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 『차이와 반복』 결론 2절

작성자
bomi
작성일
2022-10-16 01:01
조회
406
들뢰즈와의 마주침 세미나 ∥ 2022년10월 16일 일요일 ∥ 손보미
텍스트: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민음사

2절

<이유로서의 근거: 근거의 세 가지 의미>

근거 짓는다는 것은 규정한다는 것이다.
근거는 로고스나 충족이유의 활동이다.
충족이유의 활동인 한에서 근거는(근거짓는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근거짓는다는 것은 재현을 창시하고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거는 자기 자신과 같거나 동일하다. 용감함의 근거는 용기 그 자체이고, 탁월함의 근거는 탁월함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근거가 근거지어야 할 것은 이후에 오는 자들의 지망, 기껏해야 이등의 자리밖에 오르지 못할 모든 자들의 경쟁적 지망일 뿐이다.
근거짓는 활동은 지망자를 근거와 닮게 만들고, 지망자에게 내면으로부터 유사성을 부여하며, 나아가 이런 조건 아래에서 지망자에게 그가 지망하는 대상인 그 자질을 분유할 기회를 준다.
제대로 근거지어진 각각의 이미지나 경쟁적 지망은 재-현(모상)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지망의 질서에서 일등은 즉자적으로 근거에 대한 관계에서 볼 때는 여전히 이등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재현의 세계를 창시하거나 근거짓는 것은 바로 이데아이다. 반면 허상(유사성 없는 이미지)들은 근거가 없는 거짓 지망자들이라는 이유로 제거되고 고발당한다.

2) 재현의 세계가 열리고 난 이후에 근거짓는다는 것은 재현을 무한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현의 세계가 열리고 난 이후, 근거는 더는 동일자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이제 근거지어져야 하는 것은 무한한 것을 정복하려는 재현의 경쟁적 지망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원천적으로 동일자 안에 포괄된 것처럼 보였던 그런 차이를 정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동일성이 차이 중에서 자신이 포괄하지 못했던 것을 정복하려고 노력한다.
이제 근거는 재현의 경계들을 무한히 커다란 것, 무한히 작은 것으로까지 확장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재현의 한복판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활동은 충족이유를 표현하고 있다. 이제 충족이유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첫 번째 의미의 차이 중 동일자와 재현에서 벗어났던 것들을 다시 동일자에 종속시키고 재현의 여타 요구들에 종속시키는 수단일 따름이다.

3) 위 두가지 의미는 세 번째 의미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 근거짓는다는 것은 1)유한하거나 2)무한한 재현 안에서 현재를 재현한다는 것, 즉 현재가 도래하고 지나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는 아득한 태고의 기억이나 순수 과거로 나타난다. 이런 과거는 결코 현재였던 적이 없는 과거, 따라서 현재를 지나가게 하는 과거이고, 모든 현재들은 이런 과거와의 관계 안에서 원환을 이루며 공존하게 된다.

<근거에서 무-바탕으로>

근거는 자신이 근거짓는 재현에 의해 유인되는 반면, 동시에 어떤 저편에 의해 갈망의 상태에 빠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근거는 근거지어지는 것 안으로 추락하기도 하고 어떤 무-바탕 안으로 빠져들기도 하면서 그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이다.

근거의 세계는 자신이 배제하려고 기도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열망하고 분산시키는 허상에 의해 잠식된다.
이념의 ‘같음’ 아래에는 어떤 다양성 전체가 으르렁 거리고 있다. 또 이념을 어떤 실사적 다양체로, 같음의 사태나 일자로 환원 불가능한 다양체로 기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충족이유가 재현의 요구들과는 무관하게 분만될 수 있음을 제대로 엿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충족이유는 본연의 다양체를 주파하고 이념에 상응하는 요소, 비율적 관계, 독특성들을 규정하는 가운데 스스로 분만된다.

충족이유, 근거는 기묘하게 휘어져 있다. 한쪽에서 근거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을 향해, 재현의 형식들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근거는 모든 형식들에 저항하고 재현을 허락하지 않는 어떤 무-바탕, 근거 저편의 무-바탕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들고 있다. 차이는 근거짓는 원리에서 보편적인 ‘근거와해’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근거짓는다는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의 활동은 단순하지 않다. 실행 중에 있는 ‘본래적’ 규정은 어떤 형상을 부여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이때는 바탕에 있던 어떤 것이 표면으로 다시 올라오되 어떠한 형상도 취하지 않으면서 올라온다. 그것은 얼굴 없는 어떤 자율적 실존, 비형식적 기저이다. 이제 표면에 있는 한에서 이 바탕은 깊이, 무-바탕이라 불린다. 거꾸로 형상들은 이 무-바탕안에 반영될 때 분해된다. 여기서는 어떤 추상적인 선만이 유일하게 존속한다. 그 추상적인 선은 미규정자에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적합한 규정에 해당하고 밤과 동등한 광명, 애매성 전체에 적합한 판명한 구별, 곧 괴물에 해당한다. 질료는 이미 형상화 되어 있고, 형상은 상이나 꼴에 따라 모형화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이 이루는 전체는 범주들의 혜택을 받고 있다.

순수한 규정, 추상적인 선으로서의 사유는 미규정자인 무-바탕과 대결해야 한다. 이 미규정성, 이 무-바탕은 또한 사유에만 고유한 동물성, 사유의 생식성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이러저러한 동물적 형상이 아니라 다만 어리석음일 뿐이다. 사유는 최고의 규정이고, 마치 자신에 적합한 미규정자와 대면하고 있는 것인 양 어리석음과 대면하고 있다. 어리석음은 사유의 가장 큰 무능력을 구성하지만, 또한 사유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 안에서 사유의 가장 높은 능력의 원천을 구성하기도 한다.

코기토 명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의미를 언명한다고 주장하고, 그런 한에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무-의미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어떤 반-의미이다. 왜냐하면 규정 ‘나는 생각한다’는, 미규정자가 규정 가능한 것이 되는 형식을 지정하지 않은 채, 규정되지 않은 실존 ‘나는 존재한다’에 직접 효력을 미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기토의 주체는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사유할 가능성만을 지니고 있고, 또 이 가능성의 한복판에서 멍청한 상태에 빠져 있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규정 가능성의 형식이다.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 시간의 텅 빈 형식은 사유 안에 본연의 차이를 도입하고 구성한다. 사유는 이 본연의 차이로부터 사유하기 시작하고, 게다가 그 자신이 미규정자와 규정의 차이로서 사유하기 시작한다. 이 시간의 텅 빈 형식은, 추상적인 선에 의해 균열된 어떤 나와 나에 의해 응시되는 무-바탕에서 비롯된 어떤 수동적 자아를 자기 자신의 이편과 저편으로 할당한다.
사유 안에서 사유를 낳는 것은 이 시간의 텅 빈 형식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오로지 차이와 함께 할 때만 사유하고, 근거와해가 일어나는 이 지점의 주위에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사유, 다시 말해서 미규정자와 규정으로 이루어진 기계 전체가 기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차이, 또는 규정 가능한 것의 형식이다.

<비인격적 개체화와 전-개체적 독특성>

재현에 대해 모든 개체성은 인격적이고(나) 모든 독특성은 개체적이어야 한다(자아). 따라서 ‘나’라고 말하기를 멈추어야 하는 곳에서는 개체화도 멈추고, 개체화가 멈추는 곳에서는 가능한 모든 독특성도 멈추어버린다. 이때부터 무-바탕은 개체성도, 독특성도 없는 것으로 재현되고, 따라서 당연히 모든 차이가 빠져나간 것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무-바탕은 차이를 감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수동적 자아에 해당하는 자아는 선행하는 개체화의 장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불과하다. 즉 자아는 그와 같은 장의 개체화 요인들을 수축하고 응시하며, 또 이 장의 계열들이 공명하는 지점에서 구성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균열된 나에 해당하는 나는 독특성들에 의해 정의되는 이념들, 개체화의 장에 선행하는 모든 이념들을 지나가도록 허락한다.
개체화하는 차이는 물론이고 개체화는 어떤 나-선행자, 어떤 자아-선행자이고, 미분적 규정과 독특성은 그에 못지않게 전-개체적이다. 어떤 비인격적 개체화의 세계와 어떤 전-개체적 독특성의 세계, 그것이 곧 익명인 아무개 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마주침과 공명이 조성되는 세계, 재현을 넘어서고 허상들을 불러들이는 깊이와 무-바탕의 진정한 본성이 드러나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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