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7/17 『들뢰즈맑스주의』 p.13~46

작성자
bomi
작성일
2021-07-17 13:10
조회
214
*배추 님의 발제문 대신 올립니다.


들뢰즈 맑스주의
옮긴이 서문 2005. 9. 18


1) 니콜래스 쏘번이 발견하고 구성한 것은 들뢰즈를 탈맑스주의적 흐름 속에 위치시켜온 지금까지의 주된 들뢰즈 해석경향에 대한 직접적 거부이며, 들뢰즈를 맑스와 결합시키려는 최근의 노력들 가운데서 가장 명시적이고 단호한 것이다. 14

2)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대한 쏘번의 재해석
* 프롤레타리아트
상품과 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이면서도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아 생산과정에서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그래서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통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실체적 동일성 집단
/ 동일성을 거부하면서 탈주선을 찾아가는 반동일성의 계급으로 ‘이름 없는 프롤레타리아들’로
* 룸펜프롤레타리아트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점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이지만 직접적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잡다한 계급이기 때문에 동일성을 가질 수 없는 실체적 집단
/ 동일성을 추구하는 계급
쏘번은 ‘[자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나지 않는 것, 맑스의 강렬하고 소수적인 교전양식, 자본의 다양한 사회관계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 그리고 노동에 대한 비판’ 등에서 이러한 해석을 이끌어 낸다. 15

3) 노동거부
- 쏘번이 파악하기에 들뢰즈와 맑스의 생산적 조우[교전]가 이루어진 장소는 ‘비물질노동’과 ‘다중’, ‘삶정치’ 그리고 ‘코뮤니스트로 살기의 기쁨’의 개념에 의해 특징지워진 후기의 네그리가 아니라, PCI(이탈리아 공산당)에 의해 억압되었던 1960년대의 오뻬라이스모(operaismo)와 1970년대의 아우또노미아(autonomia)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전기의 네그리이다.

- 쏘번은 ‘노동=자본’이라는 등식 위에서 ‘기계화된 노동’=‘추상기계’=‘기계(론)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실질적 포섭’이라고 파악한다. 이것은 소수자들의 창조성, 발명력, 지식, 계략 등을 가두는 공간이다. 17

- 노동거부는 거부와 긍정의 두 측면으로 구성된다.
노동의 충만함, 노동 속의 주체, 민중의 모델, 그리고 동일성에 대한 거부 /
사회적 공장의 생산적 체제 내부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창의적 실천을 향한 추진력이자 프롤레타리아적 구성양식.

- 프롤레타리아적 구성양식으로서의 노동거부는 쏘번에 따르면 ‘전 지구적 노동자 투쟁의 영속적 특징’이다. 왜냐하면 ‘노동은 언제나 이미 자본이며, 정치는 필연적으로 노동과 그 주체들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거부는 포드주의 하에서 적합한 전략이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두뇌 속에 노동의 도구들을 지니고 다니므로, 사보타지적 러다이트적 의미의 노동거부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다’고 보는 1980년대 이후 포스트-오베라이스모의 네그리와는 다른, 심지어 대립하는 입장을 표현한다. 18, 19

- 노동거부에 대한 쏘번과 네그리 사이의 차이
핵심적 쟁점은 노동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서, 즉 ‘노동=자본’으로 보아 거부의 대상으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살아 있는 형식부여적인 불이자 살아 있는 시간에 의한 사물들의 형성’으로 보아 구성의 힘으로 파악할 것인가라는 강조점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쏘번의 주장은 소외된 노동의 참상에 대한 처절한 고발로 점철된 [경제철학 수고]의 맑스에 의해 지지된다. 하지만 [그룬트릿세]에서 맑스의 강조점은 노동을 세계변형과 재구성의 힘으로 파악하는 쪽으로 돌려진다. 또 [자본]의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을 ‘가치화과정’의 전개로 파악하면서도 그 과정을 규정하고 있는 ‘노동과정’의 잠재적 독립성을 놓치지 않는다.

- 들뢰즈는 노동거부에 관한 오뻬라이스모와 아우또노미아의 주장에 공감을 표한다. 19
들뢰즈가 노동거부를 지지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가변자본’으로서의 자신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주로 임금노동을 지칭하는 ‘노동’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 비노동까지 포함할 수 있는 ‘생산’이라는 포괄적 개념 위에서(‘모든 것은 생산이다’)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 20

- 맑스에 따르면 노동과 가변자본은 직접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 자본가에게 판매된 노동력 상품은 가변자본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고용된 노동자들’로 나타난다. 아직 판매/구매되지 않고 시장에 나와 있는 인력으로서의 노동력 상품은 잠재적으로는 가변자본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변자본인 것은 아니다. 또 시장 외부의 노동능력들과 노동활동들은 가변자본이 아니다.

- 한편 분명히 노동은 가치를 보전하고 생산한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가치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가변자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가변자본 형태로 포섭되어 움직일 때조차 가변자본으로 취급될 수 없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지칭하기 위해 맑스는 ‘산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네그리가 ‘디오니소스의 노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20, 21

4) 산노동
- 노동은 가치관계에 포섭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것에서 독립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혁명의 존재론적 힘으로 기능할 수 있다.
산노동에 대한 긍정은 노동 일반에 대한 긍정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로 환원될 수 없다.

- 산노동은 물론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화과정을 현실화=실현하면서도 그 자체로는 잠재적인 것에 머문다. 그것은 ‘살아있는 시간에 의한 사물들의 형성으로서 사물들의 과도성, 그것들의 순간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22

- 쟁점은, 쏘번이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와 산노동의 옹호라는 네그리의 절단선 대신에 노동에 대한 거부와 생산적 창조성에 대한 옹호라는 절단선을 선택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쏘번의 관점에서 생산적 창조성은 노동 내부에서는 실현될 수 없고 노동과의 교전(조우-대결-창조)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 논의에서 쏘번은 들뢰즈의 소수적인 것의 개념에 의지한다.

”소수파의 보편적 의식의 형상을 수립하면서 우리는 권력이나 지배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인 생성의 영역에 관계한다. 연속적 변주는 <누구나-임>의 소수파 되기를 구성하며, <아무도-아님>의 다수적 사실과 대립된다.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파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린다. .....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23

5) 잠재로서의 자율과 현실로서의 자율
- 들뢰즈가 말하는 자율은 생성으로서의 자율이지 현실로서의 자율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전자를 잠재로서의 자율로, 후자를 현실로서의 자율로 부를 수 있다. 경계되고 부정되어야 할 것은 후자, 즉 자본주의적 노동 내부에서 특정한 자율을 확인하고 또 주장하는 경향이다. 적지 않은 소수자 운동들이 자본주의에서 독립된 작은 ’현실적‘영역의 구축을 대안으로 삼으면서 이것을 ’자율‘로 이해한다.

-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과 함께 가는 그것의 숨겨진 반쪽이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말하는 ’갇힌‘ 상황은 결코 자율성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24
소수정치학은 ’갇힌‘ 상황 속에서 그것에 저항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자율성이 기능하는 양식. 정확하게 쏘번이 말하는 일종의 새로운 ’구성의 양식‘, 바로 그것이다.

- 맑스나 들뢰즈, 그리고 네그리의 사유에서 ’역설‘을 식별하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한 일이다. 역능(puissance)은 이중 흐름이며 역설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 민중은 없다. 만약 그것이 현실적이라면 그것은 동일자로 된 민중이며 주권의 몸체로서, 자본의 마디로서 기능하는 민중일 것이다.
네그리의 다중은 구성과정과 구성양식을 지칭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이면서 그 잠재적인 것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분화와 접속의 장소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과 산노동은 능력들의 새로운 배치, 즉 가능성(잠재가 실재로 이행하는 창조과정의 실제적 고리)의 범주이다. 25

6) 자율성의 기쁨 / 갇힌 공간과의 교전의 기쁨
- 쏘번은 자율성을 오직 현실성의 범주로 간주하여 그것이 잠재성의 범주일 수 있음을 보지 않듯이, 다중을 현실성의 범주로 간주하여 그것이 잠재성과 현실성의 이행과정 속에 놓인 가능성의 범주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 쏘번은 노동의 현실적 자율성과 민중의 현실적 자율성을 주장해온 사회민주주의적 조류에 네그리가 동화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 갇힌 상황과의 교전의 기쁨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전진적이다. 하지만 창조성이 왜 ’갇힌‘ 상황과의 교전의 형태로만 나타나야 하는가? 쏘번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코뮤니즘이 현존하는 것을 폐지하고 극복하는 운동이라면 그것은 이미 갇힌 상황을 넘어서는 자율적 이행의 제곱능력, 소수적 생성의 활력을 부르는 이름이 아닌가? 그것이 다시 새로운 틀에 갇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전의 새로움만을 허용하는 갇힌 상황의 동일한 반복이기보다 완전히 새로운 상황의 도래, 오직 ’다른 것‘(차이)만이 회귀하는 영원회귀적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는가? 27

7) [들뢰즈의 맑스주의]
- 이 책은 맑스와 들뢰즈의 조우를 통해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혁명적 정치(학)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들뢰즈 해석과 우리 시대의 좌파 정치(학)의 재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해석되어온 들뢰즈가 맑스의 혁명사상과 맺는 내적 관계를 밝혀준다.
둘째 기계화, 정보화, 금융화, 지구화 등이 통제의 강화과정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그것을 긍정하기만 하는 조류들을 경계하도록 한다.
셋째, 이 통제의 과정이 자본주의적 노동이 사회화하고 일반화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며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거부의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이 통제의 상황에 대항하는 힘이 어떤 사회적 실체적 집단에서 발생하기보다(’민중은 없다‘) 그것과 교전하는 힘들의 소수적 생성과정에서 발생함(’민중의 발명‘)을 가르쳐준다.
다섯째 비물질적 노동을 하나의 현실적 노동유형 그 자체로서 자율적인 것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여섯째 다중을 현실적인 사회집단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28

- engage(ment)
“... 어떤 것과 ’engage’한다는 것은 그것과 ‘encounter’(조우/교전)하고, 그것과 ‘interact’(상호작용)하고, 그것을 ‘explore’(탐구)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는 ‘비판적 탐구’ 혹은 ‘비판적 조우/교전’이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창조한다는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쏘번)






새로운 대지의 창조를 위하여 (한국어판 저자 서문)
2005년 9월


1) 네그리와 들뢰즈의 만남
- 이 책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들뢰즈와 맑스를 관련시킬 가능성,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차이의 정치(학)과 코뮤니즘의 정치(학)을 관련시킬 가능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최근 들뢰즈가 반자본주의적 문제의식과 보조를 같이하도록 만드는 주요한 전파수단은 하트와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multitude)’이라는 주체였는데 이것에서 다양성, 특이성, 그리고 차이라는 들뢰즈의 개념들이 핵심적 자리를 차지한다.

- 들뢰즈의 관심은 네그리의 관심에 가깝지만, 들뢰즈의 정치학은 다중에 대한 [제국]의 설명과 여러 모로 불편한 관계를 맺는다. 비물질적 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의 발전이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의 생산적 독립을 지향하는 다중을 보여준다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는 특히 그러하다.

2) [제국]의 선구자들
- [제국]의 선구자들인 오뻬라이스모 및 아우또노미아에 대한 것을 포함하는 연구는 하트와 네그리의 자율적 다중의 모델과는 다른 정치적 구성의 모델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 책의 ‘소수의 정치(학)’과 관련된 정조는 정치적 실천이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제약들, 공포들, 진부함들, 그리고 ‘갇힌 공간들’에서 시작한다는 인식에서 출현한다. 32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는 자율적 주체나 동일성이 아니라 자기폐지의 과정이라는 맑스의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다.

- 이 책의 주된 관심은 들뢰즈와 맑스 사이의 정치적으로 생산적인 공명의 지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공명은 정치(학)이 ‘그것의 시를 미래로부터 창조하려고’ 노력함에 따라, (들뢰즈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빌려온 표현을 사용하면) 하나의 ‘새로운 대지’를 ‘지어낼’ 내재적 힘들, 욕망들, 그리고 발명들을 동시적으로 모색하면서 당대의 사회형성체에 대한 내밀한 심문과 비판을 행하는 일에 대한 공유된 관심으로부터 나온다. 33






1. 서론 : 맑스의 위대함

- 질 들뢰즈는 자신의 마지막 책이 [맑스의 위대함]이라고 이름 붙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차이와 복잡성의 철학자가 어떻게 맑스의 ‘위대함’을 구성할 수 있을까? ... 이 질문과 교전하면서 에릭 알리에즈는 ‘들뢰즈 철학의 모든 것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주제로 집약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이성을 잃은’ 배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의 본래의 이름은 물론 맑스이다.
들뢰즈가 쓰지 못한 책 [맑스의 위대함]은 들뢰즈의 작업과의 새로운 관계를 준비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그 책이 없다는 사실이 들뢰즈의 텍스트들을 횡단하는 ‘잠재적(virtual) 맑스’와의 만남을 유도할 수 있다. 40

- 맑스에 대한 들뢰즈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최근 들어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초점은 들뢰즈의 체계에서 자본주의 동학분석의 중심성에 두어져 있다.
들뢰즈는 자본의 문제를, 즉 자본주의적 사회기계 혹은 ‘사회체’가 삶의 흐름을 교묘하게 운영하는 방식을 자신의 프로젝트의 중심에 두었으며 바로 이 맥락에서 그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선언한다.

- 맑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서도, 자본주의적 사회체는 이전의 사회형성체처럼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설정, 극복, 한계의 과정 속에서 일종의 영원한 재배치와 관계들의 강화를 포함하는 지속적인 생산과정(생산을 위한 생산)을 전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차이와 생성(혹은 특정한 형태의 생성)이 일차적이다. 42

- 들뢰즈와 맑스 사이의 생산적 공명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일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정치학의 문제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맑스의 자본 분석이 이러한 렌즈를 통해 고찰될 때에만 맑스의 사유에 공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4
들뢰즈의 정치학을 탐구함에 있어서 맑스가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은, 명백한 곤경 속에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중심성 때문이 아니라, 맑스가 자본주의 기계로부터 정치적으로 손쉽게 혹은 정해진 길을 따라 도피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생각하면서도 자본주의 그 자체 내부에서 형성되는, 그리고 그것에 특수한 관계 위에 그 도피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정립하려 한 탁월한 사상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이 바로, 맑스가 ‘코뮤니즘’이라고 부른 바의 것이다.

- 맑스에게서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출몰하고 출현하는 내재적 잠재력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정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관점이며 맑스의 저작 전체에서 발견되는 관점이다.
일반적으로 코뮤니즘적 관점은 하나의 다른 ‘코뮤니즘적 사회’의 가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체의 흐름 및 속박과 지속적으로 교전하면서 그것의 극복을 지향하는 과정이다. 45, 46

1) 정치(학)의 수수께끼
이 책은 자본주의적 관계들에 내재적인 정치(학)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함으로써 들뢰즈-맑스 공명에 기여하려고 한다. 일련의 고원들과 개념적 영토들(프롤레타리아트의 문제에서 가치, 통제, 그리고 노동거부의 문제)을 탐구하여, 맑스와 맑스주의적 관심사와의 들뢰즈적 교전이 어떻게 유용하고 혁신적인 정치적 주체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46

① 괴물스런 집합
- 들뢰즈의 정치학은, 그와 가따리의 모든 개념들 및 범주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주의적 및 니체주의적 유물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를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실존의 양식들을 파괴함과 동시에 언제나 그것을 구성하는 힘들과 배치들의 복잡하게 얽힌 괴물스런 집합으로 생각한다.
사물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힘들의 특수한, 변화하는, 그리고 변덕스러운 관계들 속에서 구성된다.

- 만약 세계가 형식이나 상수가 없는 물질들의 일차적 흐름이라면, 사물들은 언제나, 들뢰즈와 가따리가 ‘아상블라주(assemblage)’ 혹은 ‘배치’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이 흐름의 회로의 일시적 생산이다. 니체는 이 회로화를 ‘해석’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니체의 생각은, 사물들과 행동들이 이미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하는 것은 해석들을 해석하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사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47,48

② 잠재성(력)
- 사물들은 해석 이전에 어떤 근원적 형식도 갖지 않는다. 사물은 해석들/힘들의 영원히 변화하는 계열들의 합류점에 자리 잡는다. 이처럼 사물은 자신 내부의 차이를, 상이한 해석과 배치 속에서 현실화될 ‘잠재성’(virtuality) 혹은 ‘잠재력’(potential)으로 구체화한다. 49
이 잠재성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실재적인 것의 기초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배치들 속에 실존하는 창조적 물질의 실재성이다. 그것은 단지 고정된 결정들과만 대립한다.

- 실재적인 것 ”그 자체“는 카오스이며, 발효 없는 유효성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사실들은, 엄밀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우리들의 가치들로부터 도출된 ‘해석들일 뿐’이다. 49

③ 정치(학)
- 만약 모든 것이 존재의 생산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논쟁적 해석이라면, 정치(학)은 삶에 내재적이며 정치(학)은 존재에 선행한다. 해석 혹은 정치(학)은 사물을 정합적으로 만드는 일에, 아상블라주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에, 그리고 가능한 한 (그것은 변화를 이루려는 단순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복잡하고 어려운 교전이다) 새로운 감각들, 새로운 삶들, 새로운 가능성들을 형성하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50

- 만약 정치가 삶의 창조에 내재적이고 그래서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정치(학)의 특유함이 무엇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알랭 바디우는 정치를 모든 곳에 일반화함으로써 들뢰즈의 체계는 사유의 특별히 정치적인 층을 잃게 된다고 주장한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특유하게 정치적인 층의 표지는 자본과의 교전이다. 정치(학)은 자본에 적실해야만 한다. 물론 바디우는,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동학과의 교전이 들뢰즈 작품의 중심적 특징임을 안다. 그렇지만 그는, 자본의 정치(학)이 문제로 될 때에는, 들뢰즈가 창조의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적으로는 다소 공허한 ‘비판’의 모델로 후퇴한다고 주장한다. 51

- 하지만 들뢰즈의 저작에서는, 일련의 특유한 현장들과 문제들을 통해 그리고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배치들과의 정치적 교전에 관한 상당히 많은 논의들을 통해 삶의 정치가 탐구되고 있듯이, 삶의 정치가 무엇일 수 있는가에 관한 풍부한 개념화가 그 속에 존재한다.

- 창조와 비판 사이의 구분(바디우)과는 반대로, 들뢰즈의 프로젝트는 엄밀히 말하자면, 자본에 적합한 발명(invention)의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
바디우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즉 사유의 특이하게 정치적인 층을 들뢰즈가 서술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난점이자 약속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정치(학)은 인간 행동의 특유한 장이 아니며 일반화된 발명의 과정도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정치적 해결책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과정이거나 혹은 사회적 총체성에의 참여이다.

④ 정치(학)의 수수께끼
- 새로운 대지의 프로젝트는 피어슨이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일종의 수수께끼이다. 그것은 설계되고 계획되고 결정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정치(학)은 삶을 발명하는 과정인 동시에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관계들과의 교전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수수께끼의 실천이며, 비결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열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프로젝트이다. 53




< 토론거리 >
- 산노동에 대해
- 창조의 정치와 발명의 정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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