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9/19 『까판의 문법』, 2,3 장

작성자
bomi
작성일
2020-09-06 23:06
조회
373
9월 19일(토요일), 오후 1시, 『까판의 문법』 세미나가 열립니다.
공부할 책의 범위는 2장, 3장입니다.
- 2장 증언을 거짓말로 만들어라.
- 3장 '거짓 진실'을 내세우라

책을 읽으시고 토론거리, 질문거리 등을 준비해 오시면 됩니다.
발제문을 정리해 게시판에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9월 셋째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본 세미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 zoom으로 진행됩니다.
*본 세미나는 격주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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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5일 <까판의 문법> 세미나 기록

#주제 1 : 까판 이해하기
1) 13쪽 들뢰즈와 특이성의 탈영토화운동, 16쪽 블랙홀적 상황 -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2) 까판의 문법의 특징은 무엇일까?
3) 까판 문법과 질적으로 달라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4) 힙합의 디스 문화와 까판 문법은 유사하지 않은가?
5) 까판은 극장의 생산물, 무대의 생산물이 아닐까? 까두목을 스타에 비유해본다면 어떨까?
6) 텔레비전이 모두의 마음 속에 까판을 심는 것 같다.

11쪽
"까판의 목적은 오직 표적이 된 인물을 타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 물론 까판의 해체주의적 특성상 까두목의 계정이 표적이 되면서 까까판, 까까까판 ... 이 형성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탈영토화는 영토화되어 있는 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운동인데, 그것이 중심을 해체시키는 것. 해체주의적 성격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11쪽
"해체의 대상은 넓은 의미에서의 명성과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주로 뜨는 인물, 갑자기 유명해진 인물을 표적으로 삼으며 큰 명성을 가진 사람, 큰 권력을 가진 사람, 예컨대 정치가나 재벌을 타격하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까판은 이미 큰 명성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11쪽
"많은 경우 까주체가 자신이 경쟁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인물, 다시 말해 '나도 저 정도의 명성과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표적으로 된다."

큰 권력이 있고 작은 권력이 있을 텐데 그중에서 까판의 세력들이 공격하는 것은 큰 권력보다는 작은 권력인 것 같다. 뜨는 인물'이란 이제 막 권력을 키워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정치가는 이미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까지는 않고 지금 막 크려는 사람, 이제 막 권력이 생겨나고 있는 인물의 싹을 자르려는 메커니즘이 까판 같다. 현실 정치인들로만 한정해 생각해보면, 예컨대 최근 윤땡향 의원처럼, 어떤 사람이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려는 조짐이 있을 때 미리 너무 크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새로 떠오르는 권력을 차단할 때 그 효과는 기존의 권력 유지를 돕게 돼 버리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까판은 해체라는 것을 기존 권력이 활용하는 방법 같다. 까판이 진실이라는 것을 해체하는데, 진실을 해체함으로써 결국 이익을 보는 것은 기존의 권력이다. 해체의 방법이 기존의 권력에 활용되는 게 까판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하위문화로서의 까판의 문법이 지금 이 사회의 주류문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16쪽
"윤지오에게 사기 협의가 덧씌워지고 경찰과 검찰이 체포 영장 발부, 여권 무효화 조치, 적색수배령 등의 극단적 사법 조치들을 차례차례 내려가면서 증언자를 범죄화한 일련의 과정은 까판의 문법의 정치사법적 지속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결과 탈진실의 조건들이 공통진실로 진화할 경로는 봉쇄되고 그것들이 가짜뉴스, 반진실의 폐쇄적 공명판으로 기능하게 되는 블랙홀적 상황이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 미디어가 강력한 진실권력으로 갖고 있는데 까판이 그것을 해체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그 방향이 공통진실이 아니라 반진실로 향한다.
까판은 자생적 힘이기는 하지만 자율적이지는 않다.(13쪽)

<까판과 공통장의 특성 대비>
- 자생적이나 자율적이지 않음 – 자생적이며 자율적임
- 동일성 - 특이성
- 위계화된 집권체 - 수평적 그물망
- 블랙홀 - 공재로의 열림
- 반진실 - 공통진실

까판은 반동, 과거 수호적이다. 『어셈블리』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분석한 백인의 특권을 지키기를 원하는 우익 운동의 특성을 까판은 갖고 있다. 환상적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새롭게 출현하는 것은 무엇이든 위협으로 보고 억압한다.

한국에서는 까판의 일부는 좌파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 이것도 세계적 현상이다.

포스트모던이 반동 속에서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

근대주의, 독재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포스트모던이 처음 출현했을 당시에는 그것이 새로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포스트모던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모던을 극복하면서 되려 중세로 돌아가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부정이 이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서땡 진땡권 등이 한국 사회에서 진보 논객으로서 이야기를 해왔는데 진땡땡 같은 경우 미학, 미술에서도 새로운 학문을 연구를 해왔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추구했던 학문을 스스로 정체화해버렸을 때 반동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누구든지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까판이 될 수 있다.

# 주제 2 : 증언에 대한 공격과 증언자에 대한 공격
1) "증언"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공격받는가?
2) 왜 "증언행위" 이후 "증언"이 향하는 곳(가해권력)이 아니라 "증언"과 "증언자"를 공격하는가?
3) 왜 가해자에 대한 검증 요구는 묵살되는가?
4) 왜 증언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증요구는 없는가? 증언이나 증언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공격 뒤에 숨는가?
5) 22쪽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를 보자'가 공통장의 윤리라면 '메시지를 깔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까라'가 까판의 문법이다.

메신저 공격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 시대에 굉장히 강력하게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회의주의가 있다. "어떤 느낌이 드냐면 메신저를 까면 안 되는 것을 알잖아. 근데 왜 이렇게 먹힐까? 왜 그럴까? 인간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나 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메신저 공격은 정동을 건드린다.

진리, 진리관도 있는 것 같다. 진리가 새로 만들어지고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란 이미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문제다. 신이 말한 것은 모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약점이 많은 사람이 이야기한 것은 당연히 결점이 많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진실을 대하는 관점에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과거에는 누가 한 말인가가 진리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귀찮음, 편의주의, 무마하려는 습성,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메신저 공격을 만든다. 증언은 일단 에너지다. 불의에 맞서는 용기, 존엄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존엄에 대한 의지보다는 혐오로 짜인 사회이기에 용기와 존엄과 생명을 실은 증언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증언의 용기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증언을 밟지 않고는 존속해나갈 수 없는 사회다.

새로운 씨앗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을 때 그것에 호기심과 관심이 생긴다.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사람은 "저거 위험한 거야. 저 바이러스는 좋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나쁜 바이러스야"라는 인상을 퍼뜨린다.

두려움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인인 것 같다.

괴벨스 같은 사람은 쉬운 일을 하는 사람이다. 메신저 공격을 하는 사람들은 쉽고 안온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자신도 슬픔의 공간에 빠져버렸음을 알게 될 것.
공통진실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는 않지만 즐거운 길, 기쁨의 길이다.

전문가 집단은 진실은 독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변호사 과학자 그런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 검증된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과 진실이 이렇게 연합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권력자들이 전문가들이고 전문가들이 진실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뜻에 따라 사회를 움직여야지, 전문가 박땡땡 박땡들은 전문가인데 아무것도 못 했는데 윤지오가 나와서 세상을 바꾸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새로움에 대한 반응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
새로움을 맞닥뜨렸을 때 경쟁심을 가지면서 의심하거나 깎아내리려고 한다.
새로움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때 많은 사람에게 위험한 사회가 되는 것 같다.

돈을 벌려면 익숙한 것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윤지오를 비판하면 악인가?"라고 박땡땡이 질문을 하는데, 윤지오를 비판하면 악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악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 머리에서 나온 것. 윤지오가 이야기한 것은 잘못된 보도에 대한 정정요청이었다. 정정요청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서 박땡땡의 머리에는 이분법적 선악구도가 굉장히 강하게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걸 선악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 오히려 윤지오를 악으로 몰아가는 것. 그래서 이분법적인 논리가 흥행하는 사회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분법이 깨지는가 싶더니 요즘 들어서 이분법 논리가 다시 흥행하는 것 같다. 이분법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가짜뉴스. 나도 초등학교 때를 생각해 보면 북한 사람들이 뿔 달린 것으로 알았다. 이분법 논리가 가짜뉴스를 만드는 논리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 같다. 다시 이분법적인 구도가 성행하는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변화 속에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해체주의, 포스트모던이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힘이었다. 까판도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힘인데, 그게 되는가 싶더니 왜 갑자기 다시 이분법으로 돌아가는가? 해체의 힘이 새로운 공통진실의 구성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는 블랙홀 속에서 맴돌다가 다시 기댈 건 이분법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실과 거짓이 있어, 라는 담보된 이분법. 다시 객관진실이나 선악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실체와는 상관없이 관념 속에서 진실의 자리와 거짓의 자리를 일단 나누어놓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때 그때 어떤 것들을 자기 멋대로 각각의 자리에 옮겨놓는 거 같다. 분배 기준도 없다. 동일한 것을 어떨 때는 선의 자리에 놓았다가, 어떨 때는 악의 자리에 넣었다가 일관성이 전혀 없다. 일관성 없음이 공통장을 만드는데 방해가 된다. 교란시킨다.

이분법의 형식만 끊임없이 가져오는 것 같다.

새로움을 맞닥뜨렸을 때 흥미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변화가 두려운 사람들이다.

#주제3. 언론
1) 24쪽 "포스트모던 환경하의 언론은 사실이나 진실을 다룬다는 오래된 환상을 이용하여 기사 내용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 즉 진실 시장의 고객들에게 진실이라는 상표를 붙여 기사를 파는 기사 출고 거래의 기관으로 나타난다."

인터넷 언론이 엄청나게 많이 생긴 것 같다. 그것이 돈벌이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기사가 돈과 연결이 되는. 예전에도 신문이 광고료와 관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인터넷 언론들이 돈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조국 흑서>를 읽고 있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강땡땡 기자. 나름 진보적인 기자였다. 한때 진보적이라고 자임했던 기자들, 그리고 진땡땡 같은 사람도 다시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를 자청했던 기자들의 자의식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가 잘 드러난다. 그분이 뉴미디어를 굉장히 비판한다. 그 과정에서 전통 미디어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뉴미디어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결국은 이럴 바에는 전통 미디어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준다. 전통적인 미디어들은 돈과 상관이 없었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싶은 기사들이 있다. 돈과 연결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그 돈이 어떤 성격의 돈이냐, 대기업의 광고료냐 시민들의 후원금이냐에 따라서 비판도 달라질 수 있다.

당연히 돈은 오늘날 살아갈 때 꼭 필요하다.

#주제 4 : 정치적 질과 이해관계 투쟁
36쪽 4줄 "정치적 질"을 "이해관계 투쟁"으로 환원한다는 것의 의미

자본에 집중하면 착취-피착취, 자본가-노동자 구도가 가능한데 단순히 ‘돈’을 문제로 생각하면 개인들 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각자 자기가 돈 많이 벌려고 한다는 식으로, 개인들의 이해관계로 문제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까판이 문제를 단순화시켜버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계급차별, 종차별,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적대를 무효화시켜서 비슷비슷한 개인들의 이해관계의 차이로 만든다.

성폭력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때가 많다.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계급적 차이, 힘의 차이는 사라지고, 방사장, 홍땡표 같은 정치인들이 그저 변태적인 한 명의 남성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해질 때가 많다.

전문가집단들의 합리주의적 경향, 객관주의적 경향 속에는 그런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살피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려는 것. 그 사람의 처지, 관계를 안 보고 누구나 똑같은 인간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전문가집단들의 공통적 특성이 아닌가 싶다.

숫자, 통계, 개인, 시민, 임금, 화폐 등은 지배자의 편의에 맞게 특이성을 무화한다.

#주제 5 : 박땡땡 변호사를 누가 진상조사단에 넣었을까?
과거사진상조사단 - 검찰총장이 임명한 것이다. 원래 검사가 없었는데 검사를 끼워넣었다. 그때 검찰을 조사하는데 검사가 들어가는 게 말이 되냐는 비판이 있었다.

#주제 6
52쪽 누군가의 삶을 검증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윤리적일까? 누군가 검증대에 올라갈 때는 누가 검증대에 올리는가를 보아야 한다.

검증이 뭘까?
자격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인가 검증을 하는 것 같다. 정치인 청문회 같은 것을 많이 봤는데, 특정한 자격에 부합해야 한다.

검증이 대상화시키는 것의 한 가지 종류다. 자연을 분석하기 위해서 자연을 분해하고 자연에 대해서 갖가지 실험을 한다. 사람을 검증할 때도 한 사람을 대상화시켜서 속속들이 해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검증한다는 것이 너무 섣부른 생각인 것 같다. 검증하기도 어렵고, 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정말 그 사람이 한 말이 법적으로 위증이면 당연히 위증의 벌을 받으면 된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검증을 받는 것이지, 왜 증언자를 검증하는가? 같은 증언자라 하더라도 윤지오 증언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주제 6 : 박땡땡의 뇌국소적 기억론 비판

박땡땡의 기억론은 물질적 시간만 유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대적 시간관, 엘리트주의적 시간관이다.

박땡땡 변호사도 너는 가짜야, 사기꾼이야 라고 결론을 내려놓고 덤벼드는 것 같다. 처음에는 재보다가, 나중에는 결정해놓고 덤벼드는 것 같다.

윤지오 증언자의 영향력이 진짜 셌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 권력에서 원하는 고분고분한 증언자가 아니었다. 자기들(박땡땡 변호사 등)의 의도와 너무나 다르게 움직였다. 국민청원, 경찰 시스템 고발하고. 국가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흔드니, 변호사 등 현 시스템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이러다 내 밥그릇까지 위험해지겠다는 위협감을 느꼈을 것이다.

윤지오 씨는 한국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증언자였다. 수치스러워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기성 권력이 이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대 파시즘이 아니라 민주주의 대 가부장적 지배체제다. 윤지오 증언자가 세상을 뒤집는 힘으로 나타났다. 가부장적 지배체제를 뒤집는 것이었다. 권력형 성폭력을 증언하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이 여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경향이 발생한 것도 그런 면에서 당연했을 것이다. 여성혐오의 말들이 거기에 동원이 되는 과정들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윤지오라는 증언자는 한국 역사에서 굉장히 특이하고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고, 작년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은 드레퓌스가 상징적인 사건이 된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윤지오라는 증언자의 출현과 그 일련의 일들이 중요하게 역사적으로 남을 것이다.


#결론 : 각자가 책 속에서 뽑은 한 문장!

토론자 1
"가부장적 가족은 옳은 길을 가르치겠다며 가부장이나 그 대행자들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무작위 린치를 가해도 공적 제재가 잘 통하지 않는 낡은 조직적 유제다. 민주주의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조직 형태가 바로 가부장적 가족이다."

토론자 2
"장자연 사건처럼 남성 가해자들에 의한 성폭력이 쟁점인 사건에 남성 조사원이 자기를 버리는 혁명(여성되기 혁명) 없이 국민 대중보다 그 사건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이요 환상이다. (...) 윤지오가 실제적 두려움으로 경험하는 그 "법 위의 남자들"에 대해 남자인 박땡땡 자신이 친화감과 믿음(그러니까 '한패 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빼놓고는 이 둔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토론자 3
"윤까판에서 유통되는 생각들은 제대로 된 학력을 가져야 한다는 엘리트주의 '여자는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얌전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예술작품에는 원본이 있다'는 플라톤주의적 원본주의 등 주로 권력자들이 활용하는 낡고 고루한 관념들의 유사 변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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