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낡은 여행가방 / 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10-04 15:41
조회
265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11

낡은 여행가방

 

1932년 3월, 중국 안동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철교를 걸어서 건너는 남녀가 있었다. 철교 중앙은 단선철도, 양쪽으로는 차도와 인도다. 철도를 중심으로 왼쪽 일방통행이다. 양쪽 끝단 검문소 앞에는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검정 모직 외투에 검정 중절모를 쓴 사내는 30대 후반, 검정 모직 외투에 챙이 둥근 검정 모자를 쓴 여인은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여인은 교각에 부서지는 물보라를 내려다보고 외투깃을 단단히 여몄다. 세찬 강바람에 외투자락이 펄럭였다. 봄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검문검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인은 화장을 했지만 검은 얼굴을 가릴 순 없었다. 키가 작아 낡은 여행가방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여행가방은 진밤색 가죽이다. 여행가방 속에는 옷가지와 화장도구와 성경책이 들어있다. 검정 가죽장정의 성경책 내지 군데군데엔 밑줄이 그어져 있고 깨알 같은 메모가 되어있었다. 외투는 낡았지만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낡은 서류가방도 진밤색 가죽이다. 검정 가죽장정의 성경책과 오래된 만년필과 노트 몇 권이 들어있다. 경비병은 조금은 엄숙한 얼굴로 남녀를 통과시켰다.

32년 3월 19일 상해를 출발한 이봉춘과 김명시는 3월 30일 경성에 도착했다. 안내원 이봉춘은 공작원 김명시를 경성 연락선에 인계하고 상해로 복귀했다. ‘국제선 공산주의그룹’(“국제선”) 국내 전권위원 김형선에게, 상해에서 온 공작원이 아지트에 안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공작원은 젊은 여성이라고 했다. 안내나 모금이나 연락이 아닌, 공작을 맡을 수 있는 활동가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여성 공작원이라면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김형선은 공작원이 김명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형선은 아지트로 향했다.

김명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김형선은 김명시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1925년 김명시는 모스크바공산대학 유학을 떠났다. 본인이 선택한 삶이겠지만, 추천자가 오라비인지라 항상 마음에 걸렸다. 김형선은 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때 만주로 도피했다. 코민테른의 ‘1국1당주의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 활동하던 김형선은 31년, 국제선에 배속되었다. 김명시는 27년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에 파견되었다. 32년 2월 국제선에 배속된 김명시는 국내에 파견되었다. 같은 운동선에서 오라비와 만났다.

국내 활동은 망명지 활동과 차원이 달랐다. 스스로를 지킬 총 한 자루 없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힌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조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투쟁 속에서 동지를 획득하고, 더 단단한 조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고문과 죽음의 공포를, 굳센 신념과 결의로 돌파해, 조직과 동지를 지켜내야 한다. 김형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김명시가 김형선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김명시가 낡은 여행가방을 열었다. 옷가지와 화장품과 성경책을 꺼냈다. 가방 뚜껑 안쪽 빙 둘러 박음질된 두꺼운 봉제선을 칼로 뜯었다.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기관지 『콤무니스트』 4호 등사원지와 메이데이격문 등사원지와 연락문과 활동자금 200원을 꺼냈다. 32년 1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국제선”) 전권위원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 치타 만주리 중소국경을 넘어 하얼빈 장춘 북경을 거쳐 상해까지 가져온 낡은 여행가방은, 안동 신의주 중조국경을 넘어 평양을 거쳐 경성에서 긴 여정을 끝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지부승인을 취소하며 「조선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12월테제”)를 발표했다. 12월테제는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당을 구성한 점과 노동자와 연대가 부족했던 점은 이제까지 조선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영구적인 위기의 주원인이었다.”고 진단하고 “지식인 서클 조직이라는 옛 방법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셰비키 대중사업을 하며 빈농을 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12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이 “오랫동안 파벌투쟁으로 발전을 지연시켰다.”고 비판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통합’을 이룩하여 분파투쟁을 청산하는 일에 코민테른이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결성되었다. 26년 3월 3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6차 확대총회는 조선공산당을 지부로 승인했다. 조선공산당은 25년부터 28년까지 4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끈질기게 조직을 복구하며 투쟁을 이어왔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충격 속에, 12월테제를 받아들이고, 당재건운동에 나섰다.

조선공산당 지부승인을 취소한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에 조선위원회를 설립했다. 첫 회의는 30년 1월 31일 열렸다. 참석자는 쿠시넨, 미프, 마쟈르, 최성우, 박애, 박헌영이었다. 30년 3월 4일 조선위원회 제3회 회의는, 기관지 『콤무니스트』 발간을 위한 사업계획안을 심의 확정했다.

조선위원회는 “기관지를 발간하는 ‘사상의 중앙’을 건설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내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김단야 최성우 김정하 3인을 상해에 파견했다. 상해의 조선출신 사회주의자들은 “1국1당주의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김단야는 중국공산당에 지원을 요청했다. 5인의 조선출신 활동가가 배속되었다. 2인은 『콤무니스트』 제작에 배치되었다. 김형선 등 3인은 31년 2월, 경성 평양 목포에 파견되었다. 이들에게는 노동자 조직화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콤무니스트』는 31년 3월 상해에서 창간되었다.

공장·광산·철도·부두 등 계급투쟁의 분화구 속으로! 그 속에서 선전하라, 조직하라, 투쟁의 불을 지르라!

- ‘콤무니스트 창간선언’ 부분

‘창간선언’은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기 위하여 이 『콤무니스트』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창간호는 나왔지만 국내와의 연결망은 만들지 못했다. 31년 5월에야, 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연결자’가 확보되었다. 김단야는 『콤무니스트』 1호, 2·3합집호 150부를 이불과 베개에 숨겨 국경으로 보냈다. ‘전달자’는 “등사판 필자의 부인” 고명자였다. 기관지는 ‘연결자’에게 전달되었다. 국내에 기관지가 전달되었고, 인쇄기관을 확보했다는 김형선의 연락이 왔다. 하지만, “한 동지가 상해에서 체포”되며 기관지 발행은 중단되었다.

국내에 파견된 김형선 등은 31년 중반까지 9개의 ‘공장핵’을 건설했다. 부산에 셋, 경성에 둘, 인천에 둘, 평양에 하나, 청진에 하나였다. ‘배포자’를 통해 공장 안에 ‘독서반’을 만들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에, 32년 7월 현재, 인천 평양 진남포 부산 마산 목포 등에 20개 안팎의 세포단체가 조직되었고, 조직원은 90여 명이라고 보고했다. 33년 7월까지 “일제가 저지른 반중국 대량학살에 대해 인천에서 시위했다. 대구에서 반전 선전과 선동을 했다. 부산에서 일본 병사들을 상대로 선동했다. ‘비합법 단위’에서 전단 2만부를 만들어 살포했다. 인천 정미소 파업에서 파업위원회와 실업자위원회를 만들었다. 마산 부두노동자 파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평양 시멘트공장 일본 노동자 파업과 동해 방적공장 파업에 개입했다. 진남포 정미소 파업에 개입하여 성공으로 이끌었다. 창원·진영·영천 등의 농민투쟁에 개입했다. 밀양 철도노동자 파업과 제주도 해녀투쟁에 참여했다. 인천 성냥공장 메이데이투쟁을 지도했다.”고 보고했다.

32년 1월, 조선위원회는 박헌영을 상해에 파견했다. 중국공산당은 홍남표와 김명시를 국제선에 파견했다. 32년 3월, 김명시가 여행가방 뚜껑 속에 『콤무니스트』 4호 등사원지를 숨겨 국내에 잠입했다. 김명시는 인천 조직책 김점권과 함께 제물포 비밀인쇄소에서 기관지 『콤무니스트』, 지하신문 『태평양노조』, 격문 등을 인쇄 배포했다. 김명시는 제사공장과 성냥공장 여성노동자 조직 및 교육을 맡았다.

32년 5월 1일, 붉은색과 푸른색의 색지에 인쇄된 ‘조선공산주의’ 명의의 격문 「붉은 5·1절」과 「일본제국주의와 만주점령을 반대하라」가 전국 각지에 뿌려졌다. 진남포지역 “메이데이격문 살포사건”을 수사하던 평북 경찰부에 격문의 출처가 포착되었다. 5월 3일 저녁 7시경 통신연락원 민봉근이 경성의 한 병원 앞에서 가두연락 중 체포되었다. 민봉근이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경성 동소문밖 돈암리 민봉근의 집에 있던 김형선과 김명시는 자동차를 타고 도주했다. 이날 체포된 민봉근은 고문으로 살해됐다. 그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5월 4일 일경은 민봉근의 집을 습격했다. 5월 5일 일경은 아지트로 추정되는 경성 훈정동 황일헌의 집을 습격했다. 20대 중반의 여인을 체포했지만, 김명시가 아니라 고명자였다. 고명자는 김명시와 모스크바공산대학 동창으로, 국제선 상해 전권위원 김단야의 처였다. 김형선과 김명시는 4일 밤 훈정동 아지트에 들러 도피자금 40원을 가지고 신의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김형선과 김명시는 5월 10일 신의주에 도착했다. 일경의 추격을 받는 남매가 함께 국경을 넘는 것은 위험했다. 5월 13일 김형선이 신의주 연락원 박은형의 “유도”로 국경을 넘었다.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남매의 동선이 일경에게 포착됐다. 일경은 박은형의 집을 습격했다. 그날 아침 7시 김명시는 거처를 옮겼다. 어린아이를 업은 시골 여자로 변장한 김명시는 백마강역 부근의 한 농가에서 체포되었다. 상해에 도착한 김형선은 안동 신의주 간 ‘연결자’가 일제의 밀정이 되었다고 보고했다.

32년 9월, 국제선은 김형선과 김찬을 다시 국내로 파견했다. 진남포 조직책 김찬은 “메이데이격문 살포사건”으로 도피 중이었다. 9월 15일, 평북 경찰부는 김형선이 말을 타고 국경지대를 이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국경지대 곳곳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고군영 주재소에 김형선과 김찬이 연행되었다. 일경은 이들이 진술한 주소지로 신원조회를 의뢰했다. 갑자기 김형선이 구토를 시작했다. 일경은 별 의심 없이 김형선을 여관에서 쉬게 했다. 휴식을 취하던 김형선은 여관 주인에게 겉옷과 중절모와 현금 40원과 은시계를 맡기며 잠시 바람을 쐬겠다고 말했다. 산책을 하던 김형선은 그대로 도주했다. 체포된 김찬은 45일 동안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견뎌냈다. “검거 후 45일까지 자기 범행을 전면 부인한 인물은 김찬 외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평북 경찰부는 기록했다.

상해에서는 안동 신의주 간 연락선을 포기하고 상해 인천 간 뱃길을 개설하기로 했다. 새로운 연락선 개설을 맡은 홍남표가 32년 12월 16일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김형선은 경성지역 비합법 운동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경성트로이카”)와 제휴를 추진했다. 33년 6월 중순, 김형선은 동숭동 대학로에서 경성트로이카 지도자 이재유를 만났다. 자신이 국제선에서 특파되었음을 밝혔다. 이재유는 국제노선에 따를 것임을 밝혔다. 두 번째는 6월 20일 숭일동에서 만났다. 이재유는 상해에서 발간되어 국내에 반입되는 기관지의 현장성과 시의성에 문제제기를 했다. 7월 초 세 번째 만남에서 김형선은 ‘출판기능을 가진 투사’를 소개해 줄 것을 의뢰했다. 제휴추진은 7월 15일 김형선이 검거되며 중단되었다. 김형선이 체포되자 이재유는 동숭동 집을 정리하고 신설동 빈민굴로 거처를 옮겼다.

33년 7월 4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김단야의 동선이 포착되었다. 7월 5일 오전 7시 45분, 상해 공동조계 북경로와 강서로 교차로 부근에서 잠복 중이던 일경은 김단야로 의심되는 사내를 체포했다. 사내는 김단야가 아니라 박헌영이었다.

33년 7월 14일 일경은, 다음날 김형선이 경인가도를 자동차로 이동, 경성에 진입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3백 명의 무장경관이 출동했다. 7월 15일 새벽, 한강대교 노량진검문소에 진을 친 일경은 승용차 한 대를 검문했다. 경호원 홍운표가 일경과 난투극을 벌이는 사이 김형선은 도주했다. 도보와 버스로 오류동까지 온 김형선은 기차를 타고 소사로 갔다. 다시 도보로 김포까지 빠져나왔다. 하지만 김형선은 경성 진입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전 11시경, 한강대교 노량진검문소에 진을 친 일경은 버스 한 대를 검문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김형선이 체포되었다.

김단야는 새로운 배포망 구축을 위해 정태희를 국내에 파견했다. 33년 10월 정태희가 “상해로 돌아오는 기차역에서 체포”되었다. 33년 12월 코민테른은 『콤무니스트』 발간사업을 종결하고, 김단야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콤무니스트』는 등사판 인쇄물이다. 내지는 얇은 습자지다. 분량은 45쪽에서 60쪽 내외다. 1쪽이 560자 내외로 200자 원고지 130~170매 분량이었다. 광고와 단신을 제외하고 10쪽 내외 6~8개의 기사가 실렸다. 판형은 일반 단행본 크기의 반이다. 둘둘 말아 소매 속이나 호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다. 겉표지는 경제나 위생 관계 서적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창간호 표지 제호는 『養蠶家의 心得』, 발행처는 ‘중앙양잠협회’, 2·3합집호는 ‘경성상공협회’의 『중앙상공월보』, 4호는 ‘약학연구회’의 『중앙의약월보』, 6호는 『위생월보』였다. 본문은 깨알 글씨 행서 세로판 국한문혼용체다. 모스크바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에 창간호, 2·3합집호(31년 5월), 4호(32년 3월), 6호(32년 7월)가 남아있다. 6호에는 7호의 ‘노동자통신란’ 투고요청 광고가 실려 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에 『콤무니스트』를 7호까지 발간했다고 보고했다.

김단야는 『콤무니스트』에 수록된 주요 기사의 주제를 “사회주의 진영 내부문제, 노동운동, 농민운동, 소련의 사회상, 반전 평화투쟁의 전술, 일본의 대외침략정책, 조선 부르주아지 동향 평가” 등 7가지로 분류, 25개 기사를 보고했다. 25개 중 7개의 기사가 “사회주의 진영 내부 문제”였다. 김단야는 이 주제를 “반종파 코민테른 노선 옹호와 공장 핵에 기반한 당 대열 형성 투쟁”이라고 요약했다. 모든 기사의 필자는 가명 또는 익명이었다. 마쟈르, 김단야, 박헌영, 홍남표 등이 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부터 33년까지, 모스크바와 상해와 국내에서, 『콤무니스트』 발간과 배포를 통해 당재건운동을 벌였던 혁명가들을 ‘국제선 공산주의그룹’(“국제선”)이라고 불렀다.

박헌영은 징역 6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 운동일선에 복귀,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다. 김명시는 징역 6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 운동일선에 복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 홍남표는 징역 6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 운동일선에 복귀, ‘조선공산주의자회’에서 활동했다. 징역 8년 형기를 마친 김형선은 전향을 거부해 석방되지 못했다. 41년부터 ‘사상범예비구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45년 8월 16일 출옥, 운동일선에 복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다.

 

* 이 글은 최규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년), 임경석의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26호, 2004년)과 「국제선 공산주의그룹과 박헌영」(『진보평론』 제24호, 2005년), 김경일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푸른역사, 2007년 개정판), 강만길·성대경의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년), 안재성의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인문서원, 2015년), 김성동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박종철출판사, 2014년), 정운현의 『조선의 딸, 총을 들다』(인문서원, 2016년), 원희복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공명, 2015년)를 참조해서 썼다. 이 글을 쓴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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