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세계에 내재한 신, 삶의 존엄성 / 이성혁

톺아보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2:18
조회
296
세계에 내재한 신, 삶의 존엄성


이성혁 (문학평론가, 『미래의 시를 향하여』 지은이)


* 편집자 주 : 이 글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6년 8월 13일 토요일 저녁 7시에 열린 "제1회 톺아보기 ― 유채림 작가의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웹진 <문화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 http://goo.gl/JMUkZA )


유채림 소설가의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는 ‘오쿠바’(어금니의 일본어)라고 불리던 한 인간-정원탁-이 폭력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형성했으며 또 파괴됐는지, 그리고 그 파괴된 삶을 어떻게 재건해 나갔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1972년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구속된 후 고문으로 범행을 자백하여 억울하게 1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정원섭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알고 있다.(이 사건은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이 정원섭 씨의 삶을 어느 정도로 사실대로 재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살인누명이라는 골격을 제외하면 모든 게 상상력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짐작으로는, ‘살인누명’ 사건뿐만 아니라 ‘오쿠바’가 겪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실화가 아닐까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플롯이 다소 느슨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장편 소설의 소설가는 허구를 통해 주인공의 인생을 구성하면서 플롯을 긴밀하게 엮어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드라마틱한’ 플롯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 바, 그것은 소설의 뼈대를 실화 ― 정원섭 씨의 실제 삶 ― 에서 가져왔기 때문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중심부를 이루고 분량 면에서도 반을 훌쩍 넘는, 살인누명사건 이전의 오쿠바의 삶을 전적으로 허구를 통해 구성했다면, 소설은 저 누명사건이라는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인누명사건과 오쿠바의 그 이전 삶은, 소설 속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구성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개인의 의지를 벗어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묻는다는 면에서는, 살인누명사건 이후 오쿠바의 삶과 그 이전의 오쿠바의 삶을 구성한 사건들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선 후술할 것이다.) 구성이 긴밀하게 엮이어 있지 않다는 면을 들어 이 소설의 흠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작가가 정원섭 씨의 실제 삶의 골격을 훼손하지 않으려 했기에 나타난 현상이며, 또한 도리어 이 소설의 특성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작가가 억지로 ‘드라마’를 꾸며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순전한 허구로 플롯을 짰다면 오쿠바의 첫 사랑 영치는 소설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영치는 소설 중반에 사라져버린다. 그야말로 행방불명된다. 독자는 다만 이승만 정부의 한강대교 폭파 시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실화를 플롯의 골격으로 삼았든 아니 삼았든, 이 소설은 오쿠바라는 한 개인의 삶과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한국 역사의 전개 - 특히 한국전쟁 초반이 집중적으로 묘사된다 ― 를 엮으면서, 폭력적인 한국 정치사와 그 속을 관통하며 살아간 한 평범한 인간이 삶의 존엄성을 어떻게 획득해 나갔는지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오쿠바가 사진작가를 꿈꾸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진 예술은 증언의 미학을 보여준다. 김구의 장례식과 한국군의 서울 재탈환 직후의 광장에 오쿠바가 사진기를 들고 나가 역사적 현장을 담아내고자 했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는 것은,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현장뿐만 아니라 오쿠바의 첫사랑 영치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창경원에서의 스냅사진 찍는 장면 역시 상세히 묘사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작가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일상의 소중함 역시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현장을 붙잡고자 하는 오쿠바의 모습은, 결국 유채림 작가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오쿠바라는 한 개인의 삶을 그려내면서, 해방 이후 분단과 그 고착, 테러 국면, 한국 전쟁, 4. 19 시민 혁명, 유신 시대를 증언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작가는 폭력적인 역사 속에서 힘겹게 삶을 꾸려나갔던 한 평범한 인간의 생존기를 통해 삶의 존엄성을 담아내려고 했다. 한 인간의 삶은 질서 잡혀 있지 않다. 삶에서 기쁨과 슬픔의 마주침은 불쑥불쑥 일어난다. 특히 역사의 폭력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게 되면, 기쁨은 급격하게 슬픔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오쿠바가 자신의 첫사랑 영치와 사랑이 맺어질 무렵 한국 전쟁이 터지고, 오쿠바는 영치와 영원히 헤어져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이후, 그는 우연히 동물원에서 길 잃은 아이를 돌보게 되면서 강은호와 새로운 사랑을 맺게 되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혼 이후 오쿠바는 행복하게 삶을 살 수 있엇다. 하지만 그 행복은 계속되지 못했다. 오쿠바는 큰 아들 재무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며, 더 나아가 살인강간 사건의 범인으로 날조되어 무기징역을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삶의 난장 속에서 오쿠바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밝혀내고자 결심한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그는 넥타이를 세 번이나 맬 만큼 지독한 고통과 절망을 겪으면서 도리어 살아갈 의미와 힘을 역설적으로 찾아낸 것이다.(넥타이를 맨다는 말은 감옥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는 것에 대한 감옥 내 은어이다.) 삶의 존엄성은 삶이 가장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릴 때 역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욥기에 대한 담론이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오쿠바에게서 삶의 존엄성은 영웅적인 면모를 가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쿠바에게 대통령상을 안겨준 “꽃가마에 오르면서 눈물 흘리던 신부의 사진”(333)인 <아픔>이 “경사에 흘리는 눈물의 역설”(333)을 보여주고 있다면, 소설에서 전개된 오쿠바의 삶은 거대하고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의해 철저하게 짓눌리고 파괴된 한 가냘픈 삶이 그 폭력보다 더 거대한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국 근대사의 폭력적인 장면을 증언하면서도, 그 역사적 사건에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의미는 확실하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쿠바의 신학적 고민의 과정이 그 의미를 암시한다. 오쿠바가 폭격에 의해 죽은 인민군의 시체를 보았을 때, 그는 “분노와 원망과 두려움과 슬픔을 안고 죽어가는 인간을 신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며 결국 “악이 신을 압도했”(254)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과 고뇌는, 신학도가 된 오쿠바가 오늘날에도 한국 기독교에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근본주의’ - “신은 뜻대로 세상이 굴러간다고 믿기에 도대체 어둠에는 관심이 없”(338)는 -로 빠지지 않도록 만든다. 그리고 좌절에 좌절을 겪고 난 이후 결국 그가 자신의 무죄를 인정받았을 때, 그는 “이 사건은 용기를 잃지 않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이에요. 신에게 감사한 건 인간이 일으킨 사건을 두고 나와 내 이웃들이 꺾이지 않도록 용기를 주셨다는 것”(429)임을 깨닫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미에 대한 오쿠바의 마지막 깨달음은 역사의 폭력에 대해 꺾이지 않는 삶의 존엄성과 그 의미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이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이 소설은 신앙의 의의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그 때문에 이 소설에서 청소년기의 오쿠바가 교회에 다니면서 일어난 에피소드가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이 이덕열 변호사가 그의 부인이 신앙생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무죄를 인정받은 오쿠바가 신의 의미와 인간의 의지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진술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도, 이 소설의 얼개와 주제가 폭력의 역사와 고통의 삶 속에서 신의 존재가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둘러싸고 형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 소설을 종교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쿠바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 속의 한 인간이 역사를 딛고 만들어낸 ‘기적’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쿠바가 감사를 표한 신은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다. 신은 어떤 계시처럼 드러나는 삶의 존엄성, 그 용기와 힘에 대해 이름 붙여진 것이다.

삶의 존엄성은 개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에 내재해 있는 힘이며 그래서 신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 신은 ‘인간의 의지’를 통해 현현한다.(서술자는 오쿠바를 면회 온 김재준 목사를 “인간의 얼굴을 하고 온 신”(409)이라고 표현한다.) 신에 대한 회의 ― 특히 오쿠바는 큰아들 재무의 죽음으로 신에 대한 회의가 극에 달한다.(시민이 승리한 1960년 4월 26일에 태어난 재무의 죽음은 시민혁명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 에도 불구하고 오쿠바의 짧은 행복과 기나긴 지독한 불행의 삶은 인간과 신의 관계와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그는 국가 권력과 역사의 폭력에 의해서도 꺾이지 않는 삶의 존엄성을 체화한다. 폭력에 의해 짓이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선사한 용기를 체화해나가는 삶의 존엄성, 소설에서 그려진 오쿠바의 삶은 이 존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오쿠바뿐이겠는가? 삶의 존엄성을 체화하면서 살아가는 삶들은. 한국의 신자유주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저항을 통해 그 존엄성을 체화해나가고 있지 않는가? 하여, 오쿠바의 삶을 그려낸 이 소설이 결코 오쿠바 한 사람의 인생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저항하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 ― 인간의 얼굴로 드러나고 있는 신 ― 을 떠올리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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