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호] 가능해진 있을 법하지 않은 것 / 스티븐 샤비로 『탈인지』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2-12-20 14:04
조회
727
 

가능해진 있을 법하지 않은 것


『탈인지』의 한국어판에 관하여


스티븐 샤비로


안호성 옮김 (『탈인지』 옮긴이)


저의 책 『탈인지』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탈인지』는 도서출판 갈무리에서 번역되고 출간된 저의 두 번째 책입니다. 저를 대신해 노력해 주신 출판사에 감사드리며, 한국 독자들이 제 책을 관련 있고 흥미롭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번역은 언제나 어려운 과정이며, 저 자신은 한국어를 말하거나 읽지 못합니다. 언제나 번역이야말로 의미와 느낌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전달된 것을 기념하는 이유이며, 마찬가지로 번역이야말로 말하기, 듣기, 쓰기, 그리고 읽기 행위를 통해 의미와 느낌이 한 뇌와 신체에서 다른 뇌와 신체로 전달된 것을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번역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일을 쉽게 이룰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공적 전달, 모든 소통 행위, 그리고 사실상 모든 사고는 작은 기적임을 상기할 가치가 있습니다. 한 뉴런과 다른 뉴런 사이가 되었든, 혹은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가 되었든, 혹은 한 신체와 다른 신체 사이가 되었든, 혹은 입과 귀 사이가 되었든, 혹은 페이지와 눈 사이가 되었든, 언제나 간극이 존재합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번역은 이러한 간극을 넘나드는 행위입니다.


제 책의 제목 탈인지(Discognition)는 실제로는 영어에 존재하지 않는 합성어입니다. 그것은 (표준적인 정의를 인용하자면) “사고, 경험, 그리고 감각을 통해 지식과 이해를 습득하는 정신적 행위 또는 과정”을 의미하는 ‘인지’라는 단어에 부정 또는 무효화를 함의하는 접두사 ‘탈-’을 결합한 것입니다. 이 합성어를 사용하여 저는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과정을 지적하고, 이러한 과정이 여러 과학소설 텍스트와 철학적 글의 중심부(1장), 그리고 일련의 생물학적 연구 논문(마지막 장)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기술하려고 합니다.


저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는 관찰입니다. 언제나 그 이상의 것, 빠진 것, 제 포착을 벗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이 ‘그 이상’ 또는 ‘외부’extra는 번역을 통해 상실되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요하며 실제로 중대한 차이를 만듭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가 말하듯, 그것에 “너무 많이 달려 있”습니다. 제가 먹으려는 복숭아나 던지려고 하는 공과 같은 객체를 기술하려고 할 때면 저는 언제나 부족합니다. 언제나 제가 말로 포착하지 못한 객체의 양상 또는 성질이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복숭아를 먹은 저의 즐거운 경험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은 복숭아의 양상이나 성질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공을 던지고 받는 경험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는 공의 양상이나 성질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그의 저서 중 일부 또한 도서출판 갈무리에서 한국어로 번역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은 이에 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주로 위대한 독일 철학자 G. W. 라이프니츠(1646-1716)로부터 단서를 얻는데, 그는 세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관심을 가졌던 초기 계몽주의 박식가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라이프니츠에 관한 포괄적인 논의 같은 것을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의 관념 중 일부를 제 목적에 유용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조용히 변경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제게 중요한데, 그가 저의 과학소설 이해에 핵심적인 세 가지 원리를 유지하고 세 가지 개념을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원리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식별 불가능자의 동일성
2. 충족이유
3. 비모순.


그리고 세 가지 개념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수적 관점
2. 가능세계
3. 다양성 속 일치.


먼저, 라이프니츠는 다수적 관점을 주장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우리 각자가 그가 모나드라고 부르는 것, 의지와 느낌의 핵심적 중심이며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기-폐쇄적이며 세계의 다른 것과 분리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대 생물학은 모든 세포,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생물은 외부로부터 내부를 분리하고 선택적으로 어떤 것은 내부와 외부 사이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다른 것은 허용하지 않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현재 생물학적 세포에 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생물학, 특히 현미경을 통해 최초로 단세포 유기체를 관찰한 동시대인 안토니 판 레벤후크의 연구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라이프니츠는 그가 모나드라고 부르는 세포 구조를 생명의 기본 단위로, 사실상 전체로서의 세계의 기본 단위로 보는 방식을 통해 이후의 과학적 발견을 선점합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저는 세계의 활동적인 부분인 동시에 세계의 나머지와 떨어져 있는 탈착된 방관자입니다. 저는 세계의 특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데, 이를 저의 관점 또는 입각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를 둘러싼 모든 것, 제가 조우하는 모든 것을 저의 특수한 입각점에서 경험합니다. 저는 세계의 다양한 요소를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봅니다. 사실상, 저는 세계, 그리고 세계 속 모든 것을 느낍니다. 저의 인지 — 세계에 관한 저의 지식 — 는 이러한 계속되는 느낌 및 경험 과정에 이차적이며 거기에 의존합니다.


인지가 느낌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유한하고 부분적이며 불완전합니다. 제 경험은 제가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것, 혹은 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섭니다. 실제로, 저의 느낌과 경험은 반드시 즉각적이고 의식적인 것은 아닙니다. 라이프니츠는 제가 세계를 주로 의식적 알아차림의 문턱 아래를 형성하는 “미세 지각”(petites perceptions)의 형태로 조우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러한 지각들을 개별적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들의 총합, 또는 그것들의 후속 귀결만을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가 말하듯이 “사람들이 해변에 가까워졌을 때 듣는 혼란스러운 잡음은 수많은 파도의 잔향이 합쳐지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저는 파도가 치는 소리를 전반적 소리, 집합체로서만 듣습니다. 저는 각각의 특수한 물방울이 내는 개별적인 소리를 고립된 것으로서는 전혀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제가 듣는 집합체 소리가 결코 균일하지 않다고 보장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별적인 물방울은 서로로부터 아주-오묘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식별 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의 기초이며, 이는 어떤 두 개의 분리된 이산적 사물도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고 진술합니다.


이번에는 라이프니츠의 후계자 중 한 명인 근대 영미권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9)에게서 예시를 빌려보겠습니다. 제가 태양 아래 서 있을 때, 저는 태양 빛의 가시 스펙트럼을 보고, 제 피부에 비치는 그 광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태양으로부터 방출되어 마찬가지로 제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자외선을 볼 수 없으며, 즉각적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듯이, “인간 신체는 어떤 색 감각도 산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태양 스펙트럼의 자외선에 의해 인과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가 이어서 말하길, “이러한 광선은 결정된 정서적 효과를 생산합니다.” 실제로, 저는 다음 날 깨어나 제가 햇볕에 그을린 것을 발견하며 이런 종류의 방사선을 대체로 소급적으로 경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만약 태양의 자외선이 하나 이상의 제 피부 세포에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면, 몇 년 후 제 피부에 암 종양이 생길 때까지 그것을 감지하거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탈인지』 한국어판의 부록으로 첨가된 논문에서, 저는 우리가 세계를 지각함으로써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지각은 그 자체로 더 넓은 범주, 저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의해 저의 정신과 신체가 촉발되거나 영향을 받는 방식 — 제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 의 하위집합입니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서 — 혹은 이 모든 것의 결과로서 — 저의 외부에 있는 세계에 대한 저의 느낌과 경험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가 조우하는 사람과 사물에는 이해는커녕 실제로 발견하거나 도달하지 못할 양상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영혼이 마치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세계 전체가 제 안에 비쳐 제게 표상됩니다. 우주 전체가 각각의 모나드를 촉발하고, 그러므로 각각의 모나드에 반사됩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반사 대부분이 모호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합니다. 저는 오직 세계의 아주 미세한 분량만을 명료하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흐릿하고 단편적이며 뒤섞인 형태로 저에게 나타납니다. 화이트헤드는 유사한 요지를 세웁니다. 저는 화이트헤드가 현시적 즉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작용을 통해 세계의 몇몇 특수한 사물이 저를 촉발하는 방식을 적절하게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제 경험은 화이트헤드가 인과적 효과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합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 양태에 있어서 경험은 “모호하고, 떠돌며, 통제 불능하고… 우리의 즉각적 자아를 장악하는 지나간 사물들과의 접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오직 신(만약 존재한다면)만이 우주 전체에 대한 명석판명한 지각을 가집니다. 화이트헤드는 더 나아가 신의 이해도 뒤늦은 것이며, 오직 사후에야 따라온다고 시사합니다. 두 사상가 모두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러한 명료성과 완전성을 얻을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신에 관해서 무엇이 참이든, 모든 사람과 그 외 모든 사물은 유한합니다. 유한하고, 자기-폐쇄되고, 자기-경계진 모나드로서 우리는 우주의 무한성을 오직 불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특수한 입각점은 부분적이며, 저는 이 단어가 영어에서 띠는 이중적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분적이라는 것은 전체적이거나 통합적인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편파적이거나 편향적이라는 것, 편을 든다는 것, 공평하고 중립적이기보다는 당파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지는 이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부분적입니다. 어떤 유한한 존재자도 모든 곳으로부터의 신성한 관점이나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이 말하듯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부터의 관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세계에 관한 다수의 관점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모두 불완전합니다. 유한한 존재자로서, 우리가 이 상황을 뛰어넘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한 관점주의는 『탈인지』에서 제 주요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각각의 장에서, 저는 이런저런 존재자가 세계를 보는 방식, 그리고 그것들의 관점이 우리의 것과 다를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는 텍스트를 다룹니다. 예를 들어, 일종의 영역-특정적 인공지능, 계산 “전문 체계”가 어떤 형태의 감수성을 키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보다 전략적으로 더 똑똑하고 기술적으로 더 세련되었지만,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짐을 지니고 있지 않은 지능적 외계인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할까요? 침략적인 기술 수단을 가지고 어디까지 인간의 의식을 조작할 수 있을까요? 원형질 점균(과학 용어로 진성점균Myxogastrea 또는 변형균강Myxomycetes)으로 알려진 유기체는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반응할까요?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준점인 인간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 직면합니다. 이 텍스트들의 저자들은 그러한 낯선 관점을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용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라이프니츠에게서 가져온 두 번째 개념은 가능세계의 관념입니다. 현실세계에 관한 많은 관점이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것처럼, 이 현실세계만이 구상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가능세계들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한 다른 세계는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와 다른 철학자들이 수행한 일이지만, 과학소설 작가들이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과학소설은 실제로 미래를 예측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과학소설은 복잡성 이론가들이 미래성의 가능성 공간이라고 부를 것을 탐구합니다. 과학소설은 우리의 현실세계의 상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살펴봅니다. 과학소설은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과학소설은 그것이 쓰이고 읽히는 현실세계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너머로 확장되며, 그로부터 벗어난 — 그러나 적어도 그로부터 잠재적으로 떠오를 수 있는 — 대안적 세계를 상정합니다.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 학설에는 걸림돌이 하나 존재합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다수의 가능세계 중에서 하나의 특수한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선택했습니다. 신이 이 특수한 선택을 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주장하기를,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상 “모든 가능세계 중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가 살던 시대에 이미, 그리고 오늘날까지 라이프니츠는 이 과장된 주장에 대해 비판받았고 사실상 조롱받았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예시는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가 그의 소설 『캉디드』(1759)에서 라이프니츠를 가장 끔찍한 재앙 앞에서 반복적으로 “모든 가능세계 중에서 최선인 이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최선을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팡글로스 교수의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세계가 최선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근대와 그 선조 신학자들이 구성한 창조주의 체면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담한 임시방편”으로 좀 더 신중하게, 그러나 여전히 못마땅하게 특징짓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에게 신을 비난으로부터 구하려는 은밀한 동기가 없다면 사건의 과정이 “단순히 ‘주어진 것’의 특징을 가지고 그 자신을 제시하며, 어떤 ‘완벽성’ 고유의 특징을 개시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결코 백지상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은 언제나 이전에 온 것, 즉 이미 “주어진” 것의 제약을 받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신 자신도 이 제한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는 다음을 의미합니다.


신의 이러한 기능은 그리스 사상과 불교 사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의 냉혹한 작용과 유사하다. 최초의 지향은 그 막다른 골목에 있어 최선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최선의 것이 악이 된다면, 신의 무자비함은 재해의 여신 아태Atè로 의인화될 수 있다. 쭉정이는 불 속에 던져진다.


화이트헤드에게 라이프니츠의 “최선”에는 도덕적 함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물리학자들이 최소 작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least action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물이 언덕 아래로 흐를 때 물은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따라 흐를 것입니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세계는 막다른 골목에서 “최선의” 길을 찾습니다. 라이프니츠에 관해 말하자면, 비록 그는 도덕적 고려사항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모든 가능세계 중 최선”에 대한 그의 일차적 의미는 가장 복잡하고 미학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서유럽에서 예술과 건축의 바로크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미적 감각은 수많은 논평가(가장 유명하게 질 들뢰즈)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매우 바로크적입니다. 바로크 미학에 대한 한 가지 표준적 정의는 그것이 “그 과장적 장면, 화려한 장식, 짙은 색상의 사용, 명암 배분, 그리고 비대칭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표준적 정의는 그것을 “경외감을 달성하기 위해 대비, 운동, 풍부한 세부사항, 짙은 색상, 웅장함, 그리고 놀라움”을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라이프니츠가 우리의 세계는 “모든 가능세계 중 최선”이라고 주장할 때, 그는 우리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다채롭고 복잡하며 웅장한 세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21세기 용어로 보자면,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아원자 입자 이론을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여기며, 이러한 성질을 그 진리치에 대한 증거로 보는 물리학자의 주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피하고자 저는 라이프니츠에게 반대하여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자명하게 최선이 아니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대안세계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수준의 물질적 복지, 안락함, 그리고 자기-결정권을 보장받는 세상을 원합니다. 아름다움과 흥겨움이 그것과 나란히 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현재 능력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어쩌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에 저항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저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저의 관심이 라이프니츠의 사유와 상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저의 감각조차도 가능세계의 다수성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근본적 통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어떤 종류의 대안적 세계 배치가 달성 가능한지, 어떤 것이 불가능한지 고려할 수 있게 해줍니다.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 개념은 한편으로는 엄격한 결정론과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비결정론이라는 두 극단을 거부합니다. 엄격한 결정론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엄격한 물리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착상입니다.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미리 결정된 것입니다. 상황은 지금과 정확히 같아야 합니다. 물리학자 션 캐럴이 이 학설을 표현하듯이, “시간의 흐름에서 각각의 순간은 명료하고, 비인격적이며, 정량적인 규칙에 따라 이전 순간으로부터 이어집니다.” 만약 이것이 참이었다면, 유일한 가능세계는 현실세계일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엄격한 사슬은 현재 순간까지 이어지고, 그로부터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존재하는 것에 정확히 뒤따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공허하고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극단도 동등하게 의심스럽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는 “어떤 원인이 실제로 어떤 결과도 낳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같은 원인이 실제로 ‘100개의 다른 사건’(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인 하이퍼카오스라고 부르는 것을 주장합니다. 메이야수에게 우리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초현실적인 무작위성 중 하나이며, 이 무작위성 속에서 코끼리는 우리가 공기역학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언제라도 하늘로 날아갈 수 있고, 세계 바다의 소금물은 언제나 맛있는 레모네이드로 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시나리오 중 전자는 닥터 수스의 유쾌한 동화책 『알을 부화시키는 코끼리』(1940)에서 극화되었고, 후자는 유토피아 철학자 샤를 푸리에가 그의 『네 가지 운동의 이론』(1808)에서 구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저자 모두 그러한 사건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합니다. 설령 이러한 설명들이 완전히 허구적이고 현재 우리의 이해에 따를 때 과학적으로 유효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일종의 일관된 상상적 및 서사적 논리를 주장합니다 — “이 행동에 대한 원인이나 이유가 없이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메이야수의 주장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메이야수는 과학적 또는 물리적 인과성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방식, 그리고 같은 이유로 서사적 인과성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상상은 엄격한 결정론자에게 그러하듯이 메이야수에게도 무의미하고 공허합니다. 메이야수가 과학소설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자연법칙이 “순수하고 간단하게 폐기”되며 “어떤 현실적 또는 상상적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는” 허구적 세계를 선호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메이야수 자신도 그러한 형태의 서사가 매우 드물고, 기껏해야 거의 독해할 수 없을 것임을 인정합니다.


가능세계 관념은 엄격한 결정론과 급진적 비결정론이라는 상반된 극단을 동등하게 거부하기 때문에 과학소설에 유용합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지만 모든 세계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많은 상황이 있습니다. 메이야수는 미국의 분석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처럼 세계가 극단적으로 우연적이며, 논리적 모순을 근거로 배제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서 거의 모든 인간 경험과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메이야수,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진술과 그 부정이 동시에 참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비모순율(Principle of Non-contradiction)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여기에 그가 충족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가합니다. “그것이 그러하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충족이유 없이 우리는 참되거나 존재하는 사실, 참된 주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설령 그 무엇도 완전히 미리 결정되지 않았더라도, 일단 어떤 것이 발생하면 그것은 특수한 이유로 발생한 것입니다. 설령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이유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고 해도, 이는 필연적으로 참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 현존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님을 의미합니다. 사물들이 언제나 함께 맞물리지는 않습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어떤 특수한 사물이 그 자체로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물과 같은 세계에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상황도 서로 공가능적compossible이어야 합니다. 비모순율을 추상적 논리에서 현실세계 상황으로 확장한 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혁신 중 하나입니다. 공가능성을 주장하면서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우리가 환경적 또는 생태학적 이해 양태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라이프니츠에게 공가능성은 그가 신이 부여한 모나드들 사이의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 같은 근대 사상가들은 그러한 조화가 단순히 “경험의 계기 속 여러 요인의 상호적 적응”을 통해 내재적으로, 실시간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물들은 서로를 수용하고 여러 요소를 병합함이 없이 교환함으로써 그 존재를 지속합니다. 실시간 속 진화는 신이 모든 것을 사전에 배열할 필요 없이 공가능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여기 공가능성 또는 실제 비모순의 예시가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과 탄소를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에게는 액체 형태의 물이 필요하며, 이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제약합니다.


물에서 신진대사와 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알려진 최고 온도는 섭씨 122도(화씨 252도)이며, 고압 열수 분출구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최저 온도는 섭씨 영하 18도(화씨 약 0도) 정도인 것처럼 보인다. (「물-기반 생명체의 새로운 분류체계」)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온도가 섭씨 464도이고 기압이 지구 표면의 92배인 금성 표면에는 물-기반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정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와 금성의 기후 조건은 상호 공가능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금성 표면에 생명체가 있다면, 그것은 지구 생명체와는 완전히 다른 구성과 조직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얀 슈파첵과 스티븐 브렌너라는 두 명의 과학자는 최근 금성 생명체가 황산에 담긴 자기-조직적이고 자기-복제적인 레드 오일 방울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제안했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생명체는 적어도 금성의 조건과 공가능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금성의 잠재적 생명체에 관해 이 논문을 쓴 과학자들은 그것을 사고 실험으로 의도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생명체가 현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논문을 과학소설로 여기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과학소설을 정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는 가능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공가능적 상황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시사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과학소설을 판타지와 같이 밀접하게 관련된 다른 장르와 구별하는 것입니다. 과학소설과 판타지는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현실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그러나 과학소설의 가능세계는 가능성의 문제가 전면에 있지 않은 판타지의 세계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구별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미국 TV 프로듀서 로드 설링은 “판타지는 있을 법하게 된 불가능한 것”인 반면, “과학소설은 가능해진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며 차이점을 설명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 학설 — 논리적으로 비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상황적으로 비모순적이거나 공가능적 요소들로 구성된 세계들 — 은 제가 『탈인지』에서 인지와 의식의 문제에 관해 저술하는 방식의 바탕을 이룹니다. 제가 논하는 각각의 서사는 특정한 형태와 양식의 감수성을 투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수성이 진화하고 번성할 수 있는 가능세계 또는 환경을 환기합니다. 이 세계는 기업의 중앙 컴퓨터일 수도 있고, 컴퓨터 게임 네트워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부 정보기관이 끔찍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첨단 인간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진화가 지구에서와는 급진적으로 다른 경로를 택한 다른 별 주위를 맴도는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마지막으로, 지구 토종의 물과 탄소 기반 생명체일 수 있지만 그 생명체를 둘러싼 특수한 물리적 환경이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느낌과 인지 양태를 요구하는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언급한 세 번째 라이프니츠의 개념, 다양성 속 일치로 이어집니다. 라이프니츠가 과학소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나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미국의 비평가 리처드 핼펀은 “라이프니츠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초기 과학소설 작가”라고 시사하고,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글은 “스타니슬라프 렘이나 필립 K. 딕, 류츠 신의 글을 특징짓는 일종의 밀도 높은 지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핼펀과는 별개로, 프랑스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철학적 소설과 과학소설』(Fictions philosophiques et science-fiction)이라는 책 전체를 저술했으며, 가능세계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착상, 그리고 과학소설이 그 평행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전개한 허구들 사이에 있는 그가 “경이로운 상동성”이라 부르는 것을 추적합니다. 물론, 이 평행성은 엄격히 역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과학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라이프니츠 시대의 문학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분명 판타지적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소설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보다는 우리가 지금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에 더 가깝거나 소극과 풍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고 실험이라는 개념이 적절하게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오늘날 사고 실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미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어 용어 Gedankenexperiment와 Gedankenversuch는 라이프니츠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한 세기 후에야 처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명확하게 이론화되지 않았음에도 이 개념은 이미 라이프니츠의 활동 속에 존재합니다. 종종 우리는 과학적, 철학적 중요성을 지닌 관념을 개발하기 위해 허구적 주장을 전개하고 그 귀결을 추적해야 합니다. 제가 『탈인지』의 첫 번째 장, 심리철학자들이 “메리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을 살펴보며 논한 것처럼, 오늘날 철학자들 스스로 이것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소설 글쓰기도 이런 종류의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종종 엄격한 철학적 글쓰기의 경우보다 더 광범위하고 대담한 규모로 참여합니다. 어쨌든, 철학적 사고 실험과 과학소설적 우화는 비허구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데, 그것들이 라이프니츠의 다양성 속 일치 원리를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허구나 과학소설적 서사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고 전례 없는 상황을 발견하든지 간에, 그것들이 묘사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상황과 공가능적인 한 그것은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 학자가 라이프니츠 시대의 판타지적 문학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매료를 추적했습니다. 라르드로, 핼펀, 그리고 저스틴 E. H. 스미스는 놀랑 드 파투빌에 의해 1684년에 초연된 프랑스의 소극 〈달빛 속의 황제, 아를르켕〉(Arlequin, Empereur dans la Lune)에서 제시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아를르켕 인물상을 라이프니츠가 인용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이 무대 연극에서, 아를르켕은 달의 황제로서 달에서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그의 묘사는 모두 풍자적이며, 원래 파리의 청중에게 친숙했을 대상을 조롱합니다. 극 중 다른 등장인물들은 아를르켕이 제공하는 모든 묘사에 반응해서 “다 여기 있는 그대로야”(c’est tout comme ici)라고 말합니다.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며 이 연극을 참조합니다. “자연적 사물에 관한 저의 대원리는 달빛 속의 황제, 아를르켕의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 속에서 언제나 어디에서나 다 여기 있는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달에서도,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황제일 때도, 사물들이 서로 어울리고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 작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연결 논리의 일치는 사물, 사건, 그리고 존재 방식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다양성을 묶습니다. 이것이 허구가 실재에 관해 알려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풍자는 풍자되는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거리가 있을 때만 풍자 표적을 공격합니다. 설득력 있거나 심지어는 단순히 독해할 수 있는 허구적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같은 논리 또는 같은 연결 및 변형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아마도 과학소설이 표현하는 내용은 설령 상상적이거나 반사실적일지라도, 그 텍스트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표현 규범을 따르는 이유일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 모든 것이 제가 『탈인지』에서 과학소설이 “〔철학적〕 문제들을 등장인물과 서사로 체화”하고, “그 시나리오들의 가장 기이하고 가장 극단적인 파문을 통해 진행되며,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떨지 상상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과학소설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우리가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극도로 낯선 상황을 포함할 수 있는 미래성을 취하고 탐구하는 방법입니다. 전통적인 철학은 사회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설의 토대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그것의 근본적인 전제가 지닌 결함을 조사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과학소설은 그러한 가설의 귀결을 살펴보고, 시간이 지남에 따른 잠재적 발전을 추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소설이 그 최선에 있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과학소설 텍스트의 함의를 이끌어내며 수행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탈인지』 화상강연 영상
 강연 : https://bit.ly/3Vh5lmd
 질의응답 : https://bit.ly/3v4PF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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