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호] 적기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01-03 14:14
조회
62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12


적기


 

 

1936년 12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주재소 순사가 공덕리 농가를 방문했다. 순사는 지난 가을 호구조사를 위해 신원조회를 의뢰했던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 맥도리에서, 김대성 김소성 형제가 등재된 적이 없다는 회신이 왔다고 말했다. 김대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잔주름이 잡혔다가 펴졌다.

“아! 그럼, 김해 덕도리에 한 번 알아보시지요. 덕도리에 산 적이 있었으니…….”

김대성이 순사에게 말했다. 적당히 둘러대 시간을 벌었지만, 아지트를 정리하고 피신해야 했다.


이관술이 이재유와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 생활”을 시작한 것은 34년 10월부터다. 33년 1월 “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된 이관술은, 34년 3월 말 예심이 종결되면서 보석으로 출감했다. 출옥 4일 뒤, “서대문경찰서 탈주사건”으로 경성이 발칵 뒤집어졌다. 서대문경찰서에서 수사를 받던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경성트로이카”) 지도자 이재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9월 중순, 동덕여고 교사시절 제자였던 박진홍이 이관술을 찾아왔다. “운동을 청산하지 않았다면, 10월 초순의 어느 날 오전 11시에 장충단 뒷산 약수터 부근에서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운동선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이관술은, 지정한 복장으로 약수터에 나갔다. 박진홍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는데 뒤따르던 사내가 앞지른다. 사내가 살짝 얼굴을 돌리는데 두 눈이 마주쳤다. 이관술은 걸음을 늦추고 멀찌감치 사내를 뒤따랐다.


“갖은 고심 끝에 고대하던” 이재유를 만난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이관술이 학생운동부문, 이관술의 연락으로 합류한 박영출이 노동운동부문, 이재유가 총괄을 맡았다.


35년 1월 4일, 이재유와 “비밀연락통신”을 하던 이인행이 검거되었다. 1월 10일, 동지 획득을 나간 박진홍이 예정시간이 지나도록 신당동 아지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재유는 증거가 될 만한 문서들을 폐기하고 하왕십리 박영출의 아지트로 옮겼다. 11일 신당동 아지트를 확인하러간 박영출이 잠복 중이던 일경에게 체포됐다. 11일 밤 이종희가 잠적에 들어갔다. 12일 새벽, 본정 4정목 성가병원에 입원해 있던 유순희를 빼내왔다. 인력거를 여섯 차례 갈아타고 하왕십리로 온 유순희는 이정숙과 함남 홍원으로 떠났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오전 8시경 하왕십리 아지트를 나왔다. 상인으로 변장한 이관술은 달걀상자를 등에 지고, 농부로 변장한 이재유는 가래 등 농기구를 들었다. 뚝섬 군자리 중랑천 제방에 문건과 팸플릿 등을 묻고 경성을 벗어났다. 한겨울에 농기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경성을 벗어나면서 알았다. 이재유는 농기구를 버렸다.


하얀 눈이 끝없이 내렸다. 날은 저물고 산길은 끊어졌다. 바람은 살을 에고, 내린 눈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이재유가 눈구덩이를 만들었다. 눈구덩이에 들어간 이재유와 이관술은 옷을 홀라당 벗어 바닥에 깔고 누웠다.

“잠들면 죽음이오.”

이재유가 말했다.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서로의 몸을 비볐다. 눈구덩이 위로 하얀 눈이 끝없이 내렸다.


두 달 동안 양주, 포천 일대를 떠돌던 이관술과 이재유가, 수해를 입고 고향을 떠나온 이재민 김대성 김소성 형제로 가장, 공덕리에 정착한 것은 35년 3월이다. 임야 6천 평을 빌려 개간하고 초가집과 돼지우리, 닭장, 창고를 지었다. 다음 해에는 임야 4천 평을 더 빌렸다.


이재유는 『적기』 3호 작업을 서둘렀다. 그동안 준비된 원고만으로 인쇄를 했다. 아지트를 정리하면, 기관지를 발간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시일이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국내 근거지에서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기관지를 발간하고 배포해야 한다. 망명지에서 만들어 국내에 반입되고 지역까지 배포되는데 두세 달이 넘게 걸리는 기관지는, 우리 운동의 생명과도 같은 현장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이재유의 믿음이었다. 저항은 폭압이 집중되는 곳에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이 온갖 위험 속에서도 경성지역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돌이켜 보면, 체포와 구금과 도피와 도주와 탈출과 탈주로 점철된 지난날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1928년 8월, 이재유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에서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서의 노동운동 시절, 이재유는 70여 차례나 체포되며 비타협적 투쟁을 벌였다. 이재유는 감옥에서 만난 김삼룡, 이현상과 출옥 후 투쟁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1932년 12월 21일 이재유는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 감옥에서 “혁명가로서 후세에 미명을 남기겠다고 확신”한 이재유는 출옥과 동시에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노동운동부문에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학생운동부문에 최소복, 총괄에 이재유 등 5인으로 “상부 트로이카”가 형성된 것은 33년 9월이다. 트로이카는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 “이재유그룹”이 취했던 “조직과 지도가 없는 협의방식의 운동”이다.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는 “투쟁을 통하여 운동자를 얻고 조직을 결성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활동”했다.


33년 5월 동덕여고 동맹휴학, 6월 중앙기독교청년학교 동맹휴학, 7월 숙명여고 동맹휴학 기도, 11월 중앙고보 동맹휴학, 12월 배재고보와 경성여상 동맹휴학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33년 6월 1일 경성 편창제사 파업, 8월 17일 별표고무 파업, 8월 22일 소화제사 파업, 8월 하순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 파업, 9월 7일 조선견직 파업, 9월 19일 서울고무 파업, 9월 21일 종연방적 및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파업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일경은 “배후에 선동하는 무슨 계통이 있지 아니한가 조사”했다. 서울고무 파업으로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권오상 등이 검거되었다. 종연방적 파업으로 이병희, 이효정, 변홍대 등이 검거되었다.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파업으로 안삼원 등이 검거되었다. 12월 중순 이현상이 체포됐다. 배재고보 동맹휴학으로 변우식 등 수 명이 검거됐다.


34년 1월 18일 이재유는 익선동 이순금의 집에 들렀다. 잠복해있던 일경이 이재유를 연행하려 했다. 시골서 올라온 친척이라고 둘러댄 이재유는, 용변이 급하니 잠시 후 가자고 하고, 화장실 천장 창문을 깨 가까스로 도주했다. 1월 20일 밤 10시경 일경은 내수동 아지트를 덮쳐 이순금을 체포했다. 이재유는 간발의 차이로 중림동 안병춘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22일 오전 김삼룡과 안병춘이 체포되고, 이재유는 오후 3시경 중림동 전차정거장 부근에서 체포되었다.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경성에서 200여 명, 강원도에서 160여 명이 체포되었다.


34년 3월 중순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담당 순사가 졸고 있었다. 서대문경찰서 2층 고등계 분실을 빠져나온 이재유는 2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담을 넘었다. 광화문쪽으로 뛰었다. 정동 입구에 이르니 경관들이 추적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마침 장작수레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수레를 밀며 언덕을 오르다가 건물 담을 넘었다. 기진맥진한 이재유는 혼절했다. 담을 넘은 건물은 미국 영사관이었다. 이재유는, 담을 넘은 도둑이 기절해있다는 영사관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경에게 인계되었다.


이재유에게 쇳덩어리가 달린 족쇄가 채워졌다. 허리에는 방울을 달았다. 이재유는 밥알을 짓이겨 모형을 뜨고, 우유곽 양철뚜껑을 갈아 열쇠를 만들었다. 겉옷 안감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다. 4월 13일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 2층 훈시실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질환자 김찬규에게, 자신의 저녁밥을 주었다. 그날 밤 12시경부터 김찬규는 순사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새벽 4시경 견디다 못한 순사가 김찬규를 데리고 화장실에 간 사이, 허리에 달린 방울을 떼고 족쇄를 딴 이재유는 옷보퉁이를 넣어 이불을 볼록하게 만들었다. 겉옷을 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훈시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정문으로 나왔다.

“이제 퇴근하십니까?”

경비를 서던 순사는 이재유를 형사로 오인하고 경례를 했다.

“수고하게.”

이재유가 유창한 일어로 말했다.


서대문경찰서 앞 자동차회사에서 택시를 탄 이재유는 황금정 2정목에서 내렸다. 겉옷 깃 속에 넣어 꿰매놓았던 지폐를 꺼내 요금을 냈다. 택시가 차고로 바로 돌아가지 않도록 웃돈을 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3정목까지 걸어가 다시 택시를 탄 이재유는 동소문에서 내렸다. 산을 넘어 동숭동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의 관사 담을 넘은 이재유는, 정원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미야케 교수는 이재유가 검거되기 전, 경성제대 학생 정태식의 연락으로 만나, 제휴를 도모하던 사회주의자였다. 미야케 교수의 서재 탁자 밑 다다미를 들어내고 토굴을 팠다. 그날 이후 38일 동안 토굴에 은신했다.


미야케 교수는, 프로핀테른 극동지부에서 파견된 권영태가 주도하는 ‘경성공산주의자그룹’과 제휴 활동했다. “메이데이격문 살포사건”으로 5월 17일 정태식, 19일 권영태, 21일 미야케가 검거됐다. 이재유는 토굴을 나와, 준비해 두었던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관사를 떠났다.


돌이켜 보면, 체포와 구금과 도피와 도주와 탈출과 탈주로 점철된 지난날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앞으로의 날들도 아득하기만 했다. 그 아득하기만 한 날들을 뚫고,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뚜벅뚜벅 나아가야 한다. 탄압은 저항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이재유의 믿음이었다.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 『적기』는 1936년 10월 20일 창간됐다. 원고는 이재유가 쓰고, 글씨를 잘 쓰는 이관술이 필경을 했다. 기관지가 조잡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탄산지 필사본이 아닌 등사본 간행을 결정했다. 등사기구를 구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직접 등사기구를 만들었다. 철필은 아카시아가지에 축음기 바늘을 꽂고 판금을 싸서 만들었다. 등사판은 석유깡통 옆판과 판유리를 잘라 만들었다. 소나무가지를 둥글게 잘라 사포로 갈고, 그 위에 자전거튜브를 말고, 양동이 손잡이를 달아 등사롤러를 만들었다.


각 경영 내의 오르그 동지 제군의 진정한 요구에 응하여, 또는 우리들의 임무수행상의 필요에 의해, 또는 일반 투사들의 절실한 희망에 의하여, 전경성적 선전자이고 선동자이고 조직자이고 지도자로까지 앙양할 수 있는 과도적 정치적 기관지 『적기』를 창간한다. 『적기』의 임무는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비밀에 대하여 정치적 폭로 항의 투쟁을 일으킬 것, 민정 사민 파벌 섹트주의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비판 청산 극복 박멸할 것, 대중의 모든 불평불만 반발 항의투쟁을 격발 추출 지도 집중할 것 등등을 중심으로 이론문제, 전술문제, 대중의 계몽을 위한 문제, 공장 내 제 문제, 기타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다.


-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적기 창간선언’ 부분


‘창간선언’은 『적기』가 “전경성적 정치신문”이며, “전국적의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적기』는 “정세와 조선노동자계급의 임무, 행동강령, 행동슬로건”을 밝혔다. 당면 현안에 대한 ‘경성준비그룹’의 입장을 실었다. 『적기』는 각 호 45매 분량으로 기획됐지만 3호까지 총 178매다. 1호와 2호는 각 40부씩, 3호는 17부를 인쇄했다. 각 부문 연락선을 통해 배포됐다.


일경의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었다. 36년 10월 함흥 편창제사 파업으로 유순희가 함경남도 경찰부에 검거되었다. 유순희와의 연락을 위해, 이종희의 동생 이종국이 개설한, 경성 마장동 전창수와의 연락선이 드러났다. ‘경성공산주의자그룹’ 활동 관련 서구원과 최호극이 수사선에 올랐다. ‘경성공산주의자그룹’에서 활동했던 서구원과 최호극은 이종국의 연락으로 “이재유그룹”에서 활동했다. 36년 12월 15일 함남 홍원에서 서구원이 체포됐다. 16일 경성 흑석동에서 최호극이 체포됐다. 이재유와의 연락일정이 포착되었다.


1936년 12월 24일 이재유와 이관술은 『적기』 3호 인쇄를 끝냈다. 여기저기 빌려주었던 돈을 회수하고, 닭과 달걀과 돼지도 팔았다. 12월 25일 오전 10시경 이재유는, 『적기』 3호를 가지고, 최호극을 만나기 위해 공덕리 아지트를 나섰다.

“오후 2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도주하시오.”

이재유가 말했다.

흐린 하늘 저 편으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차게 이관술의 뺨을 때렸다. 먹구름을 몰아오는 차가운 바람을 거슬러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재유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이관술은 공덕리 아지트 앞에 서있었다.


1936년 12월 25일 오전 11시경, 이재유는 공덕리 제2우이교 부근에서 “농군, 장돌뱅이, 노동자, 학생 등 여러 가지로 변복”한 일경에게 체포됐다. 이재유는 산으로 달아나며 극렬하게 저항했다. 자신이 검거되는 걸 주위에 알리기 위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1936년 12월 25일 오후 2시, 이관술은 『적기』 3호를 가지고 공덕리 아지트를 떠났다.


징역 6년 형기를 마친 이재유는 전향을 거부해 석방되지 못했다. 41년부터 ‘사상범예비구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44년 10월 26일 이재유는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 이 글은 김경일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푸른역사, 2007년 개정판), 금강산인의 「조선민족해방 영웅적 투사 이재유 탈출기」(『신천지』, 1946년 4, 5월호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재수록본), 안재성의 『경성트로이카』(사회평론, 2004년), 안태정의 「자주적 공산주의자 이재유의 혁명노선과 좌익전선운동」(『역사비평』 제14호, 1991년), 안태정의 「1930년대 서울지역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변은진의 「1930년대 경성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일송정, 1991년), 이애숙의 「이재유그룹의 당재건운동(1933년~36년)」(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년)을 참조해서 썼다. 이 글을 쓴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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