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8_발제] 안티오이디푸스 645-660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20-11-08 09:51
조회
488
분열-분석의 원리
관념해리 : 연상들을 부수는 일의 필요성,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마침내 욕망 기계로서의 무의식의 기능 집합으로 들어가는 요소들에 도달했다는 기호이다.
(Functional Fixed의 해리)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한에서 (연줄의 부재에 의해 연계된 한에서) 함께 기능하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부품들의 집합이 출현했던 것이다.
ex) 다다이스트 기계, 줄리어스 골드버그의 그림, 팅겔리의 기계들

팅겔리에게 현실적 구별의 예술은 재귀 절차로서의 일종의 이탈에 의해 획득되었다. 하나의 기계는 그것이 가로지르는 여러 동시 구조들을 작동한다.
첫째, 구조는 자기와 관련해서는 기능적이지 않고,
둘째, 구조 속에서만 기능적인 요소를 적어도 하나는 포함하고 있다.
팅겔 리가 본질적으로 유쾌한 것이라고 제시하는 이 놀이야말로 기계의 탈영토화 과정 그리고 가장 탈영토화된 부분으로서 기계공의 위치를 보장한다.

기계론적 무질서에서 덜 개연적인 것으로 가는 하나의 벡터, 즉 <미친 벡터>라 명명할 수 있을 벡터를 따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요소들 자체들의 연줄 없는 연계, 또는 이 요소들의 자율적 구조들의 연줄 없는 연계를 보장하는 것 역시 바로 무작위 관계들이다. (...) 문제는 미친 벡터를 따라 욕망 기계로 기능하는 하나의 집합체로 단순 기억 회로 또는 사회 회로를 대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기계는 현실 기계들이다. <욕망이 작용하는 곳에는 상상계의 자리가 없>으며 상징계의 자리도 없다는 오캉갬의 말은 옳다. 이 모든 기계는 이미 거기에 있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생산하고 제작하고 기능시키는데, 왜냐하면 기계들은 욕망, 본연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 욕망 기계들은 우리 머리에, 우리 상상 속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사회·기술 기계들 자체 속에 있다.

욕망 기계들이 있고, 어떻든 여기 있고, 우리가 그것들과 더불어 기능하고 있으니, 그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이 당신은 보이지 않는가.

이반 일리치는 (...) 큰 기계들은 자본주의 내지 전제군주 유형의 생산관계들을 내포하며, 소비자나 사용자의 상태로 환원된 사람들의 의존, 착취, 무력을 야기한다.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는 이 사태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그저 스탈린적 전제군주 조직을 부양할 따름이다. 또 일리치는 그것을 <회식사회>, 말하자면 비-오이디푸스적 욕망적 사회에서 각자가 생산수단을 이용할 권리와 대립시킨다.
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 의한 기계들의 가장 확장된 이용
② 작은 기계들의 배가 및 작은 단위들에 큰 기계들이 적응
③ 생산자-이용자들 자신에 의해 조립되어야 할 기계적 요소들의 배타적 판매
④ 지식의 전문화나 직업의 독점 파괴 등.
의학 지식 대부분의 독점 내지 전문화, 자동차 모터의 복잡화, 기계들의 거대화 등 서로 아주 다른 것들이 기술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권력이나 통제력을 지배계급의 수중에 집중할 작정인 경제적·정치적 지상명령에 응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
욕망적 <회식 혁명>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작은 기계들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본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들이 경제적·정치적 권력과 관련하여 전력을 다해 억압하는 기계적 혁신 자체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사회·기술기계들과 욕망 기계들 간의 참된 차이는 분명 크기에 있지도 않고 목적들에 있지도 않으며, 다만 크기와 목적들을 결정짓는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같은 기계지만, 체제는 같지 않다.

반-욕망의 체제와 욕망의 체제 같은 두 체제의 구별은 집합체와 개체의 구별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두 유형의 군중 조직으로 귀착되며, 각 유형에서 개인과 집단은 똑같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 미시 물리학의 심급은 기계-전자가 아니라 기계화하는 분자적 욕망이며, 마찬가지로 거시 물리학의 심급은 그램분자적인 기술적 대상이 아니라 반-욕망적·반생산적인 그램분자화하는 사회구조로, 이 사회구조가 기술적 대상들의 사용, 제어, 소유를 현행적으로 조건 짓고 있다.

욕망 기계의 체제는 일반화된 변태가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이며, 결국은 행복해진 일반적이고 생산적인 분열증이다. 왜냐하면 욕망 기계에 대해서는 팅겔리처럼 이렇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쁨에 찬 기계, 기쁨에 찼다는 말은 내겐 자유롭다는 뜻이다. (a truly joyous machine, by joyous I mean free.)

3. 기계와 충만한 몸 – 기계의 투자들
우리가 보기에는, 기계는 한 사회적 몸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생각되어야지, 생물학적 인간 유기체와 관련해서 생각되면 안 된다. (...) 인간과 도구는 해당 사회의 충만한 몸 위에서 이미 기계 부품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계는, 기계화하는 심급으로서 충만한 몸에 의해, 또는 이 몸 위에 분배되어 있는 한에서 기계 작동되는 인간들과 도구들에 의해 구성되는 하나의 사회 기계이다.

장소들, 공동 설비들, 소통 수단들, 사회적 몸들이 기계들 또는 기계부품들로 여기지는 것은 은유에 의해서도 의미 확장에 의해서도 아니다. 반대로, 기계가 하나의 기술적 현실만을 가리키게 되는 것은 (추상적 인간에서 자신의 출발점을 찾은 하나의 선 위에서 도구의 절편을 계승하는 새로운 절편으로서의 기계) 제한과 파생을 통해서인데, 이런 일은 바로 하나의 아주 특수한 충만한 몸, 즉 돈-자본의 몸이라는 조건에서만, 이 몸이 도구에 고정자본의 형식을 주고, 즉 도구들을 자율적인 기계적 대표 위에 분배하고, 인간에게 가변자본의 형식을 주는, 즉 인간들을 노동 일반의 추상적 대표 위에 분배하는 한에서 생긴다.

우리는 어떻게 기술 기계가 단순한 도구들을 계승하는지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회 기계가, 또 어떤 사회 기계가 인간들과 도구들을 기계 작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 기계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필연적이게끔 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된 기계는 욕망 기계로 정의된다. 그것은 기계 작동하는 충만한 몸과 이 몸 위에서 기계 작동되는 인간들 및 도구들의 집합이다. 여기서 많은 귀결들이 도출되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그저 프로그램으로만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첫째, 욕망 기계들은 정녕 사회·기술 기계들과 같지만, 이것들의 무의식과 같다.
둘째, 욕망 기계들이 사회·기술 기계들의 내부 극한으로 존재한다는 점은, 한 사회의 충만한 몸, 즉 기계화하는 심급이 결코 그 자체로는 주어지지 않으며 이 사회 안에서 작용하는 항들 및 관계들에서 출발해 항상 추론되어야 한다고 여길 때 더 잘 이해된다.
셋째, 기술 기계 외부에 머물러 있는 생산 관계들은 반대로 욕망 기계 내부에 있다. 이는 관계의 자격에서가 아니라 기계 부품이라는 자격에서 참인데, 이 부품의 일부는 생산의 요소들이요 다른 일부는 반생산의 요소들이다. (...) 성욕은 하나의 다른 <경제>, 하나의 다른 <정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자체의 리비도적 무의식을 가리킨다. 욕망 기계의 에너지인 리비도는 계급, 인종 등 모든 사회적 차이를 성적인 것으로서 투자한다. (...) 욕망 기계는, 자신의 폭력 속에서, 욕망에 의한 사회장 전체의 시험, 즉 욕망의 승리로 끝날 수도 욕망의 압제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는 시험이다.
넷째, 무의식의 에너지로서의 성욕이 욕망 기계들을 통한 사회장의 투자라면, 기계들 일반을 대면하는 태도는 / 결코 하나의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 자체 속 욕망의 정립, 즉 사회장을 가로지르는 절단들과 흐름들과 관련한 / 욕망의 돌연변이들을 표현하는 것 같다. (...) 이데올로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시기와 집단의 무의식 전체를 작동하는 기계화가 바로 문제이기 때문에, 이 태도들이 사회·정치장과 맺는 연줄은 규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복합적이다.

욕망 기계들과 사회·기술 기계들 간에, 한편에서 욕망이 파시스트적·편집증적 구성체들을 투자하고 반대로 다른 한편에서 분열증적·혁명적 흐름들을 투자하는 이 두 극단적 극 간에, 각각의 내재성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욕망의 역설은, 이 극들을 풀어내고 / 욕망 기계들을 위해 집단의 혁명적 시험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 언제나 이토록 긴 분석을, 무의식 분석을 전부 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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