 나의 오성을 대신할 책이 한권 있다면 나는 노력을 할 전혀 없다. 칸트가 자신의 비판서에서 제안하는 오성, 실천 이성, 판단력의 적법한 사용은 이와 같은 모순에 사로 잡혀 있다. 지식인과 사회적 지도자들은 자율성을 설교하는 경우에조차도 자신들의 권위 자체로 인해 복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칸트의 계몽 내지 해방의 기획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지적, 사회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스스로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사람과 인류 전체가 소수성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할 수는 없다. “왜 그들은 그럴 수 없는가?” 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푸코는 칸트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권위 아래에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러한 구속에 익숙해져버린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affranchissement)을 감당하지 못한다.” 푸코의 계속된 설명에 따르면, 구속에 길들어진 사람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지도자들이 그 구속 상태를 재확립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구속 하에 놓이게 되며, 이것이 모든 혁명에 있어 하나의 법칙과도 같이 되어버렸음을 칸트는 1784년에 설파했다” (Gouvernement 33면). 이제 소수성이 갖는 두 가지 의미는 진퇴양난의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일반 사람들은 첫번째 의미로서의 소수성의 상태—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까닭에 해방의 과정을 시작할 수 없다. 소수성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훈련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 또한 두번째 의미로서의 소수성—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위계와 권의의 구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타인을 소수성의 상태 밖으로 이끌 수 없다. 첫번째 의미로의 소수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말해 홀로 생각하고 행동할 용기를 기르고 권위에 대한 수동성과 복종의 습관들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우리는 복종을 영속화시키는 위계와 권위의 사회 구조를 타파하는, 두번째 의미로서의 소수성의 상태로부터의 탈출도 함께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혁명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칸트와 같은 계몽 철학자들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칸트는 두번째 의미로서의 소수성의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추진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추진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글 중반 이후에서 계몽과 일반화된 사회적 자율성에 대한 기획이 왜 충분히 발전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얼핏 보기에 칸트는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한 뒤 공공 영역에서는 자율성이 그리고 사적 영역에서는 복종이 적절하다고 말함으로써 계몽의 기획이 사회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푸코는 칸트식의 공-사 구분이 사회적 영역들을 차별짓고 인간의 능력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지음으로써 자율성의 영역을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의 능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 즉 복종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특정 집단의 사람들과 특정한 공적 직업에 적절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가령 행정기관이나 기구의 기계 부속품처럼 움직일 때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사적으로 이용해 복종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작가와 지식인은 보편적인 것을 취급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능을 공적으로 이용한다고 칸트는 설명한다. 이로써 소수성이 가진 두 가지 속성의 괴리 문제가 한층 강화된 형태로 재등장하게 된다. 즉 사회적 위계라는 두번째 의미의 소수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첫번째 의미의 소수성의 상태에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향한 일반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칸트가 두번째 의미로서의 소수성에서 탈출하는 기획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그가 자율성을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세금을 내고 프러시아의 프레드리히 대왕의 지배와 공공 영역의 권력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푸코의 분석은 비판과 해방 사이의 간극을 더 벌여 놓는다. 비판은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사회적 체제를 창조하는 긍정적인 기획을 담당할 수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적 기획을 수행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율성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 혹은 자신들의 탁월한 지식을 바탕으로 대중적 견해와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반적으로 가려져 있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비판이 종종 (심지어 항상?) 다른 사람들의 적절한 이해를 돕고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율성의 길로 인도함으로써 비판적 관점을 모든 사람에게 혹은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확대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푸코는 칸트를 독해하면서 바로 이 오류를 반박하고자 한다. 인간의 이성, 오성, 판단의 힘을 규정짓고 드러내고 있는 칸트의 세 비판서마저도 우리의 자율성 확립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푸코의 논지에 따르면, 비판으로 확립된 권위는 자율성을 증대시키는데 일조하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떠나 오히려 그것에 대한 장애물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칸트가 의미하는 바로서의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은 두번째 의미에서의 소수성으로부터의 해방, 즉 비판이 성취할 수 없는 일반화된 불복종과 해방의 기획과 함께 맞물려야 한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칸트를 떠나 다른 곳에서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 철학적, 정치적 실천의 형식을 추구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대로, 푸코는 이 입문 성격의 강연을 끝으로 칸트를 떠나 이년 동안 이어질 그리스 사상에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여러가지 의문점들을 남긴다. 만약 이론이 실제로 우리가 속한 현재의 특징과 임무를 밝히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체제와 주체—즉 현재를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리”—를 구성해야만 한다면, 뒤이어지는 푸코의 강의들은 어떻게 이 임무를 수행해내는가? 비판이 이와 같은 임무에 걸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푸코가 이론을 위해 제시하는 대안적 모델은 어떤 것인가? 나의 가정은 푸코가 그리스 사상에 관한 수업을 진행하며 칸트로부터 끌어낸 목표—자율성의 일반화내지 범세계적인 해방의 기획을 수행해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용기를 지니도록 만드는 것—를 견지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푸코가 비판을 대신할 전투적인 개념의 철학적, 정치적 실천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푸코가 자신의 강연에서 개진하고 있는 유일한 주장은 아니지만 중요하게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주제임은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와 현재 사이에 가로 놓인 거리 덕분에 푸코는 현시점의 여러가지 압박 그리고 반목을 일삼는 현대 정치의 풍토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논지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대해 차분히 읽으면서 푸코는 결국 자신이 골몰했던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푸코가 이 수업을 통해 이년 동안 추구하게 될 명시적 과제는 진실 말하기 혹은 정직하고 자유로운 발화로 번역되곤 하는 파레시아 (parrhesia) 의 개념을 훑는 것이었다. 강의가 진행되면서, 푸코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 parrhesia와 민주주의와의 관계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른 저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푸코가 사용하는 방법론은 시대를 구분짓는 것으로서, 그는 민주주의와 진실 말하기가 일치하는 대략 기원전 5세기 즈음의 첫번째 시기;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진실 말하기와 민주주의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두번째 시기; 그리고 고대 견유주의자 (Cynics)들이 진실 말하기를 삶의 한 형식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정치적 실천을 모색하고자 했던 세번째 시기를 구분한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세번째 시기이지만, 푸코가 이 강연에서 제기했던 핵심적 문제 그리고 그의 사고의 궤적을 설명하기 위해 첫 두 시기의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푸코는 첫번째 시기 동안 parrhesia와 민주주의가 호혜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발견하는데, 이는 일견 그가 칸트를 독해하며 이루고자 했던 과제—소수성이 지닌 두 가지 의미 모두로부터 탈출하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포네스 전쟁사>—그 중에서도 특히 페리클레스의 유명한 연설들—그리고 유리피데스의 희곡 작품—특히 <이온>—처럼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범이 되는 몇몇 텍스트들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푸코가 발견한 것은 덕을 갖춘 민주적 지도자들이parrhesiastes—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대중 앞에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인물—로 정의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대중 앞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무지한 사람은 부정적인 민주적 지도자로 여겨졌고, 용기가 없어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얘기하는 정치적 아첨꾼 내지 수사학자는 민주주의에 더욱 더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푸코는 정치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특히나 그것을 말하는 주체에게—위험한 행위라고 설명한다. 예측 가능한 결과를 목표로 하는 수행적 발화 (performative speech)와 달리, 정치적 parrhesia는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다. 칸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용기는 여기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이제 그 초점은 아는 것으로부터 진실 말하기로 옮겨져 알려고 하는 행위가 아닌 정치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행위가 중요해진다. 푸코는 이것이 적어도 처음에는 민주주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페리클레스의 유명한 연설에서 엿보이듯이, 이 시기에 있어 정치적 parrhesia는 민주주의적 통치에 핵심적이며, 민주주의는 진실 말하기의 고유한 영역이다.

푸코는 곧이어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전범이 되는 텍스트들에서조차 민주주의적 사상과 실천이 상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가 고찰하는 예 중 하나는 parrhesia와 isegoria (대중 앞에서의 평등한 발언권) 사이의 대립이다. 평등은 차이의 부재로 이해되기 쉽다는 점에서 차이를 표시하는 parrhesia—진실을 아는 자는 소수이며 그 진실을 대중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자는 지극히 소수이다—와 대조적이다. 민주주의는 이처럼 평등을 도모하면서도 소수의 사람을 격상시키고 페리클레스와 같은 지도자의 권위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된 담론은 차이를 불러오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담론은 그 형성 조건과 영향에 있어 차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오직 몇몇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수의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순간, 즉 진실 말하기가 민주주의의 영역에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 소수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에 자리하게 되며 그로써 차이가 발생한다. 참된 담론 그리고 참된 담론의 발생은 통치화 과정의 근원이다. 민주주의가 통치 가능하다면, 그것은 참된 담론이 있기 때문이다. (Gouvernement 167면).

칸트의 비판 기획과 소수성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명령 사이에서 푸코가 발견했던 모순적 관계가 여기서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칸트의 문제틀 속에서 책, 목사, 의사가 그들의 권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다른 사람보다 그의 위치를 격상시키고 진실 말하기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평등과 민주주의에 배치된다.

이처럼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내재된 내적 갈등을 분석하는 가운데 푸코는 현대 이론에 대해 여러가지 짧은 곁이야기를 하며 오늘날의 이론가들이 정치적인 것 (“le politique”)을 정치 (la politique)보다 더 강조하는 경향을 공격한다. (이 경향은 푸코의 사후 몇 십년동안 더 농후해진 감이 있다.) 그는 경고의 어조로 “정치로부터 정치적인 것으로 옮아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내가 보기에 현대의 다양한 분석 작업에서 그것은 중요한 문제, 특히나 정치와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Gouvernement 146 면). 일상적인 불어 용례에서 두 용어를 이처럼 사용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긴 하지만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를 푸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보여준다.(정치가 일반적으로 권력 관계와 결부된 투쟁과 협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정치적인 것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권력 구조와 권력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구분은 오늘날 이 두 용어가 이론적 논의에서 기능하고 있는 방식과 대체적으로 상응한다. 강의 내용 중에서 이전 부분을 살펴보면 푸코는 정치적인 것을 국가정체 (politeia)를 분석하는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는 권력과 투쟁의 역학을 다루는 정치의 영역과는 동떨어진 법의 문제, 권력 구조와 법적 토대의 정비와 같은 문제들을 다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푸코가 권력의 구조와 관계에 대해 분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제는 그가 이미 1970년대 중반에 <감시와 처벌> 와 <성의 역사> 첫번째 권을 비롯한 자신의 주요 저서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바 있다.) 오히려 그의 논지는 그러한 권력 분석은 투쟁이라는 정치의 영역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그 위험에 대해 열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권력에 대한 그의 연구가 종종 정치적 투쟁의 영역에 충분히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온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푸코가 칸트를 독해하는 맥락에서 살펴볼 때, (정치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은 비판이 내세우는 입장과 유사한 반면, 이제 앞으로의 논의에서 살펴볼 것처럼, 투쟁의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비판을 넘어 전투적인 관점을 향해 나간다.

푸코가 첫번째 시기에서 대략 기원전 5세기에서 6세기에 해당하는 두번째 시기로 이동할 때, 혹자는 그가 parrhesia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연결시키면서 이전에 대두되었던 민주주의의 모순들을 해결할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고학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제 parrhesia와 민주주의는 점점 더 양립 불가능한 것이 된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그 이전 시대에서처럼 “특권적인 parrhesia의 장”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parrhesia를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다” (Courage 50면). 푸코가 분석하고 있는 이 시기의 핵심 인물인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심지어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서는 긍정적 의미로서의 진실 말하기, 즉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용기있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푸코를 매료시켰던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진실 말하기와 양립 불가함을 확신한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parrhesia의 영역을 정치에서 윤리로 전환시키는가의 문제였던 것 같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크라테스의 임무는

그 발전, 형식, 목적 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정치적 parrhesia나 정치적 진실 말하기와 매우 다르다. 그것은 다른 형식과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가 가졌던 목적은 사실상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각 개인이 스스로에게 관심을 돌려 자신들이 각자의 마음에 기초해서 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성적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parrhesia를 윤리의 영역에 올려놓게 된다. (같은 책, 79면)

이처럼 소크라테스가 설교하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을 넘어 스스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는 윤리적 명령으로서, 이는 정치적 진실 말하기만큼이나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푸코의 고고학에 있어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사회 전체의 해방의 과정으로서의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기획으로부터 처음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페리클레스가 살았던 아테네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적 토양으로부터 소크라테스가 설파하는 개인적인 앎과 돌봄의 윤리로 후퇴한 것이다. 사실 푸코의 독법에 따르자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소수성으로부터 탈출해 자율성을 획득하라는 명령은 위계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소수성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적, 민주주의적 기획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러한 기획을 배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푸코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정치의 영역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열쇠를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한다. 푸코는 소크라테스가 진실 그리고 진실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즉 진실된 삶을 사는 방식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또 그 진실과 조화로운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할 것을 요구한다. 푸코가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삶, 다시 말해 parrhesia의 대상으로서의 삶의 양식이 부상하는 것”으로서, 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펴서 그 속에서 무엇이 진실된가를 헤아려야 한다 (같은 책, 135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진실 말하기는 삶의 방식이자 심지어는 삶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진실 말하기와 삶의 관계가 갖는 정치적 중요성은 푸코의 고고학에서 세번째 시기, 즉 대략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기원후 4세기에 걸쳐 견유주의자들이 왕성한 활동을 한 시기를 논하는 부분에 와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견유주의자들이 쓴 텍스트 중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푸코는 그들의 원칙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실제로 견유주의자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푸코는 주로 그런 텍스트들을 읽어내면서 견유주의자들이 견지했던 진실된 삶의 개념이 우리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전투적인 삶이었음을 밝혀낸다.

견유주의자들의 삶은 그리스어 단어 kunikos가 지시하듯 그야말로 개의 삶이었다고 푸코는 설명한다 (같은 책, 224면). 개의 삶이 갖는 특징적 요소 두 가지는 사회를 자극하고 들썩이게 하는 견유주의자들의 용기를 예시해준다. 첫번째, 개 (혹은 다른 짐승)처럼 견유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은밀한 곳에서만 하는 행위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둘째, 견유주의자들은 가난하고 보호를 받지 못하는데다 다른 사람들의 멸시와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와 비슷하다. 특히나 푸코를 매료시켰던 것은 견유주의자들이 공공 장소에서 알몸으로 걷거나 심지어 자위행위를 하는 한편, 사적인 공간에서는 똑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그런 행위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들이라고 야단치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견유주의자들이 가진 진실된 용기는 그들이 스스로를 경멸, 거절, 비난, 모욕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인정하거나 혹은 인정하는 체하는 것들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데에 있었다” (같은 책, 215면). 그들의 진실된 삶은 모든 것을 완전히 드러내는 삶으로서, 삶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또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푸코는 견유주의자들이 가진 전투성을 단지 추문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만 찾고 있지 않다. 그에게 있어 개의 삶이 지닌 두 가지 또 다른 측면은 주류 사회에 대항하고 싸우는 견유주의자들의 용기를 잘 예시해준다. 견유주의자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사회 제도와 관습에 대해 개처럼 짖어대고 물어 뜯는다. 그에 더해 견유주의자들은 진실된 삶을 부지런히 지키는 수호견이기도 하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견유주의자들의 전투는 자발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전투이자 직설적인 공격이다. 그것은 인류 전체—즉 변화시켜야 할 지평이자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실제 삶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서, 인류의 도덕적 태도 (에토스)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그러한 변화를 통해 인류의 습관, 관습, 삶의 방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같은 책, 258면). 푸코가 견유주의자들의 실천에서 전투적 삶으로 파악한 것은 스스로와의 싸움이자 스스로를 위한 싸움이며, 타인과의 싸움이자 타인을 위한 싸움이다. 그는 견유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철학을 전투성으로 개념화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전투성으로서의 철학에 매우 개방적이고 격렬한 형식을 부여했다고 결론 짓는다.

견유주의자들은 삶에 집중하고 진실 말하기를 진실된 삶과 아우르려는 자세를 소크라테스에게서 이어 받지만 동시에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들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공격하여 그것을 새로이 하려 하였고, 또 자신을 돌보는 행위를 인류 전체를 돌보는 행위로부터 분리하거나 자아에 대한 통치를 타인에 대한 통치로부터 구별짓는 것을 거부하였다. 진정한 삶, 새로운 삶, 변모된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이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Courage 227, 288면). 푸코는 이러한 전투성에 상응하는 것이 19, 20세기의 혁명적 행위와 혁명적 삶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푸코는 삶정치적 (biopolitical)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견유주의자들이 삶 자체를 정치적 행동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전투성은 삶정치적인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푸코가 일관성있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 삶권력(biopower)과 삶정치 (biopolitics) 라는 용어를 구분지어 설명하고자 한다. 푸코가 1970년대 후반에 분석하기 시작하는 삶권력은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행사되는 권력으로서, 죽이고 없애기 위한 권력이라기보다는 의료 행위, 성적 규제, 유전 실험, 인종 정책, 의료적 패러다임, 경제 체제 등을 통해 삶을 생성해내고 유지하는 권력이다. 반면 푸코가 견유주의자들의 전투성에서 발견하는 삶정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에 대해 접근한다. 그들은 지배적인 통제의 방식을 파괴하고, 자신과 타인을 위한 새로운 삶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내고자 애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삶정치는 삶권력과 다를뿐 아니라 그것을 공격하는 주된 무기에 해당한다.

물론 삶권력과 삶정치와 같은 용어를 고대 그리스에 투사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푸코는 자신이 견유주의자들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전투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시대착오적 용어 사용은 푸코가 궁극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이 고대 세계가 아니라 현대 세계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기능을 한다. 그가 칸트 다시 읽기를 통해 강좌를 시작하며 강조했듯이, 그의 목표는 현재를 이론화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에 대한 존재론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는 푸코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를 낯설게 하여 새로운 각도로 그것을 조명할 수 있는 수단—위험한 현재의 문제를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 거리—을 제공했다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고대 그리스 사상의 세 시기를 잇는 두 개의 중요한 과도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푸코의 고고학의 전반적 궤적을 살필 수 있다. 첫번째 과도기에 대해 고찰하며 푸코는 진실 말하기와 민주주의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페리클레스와 아테네의 민주적 정치 담론 (5세기) 으로부터 진실 말하기와 민주주의가 완전히 양립 불가능하고 자신을 돌보고 아는 행위에서 진실을 실천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담론 (4세기) 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식으로 삶에 초점을 두는 태도는 두번째 과도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여, 이제 견유주의자들은 진실된 삶이란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투적 삶정치라고 제시하면서 윤리학에서 다시 정치학으로 나아간다. 결과적으로 푸코는parrhesia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치에서 윤리로 옮겨가고, 그리고 거기서 다시 정치, 아니, 삶정치로 돌아오는 순환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셈이다.

푸코는 이 궤적이 견유주의자들에게서 끝나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시간이 모자랐고 마지막 세션이 있은지 두 달도 채 못되어 죽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강의를 적절하게 매듭짓고 자신이 앞서 제기한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혹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여기서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두 가지 문제, 즉 민주주의와 비판의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를 훑고 지나가는 푸코의 고고학의 궤적은 민주주의의 문제가 세번째 단계에서 견유주의자들에 의해 해결될 것임을 시사한다. 5세기 아테네에서의 parrhesia를 다루며 푸코는 자신의 분석작업의 상당 부분을 진실 말하기와 민주주의 사이의 호혜적 관계에 할애한다. 그는 다음 시기의 소크라테스를 독해할 때도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진실 말하기에 대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견유주의자들을 다루는 강연에 이르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주요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견유주의자들의 전투적 삶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진실된 삶으로서의 parrhesia와 양립 가능한 민주주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푸코는 민주주의의 개념을 떠받칠 사회 구조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견유주의자들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찾지 못했다. 푸코가 견유주의자들에 대해 느꼈던 정치적인 열의는 우리가 그것을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가 맨 처음 강의에서 제기한 소수성의 탈출이라는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여길 때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가 칸트를 독해하며 특히 우려했던 것은 지적,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의 권위가 소수성으로부터의 탈출, 다시 말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획득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그가 견유주의자들의 전투적 삶에 그토록 매혹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권위를 휘두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경멸과 비웃음을 불러오는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회 제도와 관습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가치를 탈가치화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던 것 같다. 말하자면 견유주의자들의 전투적 삶은 전위적 기구로서 다른 사람들의 삶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일부로서, 그리고 남들에게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로 사회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애썼다. 하지만 전투성에 대한 이러한 입장을 민주주의 제도와 실천으로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푸코를 넘어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견유주의자들의 전투적 삶은 푸코에게 있어 주요한 이론적, 정치적 개입의 방식으로서의 비판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전투성은 비판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푸코는 견유주의자들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행동을 통해 얼마나 격렬하게 지배적인 사회 가치와 사회기구를 공격했는지 설명한다. 개와 마찬가지로 견유주의자들은 울부짖고 물어 뜯는다. 그렇다고 전투성이 비판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전투성은 동시에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거나 적어도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달리 말해, 전투성은 통치성과 관련하여 비판과는 전혀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 푸코가 지적하듯이, 비판은 대단히 많이 혹은 이리저리 통치되지 않는 기술을 목표로 하는 반면, 전투성은 통치하기는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여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자신의 2년 동안의 강연들에 붙인 일반 제목인 “자아와 타자들의 통치”를 내가 이해하는 방식이다.

내가 생각할 때 푸코의 삶정치적인 전투성이 오늘날의 이론에 대해 가장 커다란 도전과 함께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새로운 영역을 더 깊이 발전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이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려면 우리는 거의 푸코의 도움 없이 해야만 한다. 내가 볼 때 그러한 탐구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최근 몇 년간 학계 안팎에서 대두된 다양한 형태의 전투성에 대한 연구들로서, 이들은 이론의 위치와 지식의 생산이 사회적 투쟁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푸코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창안해야 할 이론은 삶정치적인 전투성으로서의 이론으로서,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투쟁하는 한편 현재의 세계를 등지고 신세계를 향해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와 같은 전투성의 개념은 통치의 정도와 방식을 제한하는 비판의 기능을 훨씬 넘어 새로운 형태의 통치의 장을 열어 놓는다.

원문 출처: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110:1 (Winter 201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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