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제2절 프로이트의 세 텍스트 (pp. 108~116)

작성자
노을
작성일
2020-05-31 01:53
조회
54
제2장 제2절 프로이트의 세 텍스트 (pp. 108~116)

- 오이디푸스화 / 법원장 슈레버의 망상의 진압

1) 텍스트 하나 : 편집증 환자 슈레버 – 자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늑대인간>>)

문제가 우선 실천적인 것이요, 무엇보다도 치료의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맹렬한 오이디푸스화 과정은 오이디푸스가 <핵심 콤플렉스>로서 아직 이론적으로 충분히 형식화되지 않고 주변에 머물러 있던 바로 그때 더 명확하게 떠오른다. 슈레버 분석이 살아있는 그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이 분석의 모범적 가치가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즉 프로이트가 가장 위험한 의문을 만나는 것은 저 텍스트(→슈레버의 회상록, 1911)에서이다. 그 법원장의 망상처럼 그토록 풍부하고 그토록 미분화되고 그토록 <성스러운> 망상을 어떻게 감히 아버지라는 주제로 환원하는가?
(→법원장 슈레버는 편집증자가 아니라 분열증자다.)
(→ 프로이트의 진단 : 아버지 콤플렉스 & 동성애 소망)

법원장이 회상록에서 아버지의 기억에 대해서는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프로이트의 텍스트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그가 어떤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우선 의사 플레히지히라는 인물에 대한 <동성애 리비도의 돌출>을 그 병의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답은 이중적이다. 1) 플레히지히에서, 신에서, 태양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욕과 성욕의 집요한 상징성의 잘못이다. 2) 아버지가 알아보기 어렵고 숨겨진 형식으로 현실적 망상들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도처에서 되돌아오며, 고대 신화들과 종교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방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법원장 슈레버는 생존 시에 하늘의 광선에 의해 비역질을 당하는 운명뿐 아니라 사후에 프로이트에 의해 오이디푸스화되는 운명도 알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받아야 한다.

슈레버의 망상이 지닌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내용에 관해서는, 마치 리비도가 이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양 한마디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성적 논의와 신화학적 논의만이 원용되고 있는데, 전자는 성욕과 가족 콤플렉스를 용접하고, 후자는 무의식의 생산적 역량과 <신화들과 종교들의 건설적 힘들>의 부합을 정립한다.

- 어떤 점에서 정신분석은 아직도 독실한가

이 마지막 논의(→ 신화학적 논의?)는 매우 중요하며, 프로이트가 융과 의견 일치를 표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의식이 신화들과 종교들에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보더라도, 이 적합함을 읽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이것들은 신화를 척도로 무의식을 측정하고 처음부터 생산적 구성체들을 단순한 표현적 형식들로 대체했다(→ 일원화)는 기본 전제를 공통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 신화로 되돌아가는가?(→왜 플라톤의 상기론(잃어버린 것을 획득)식으로, 일원화하는가?) 왜 신화를 모델로 삼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은 무시되고 기각된다.(→일원화하려는 사고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1) 이렇게 되면 <무의식과 신화들 및 종교들의> 추정된 부합은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이른바 신비 추리적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선의 이데아 숭배)
2) 또는 거꾸로 <낮은 곳>을 향하는 분석적 방식으로, 신화를 충동들과 관련해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충동들은 신화에서 베껴 써지고(轉寫), 여러 변형들을 고려하면서 신화에서 공제되는....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같은 기본 전제에서 출발해 융은 가장 확산되고 가장 영적인 종교성으로 인도된 반면, 프로이트는 가장 엄격한 무신론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맑스의 위대한 선언을 상기하자(칼 맑스, <경제철학>). 신을 부정하는 자(→ 프로이트?)는 <2차적인 것>밖에 하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실존을 내세우기 위해, 인간을 신의 자리에 놓기 위해(변형을 인정함) 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리가 딴 곳에, 인간과 자연의 공통-외연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의 낯선 존재, 자연과 인간을 넘어 있는 존재>에 관한 물음의 가능성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이런 매개, 즉 신화가 필요없다. 그는 더 이상 이런 매개, 즉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경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의식의 자기-생산 지역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에서 무의식은 고아인 동시에 무신론자이며, 직접적으로 고아이고 직접적으로 무신론자이다. (→ 스피노자. 코나투스.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

첫째 논의(→ 성적 논의?)를 검토해도 우리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리라. 성욕을 가족 콤플렉스에 용접하고 오이디푸스를 분석에 있어 성욕의 기준으로, 더할 나위 없는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만듦으로써, 프로이트 자신이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들을 둘 다 욕망이 직접 투자(→ cathexis)할 수 없는 하나의 나중 내지 하나의 너머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 프로이트의 한계점. 사회적 및 형이상학적 관계들로 나아가지 못함.)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 너머가 욕망의 분석적 변형을 통한 가족 콤플렉스에서 유래하는지 아니면 그 변형을 통해 신비적 상징화 속에서 의미화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해진다. (→ 이 작업은 라깡에 의해서 이뤄짐?)

- 결핍의 이데올로기 – 거세

2) 텍스트 두 번째 - <아이가 매를 맞는다>(1919)

여기서는 벌써 오이디푸스가 <핵심 콤플렉스>로 제시되고 있다.
소년들은 매를 맞는다. 프로이트의 이중 환원을 목격하는데, 이 환원은 환상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로서 프로이트에 의해 요구된 것이다.
1)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환상의 집단적 성격을 순전히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기를 일부러 바란다. 매 맞는 아이들은 자아(주체 자신의 대체물들)여야 하고 때리는 사람은 아버지(아버지의 대체물)여야 한다.
2) 다른 한편 환상의 변형된 모습들은 배타적으로(→ 이접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분리들 속에서 조직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녀-계열과 소년-계열이 있겠지만, 이 계열은 서로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프로이트에게는 사태가 늘 이렇다. 남녀 양성에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두 성에다 각각 결핍을 주고, 비대칭적인 두 계열에 결핍을 분배하며, “너는 소녀 아니면 소년이다!”라는 분리들의 배타적 사용의 기초를 놓기 위함이다.

거세는 공통된 운명, 말하자면 우세하고 초월적인 남근인 동시에, 소녀들에게는 음경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나고, 소년들에게는 음경을 잃는 공포 내지 수동적 태도의 거부로 나타나는, 배타적 분배이다.

이 공통된 어떤 것은 무의식의 분리들의 배타적 사용의 기초를 놓아야 하며, 우리에게 체념(포기)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공통된 어떤 것, 즉 거대한 남근, 중첩될 수 없는 두 얼굴의 결핍은 순전히 신화적이다. 그것은 부정신학의 일자와 같다. 그것은 욕망에 결핍을 도입하며, 배타적 계열들을 생겨나게 해 이 계열들에 하나의 목표, 하나의 기원, 하나의 체념의 길을 고착한다.

이와는 반대되는 것도 말해야 하리라. 두 성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지만, 이와 동시에 두 성은 횡단적 양태로는 끊임없이 소통하는데, 이 방식에서 각 주체는 두 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 두 성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다른 주체의 한 성 내지 다른 성과 소통한다. 이와 같은 것이 부분대상들의 법칙이다. 그 무엇도 결핍되어 있지 않으며, 결핍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성기는 결핍 또는 1차적 박탈에서 출발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이탈될 수 있는 부분대상에서 이탈된 것으로서 하나의 완전한 대상(남근)의 정립으로 이행하는 지점에서 성립한다. 이 이행은 특정한 성을 가진 고정된 자아로 규정된 주체를 함축하며, 이 주체는 하나의 결핍으로서 전제군주적인 완전한 대상에 필연적으로 예속해 살아간다.

유일한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충동인데, 부분대상 그 자신이 이 충동과 함께 기관 없는 몸 위에 정립하면, 아마도 사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으리라. 이 충동은 자기와 더불어 욕망 기계를 형성하며, 또한 그 각 요소가 실정적으로만 정립될 수 있는, 그에 상응하는 다양체의 한가운데서 다른 부분대상들과 연결/분리/결합의 관계에 들어가니 말이다.

거세는 오이디푸스화의 완성이다. 오이디푸스화란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거세하고 거세를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조작이다. 무의식에 대한 실천적 조작으로서의 거세는, 전적으로 정립적이고 전적으로 생산적인 욕망 기계들의 수천의 흐름-절단들이 하나의 똑같은 신화적 장소, 즉 기표의 단일한 자취 속에 투사될 때 얻어진다.

기성 질서에 일치하는 <믿음들>을 무의식에 주입하는 조작들과 술책들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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