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호] 과학은 하늘이다. 종교는 땅이다: 브뤼노 라투르와 신학에 대한 객체지향 접근법 / 『사변적 은혜』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8-02 15:53
조회
276
 

과학은 하늘이다. 종교는 땅이다: 브뤼노 라투르와 신학에 대한 객체지향 접근법


『사변적 은혜』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자 : 애덤 S. 밀러
번역 : 안호성 (『사변적 은혜』 옮긴이)
강연 일시 : 2024년 7월 20일 토요일 오전 10시 ZOOM



도를 배운다는 것은 나를 배운다는 것이다.
나를 배운다는 것은 나를 잊는다는 것이다.
나를 잊는다는 것은 만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도겐 선사



1. 서론


벌써 40년째지만, 저는 거의 일요일마다 3시간을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이는 거의 6천 시간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그 모든 헌신적인 시간 동안, 저는 초자연적인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제 경험은 예외라기보다는 규칙에 좀 더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주일 예배의 목표가 심우주로 가는 직통선을 여는 것이라면, 종교는 그야말로 대실패입니다. 우리의 노래와 의식이 효과가 없는 것이거나, 우리가 그것들을 잘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설교와 성찬은 효과가 있지만, 너무 명백하기에 눈에 잘 띄지 않는 다른 종류의 일을 눈앞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만약 매주 제가 그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특별한 효과를 가져올 신현theophany, 神顯을 결코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생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종교를 평가하는 제 척도가 억 달러 예산의 할리우드급 과학소설이라면, 종교에 대한 제 평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만약 하늘이 이제는 명백히 과학(그리고/혹은 소설)의 영역이라면, 우리가 처음부터 무언가를 혼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브뤼노 라투르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태양과 달, 별에 관해 알고자 한다면, 저는 과학으로 눈을 돌립니다. 하지만 제가 발밑의 일상적 세계와 연결되고자 한다면, 저는 교회에 갑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하늘이고 종교는 땅입니다.


2. 라투르의 접근


라투르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진리들이 발견되거나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진리들은 구축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진리를 다루는 이런 방식은 진리에 관한 몇 가지 상식적인 가정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특히 두 가지 가정에 위반됩니다. 첫째로, 모든 것이 공유하는 깔끔하게 미리 형성된 세계는 단 하나뿐이며, 둘째로, 진리는 이미 결정된 것의 정확한 반영일 따름이라는 가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그림은 잠시 잊어버리세요. 다른 모델로 실험해 보겠습니다.


라투르의 촉구에 따라, 대신에 공-영원한co-eternal 행위자들의 복수성을 가정하고 시작해 봅시다. 더 나아가, (1) “현존한다는 것”은 “행위자로 있다는 것”이 될 정도로 행위성이 모든 곳에 있고, (2) 행위자는 무시간적이고 자족적인 원자가 아니라 다른 행위자들의 지저분하고 역동적인 회집체이며, (3) 세계는 미리 형성된 용기가 아니라 행위자들의 활동적인 회집체이고, (4) 그 결과로 숫자 없는 세계들이 있다고 주장해 봅시다.


라투르에게 형이상학은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이며, 단수적이기보다는 다수적이고, 전 지구적이기보다는 국소적이며, 중앙화되어 있기보다는 분산되어 있고, 순수하기보다는 지저분하며, 강하기보다는 약하고, 왕권 체제기보다는 민주적이며, 선시간적이보다는 역사적이고, 원본이라기보다는 재활용된 것입니다.


이 모델에서 진리들은 하나의 진정한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들은 새로운 세계를 제작하고 새로운 행위자 연합을 회집하는 어려운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진리-제작은 창조 작업입니다. 진리-제작은 인식론적이기보다는 존재론적입니다. 진리-제작은 미리 회집되어 있지 않은 행위자들 사이에 다리를 구축하고 행위자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입니다. 진리들은 공들여 회집되고 유지되는 연합입니다.


“객체”라는 단어를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사물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객체는 행위자이고, 모든 행위자는 연합이며, 모든 연합은 진리입니다.


연합으로서, 진리들은 만들어져야 합니다. 진리들은 여느 고속도로 다리나 배관이 설치된 변기와 마찬가지로 견고하게 그리고 물질적으로 구축되어야 합니다. 진리들은 공통의 대의를 통해 행위자들이 구체화됨으로써 구축됩니다. 진리들은 매끄러운 하향식의 단조로운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들은 어렵게 얻어지는 상향식의 다방면 합의입니다.


어떤 진리는 크고, 어떤 진리는 작습니다. 어떤 진리는 의지할 수 있지만, 어떤 진리는 깨지기 쉽습니다. 어떤 진리는 강하지만, 어떤 진리는 약합니다. 어떤 진리는 쉽게 이식할 수 있지만, 어떤 진리는 장르에 의존적입니다. 진리의 척도는 정확한 반영이라는 수동적인 허영심이 아니라 그 진리를 구성하고 그 진리에 의지할 수 있게 보장하는, 회합하는 수많은 행위자의 규모, 다양성, 응집력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다시 진술해 보겠습니다. 어떤 진리의 상대적 강도는 (1) 그 진리의 연합에 회합한 행위자들의 , (2) 그 연합에 회합한 행위자들의 다양성(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물질과 형상, 문화와 자연), (3) 이 행위자들을 모으는 합의의 내구성에 의해 측정됩니다.


진리는 결코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닙니다. 하나의 진리를 측정할 수 있는 근원적 “전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진리는 그 진리에 축적된 지지의 양, 다양성, 내구성에 따라 그 강도가 지표화됨으로써 측정됩니다.


모든 진리는 이러한 같은 기준에 따라 판단됩니다. 과학은 시보다 생래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으며, 역사는 수학보다 생래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고, 종교는 정치보다 생래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으며, 이를 다른 영역에도 계속 적용해 갈 수 있습니다. 모든 분야는, 연합 구축을 위해 그것들이 도입하는 전략은 다양하지만, 동일한 종류의 주장을 빚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행위자들을 협력자들로 주장할 수 있는 타협안을 빚기 위해 경합합니다. 상공을 표류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그 진리가 어떤 높이까지 도달하든 간에, 참값을 가진 진리입니다.


세계는 미리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경합하는 행위자들의 범람이며, 진리는 시장입니다. 어떤 진리가 출현할 때, 그 진리는 일반적으로는 서로 어긋나는 행위자들의 나열에서 크로스-플랫폼cross-platform 호환성을 협상함으로써 출현합니다.


진리들은 동의를 유도하고, 서명을 모으며, 행위자들의 집합을 기능적 단순화로 요약합니다. 조작하는 것이 된 단순화로서, 진리들은 다른 진리들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도 완전히 양립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진리는 방대한 잔재를 남깁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연합으로서의 하나의 진리는 조작화된 단순화입니다. 진리는 다자를 묶어 하나로 작동하도록 설정합니다.


여러분이 북극의 만년설은 불안한 속도로 녹고 있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 주장을 시도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주장이 내구성 있게 주장할 수 있는 협력자의 수와 다양성만큼만 참일 것입니다. 몇몇 인간에게만 설득력이 있는 진술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그 주장을 가지고 멀리 갈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빙산에 관해 진실하게 말하고 싶다면, 동료 과학자, 영향력 있는 정치가, 혹은 심지어 중산층 어머니 무리를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견인력을 가지려면, 여러분에게는 빙산 자체가 여러분의 주장 뒤에 줄을 서도록 설득하기 위한 충분한 연구 지원금, 측정, 기구, 사진, 전초 기지, 통계, 도표, 인공위성 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여러분이 꿀에 관한 주장을 세우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위자들 정렬에 양봉업자뿐만 아니라 꽃과 벌집, 꿀벌도 줄을 세워야 합니다. 동의하는 꿀벌들이 많을수록 여러분의 주장은 더욱 튼튼해집니다. 비인간 행위자들도 인간들만큼이나 진리를 구성하는 데 많은 발언권을 갖습니다. 사실, 한 진리의 내구성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작업에 항변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양에 의존합니다. 왜냐하면 비인간들이 사람보다 훨씬 속이기 어려운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좀 더 속기 쉬운 경향이 있는데, 특히 권위와 마주쳤을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관한 한, 권위에 대한 호소는 그러한 권위가 동원할 수 있는 대중만큼의 무게만 지닙니다.


부재한 신, 천사, 플라톤주의적 형상, 자연법칙, 혹은 본체적 사물-그-자체가 후원하는 진리를 포장하는 피상적 호소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습니다. 진리는 마법 왕국의 영역이 아닌 평범한 민주주의의 산물입니다. 투표를 하려면 여러분은 투표소에 방문해야 합니다. 누구도 거부권을 갖지 못합니다. 과학자, 변호사, 교사, 의사, 정치가, 종교 지도자, 기업가 같은 사람들이 종사하는 진리 제작 작업은 표를 얻기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이 작업을 건너뛰는 형이상학적 지름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물이 어떠한지에 관한 기술적 주장이 아니라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규범적 주장을 하고 싶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작업은 동일합니다. 도덕과 가치, 의무는 무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가 그렇듯, 그것들 역시 지저분하고, 역사적인 상황 속에 놓여있으며, 국소적이고, 임시적이며, 신생의 합의입니다. 그것들 역시, 관련된 행위자들의 수가 어떻든, 그 행위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향식 협상의 잠정적인 산물입니다.


또는 여러분이 지구의 나이가 6천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요구하는 「창세기」에 대한 훌륭한 독해를 제공하고 싶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이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꺼이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하위집합이 여러분의 독해를 따르도록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인간들도 설득되어야 합니다. 화석의 의견은 중요합니다. 탄소14는 발언권을 얻습니다. DNA에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지질학적 형성물들은 무시될 수 없습니다. 만약 45억 년 동안 있었던 암석과 날씨, 방사능 붕괴가 반대한다면, 여러분의 독해는 심각한 결함을 지니는 것입니다.


현실적 돌덩어리 현실적 문자의 물질적 행위성을 무시하는 “직서적” 독해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허무주의에 얽힌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대한 독해가 결함 없이 반복되는 데 실패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기를 실패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에 대한 독해는 그 독해가 더 이상 단어와 돌덩어리를 독립적인 역사, 궤적, 약함, 그리고 그 자체의 마찰을 가진 행위자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 참이기를 실패합니다. 독해는 광합성이나 유사분열mitosis, 또는 구름형성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해석의 척도는 간단히 말해서, 어떤 행위자들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다양하게, 얼마나 오랫동안 소집해내는가입니다. 회복해야 할 근원적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설득해야 할 행위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입니다.


이 작업의 필연성은 애석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세계는 진리를 구성하는 것이 우리를 사물 그 자체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계는 진리를 제작하는 지저분한 작업에서 우리 자신을 추출하는 것이 우리를 사물에 더 가깝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재적인 것은 그 자체로 경합하는 구성 프로젝트들의 복수성으로 특징지어지기에, 경합하는 진리들의 복수성은 실재적 행위자들 사이에 실재적 다리를 구축하는 존재론적 작업의 핵심적인 부분일 따름입니다.


과학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경쟁적이고 완전히 양립 가능하지는 않은 과학적 진리들의 다수성은


과학자들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자연적인 객관적 사실 소재”라는 기성 개념이 너무 빨리 융합했던 것, 즉 실재, 통합성, 그리고 논쟁 불가성을 분리해 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신이 첫 번째 항목을 찾는다고 해서 다른 두 항목이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동일한” 사물에 대한 “여러 관점”이 허용하는 “해석적 유연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수로 전개될 수 있도록 허용하며, 따라서 다양한 관점을 통해 파악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사물 그 자체이다.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116)


우리의 진리들이 오직 부분적으로 양립 가능한 다수성보다 결코 더 잘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세계 자체의 단순한 “통일성”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으므로 실재적인 것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반대가 참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계는 단순한 통일체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오직 부분적으로만 양립 가능한 진리의 다수성은 우리가 실재적인 것 자체의 다수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상하는 징표가 됩니다.


우리의 진리들의 상대성과 부분적 양립 가능성은, 실재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갈라진 지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진리는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작업입니다.


3. 비환원의 원리


진리에 대한 라투르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본 결과로, 우리는 라투르의 접근법이 지닌 핵심을 더 잘 전유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핵심은 “비환원의 원리”라고 불립니다.


라투르 버전의 비환원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거나 한 것이 아니다”(PF 158). 여기서 어떤 객체도 다른 객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참이지만, 어떤 객체도 부분적으로 다른 객체로 환원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 또한 참입니다.


객체들을 단일한 형이상학적 일반성으로 완전히 환원할 수 없기에, 우리는 객체들을 사전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객체는 다른 객체들의 다수체로 구성되고 그것과 관계되어 있기에, 모든 객체는 시험, 셈, 측정과 같은 간단한 수단으로 모든 객체를 다른 객체로 부분적으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라투르 정식의 탁월함은 그것이 환원과 환원 불가능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제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공리로서 두 가지 구별되지만 서로 연관된 주장을 세웁니다.


근원적 다수성을 감안할 때, (1) 어떤 객체도 다른 객체나 객체 집합으로 잔여물 없이 완전히 환원될 수 없으며, (2) 어떤 객체도 다른 객체나 객체 집합으로 부분적으로 환원되는 것으로부터 선험적으로 면제되지 않는다.


원리의 첫 번째 부분은 어떤 주어진 제목 아래로 객체들을 완전히 통일하는 것을 방지하기에 일자를 금지하고 다수성을 보장합니다. 모든 관계에는 언제나 포섭되지 않은 잔여물이 수반될 것입니다. 총체성으로서의 일자는 금지되었습니다. 원리의 두 번째 부분은 중첩 가능성과 소통 가능성을 보장합니다. 어떤 다수도 다른 다수로 부분적으로 환원되는 것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습니다. 원리적으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권적 예외로서 관계에서 면제되는 일자는 금지됩니다.


라투르는 이런 식으로 명시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비환원의 원리의 두 가지 반쪽을 (1) 저항과 (2) 이용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객체는 관계에 거부하는 동시에 관계를 위해 이용 가능합니다. 어떤 객체도 완전히 저항적이지 않으며, 어떤 객체도 완전히 이용 가능하지 않습니다. 객체는 이러한 저항적 이용 가능성의 이중-구속을 통해 지금의 그것으로 구성됩니다. 저항적 이용 가능성은 작업을 필요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작업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객체가 현존한다면, 그것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양립 가능한 관계 집합의 오직 잠정적인 통합체로 현존합니다. 객체는 어떤 전지구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부분들을 치환할 수 없으며, 치환될 수도 없습니다. 객체는 실재적이고 이용 가능하지만 비환원적으로 지저분합니다. 모든 객체는 원주율처럼 무리수인 것입니다.


4. 과학과 종교


비환원의 원리를 인정한다면, 과학과 종교 사이의 차이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라투르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모두 객체들을 현상학적으로 가시화하는 동일한 작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비환원의 원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객체의 가시성은 주어진 시선에 상대적으로 그 객체를 특징 짓는 저항과 이용 가능성의 가변적인 정도에 의존할 것입니다. 이미지를 개발하는 것은 객체의 저항과 이용 가능성 사이의 균형을 최적화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너무 저항적이거나 너무 이용 가능한 객체는 나타나는 데 실패할 것입니다. 이용 불가능한 것과 묵종하는 것은 모두 비가시성을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경우에, 객체는 너무 멀고, 너무 불투명하며, 너무 초월적입니다. 다른 경우에, 객체는 너무 가깝고, 너무 투명하며, 너무 내재적입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비가시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과학이 저항적이지만 불충분하게 이용 가능한 객체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종교는 이용 가능하지만 불충분하게 저항적인 현상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과학은 이용 불가능성에 대한 삼인칭 설명입니다. 종교는 명백한 것에 대한 일인칭 현상학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즉 과학은 우리의 근시를 교정하고 종교는 우리의 원시를 교정합니다.


이 분배 방식을 기억하세요. 라투르의 설명에 따를 때 종교의 장은 내재이고 과학의 수양은 초월입니다.


이러한 작업 분배를 통해, 라투르는 이제는 종교를 방해하는 데만 기여할 따름인, 잔재하는 기대의 그물망에서 종교를 풀어내려고 합니다. 라투르는 종교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사실상 종교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된 무언가의 낡은 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혼합”, 즉 정치학, 과학, 철학, 신화학, 심리학, 예술 등의 혼합을 갈망합니다(TS 217). 종교는 왕족이라기보다는 세계에서 작용하는 객체들의 다수성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기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다양한 유형의 진리 생성기” 또는 “발화 체제”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TF 28).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라투르의 독창성은 과학과 관련해서 종교의 책임을 능숙하게 재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수수하지만 여전히 실행 가능한 종교의 역할을 식별하려는 그의 시도에 있습니다.


라투르는 일반적으로 과학과 종교에 할당된 분업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오류의 희극인지!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이 벌어질 때 형용사는 거의 정확히 뒤바뀐다. 저 너머의 비가시적 세계에 도달하고, 영적이며, 기적적이고, 영혼을 고양시키며, 희망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이다. 그리고 국소적이고, 객관적이며, 가시적이고, 평범하며, 기적적이지 않고, 반복적이며, 완강하고, 견고한 것으로 특정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이다. (TF 36)


신중하게 구성되고, 세심하게 시험되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참조 사슬의 유약한 다리를 구축하는 것은 과학의 작업입니다. 어두운 저 너머를 더듬어 나가 우리를 머나먼 곳,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로 인도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기적적인 것을 후원하고, 반직관적인 것을 옹호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발굴하고, 저항하고 이용 불가능한 것과 협상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나 저항적이고 초월적인 것의 비가시성은 오직 한 종류의 비가시성일 따름입니다. 이용 가능하고, 명백하며, 낯익고, 국소적이며, 반복적이고, 견고하며, 사실적인 현상의 비가시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비가시성은 그 특징이 상당히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돌파하기 어렵습니다. “머나먼 곳 또한 가까운 곳만큼이나 낯설고, 닿기 어렵고, 비현실적이며, 그리고 덧붙이건대 비합리적입니다”(WS 465). 모든 비가시성이 단일한 종류로 환원되고 단일한 시선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혼란이 초래됩니다. 특히 종교적 현상에 적합한 비가시성이 과학적 현상에 적합한 비가시성과 동일하다고 가정될 때 혼란이 발생합니다.


저의 유비를 사용해 말해보자면, 라투르의 말을 따를 때 과학과 종교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혼란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과학은 우리의 근시를 교정하고 머나먼 초월적인 현상에 초첨을 맞출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큰 박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으로 가득 차 종교적 허세에 휩싸인 과학은 이웃에 관한 몇 가지 불쾌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은 종교에서 안경(우리의 원시를 교정하기 위한 안경)을 빌려 와 착용한 다음, 이 안경이 쓸모없다고 큰 소리로 불평합니다. 이 렌즈를 통해 보자, 과학이 어렵게 얻은 모든 초월적 객체들이 갑자기 흐릿해지거나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종교인과 과학자 모두가 일반적으로 따르는 잘못된 가정이란, 종교적 이야기는 과학이 기술하는 초월적 객체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과학 자체가 기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고, 훨씬 더 초월적이며, 훨씬 더 기적적인 “비가시적인 믿음의 세계”를 언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HI 433).


그 결과로 과학과 종교는 모두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초-초월적인 것에 관한 종교적 이야기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많은 종교인은 종교가 실제로 중요한 무언가를 환기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초-부조리함을 믿는 것으로 공공의 미덕을 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실천이 가진 힘일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라투르는 “믿음은 지식이 과학의 캐리커처인 것처럼 종교의 캐리커처”라고 주장합니다(TF 45). 이 캐리커처들은 모두 폐기되어야 합니다. 종교가 마법의 믿음을 다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명백한 사실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 두 ‘세계관’ 사이의 싸움, 화해, 휴전은 칠흑 같은 터널에서 벌어지는 권투 경기만큼이나 교훈적입니다”(WS 464).


과학과 종교 사이의 차이는 모호한 영적 문제에 적용되는 ‘믿음’과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물에 적용되는 ‘지식’이라는 두 가지 다른 영역에 행사되는, 서로 다른 정신적 역량에서 발견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개의 매개자 사슬에 적용되는 동일한, 광범위한 역량 집합에서 발견될 것이다. 첫 번째 사슬은 너무 멀고 반직관적이어서 직접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따름이기에 비가시적인 것, 즉 과학으로 이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슬인 종교적 사슬도 비가시적인 것으로 이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슬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그것이 숨겨져 있고, 암호화되어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갱신되기 어렵기에 비가시적인 것이다. (TF 46)


과학을 잘하는 데 필요한 역량과 종교를 잘하는 데 필요한 역량은 동일합니다. 실천자는 인내, 겸손, 끈기, 호기심, 집중력, 관대함, 창의성, 치밀함, 배려, 그리고 물론 객관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지식과 믿음은 과학이나 종교의 일을 기술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모두 동일한 역량을 요구하며, 과학과 종교 모두 동일한 출력을 생산합니다. 둘 다 드러냄revelation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우리의 근시안을 교정하여 초월적 객체를 드러낸다면, 종교는 우리의 원시안을 교정하여 내재적 객체를 드러냅니다.


5. 진화


진화를 사례로 취해 봅시다.


종교가 과학보다 과학을 더 잘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종교보다 종교를 더 잘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는 과학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자 모든 것의 혼합물, 모든 것에 대한 최종 선고로서의 종교라는 혼란스럽고 전통적인 관점을 흉내 낼 때 특히 그렇습니다.


종교에 대한 이 혼란스럽고 전통적인 취급은 과학을 위해 라투르가 싫어하는 안 좋은 환원주의의 모든 핵심적 특징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과학은 그것이 객체를 다른 객체로 깔끔하고 완전하게 환원하여 설명하는 정도까지 신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그 지향점에서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으로 남습니다. 설령 세속주의자나 무신론자를 자처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환원주의는 여전히 종교적인데, 왜냐하면 “환원주의와 종교는 언제나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 종교적 종교, 정치적 종교, 과학적 종교처럼 말입니다”(PF 190).


비환원의 원리는 이러한 실책을 방지하는 중요한 방법론적 안전장치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가 공리적으로 부여하는 수수함이 없다면, 종교와 과학은 모두 객체들을 어떤 단일하고 근원적인 거시적-힘으로 완전히 환원하는 매끄럽고 단순한 본래적-판타지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라투르에 따르면, 종교인과 과학자는 진화의 문제에 관해 서로의 입장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유사해서 서로 부딪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 다 진화의 현상을 외부의 거시적-힘의 노동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다수성의 작업에 대한 책임의 다수성을 빼앗아 갑니다.


라투르에 따르면 문제는 “신다윈주의자나 창조론자 모두 유기체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급진적인 소식을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WS 469). 그 결과, 살아있고 진화하는 유기체에는 결코 그 자체로 초점이 맞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기체는 한편으로는 작용인이라는 대규모 힘의 맹목적이고 치명적인 조작에 의한 국소적 꼭두각시일 따름이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이 설계한 목적인의 배려와 의도적 전개에 놀아나는 국소적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하나는 뒤에서 작용하여 되는대로 최적화에 도달하는 맹목적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미리 정의된 계획에 따라 유기체를 최적화로 이끄는 지성입니다 :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자신이 수행하는 일을 장악하는 두 명의 공학자입니다. 시계공이었던 그것들은 여전히 시계공인 것입니다”(WS 469).


둘 다 유기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을 놓칩니다.


확실히, 뒤편의 힘과 목적인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지만, 이 차이는 두 논증에서 모두 개별 행위자로서의 유기체는 지워지고 대신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필연성의 운반자로 변모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무색해진다. 각각의 유기체가 스스로를 유지, 영속화, 재생산할 때 직면하는 간극과 불연속성에 스며드는 창조성은 사라졌다. 맹목적이거나 지적인 시계공 없이, 최적화 없이, 계획 없이, (목적인이든 작용인이든) 원인 없이, (종교적이든 이성적이든) 어떤 종류의 섭리 없이, 각각의 개별 유기체가 재생산이라는 아찔한 부담에 직면해야 한다는, 다윈의 발견에서 매우 급진적이었던 점은 과학과 종교 간의 싸움에서 철저히 상실되었다. (WS 469)


이런 의미에서, 다윈의 발견이 지닌 힘은 결국 양 진영에 의해 흡수되고 효과 없이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과학과 종교 모두, 특히 서로를 비난하는 혼란 속에서, 다윈의 연구가 생명 자체의 전개에 대해 가시적으로 만든 것, 즉 다수성의 우선성, 유동성, 다양성, 충분성, 비환원성에 대한 드러냄을 놓칠 위험에 처합니다.


여기서 진화는 개별 유기체가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수행, 반복, 재생산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연쇄적인 부산물로서 개화합니다. 객체의 특징은


진화 생물학자들의 눈에는 불가피하게 명백했다. 여기서 수십억 개의 존재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필연성의 운송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간과 혈통에서의 불연속성과 간극을 건너며 반복의 위험을 겪는다. 그것들은 분명 수많은 원인과 수많은 결과에 직면하지만, 모든 지점에는 거기에 개입하는 수많은 독창성이 있으므로 원인과 결과는 서로 잘 일치하지 않게 된다. 창조성은 모든 시점에 스며들어 자연주의자들의 눈에 들어왔다. (WS 468)


다윈은 객체의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넘치는 창조성을 계열체적인 방식으로 드러냈습니다. 다윈은 객체들 자체의 한가운데서 세계적 수준의 과학을 수행하였고, 멀고 어려운 것을 가시화하고 이용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윈의 과학과 동일한 노동 분야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과학은 종교조차도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라투르는 종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종교가 언제나처럼 진화를 반대하거나, 제한하거나, 흡수하기보다는, 진화가 현대 세계에서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대화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라투르가 묻기를, “만약 지금, 종교가 다시 무대로 소환되어 (영구히 사라진) 자연을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유지하고 영속시키는 위험한 사업에 착수하는 존재자들로 구성된 세계를 조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WS 467). 만약 종교가 이 토착적 행위성을 당연히 여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과는 객체지향 신학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이어 생물학자들이 객체지향 신학을 조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물학자들이 진화가 거짓된 초월, (맹목적이든 지적이든) 설계자의 거짓된 영성으로 재포장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종교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WS 470)


라투르에게 “종교는 진화(또는 더 일반적으로 재생산)를 어떤 강탈(그리고 최상의 의미나 최적화를 향한 추구)로부터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 명백합니다(WS 470). 종교와 과학은 협력하여 이러한 음모론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주어졌더라면, 다윈과 그의 아내는 모두 더 편히 잠들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6. 믿음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의를 온전히 종교로 돌려봅시다.


위의 모델에서, 종교는 객관적입니다. 그것은 객체들로 만들어져 있고, 객체들에 의해 실천되며, 객체들을 드러내기 위해 실천됩니다. 객관적 특징과 멀어지면 종교는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를 수행합니다. 라투르가 보기에, 종교를 “믿음”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이 씁쓸한 패러디에 힘을 실어주는 실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종교적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종교를 활성화하는 너무나-내재적인 객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종교에 부여한 임시방편적인 설명입니다. “믿음이라는 개념은 정보-전달의 궤적을 종교적 매개자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HI 433).


종교의 멀고 초월적인 현상을 찾기 위해 과학의 렌즈를 사용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종교는 틀림없이 환상일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됩니다. 단 한 가지 종류의 비가시성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고수한다면, 종교는 초-부재한 무언가를 믿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 외에 무슨 선택지가 있을까요?


우리의 눈앞에서 종교적 믿음에 대한 비종교적 믿음이 탄생합니다. “따라서 믿음에 대한 믿음은 시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종착점이 없는 무언가에 접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자선적인 구성입니다. 믿음은 근거 없는 지식의 모방입니다”(TS 231).


빈곤한 자의 과학으로 여겨진 종교는 빈곤한 과학으로 밝혀집니다. 라투르가 말하기를, “우리는 ‘믿음’이란 멀리 있는 것에 접근하기 위해 어떤 기구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러한 기구는 없습니다!”(WS 465). 종교는 실제로 초월적 객체를 보는 데 필요한 기구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과학과 정확히 똑같다고 말해집니다. 이는 종교가 전혀 과학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투르는 계속합니다. “좀 더 논쟁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적 네트워크에 몰입하여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다고 믿은 사람들만이 유일한 신자입니다”(HI 433). 그렇게 파견된 종교는 완화되지 않은 환원주의의 술책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서 허용되지 않는 한 가지는 종교적 객체가 스스로를 대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자신이 행하는 환원을 포함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근대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비판을 향한 그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속한 대담한 기업의 손댈 수 없는 중심인 믿음을 손대지 않고 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믿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믿는다고 믿습니다”(PH 275). 그 결과, 종교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고, 믿음은 소박한 것으로서, 무비판적 수동성의 모델로 여겨집니다.


라투르가 매우 반대하는, 세계와 우리의 믿음은 별개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의해 객체로부터 분리된 종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숨어 있거나 깊은 우주의 공허함 속으로 접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그리고 나는 여전히 기독교 신학과 의식에 의해 정제된 의미로 그 용어를 사용한다)는 자연과 그다지 잘 지내지 못했다. 자연이 들어오면, 종교는 떠나야 했다. 그리고 종교가 떠날 때, 그것은 영구히 떠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종교가 두 가지 동등하게 치명적인 출구 전략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출구 전략이란, 하나는 영혼의 내적성소로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해결책은 자연의 세계가 스스로에게 버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해결책에서는 비체화된 인간 영혼은 계속 줄어들고 있는 영적 관심사를 돌보는 데 남겨질 것이다. 두 번째 출구는 종교가 멀리 있고 비가시적인 것에 접근하기 위해 정렬된 매우 효율적인 수단인 과학적 기구를 모방하려는 헛된 시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훨씬 더 비생산적이다. (WS 465)


이러한 출구는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막다른 길입니다. 라투르가 주장하기를,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신자가 언제나 주장해 왔듯이 사람들을 행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더 경험론적이고, 아마도 더 과학적이고, 더 존중적이며, 훨씬 더 경제적일 것입니다”(RS235).


종교적 객체를 “신자들의 정신이나 그들의 비옥한 상상 속으로 밀어 넣거나, 다소 도착적이고 비뚤어진 무의식 속에 더 깊숙이 박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적 객체가 있던 곳, 즉 비인간의 다수성 속에 그대로 두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PH 284).


종교적 현상이 과학적 분석에 의해 — 모든 객체가 그렇듯이 — 부분적으로 환원되기 쉬운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참이지만, 이런 종류의 분석조차도 종교적 객체에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객체는 자신을 대변할 수 있도록 과학자 종교인 양쪽에 의해 허용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객체는 고유한 종교적 작업을 수행하는 행위자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이 작업은 모든 작업과 마찬가지로 저항적 이용 가능성의 이중구속과 씨름해야 하지만, 나름의 궤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투르는 만약 자신이 종교적 객체를 “정보 전달의 무리한 획일화”로 몰아넣었다면, “나는 그것을 부조리한 믿음, 즉 종교를 짓누르고 과거 몽매주의의 쓰레기 더미로 미끄러지게 하는 종류의 믿음으로 역변시키고, 변신시켰을 것”이라고 말합니다(TF33). 이런 종류의 처분은, 종교적 객체의 행위성을 무시하려는 원래의 움직임이 지닌 부조리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너무 멀리 있는 객체가 아니라 너무 가까운 객체를 비추는 것을 지향합니다. 종교는 이미 이용 가능한 것을 현재화하는 작업입니다. 종교적 서사는 우리를 머나먼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의 가까움을 행화enact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가까움을 행화하는 것이 현재를 구하고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열쇠입니다. “두 연인의 역사 전체가 관계가 소원해진 어두운 순간에 서로에게 손을 뻗으며 사랑하라는 지시를 다시 행화할 수 있는 능력에 달린 것처럼, 그 이야기의 진리치는 오늘 밤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TF33).


이러한 종류의 종교적 작업에는 어떤 최소한의 기구와 관행이 포함되지만, 이러한 기구와 관행은 과학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종교적 기구는 유사하게 광범위한 역량 집합을 요구하지만, 과학의 기구와는 종류가 다릅니다. 라투르는 이미 주어진 것을 재행화하고, 받아들이며, 다시 현재화하는 이 작업을 “과정procession을 형성하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객체는 과정을 거칩니다. 종교적 객체는 이용 가능한 것을 가시적으로 만듭니다. 천사처럼, 종교적 객체는 은혜의 자리에서 “진행”proceed하여 비가시적이지만 이용 가능한 그것의 현전으로 우리를 맞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그 자신을 모두 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나는 내가 기구라고 부르는 것, 즉 네트워크를 정렬하고 유지하는 것과 대조해서 과정의 층을 쌓고 형성하는 것을 천사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TS 225). 천사는 믿음의 문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사의 작업에는 믿음을 요구하는 부재한 종교적 객체가 없습니다. “종교는, 부재하는, 머나먼, 비가시적인 저 너머 사물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그와 같이 정의된 적도 없습니다. 신은 믿음-행위의 객체가 아닙니다”(TS231). 오히려, 종교는 전혀 다른 질서의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이미 이용 가능한 것이 되어 있는 은혜에 충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충실함만이 현전의 현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작업은 물론 신앙에 의존하지만, “신앙과 믿음은 서로에게 들려줄 말이 없습니다”(TS 231).


7. 영


그렇다면 라투르의 주장은, 종교의 드러내는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객체가 스스로를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축된 객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과학적 기대가 종교적 자기-이해로 역류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투르는 종교적 객체를 일축하는 종교적 객체를 향한 과학적 접근의 성상파괴론iconoclasm과 종교적 객체를 동결시키는 종교적 해학의 우상숭배idolatry 사이에서 “성상 사랑”iconophilia을 지지합니다. 성상 사랑은 너무 가깝고, 너무 내재적이며, 너무 이용 가능한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종교적 객체에 대한 접근법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객체 자체가 드러냄의 표적인 동시에 드러내는 행위자가 될 수 있게 하는 접근법입니다.


성상 사랑과 대조적으로, 성상파괴론자와 우상숭배자는 모두 순수성과 소진적 환원을 향한 충동에 굴복합니다. 둘 다 매개 없는 세계를 꿈꾸지만, 그 결과로 작업 중인 실재적 객체를 가립니다. 더 나아가, 둘 다 저항적 이용 가능성의 이중구속을 일축합니다.


우상숭배자는 구성적이지만 부분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객체들이 포장된 내부의 넘쳐흐르는 집합이 없는, 완벽하게 불투명한 객체를 꿈꿉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상숭배자는 객체가 참조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객체의 액면가로 객체를 환원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성상파괴론자는 완벽하게 투명한 객체를 꿈꿉니다. 그 꿈은 그 뒤에 있는 “실재적” 객체를 역변시킴이 없이 깔끔한 효율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상파괴론자는 진리에 대한 무매개된 접근, 이미지의 완전한 부재를 꿈꿉니다”(HI 421). 이런 방식으로 성상파괴론자는 객체를 그것의 현금 가치로 환원합니다. 성상파괴론자는 먼저 종교적 객체를 마치 마찰력이 없는 기호처럼 취급한 다음, 그 기호가 참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초월적 객체를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종교적 객체를 비워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종교적 객체는 그 자체로는 행위자가 아니며, 다른 무언가를 나타내는 신호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다른 무언가가 행방불명이기 때문에 종교적 객체는 공허한 신호입니다. “성상파괴론자는 세계의 거주자들을 모두 표상으로 바꾸어 세계를 비우는 동시에 연속적인 기계론적 물질로 채울 수 있습니다”(PH 285). 성상파괴론자에게 종교적 객체는 달콤한 초콜릿 중심에 대한 약속이 없는 딱딱한 사탕 껍질, 공허한 껍데기일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성상파괴론자의 실망은 객체 일반에 관한 소박한 태도의 산물입니다. 라투르가 주장하기를, “만약 성상파괴론자가 돌덩어리에 영혼을 부여할 만큼 소박한 신자들이 현존한다고 소박하게 믿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성상파괴론자 또한 자신이 우상을 깨뜨리기 위해 채택한 바로 그 사실들이 인간 행위성의 도움 없이도 현존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PH 274). 성상파괴론자들이 종교적 객체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적 객체에 특이하게 종교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객체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한 성상파괴론적 설명, 즉 종교가 어떤 초월적인 담보를 제공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불이행한 것으로 간주하는 설명을 채택한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에 대한 긍정적인 설명을 상징의 관점에서 만들어내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그 핵심에 있어 “상징적”이기 때문에 객체가 없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라투르는 이런 방향이 개선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종교를 종교의 현실적 객체로부터 끊어냅니다. “상징적인 것은 세계를 잃은 자들의 마법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물들이 ‘오직’ ‘자연적’이기만 할 수 없게 만드는, ‘객관적 사물들’에 ‘첨가적인’ ‘영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찾은 유일한 방법입니다”(PF187).


상징은 자연계의 벌거벗은 객체에 대한 미약한 보충제입니다. 상징은 색깔을 바르기 위한 립스틱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이 보충제는 너무 늦게 오는데, 왜냐하면 일단 자연계의 벌거벗은 객체가 오면, 유실되는 것은 객체 자체의 생생한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환원하는 자들과 다른 한편으로 영혼의 보충을 원하는 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두 무리는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하면 나머지는 전부 그들에게서 벗어난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징’으로 그것을 붙잡으려 합니다”(PF187). 객체를 거부하면 종교는 치장된 미사여구, 화려한 상징, 진기한 가치의 큐레이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중세 형이상학의 낡은 언어와 과학적 기대의 잘못된 적용 사이에 갇힌 종교인들은 종종 종교적 실천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말할 때, 종교인들은 주객을 전도한다. 그러나 실천에서 그들은 상당히 다르게 행위한다. 그들은 프레스코화, 채색된 유리 창문, 기도와 예배는 신에게 다가가는 방식, 신의 먼 반영에 접근하는 방식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성한 힘의 초점을 만들기 위해 교회를 짓고 물체를 배열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신비주의자들은 지시자라고 말해지는 모든 요소가 폐기되면 남는 것은 끔찍한 무Nada의 밤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순수하게 영적인 종교는 우리에게서 종교를 없앨 것이다. 글자를 죽이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것이다. (PF213)


종교적 객체는 멀리 있는 원초적으로 초월적인 신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상징적 중개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드러냄의 경험, 현전과 은혜를 드러내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초월적 객체는 시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관계에 저항하는 어떤 것도, 종교적 객체의 활동적 평범함에 기반한 종교적 실천으로 가시화되지 않습니다.


허블 망원경이 하는 일을 사람과 프레스코화, 빵, 단단한 나무의자의 수수한 배치로 수행하고, 이를 통해 심우주에 직통선을 놓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꽤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객체들의 이러한 수수한 배열이 무언가를 드러내는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현상을 완전히 놓치는 것입니다. 종교적 실천은 과학적 실천처럼 우리를 멀리 보내지 않습니다. 종교적 관습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즉, 우리를 아래와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것은 이미 이용 가능했던 것의 비가시적 은혜를 드러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이국적인 장소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흙탕을 발가락으로 뭉개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객체는 그 객체를 구성하는 다른 객체들의 유동적 현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객체들을 나르는 일종의 성상입니다. 성상 사랑은 성상에 대한 인내 있는 간청을 통해 성상파괴와 우상숭배를 피합니다. “성상 사랑은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의 운동”, 즉 “한 형태의 이미지에서 다른 형태로의 운동, 통과, 이행에 대한 존중입니다”(HI421). 성상 사랑은 객체들과 함께 머무르려는 의향입니다. 성상 사랑은 단순히 이용 가능한 직통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가까움을 행화합니다.


8. 근시 실천하기


그렇다면 라투르에 따를 때, 종교는 우리의 원시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너무 낯익고, 너무 이용 가능하며, 너무 내재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객체의 비가시성을 다룹니다. 이를 위해 종교는 의도적으로 근시를 배양합니다. 종교는 근시를 실천하며, 구원은 이 드러냄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의 근본적인 작업은 은혜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중으로 묶인 은혜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은혜는 다수성의 저항 때문에 요구되는 끊임없는 작업으로 현현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은혜는 우리의 수난 가능성에 의해 부여되는 불가피한 고난으로 현현합니다. 작업은 저항의 관점에서 바라본 은혜입니다. 고난은 이용 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은혜입니다. 지옥은 어느 한쪽의 은혜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점입니다. 작업과 고난은 은혜의 두 얼굴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죄는 은혜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것은 이 이중구속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것은 현재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떠나고 싶은 욕망, 협상의 필연성과 완전히 단절하고 타자들이 부여하는 요구로부터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입니다. 죄는 세계의 저항이 지닌 은혜로움과 그 자신의 이용 가능성이 지닌 은혜로움을 모두 거부합니다. 죄는 작업이나 고난을, 스스로 그러한 객체를 함께 구성하는 선물로 보지 못합니다. 죄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은혜에 의존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이 요청하지 않은 은혜에 의해 침해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죄는 주어진 것이, 주어진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종교의 사업은 “실망시키는 것, 무엇보다도 실망시키는 것입니다”(TF 32). 종교는 가장 일상적인 객체의 가장 일상적인 특징에 우리의 주의를 다시 집중시킴으로써, 이러한 떠나고 싶은 욕망을 의도적으로, 끈질기게, 체계적으로 실망시키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것의 일은 은혜의 이중구속과 단절되기를 원하는 우리의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멈춰 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동을 실망시키는 것, “그것을 전환시키고, 깨뜨리며, 전복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적 연설이 좇는 것입니다”(TF 32).


습관적으로 우리는 거친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처리하고, 양립 불가능한 선들을 경시하며, 블랙박스의 상대적 이용 가능성이 내부에 포장된 혼란스러운 무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달려 있다고 판타지화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실천에서는 “관객의 습관적 시선을 깨기 위해 엄청난 통증이 수반됩니다”(TF39). 작업과 고난을 후회스러운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여주기 위해 큰 노력이 기울여집니다.


“이 전통에서 종교는 떠나고, 무시하며, 무심해지고, 무덤덤해지며, 지루해지려는 의지를 체계적으로 깨뜨려 끊임없이 주의를 돌리기 위해 모든 일을 합니다”(TF36).


이 정의를 기억하세요 : 종교는 떠나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것을 이미 주어진 은헤로서, 이미 살아진 삶으로서 드러내는 일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행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하는 드러냄입니다. 주의는 발휘하기 어려운데, 주의는 집중에 저항하고 산만함을 위해 이용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금 오묘하고 세심한 돌봄을 요구합니다. 종교는 도피가 아닌 주목을 실천합니다. 종교는 우리의 주의를 이미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땅으로 다시 향하게 합니다.


종교는 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세계를 다시 채웁니다. 일상의 평범한 작업 속에서, 그것은 가장 단순한 몸짓에도 얼마나 많은 객체의 협력이 필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책임을 재분배하는 것은 세계에서 작용하고 있는 은혜를 드러내는 데 핵심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은혜의 풍성함은 재분배된 행위성의 양에 비례합니다. 종교에서 우리의 빈곤함은 “물질적 경험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이 제공하는 훨씬 더 다채로운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때 극복됩니다”(RS 111~112).


라투르가 말하듯,


우리가 보기 시작한 것처럼, 종교적 연설은 현재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 관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과거나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더는 목표, 머나먼 곳, 새로운 정보, 강한 관심사를 추구하지 않을 때 말하기 시작한다. 마치 모든 것이 훨씬 더 강한 종류의 긴박함으로 대체된 것처럼, 그것은 지금에 관해, 우리에 관해, 나중이 아닌 지금을 위한 최종 달성에 관해 말한다. (TS 232)




『사변적 은혜』 화상강연 영상
 강연 : https://bit.ly/3A9GO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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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객체들의 역사, 새로운 역사로서의 객체들ㅣ전성욱
자율평론 | 2024.06.22 | 추천 0 | 조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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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을 읽고ㅣ이수영
자율평론 | 2024.06.01 | 추천 0 | 조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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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를 읽고ㅣ하상복
자율평론 | 2024.06.01 | 추천 0 | 조회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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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전율’을 일으키는 사람들ㅣ추유선
자율평론 | 2024.05.27 | 추천 0 | 조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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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아름다움을 ‘향한’ 과정 철학의 모험은 가능한가ㅣ박기형
자율평론 | 2024.05.25 | 추천 0 | 조회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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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ㅣ이주봉
자율평론 | 2024.05.13 | 추천 0 | 조회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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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를 읽고ㅣ남윤재
자율평론 | 2024.04.30 | 추천 0 | 조회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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